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상상력을 확장하는
새로움의 탐색을 위한 시 세편
-주제 論
-글, 김부회
소금/ 장윤희
유명한 강사와 허접한 강사 사이/ 심계순
비겁/ 서수자
한 해의 시작이 엊그제 같은데 한 해의 마지막이 며칠 후다. 일각이 여삼추, 쏜 살 등의 말을 동원하지 않아도 세월은 정말 빠른 것 같다. 올 한 해 모던 포엠에 매월 기고하며 늘 가장 고심되는 부분이 소제목이었다. 글감의 공통적인 주제를 찾아 요약한다는 것은 시를 해설하고 분석하는 것보다 몇 배나 힘든 과정이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글을 쓴다는 언술 행위를 포함한 모든 글의 경우에 있어 포장지는 별개의 문제이며 중요한 것은 알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화자가 느낀 것을 어떤 형식과 구조를 통해 어떤 질감으로 채색해 세상에 내놓을 것인가? 문제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주제다. 주제가 선명하지 않은 글은 오독의 여지를 상당히 많이 내포한다. 혹자는 오독도 시를 읽는 방법의 하나라고도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시 한 편을 지을 때 수사가 비만하거나 모호한 표현 등으로 인하여 시인의 글이 정확하게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독자의 문제이기 이전에 화자의 문제가 더 크다고 생각한다. 여름에 겨울옷을 걸친 듯 어색할 것 같은, 나름 패션을 생각해서 한껏 치장하고 다듬었는데 보는 사람이 뭔가 맞지 않는 어색함을 느낀다면 그 패션은 성공한 패션 스타일은 아닐 것이다. 글도 같은 경우일 것 같다. 겨울을 생각하고 쓴 시가 독자에게 여름으로 읽힌다면 소재, 주제, 질감 등 어떤 부분에서 오독의 빌미를 제공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필자는 여러 차례 시는 공감과 소통의 영역이라는 것을 강조해 왔다. 오독은 공감과 소통의 경계에 벽을 세우는 행위가 될 것이다. 소재의 타당성과 문장의 개연성, 주제의 당위성을 잘 엮어놓았다면 그 시는 적어도 오독에서는 벗어날 것이다. 2017년 올 한 해의 마지막 호의 소제목을 주제로 명명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 한 번쯤 되돌아보자는 말을 하고 싶어서이다. 어느 해 신춘문예 심사를 두고 많은 말이 회자한 적이 있다. 이른바 소통의 부재와 관련하여 매우 흥미로운 칼럼이 있어 소개해 본다. 28세 조선일보 기자 시절,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한 재미작가 조화유 작가는 2016.1.13일자 칼럼에서 이런 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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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당선작도 무슨 소린지 알쏭달쏭
이번엔 시(詩) 당선작 "생일축하해" (안지은 작)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하겠다. 심사평을 읽어보니 이 작품이 가장 덜 난해한 시라서 뽑았다고 한다. 그런데 나에게는 이 시도 이해하기 어렵다. 시는 다음과 같다.
생일 축하해
"걷던 길에서 방향을 조금 틀었을 뿐인데, 신기하지
낯선 골목에 당신의 얼굴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니
네게선 물이 자란다, 언제 내게서 그런 표정을 거둘거니
누군가가 대신 읽어준 편지는 예언서에 가까웠지
막다른 골목길에서 나의감정을 선언하니
벽이 조금씩 자라나고, 그때에
당신은 살아있구나, 눈치챘지
문장의 바깥에 서서
당신은 긴시간 동안 사람이었지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야
언젠가 손을 맞잡았던 적이 있지, 짧게
우리라고 불릴 시간은 딱 그만큼이어서
나에겐 기도가 세수야
당신을 미워하는 건 참쉬운 일이지
오래 마주보고 있기엔 당신의 눈동자는 너무나 투명해
표정은 쉽게 미끄러지고
벽을 등지고 걸으면 내 등이 보이는 오늘
누구랄 것 없이 녹아 흘러내리지만
언제나 당신은 젖지 않지
내가 살아있는 것이 당신의 종교가 되길 바랄게
기일 축하해.
언어는 사회적 약속인데 그 약속을 어기고 작가 자신만 알게 씌어져 있다.
