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89. ⓵ [반신반인 범죄목록] 제1편(1~6) 2023.10.26.
1) 1939년 조선인 최초의 충성혈서를 일왕에게 봉공하는 반역질을 범했다. "한번 죽음으로 천왕에게 충성함"(一死以테 御奉公)이라고, 만주신문에 요란하게 실렸다.(1939.3.31) 그러나 2차 시험에도 낙방, 간도특설대 강재호대위에게 의탁한다. 이때부터 백선엽 신현준 이주일 방원철 등 간도특설대 "조센징 사냥꾼"들과 권세와 영욕의 사선을 함께 넘는다.
2) 1945년 일본 관동군을 탈영, 광복군 제3지대에 편성되어 귀향대에 소속된다. 악명 높은 간도특설대 출신 신현준 이주일과 함께 광복군으로 신분세탁을 시도하였다. 친일매국 일제관동군이 항일애국지사가 되려는 최악질 범죄다. 이런 위장음모를 신랄하게 비판한 장준하는 1975.8.17. 의문의 사고사를 당했다.
3) 1946년 남노당 군사부 조직책으로 암약하다가, 48년 체포되었다. "계획된 배반"의 자술서를 제출, 황택림 오일균 조병건 등 간부급 장교 20 여명을 총살형장에 세웠다. 일군 출신 채병덕 백선엽 김창룡 등의 연대 보증으로, 10년형의 집행을 면제받고 육본정보국 상황실장으로 복귀한다. 강제호의 추천 이후 백선엽 신현준 이주일 간도특설대 간부들과의 밀당은 계속되었다.
4) 1956.2월 제5사단 재직시 사단장 유흥비를 마련하려는 "숯가마 작업" 중, 장병 59인을 폭설에 압사시켜 문책된다. 1957년 이를 문제삼아 소장 진급을 반대한 이승만의 경무대경찰서장 곽영주는 5.16혁명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형이 집행되었다.
5) 1960년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으로 취임, 석유 500드럼 등을 대한음주당(쿠데타 모의당) 은월정 요정술값으로 제공한다. 1961년 4.19기념식을 폭동화시켜 군을 출동시키는 '비둘기작전' 계획을 실행한다. 2만장의 선언문을 박종규·김종필에게 준비시키는 등 300만환의 자금을 제공하였다. 김동복대령은 이들 쿠데타군의 비리를 민족일보에 제보했었다.
6) 1961.5.16. 군사쿠데타로 유권자가 선출한 국회를 해산하고, 장면정부를 전복시킨다. '피학살유족회' 교원노조 등 민주인사 사회운동가 3,300여명을 체포 608명을 혁명검찰부에 이송한다. 그중 216명을 기소하여, 190인에게 사형 등 유죄 판결을 선고하고 사형의 형을 집행한다. 피학살유족회 이원식선생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등 유족회를 집중 탄압하였다.
⓶ [반신반인 범죄목록] 제2편(7~13)
7) 1961.7.3. 5.16쿠데타 최고회의는 반공법을 입법 공포했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는 절차도 없고, 사법적 근거도 없는 불법적인 입법권 만행이였다. 그럼에도 이법은 80.12.31. 폐지될 때까지 무소불위의 사법폭력을 행사했다. 70년대는 민초들의 생활 깊숙이 침투하여 ‘막걸리반공법’으로 회자되기도 하였다. 동일사건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자는 사면 석방되고, 반공법 위반자는 제외되는 역란을 과시하기도 했었다. ‘꼬리가 머리를 흔드는’ 반공국시의 총아였다. 박통집권 18년 동안 총 6,944인(년 평균 386인)이 국보와 반공법 위반으로 공안사범이 되었다. 처형된 생명 중 재심재판에서 무죄가 선고 확정된 사형수도 현재 15인이 넘는다. 철조망과 감시초소, 감옥창살로 갖힌 남한사회는 어느 쪽이 안인지 바깥인지 변별되지 않는 반공독재 고문사회였다.
