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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다산
그
귀양지에서 돌아온 생가 <여유당> 매사에 조심하라는 뜻으로
그리운 다산
책 향기 그윽한
다 향기 스미는
다시 찾은 옛 집
여유당에 낮과 밤은 다름이 없으라
한강은 흐르고 흘러 쉬지를 않고
삼각산 높고 높아 끝이 없다든
보로위 다산
독서는 쉬지를 아니하고
저술은 끝이 없어라
어려서 영특함은
일찍이 세상을 눈 뜨게 하여
삼미집 경세유포 목민심서
오백여권 책을 저술하니
임금도 귀한 보배인 듯
감추고 보살펴서니
후대에도 길이 길이
이 보다 더한 보배가 있으라
북한강 남한강
아는 듯 모르는 듯
서로의 몸을 섞으며
하나의 강 이름으로
수도 서울 향하고
어제와 오늘 그 내일에도
임에게 향한 발자국
여유당 지붕
끝없이 이어지는
거룩한 곡선이여.
다산 정약용 영정
乞茗疏
乞茗疏 乙丑冬(1805년) 贈兒菴禪師.
茶山 丁若鏞
旅人近作茶饕 書中妙辟 全通陸羽之三篇
兼充藥餌 病裡雄蠶 遂竭盧仝之七椀
雖浸精瘠氣 不忘綦 毋煚之言 而消壅破瘢 終有李贊皇之癖
洎乎朝華始起 浮雲皛皛 於晴天
午睡初醒 明月離離 乎碧澗
細珠飛雪山燈 瓢紫筍之香 活火新泉野席 薦白包之味
花瓷紅玉繁華 雖遜於潞公 石鼎靑煙澹素 庶乏於韓子
蟹眼魚眼 昔人之玩好徒深 龍團鳳餠內府之 珍頒已罄
玆有采薪之疾 聊伸乞茗之情
竊聞苦海津梁 最重檀那之施 名山膏液 潛輸瑞草之魁
宜念渴希 毋慳波惠.
걸명소(乞茗疏) : 차를 얻고자 적음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乙丑冬(1805년) 贈兒菴禪師 :을축년(1805) 겨울, 아암선사에게 보냄.
旅人近作茶饕(여인근작차도) : 나그네가 요즈음 茶를 탐음하고
書中妙辟(서중묘벽) : 책속에 오묘함 열어준
全通陸羽之三篇(전통육우지삼편) : 육우의 다경 三편을 전통하고
兼充藥餌(겸충약이) : 겸하여 약으로 충당한다오.
病裡雄蠶(병리웅잠) : 병을 다스리자니 한밥잡힌 누에로
遂竭盧仝之七椀(수갈노동지칠완) : 마침내 노동 칠완을 다 들이키고
雖浸精瘠氣(수침정척기) : 비록 수척하고 정신이 잠기나
不忘綦毋煚(慮)之言(불망기무경(려)지언) : 기무려의 말을 잊지 않은지라.
而消壅破瘢(이소옹파반) : 옹체를 해소하고 흉터(죽은 깨)를 지우자하니
終有李贊皇之癖(종유이찬황지벽) : 끝내는 이찬황의 버릇이 생겼오.
洎乎朝華始起(계호조화시기) : 아침에 꽃이 갓 필 때,
浮雲皛皛於晴天(부운효효어청천) : 구름이 개인 하늘에 선연히 떠갈 때,
午睡初醒(오수초성) : 낮잠에서 막 깨어날 때,
明月離離乎碧澗(명월리리호벽간) : 明月이 점차 산 개울에서 멀어갈 때,
細珠飛雪山(세주비설산) : 솥에 물을 부으면 작은 구슬은 설산에 나르고
燈瓢紫筍之香(등표자순지향) : 등불은 자순차 향기에 나부끼느니,
活火新泉(활화신천) : 새 샘물 활력있는 불은
野席薦白包之味(야석천백포지미) : 야원에 백토시의 맛을 바치고
花瓷紅玉(화자홍옥) : 붉은 옥호 피어난 사발에
繁華雖遜於潞公(번화수손어로공) : 번영하는 유화는 비록 노국공에 못미치나
石鼎靑煙(석정청연) : 돌솥에 푸른 연기
澹素庶乏於韓子(담소서핍어한자) : 담박 질소하여 한자에는 가까우리.