"네게선 물이 자란다" "벽이 조금씩 자라나고 그때에 / 당신은 살아있구나, 눈치챘지 / 문장의 바깥에 서서" "나에겐 기도가 세수야" "벽을 등지고 걸으면 내등이 보이는 오늘 / 누구랄 것 없이 녹아 흘러내리지만 / 언제나 당신은 젖지 않지 / 내가 살아있는 것이 당신의 종교가 되길 바랄게 /기일 축하해"란 말들은 나 같은 보통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말이다.
그런데 심사위원들(시인 칭호가 붙은 정호승, 문정희)은 "안지은의 <생일 축하해> 는 당선작이 될 만큼 작품으로서 우수성이 탁월했다기보다는 소통 가능한 시가 그래도 이 시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것은 삶과 죽음을 동질관계로 인식한 바탕에서 쓴 시다. 산 자가 죽은 자를 일상의 순간에 만나 깊은 애증의 대화를 나눈다. 죽음이란 "걷던 길에서 방향을 조금 틀었을 뿐"이라는, 기일이 생일이고 생일이 바로 기일이라는 이 역설적 인식은 죽음을 도외시하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했다. 나에게는 이 해설도 소통이 안 된다. 소설도 그렇지만 시는 누가 읽어도 쉽게 그 뜻이 이해되어야 좋은 시다. 그런데 요즘 시라고 쓴 것들을 보면 마치 간첩 암호 같다. 도대체 무슨 소린지 쓴 사람 자기밖에 모를 소리를 늘어놓기 때문이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로 시작하는 김소월의 ‘'진달래’'나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로 끝맺는 천상병의 '귀천' 같은 시들은 가방끈의 길이에 관계없이 누구나 이해하고 감동을 받는다.
그런데 왜 요즘의 자칭타칭 시인들은 누구나 알아듣기 쉬운 말로 시를 쓰지 못하는 것일까? 김소월이나 천상병 같은 시인들이 요즘 한국 신춘문예나 신인문학상에 응모하면 예심에서 탈락할 것이 뻔하다. 현대 한국문단에서 시를 심사한답시고 버티고 앉아있는 사람들은 전통적인 우리나라 시를 망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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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이게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이라고?』칼럼 중 일부 인용.
혹,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 같아 2016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심사평 전문을 인용해 본다.
최종심까지 올라온 16명의 시 50여 편을 읽고 느낀 공통점은 '소통로를 찾기 어렵다'는 점이다. 시를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두루뭉수리여서 쓴 사람 혼자만 읽고 서랍 속에 넣어두어야 할 시를 읽게 되는 고통은 무척 컸다.
"이전의 이후의 반물질과/ 무기체의 감각/ 물렁뼈에 속하는 밤/ 귀, 귀(鬼), 현실/ 가느다랗게 흐트러져가는 형상에 대한/ 신뢰는 얼마나 대단한가."(이현정 '벽에 걸어놓은 외투는 살아 있다' 부분)
한 예에 불과하지만 최종심에 오른 시는 대부분 시 스스로 독자의 이해를 거부한다. 현란한 기교가 난무하고 몰이해를 바탕으로 한 산문성이 두드러진다. 시의 심장이 은유라면 그 은유의 심장이 피를 흘리다 멈춘 듯하다. 다양성이 미덕인 시대에 그 다양성을 긍정한다 해도 지나칠 정도로 관념적이다. 마치 관념의 만화경을 들여다보는 듯하다. 이는 서정과 구체에 뿌리를 내린 비 관념적 소통의 시는 이미 낡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시는 낡았든 새롭든 소통의 통로를 통해 써야 한다. 아무리 목이 말라도 흐르지 않는 꽉 막힌 수도관을 통해서는 물 단 한 잔도 받아 마실 수 없다. 그동안 한국 시단은 뒤틀린 추상과 관념의 언어로 구축된 불통의 시를 새로움이란 이름으로 지나치게 관용하거나 방치해왔다. 행과 연 구분을 하지 않아도 되는 필연성이 결여된 산문 형태의 시와 관념적 불통의 시가 한국 현대시의 미래라고 여기는 인식이 팽배해 있는 오늘의 현상은 한국 현대시가 어떤 한계에 다다른 부정적 현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구어체로 이루어진 당선작 안지은의 〈생일 축하해〉는 당선작이 될 만큼 작품으로서 우수성이 탁월했다기보다는 소통 가능한 시가 그래도 이 시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생일 축하해〉는 삶과 죽음을 동질 관계로 인식한 바탕에서 쓴 시다. 산 자가 죽은 자를 일상의 순간에 만나 깊은 애증의 대화를 나눈다. 죽음이란 "걷던 길에서 방향을 조금 틀었을 뿐"이라는, 기일이 생일이고 생일이 바로 기일이라는 이 역설적 인식은 죽음을 도외시하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최종심에서 논의 대상이 된 작품은 박은지의 〈공유지〉, 박진경의 〈다이빙〉, 이종호의 〈작은 방〉, 이현정의 〈북극점 한 바퀴〉 등이다. 이 작품들에 대해서는 시는 언어로 이루어지며 그 언어가 지닌 구체의 본질을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2016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심사평/ 정호승, 문정희 시인』전문 인용
조화유 작가의 말을 모두 인정하거나 안지은 시인의 시가 어떻다는 말을 하고자 함이 아니다. 조화유 작가 본인이 칼럼 말미에 밝혔듯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견해로 쓴 글이기에 옳다 그렇지 않다 할 수 없을 것이다. 필자 주관적으로는 안지은 시인의 시는 충분히 당선작에 뽑힐 작품성과 철학적 배경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다. 심사위원 역시 자신의 관점에서 올바르게 시를 판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두에게 같은 잣대를 대고 재단하거나 재볼 필요는 없을 것이며 생각이나 방법은 모두 다르기 때문에 주장의 하나로 보고 싶다. 다만 문제는 작품에 대한 견해나 심사에 대한 견해가 아니라 소통이라는 전제 앞에서 한 번쯤 자신의 글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소통이라는 것은 주제의식이 명료하고 전달하는 주체가 전달받는 독자에게 알맞게 전달해야 함을 기본으로 할 것이다.
위 조화유 작가의 말과는 다른 관점에서 논한 최동호 고려대 교수의 글을 인용해 본다.
대중적인 인기를 가진 시들의 약점들
최동호(문학평론가 고려대 교수)
쉽게 쓰인 시가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다. 그러한 대중시는 청소년들의 정서함양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리고 그러한 쉬운 시의 영향으로 누구나 젊은 시절 한때 시인이 되고 싶어 한다. 좋다 젊은이들에게 꿈을 꾸게 할 수 있다면 대중시도 그리 나쁜 게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를 계속 좋아하기에는 아쉬움이 많다. 젊은이들은 한 때 시원한 청량음료처럼 시를 좋아하다가 탄산수의 거품처럼 금세 사라지는 시적 정취를 다시는 거들떠보지 않게 된다. 이제 그들은 시보다 무협지나 판타지 또는 대하소설에 관심을 빼앗겨버린다.
그들이 한때 좋아했던 그 유행가 같은 시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정말 그게 시였을까? 좋은 시는 사는 동안 가슴에 묻어둔 비문과도 같은 것이어야 한다. 언제 어느 때 꺼내어 그 반짝이는 언어를 담아 봐도 싫지 않을, 그런 진정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쉽게 써진 시는 우선 감정의 처리가 값싸 보인다. 그저 말하기 좋은 고독, 이별, 사랑, 죽음, 슬픔 등의 주제에 한정되어 있다. 이러한 주제는 사실 모든 문학작품의 근원적인 문제로 많이 다뤄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만약 시인의 깊은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기보다 독자들의 인기에 영합하려고 끌어다 붙인 말초적인 감각에 의존한 것이라면 그것은 참으로 위험한 선택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결과 읽기 쉬운 시가 되어버린 이것들이 다른 이의 정서를 위축시키고 동적인 삶의 체험을 정태적으로 둔화시키는 역할을 해버리기 때문이다.