蟹眼魚眼(해안어안) : 해안 어안은
昔人之玩好(석인지완호) : 옛사람들 즐겨 완미 했거니,
徒深龍團鳳餠(도심룡단봉병) : 다만 심궁의 용단 봉병은
內府之珍頒已罄(내부지진반이경) : 나라안 곳집의 반급할 진장품은 이미 빈 그릇이라.
玆有采薪之疾(자유채신지질) : 이 사람 섶나무조차 못할 질고로 하여
聊伸乞茗之情(요신걸명지정) : 애오라지 茶 비는 정분을 신항함이라.
竊聞苦海津梁(절문고해진량) : 저으기 들으니 인생고해는 부처님의 진량중
最重檀那之施(최중단나지시) : 가장 소중함이 단나의 보시라 하고,
名山膏液潛輸(명산고액잠수) : 名山에 잠긴 경혈과 고액은
潛輸瑞草之魁(서초지괴) : 서초(茶)가 으뜸이라 하거늘
宜念渴希(의념갈희) : 마땅히 갈망 희구함에
毋慳波惠(무간파혜) : 아끼지 마시고 파도같은 은혜 베풀기 염원합니다.
아암 혜장선사(兒菴禪師) : 조선 정조 때의 스님(1772~1811).
속성은 김(金). 속명은 팔득(八得). 자는 무진(無盡).
호는 연파(蓮坡)·아암(兒庵). 1790년에 즉원(卽圓)의 법을 이어받았다.
변려문을 잘하였으며, 성리학에도 뛰어 났다. 저서에 《아암집(兒庵集)》이 있다.
나그네는 근래 차 버러지가 되어 버렸으며
겸하여 약으로 삼고 있소.
차 가운데 묘한 법은
육우의 3편 다경이 통달케 하였으니
병든 큰 누에는 마침내,
노동(盧同)도 남긴 일곱째 잔을 마르게 하였소.
정력이 쇠퇴했다 하나 기모경의 말은 잊지 않았고
막힘을 풀고 흉터를 없애기 위해서는
이찬황의 차마시는 버릇을 얻었소.
아아, 윤택할진저
아침에 달이는 차는 흰 구름이 맑은 하늘에 떠 있는듯 하고,
낮잠에서 깨어나 달이는 차는
밝은 달이 푸른 물 위에 잔잔히 부서지는듯 하오.
다연(차맷돌)에 차 갈 때면 잔구슬처럼 휘날리는 옥가루들
산골의 등잔불로서는 좋은 것 가리기 아득해도
자주빛 어린 차순 향내 그윽하고,
불 일어 새 샘물 길어다 들에서 달이는 차의 맛은
신령께 바치는 백포의 맛과 같소.
꽃청자 홍옥다완을 쓰던 노공(盧公=盧同)의 호사스러움 따를 길 없고
돌솥 푸른 연기의 검소함은 한비자에 미치지 못하나
물 끓이는 흥취를 게눈 고기눈에 비기던
옛 선비들의 취미만 부질없이 즐기는 사이,
용단봉병 등 왕실에서 보내주신 진귀한 차는 바닥이 났소.
이에 나물 캐기와 땔감을 조차할 수 없게 마음이 병드니
부끄러움 무릅쓰고 차 보내 주시는 정다움 비는 바요
듣건데 죽은 뒤, 고해의 다리 건너는데 가장 큰 시주는
명산의 고액이 뭉친 차 한 줌 보내주시는 일이라 하오.
목마르게 바라는 이 염원, 부디 물리치지 말고 베품 주소서.
다산 정약용의 저서들
화려했던 고려시대의 차문화가 유교문화를 수용한 조선시대로 넘어가면서
점점 쇠퇴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다가 1700년대 후반 쯤에 다시 살아나기 시작 했는데,
사실 차 문화는 사찰의 스님들이 다선일여(茶禪一如)라 해서
떼 놓을 수 없는 관계라 조선시대에 들어서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라.