쉽게 쓴 시의 특징은 시인의 감정 처리가 안이하다. 편의주의에 감상만을 가미하여 시적 효과를 둔화시키고 자신의 감정을 국화빵처럼 찍어내듯 드러낸다. 그런 까닭에 누구나 접하기 쉬울 만큼 표현이 평범하다. 이는 지적 실험의식을 내세운 난해시의 불필요한 난삽성을 반박하는 것이 될 수 있고, 우선 읽힌다는 점에서 독자들에게 긍정적인 측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런 시는 긴장이 너무 이완되고 정서적 깊이가 얕아, 잘 쓰인 산문에 못 미치는 꼴이 되므로 경계해야 한다.
미숙한 시의 또 다른 특징이 있다면, 적절하지 않은 수사를 반복으로 감추면서 음악적 효과를 지닌 것처럼 만드는 점에 있다. 단순 반복의 리듬감이 시적 능숙함과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친화감으로 곡해되어 독자들에게 달콤하고 부드러운 위안을 가져다줄 수도 있다. 이것이 참으로 우려될만한 점이다.
다원화 시대에 민중시 또는 순수시만이 의의가 있다는 주장은 억지이고 독선적인 논리일 것이다. 그리고 독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한 시가 졸렬하다는 생각도 역시 획일적인 생각이다. 나쁜 시는 유행가처럼 일회성을 가진다. 그런 의미에서 오래 읽혀지는 시는 결코 나쁜 시가 될 수 없다. 시는 인간으로 하여금 진실한 삶의 가치를 눈뜨게 하고 완성시켜주는 예술적 양식이기에 진정한 가치를 가진 시는 어느 시기에건 그 가치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시가 생명으로 숨쉬는 것이기에 살아있는 한 결코 외면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시는 어떤 시일까?
살아 있는 시는 유행에 매달리지 않고 시대를 초월한 시다. 시가 정서적 이유가 아닌 다른 목적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으면 건강하지 않은 시다. 그러나 세상살이를 정직하고 진지하게 노래한 것이라면 그 건강이 시의 향기가 되어 나타난다. 그런 시는 영혼의 울림을 줄 수 있는 시다.
끝으로 우리가 시를 쓰면서 경계할 이념들을 살펴보려 한다.
가장 먼저 순수주의를 경계할 일이다. 순수 지상주의는 애써 현실을 외면하고 독자적인 시 세계를 개척하듯 보이지만 김소월이나 윤동주 같은 시 세계를 답습하는 꼴일 수 있다. 현실을 부정하고 비판하지 않으며 온갖 서정성만 그럴듯하게 발라내기로 자족하는 순수시는 게으른 삼류시와 같은 것이다.
둘째는 지나친 민중주의를 경계할 일이다. 특정 이념에 자신의 사상을 고정시켜 놓은 시각은 위험하다. 그것이 왜곡된 신념이라면 특히 위험한 일이다. 민중주의는 그릇된 역사를 바꾸고 싶어 하는 정의감에 사로잡혀 다양성이 있어야 할 삶의 근본을 박탁하려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이것은 또 다른 기회주의와 다름이 없다.
셋째는 미욱한 자의 달관주의다. 달관주의는 신선사상에 근거한다. 그들은 삶의 궁극을 제대로 파악도 못했으면서 달관한 체 하기 쉽다. 이것은 극단적인 허무주의가 모습을 달리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파괴주의이다. 모든 존재는 모순으로 무너지면서 진화 발전하고 다시 생성된다. 새로운 발전을 위한 파괴는 언제나 유혹적이다. 그러나 새로운 생성을 모르는 파괴란 무의미하다.
『대중적인 인기를 가진 시들의 약점들- 최동호 (문학평론가, 고여대 교수)』일부 인용
위 두 견해와 같이 시에 대한 관점이나 관찰자적 시각은 다를 수밖에 없고, 사실 관점과 시각이 다른 것이 어쩌면 정답일지 모른다. 모두가 생각이 같다면 그야말로 시 공장에서 시 한 편을 찍어내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라는 의문이 든다. 중요한 것은 다른 시각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다만, 시인은 자신의 시를 씀에 있어 자신이 선호하는 경향을 따르면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 번 더 돌아볼 문제는 ‘주제’라고 생각한다. 어떤 옷을 걸치든 사람은 사람이다. 그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 것이다. 글의 주제가 그렇다. 미래파의 옷을 걸치든, 서정시의 옷을 걸치든, 하고 싶은 말의 정확한 의미가 전달되어야 비로소 한 편의 완성된 시가 세상에 나올 것이다. 주제의 사전적 의미는 창의적인 예술 작품에 나타나는 중심 사상을 말한다.
주제(主題, theme)는 작가가 표현하려는 매우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사상이나 관념이다. 작가는 주제를 중심으로 소재를 정리하고 통일하여 작품을 형성하므로, 주제는 플롯 전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테마라고도 한다. 철학상 용어로서 1635년 부르게르스디키우스의 《논리학》에서 최초로 사용됐다.[출처 필요] 그 사람이 사용한 주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로고스'라는 말로써 막연히 한 표현에 가깝고 사상이나 의미의 직접 대상을 가리킨다. 그것은 기호(記號)[1] 일종인데 관습이나 지식이나 지성을 대상으로 한 통찰로 말미암아 대상을 직접 지시하는 기호로서 오늘날 말하는 '상징'과 거의 동의인 이 말은 수사학에서 문장을 표현하는 근본을 나타내는 용어로도 사용될 뿐만 아니라 음악이나 문학에서도 범용된다.
『다음- 위키 백과사전 중 주제에서 일부 인용』
시에서 중요한 것은 은유, 비유, 환유, 문장, 상징, 이미지, 시어 등등의 여러 가지가 존재한다. 그중 가장 먼저 생각할 것은 ‘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제가 명확하지 않을 때, 아니 주제가 명확하게 보이지 않을 때 소통이라는 벽을 넘기 어려울 듯하다는 것이 필자의 개인적 사견임을 밝힌다.
이번 호에서는 ‘주제’ 라는 글감의 소제목에 부합하는 시 세편을 선정했다. 첫 번째 작품은 장윤희 시인의 [소금]이라는 작품이다.
소금
장윤희
우리는 누군가와 날마다
충돌한다
가볍게, 때로는 무겁게
침묵 그리고 시간을 삭힌다
서로에게 스며들기 위해 필요한 날 동안
친절하게 담금질을 하다가
소용없어진 날
낯선 얼굴로 간을 본다
변해버린 마음만큼
심각하게 녹아있다
자꾸 간을 보다 보면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현실과 부딪힌다
비상구가 없는
숨은 진실을 밟고
조금이라도 세상 밖에서 돋보이고 싶어
욕심을 한주먹 더 움켜쥔다
안간힘을 쓸 때마다
각진 인생이 베이고 녹아내린다
끈적거리고 축축한 아픔
말려 보내고 싶어
햇살 아래에서 발가벗어본다
소금이라는 것의 속성을 삶에 대입해 풀어나간 작품이다. 시쳇말로 ‘간을 본다.’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게 되고 듣게 된다. 간을 본다는 것은 입맛에 맞게 적당하게 소금기가 배여 있는지 확인한다는 말이다. 간을 본다는 말은 비단 음식의 짠맛을 조절한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 속에는 음식이 내야 하는 짠맛, 신맛, 단맛, 등등의 모든 맛과 맛 사이 맛의 균형을 잡는다는 말로 해석해도 될 것이다. 물론 맛을 결정하는 것은 소금이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도 사실이다. 장윤희 시인의 소금은 이런 삶 혹은 관계에서 비롯된 삶이라는 군상 속 균형점을 찾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침묵 그리고 시간을 삭힌다
서로에게 스며들기 위해 필요한 날 동안
친절하게 담금질을 하다가
소용없어진 날
낯선 얼굴로 간을 본다
낯선 얼굴로 간을 본다는 표현이 매우 적절하게 다가온다. 익숙하거나 프로 같은 미각의 삶이 아닌 이제는 낯선 그런 얼굴로 간을 볼 때, 그 냉정한 감각 속의 현실은 어떤 모습일까?