우리 차 문화의 중흥에 불을 붙인 곳은 바로 사찰,
다산 정약용이 유배 갔던 바로 강진의 만덕산 백련사.
이곳에는 우리 차 문화에 불씨를 당긴 두 사람의 인연이 있었다
다름 아닌 다산과 혜장스님.
서로 만난 두 사람은 차를 마시며 불교와
학문으로 이야기꽃을 피우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흠모의 정을 느껴
그리워 하고 다산의 나이 44세 혜장의 나이 34세였다고 합니다.
외로운 유배생활에서 진실함과 학식을 겸비한 혜장을 만난 것은 다산에게 실로 가슴 벅찬
반가움과 충격이었습니다. 혜장 역시 마찬가지여서 연상의 대학자를 깊이 흠모.
밤마다 다산은 혜장을 그리워하고 적적함에 잠 못 들어 했는데
어느 날 밤 자정이 넘도록 잠 못 들고 뒤척이던 차에 인기척이 있어
일어나 문을 여니 아! 그곳에는 꿈에도 못잊어 하던 혜장이 서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다산이 차를 안 것은 이 때 였고 혜장에게 차를 배우고 혜장은 다산에게
학문을 배웠다는 것은 강진에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여하튼 다산은 혜장의 입신 차맛에 감동하고
혜장은 다산의 학문과 인품에 감동 해 여기서 부터
우리 차의 소생이 시작 된 것
다산이 차를 초의선사에게 배웠다는 얘기들이 있는데
전혀 근거 없는 얘기 같습니다.
다산은 사대부 집안의 선비 출신으로 어릴 때 부터 차를 접해보긴 했으나
다만 본격적으로 애착을 느끼고 관심 있게 배운 때가 이때이며,
아암(兒庵) 혜장이었다고 합니다.
다산과 혜장이 만난 후 걸명소를 혜장에게 보낼 무렵엔 다산이란 아호도 쓰지 않을 때 였고
초의선사를 만나기도 전이었다고 합니다.
다산이 초의선사를 처음 알게 된 건 초의선사께서 스스로 경학을 배우길 간청해서였는데
이 때 초의선사의 나이 20세였다고 합니다.
다산은 혜장의 성품이 의외로 급하고 거칠 것이 없는 것을 보고
노자의 가르침 중 "부드럽기를 어린 아이 같이 하라"를 인용하여
아암이란 아호를 지어 주었다고 합니다.
혜장과 다산의 만남으로 혜장은 역(易)에 관심이 깊던 터라
제대로 된 스승을 만난 셈이고 다산은 혜장으로 인해
차와 불교에 심취하게 되는데 특히 차에 대해서는 혜장을 임금님 처럼 모셨다고 합니다.
보은 산방으로 거처를 옮긴 다산은 차가 떨어지면
혜장이 심부름이나 하라고 붙여준 색성이라는 제자에게
그 유명한 걸명소(乞茗蔬)를 지어 혜장에게 보내
걸명소를 받아 본 혜장은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어 부처님께 올리고자
두었던 비상차를 보내 주었다고 합니다.
다산의 장난으로 보낸 글이지만 글 내용이 너무나 정성스럽고 간절하며
혜장을 차의 임금으로 추켜 세워서라도 차를 한 줌 먹겠다는
다산의 정다운 공갈도 장난 아니었으니.
혜장에게 이미 육우의 다경(茶經) 3편을 빌려 읽고
꽃청자 홍옥다완을 쓰던 당의 시인 노동과 그의 칠완다가(七碗茶歌)를 알고 있었고
또 당의 재상을 지낸 한림학사 이덕유(李德裕 : 이찬황)의 차 마시는 차도 까지
익숙해 있었다
보은산방에서 겨울을 보낸 다산은 이듬해 강진읍 내에 있는
이학래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2년 후 다시 강진 남쪽 귤동(橘洞)으로
거소를 옮겼다고 합니다.
주민들이 제공했는데 이유는 자녀들의 교육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맹모삼천이 아니라 맹사(師)삼천지교인 셈.