자꾸 간을 보다 보면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현실과 부딪힌다
간을 볼수록, 균형점을 찾으려 할수록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현실과 부딪힌다. 확장해서 생각하면 균형에 대한 감각을 잃었다는 말로 보일 수 있다. 그렇기에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현실이라는 시적 장치가 무겁게 다가온다. 하지만 결구에서 시인이 말하듯 발가벗어 볼 때 가장 간을 잘 본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안간힘을 쓸 때마다
각진 인생이 베이고 녹아내린다
끈적거리고 축축한 아픔
말려 보내고 싶어
햇살 아래에서 발가벗어본다
맛을 결정하는 것은 어쩌면 대중적인 맛의 기준이 아닌, 자신의 기준에서 가장 적합한 맛의 감각 이라는 생각이 든다. 읽을수록 소금 같은 다양한 맛이 우러나는 작품이라는 생각이다.
두 번째 작품은 심계순 시인의 [유명한 강사와 허접한 강사 사이]라는 작품이다,
유명한 강사와 허접한 강사 사이
심계순
입동이 지나고 시작된 겨울
가을은 언제 왔다 갔는지 기억조차 없는데
갈 길은 멀어 지는 해가 아쉬운 어느 날
스스로 유명한 어느 강사님
강의를 듣겠다고 여러 번 참석 했는데
진갑이 벌써 지난 강사는
늙은 방청객이 영 마땅치가 않다
강의 중 질문하면
끝난 다음에 하라하고
끝난 다음에 물으면
투명인간 취급이다
노인도 강사를 무시하기 시작하고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는데
강사의 갑질이 극에 달하는 실수를 한다
저벅 저벅 노인에 앞에 다가가서는
묻지도 않고 하는 말
~~아, 이 양반은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양반이지
나오면서 노인이 말했다
질문도 받지 않고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강의
누군들 그런 강의 못할까
듣고 싶은 말이나 듣고
하고 싶다고 아무 말이나 제멋대로 하는
유명한 그런 강의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에피소드를 시로 담아냈다. 한 번 쓱 읽어도 쉽게 글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 촌철이라는 말이 있다. 작고 날카로운 쇠붙이나 무기를 말한다. 언어가 그렇다. 시가 그렇다.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것 같은 말 한마디가 때론 비수가 되어 가슴을 파고든다. 심계순 시인의 시는 쉽게 표현하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수사적 표현 기법은 철저히 배제하고 본 듯한 풍경을 그려내다 불쑥 한마디 던진다.
듣고 싶은 말이나 듣고
하고 싶다고 아무 말이나 제멋대로 하는
유명한 그런 강의
결구에서 필자 역시 뜨끔함을 느낀 것은 비단 필자만은 아닐 것이다. 심계순 시인의 시를 특별히 선별한 것은 [강의]라는 말 대신, [시]를 대입해 보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 듣고 싶은 말이나 하고 싶다고 아무 말이나 제멋대로 하는 그런 시는 없다. 다만, 그렇게 보일 혐의를 미필적으로 갖고 있는 시는 많을 것이다. 필자의 시 역시 그렇다는 생각을 해 본다. 거창한 주제를 설정해놓고 문장을 억지로 끌고 가는 식의 시 짓기 행위를 필자 역시 해 본 경험이 있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차치하고 혹, 우리가 시를 쓰면서 그런 미필적 고의를 배후에 깔고 있지는 않은지 심각하게 같이 고민해 보고 싶다.
어쩌면 강사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양반이지가 맞을 수도 있고, 아무 말이나 제멋대로 하는 유명한 강의라고 하는 말이 맞을 수도 있다. 경우와 가치관에 따라 얼마든지 자기 관점의 아전인수식 해석이나 변명은 누구에게나 가능하기 때문이다. 좋은 시와 나쁜 시의 구분은 정답이 없다. 서두에서 인용한 조화유 작가의 주장이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필자의 좁은 시안으로는 분명히 안지은 시인의 [생일 축하해]는 매우 좋은 작품이다. 문제는 그 간극을 좁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소통은 포퓰리즘에 그 기반을 두어야 할 것이다. 서로 알아들을 수 있는 강의, 질문에 친절하게 답변을 하거나, 모르면 찾아보고 답변을 해주는 강사, 유명한 강의에 삶의 변곡점이 바뀌는 청중, 이 모든 것의 조화는 간을 잘 맞추는 일이다. 시에 배여 있는 간을 잘 맞추기 위해 가장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올바르고 선명한 [주제] 선택에 있을 것이다.
마지막 작품은 서수자 시인의 [비겁]이다.
비겁
서수자
겁도 없이 비겁은
비겁 쪽으로 내려가는 계단만 죽죽 낳았다
뼈 속까지 가난한 비겁의 계단
꽃잎이 쌓였다 비가 내렸다
팔 다리 떼어주고 아직 살아있다
간 쓸개 떼어주고 아직 살아있다
계단 위에 비들이 다다다다 비겁을 속기하고 지운다
비겁은 비겁 쪽으로만 기울어진다
기울이고 보는 풍경들이 우르르 쏟아진다
기울여진 말을 디디고 바로 설려고 안간힘이다
찢어진 입이 귀에 걸리고 관자놀이 한쪽이 경련한다
한 바퀴 빙글 돌아 바로 서는 전광판처럼
비겁은 금방 제자리를 찾는다
가까이 다가가면 보이지 않는다
한 발짝씩 물러나면 보인다
철꺽 현관문 잠기는 소리가 감금에서 잠금으로
바뀌는데 반세기가 걸렸다
줄곧 나를 홀대하던 비겁이
바닥에서 나를 살리고 있었다는 것
이제 알겠다
비겁은 나의 힘
비겁은 감출 수 없는 나의 피
비겁의 사전적 의미는 떳떳하지 못하고 겁이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한자의 의미는 무서워하다 하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 서양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영화 중, 주인공의 명대사 한마디를 먼저 소개한다. “비겁하지 않을 용기가 있습니까?” 매우 중요한 말이다. 비겁할 용기의 반대편에는 비겁하지 않을 용기라는 말이 있다. 서수자 시인의 시 속 [비겁]의 의미는 아마 “비겁은 나의 힘‘이라는 결구의 반대편 ”비겁하지 않을 용기가 있습니까?“ 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철꺽 현관문 잠기는 소리가 감금에서 잠금으로
바뀌는데 반세기가 걸렸다
줄곧 나를 홀대하던 비겁이
바닥에서 나를 살리고 있었다는 것
이제 알겠다
비겁은 나의 힘
살다 보면 비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의든 타의든 비겁은 비겁하지 않은 경우와 늘 동행을 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비겁이 다만, 겁이 많고 무서운 것에 국한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비겁은 비겁하다 보면 비겁 쪽으로만 기울어진다.
비겁은 비겁 쪽으로만 기울어진다
기울이고 보는 풍경들이 우르르 쏟아진다
기울여진 말을 디디고 바로 설려고 안간힘이다
찢어진 입이 귀에 걸리고 관자놀이 한쪽이 경련한다
역설적으로 비겁해봤기에 비겁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비겁의 실체를 알게 되지 않을까?
줄곧 나를 홀대하던 비겁이
나를 홀대하던 비겁이 아닌, 내가 홀대하던 비겁의 무게는 어떨까?
철꺽 현관문 잠기는 소리가 감금에서 잠금으로
바뀌는데 반세기가 걸렸다
감금에서 잠금으로라는 표현은 대단히 주제 전달성, 명료성에 부합되는 멋진 표현이다. 가령
비겁
철꺽 현관문 잠기는 소리가 감금에서 잠금으로
바뀌는데 반세기가 걸렸다
이렇게 시를 써도 매우 훌륭한 시가 될 것이다. 감금에서 잠금,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서 감금이 잠금으로 들리는 날이 얼마나 있을지? 아니 언제쯤 올지?
한 해가 지나간다. 새해가 온다. 2018년도 우리의 글, 우리의 삶, 우리의 인생, 우리의 가족, 우리의 존재, 이 모든 것에서 선명하게 각인되는 자기만의 [주제]를 바로 세우는 한 해가 되길 기원한다. 2017 한 해 동안 어눌하고 조악한 글 읽어주신 모던 포엠의 독자 제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내년 한 해는 좀 더 많은 좋은 시가 모든 사람의 가슴에 따듯하고 훈훈한 온기가 되길 진심으로 기원하며 맺는다.
첫댓글 많이 배웁니다
시를 읽고 시평을 읽어보니 배울점이 많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