귤동은 해남 윤씨의 마을로 인연으로 보면 다산의 어머니가
윤두서(尹斗緖)의 손녀로 해남 윤씨의 시조가 고산 윤선도였다
그렇다면 바로 다산의 외갓집 마을
마을 사람들은 차나무가 많은 다산(茶山)이라는 마을 뒷산에
초당을 짓고 그곳에 다산을 모셨습니다.
그리고 다산이 죄인이라 이름을 쓸 수가 없으므로 다산 선생,
또는 정다산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었답니다.
그는 이곳에서 빛나는 저술 활동을 해 동다기(東茶記),
다암시첩, 다신계 절목(茶神契 節目) 외에 걸명소 등 47편의 시를 남겼고
경세유표와 상토지(桑土志)에는 차나무 재배법 까지 상세히 적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동다기는 전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영조 38) 경기 광주~1836(헌종 2).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했다.
실용지학(實用之學)·이용후생(利用厚生)을 주장하면서 주자 성리학의 공리공담을 배격하고
봉건제도의 각종 폐해를 개혁하려는 진보적인 사회개혁안을 제시했다.
본관은 나주(羅州). 소자는 귀농(歸農). 자는 미용(美庸)·송보(頌甫),
호는 사암(俟菴). 자호는 다산(茶山)·탁옹(籜翁)·태수(苔叟)·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
당호(堂號)는 여유(與猶).
아버지는 진주목사(晉州牧使) 재원(載遠)이며, 어머니는 해남윤씨(海南尹氏)로
두서(斗緖)의 손녀이다.
경기도 광주시 초부면(草阜面) 마재[馬峴]에서 태어났다.
다산의 생애와 학문과정은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에 따른 유배를 전후로
크게 두 시기로 구분되며 그의 사회개혁사상 역시 이에 대응되어 나타난다.
다산 정약용의 주요 저서 5가지
다산의 5가지 주요 저서로는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의 1표 2서와
아방강역고, 마과회통을 들 수 있다.
목민심서는 수령이 지켜야할 지침으로 지금으로 말하면 공무원의 교육서,
경세유표는 행정기구, 관제, 토지제도, 조세제도등의 개혁을 논한 책,
흠흠신서는 형법서라고 할 수 있다.
아방강역고와 마과회통은 생소한데
아방강역고는 조선의 역사지리서, 마과회통은 마진(홍역)에 대한
증세와 치료법을 기술한 책이다.
이 외에도 실학을 집대성한 500여권에 달하는 '여유당전서' 등이 있다.
1801년 정약용 강진 유배.
1805년 정약용 걸명소 지음.
1818년 정약용 유배에서 풀려 돌아가게 되자 18명의 남은 제자들이
다신계를 모음. 이 다신계절목(茶信契節目)에서 정약용이 볶은 엽차와 말차인 단차를 언급.
1830년 정약용의 사문제자인 장의순이 초엽포차식(炒葉泡茶式)의 내용인
명나라 장원의 차록을 전재했던 만보전서의 채다론을 지리산 칠불선원에서
다신전으로 정서함.
1836년 정약용 사망.
1837년 장의순 18수의 연시로 된 동차송 지음.
1840년 김정희 제주 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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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나라에 다산과 같은 학자가 있다는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요 , 이곳에 가서 그분이 오르내리셨던 사당의 산책로에서
가슴 적시는 눈물을 흘린적 있었지요 , 정약용에 대한 게시물이 더러 있었는데 이번 게시물도 아주 품격 있고 좋습니다 , 잘 보겠습니다
가장 강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사람이 아닌가 합니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저에게는 큰 뜻도 능력도 없으니 신비의 두글자 부적이라도 마음속에 지녀보겠습니다.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군자들의 정신에는
힘들 때 인내할 수 있는
인생의 목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산 선생을 생각하면 절로 고개가 숙여지지요. 치열하게 진지하게 한 생을
살다간 한 인간에 대한 존경심이 저절로 생깁니다. 다산 초당, 백련사 가는
길 참 아름답지요. 선생의 영혼이 서린 길이기에 더 깊게 다가오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