8) 1964.6.3. 비상계엄과 65.8.26. 위수령으로 포고령위반 1,120명을 체포하고 348명을 기소하였다. 이는 미국과 미군이 강제하고 허용한 한·일협정 반대운동에 대한 군사탄압이다. (양국은) "독도는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독도 주변의 "중복되는 영해는 공동수역"으로 한다는 이면합의를 체결했다. 이런 매판거래로 일본기업으로부터 6,600만$의 정치자금을 제공받았다. 영토주권을 훼손한 매국협정은 지금도 작동하는 괴물이다. 한·일합방의 D. 루즈벨트, 한·일협정의 케네디·존슨, 한·일군사동맹의 바이든, 한국의 자주와 평화는 워싱턴의 껌값으로 매도되어 버렸다.
9) "개값도 안되는 헐값으로 젊은이들의 피를 팔아먹는다"는 비난을 반공법위반으로 구속하였다.(경북대학교) 1964년 베트남 파병을 결행, 73년까지 누적 총 34만6천명의 장병을 보냈다. 총 수입은 2억3,356$에 전사자 5,099명과 10,962명의 상이자를 전쟁 후유증으로 남겼다. 1973.3.30. 소위 "자유의 십자군"은 패주의 대탈출극을 감행하고, 공포에 질린 떼거리 대중은 반공궐기대회로 목이 탔다.
10) 1966년 "똥물국회"가, "밀수왕초는 박통"이라고 규탄되는 참극이 발생했다. 한국비료 플랜트수입에 미쓰이사가 제공한 리베이트를 일제상품으로 밀수하여 400% 이익을 챙겼다. 이는 장기영 이후락 김성곤 김형욱(4인협의회)과 이병철이 박통의 제안에 따른 밀수범죄였다. 이후 미국의 한국 경제개발계획은 플랜트수입 리베이트와 관치금융 커미션에 올인하는 오적의 강도질 독무대로 변질되어 버렸다.
11) 4인협의회는 관치금융으로 달라차관이나 은행대출, 공적자금을 관리하였다. 기업에 차관이나 대출이 알선 배분되면 4인협의회와 오적이 뒷돈을 챙겼다. 그러므로 항상 자금난에 허덕인 기업이 매달린 사채는 당시 화폐로 3,500억(22년 기준 최소 7조1424억 이상)원에 달했다. 뒷돈 도적질을 사채 탓으로 덮어쒸운 조치가 "8.3조치"다. 1979년 청와대 금고의 비자금 또한 같은 똥자루에서 나온 구린돈이다. 이 뒷돈 때문에 중화학공업은 과잉중복 투자되고, 기업에게는 재무구조 악화와 국제경쟁력 약화라는 경영위기가 반복되었다. 1980년 경제성장률은 -4.8%로 추락하고, 안보분담금을 일본에 구걸하는 치태를 연출했다.
12) 1971.8.10. 광주대단지 빈민봉기가 일어났다. 재벌과 기업을 위해 저임금정책을 설계한 미국은 저곡가정책을 정부에 강제했다. 이 살농정책으로 발생한 누적된 농가부채와 영세소작농으로 전락한 농민들은 야반도주와 취업이주를 결행하였다. 그리고 도시 변두리 판자촌 빈민가로 숨어들어 막노동꾼이 되었다. 도시환경 정비사업에 쫓겨 성남시 광주대단지로 소개되고, 아사에 몰리자 봉기하였다.
13) 1973년 영동지구는 개발촉진지역이 되어 부동산 돈벼락이 쏟아졌다. 오적떼의 기획에 따라 각종 세제혜택(재산세 면허세 등)에다 지하철 2호선, 명문고 이전 등이 이루어졌다. 계속된 정책지원을 화수분으로 땅값은 1970년 평당 2,000원이 74년 80,000원, 79년 400,000원으로 폭등했다. 1963년에서 79년 땅값 폭등은 압구정은 875배, 신사동은 1,000배에 달했다. 성남광주와 강남왕국의 땅값 차이는 사는 사람의 운명까지 바꾸어 놓는 "한강의 기적"이였다.
⓷ [반신반인 범죄목록] 제3편(14~17)
14) 1972.10.17. "10월유신"은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다. 새로 구성된 1년짜리 국회가 속절없이 해산되었다. 아무런 사회적 사건도 흔해빠진 간첩사건조차 없었는데도,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무장군인들이 거리에 진을 치고 탱크와 장갑차가 언론사를 포위하였다. 유권자의 자유투표권과 정부 선출선택권은 박탈되었다. 이후 유신헌법의 긴급조치는 1호에서 9호까지 총 1,204명을 구속, 1,050명이 유죄판결, 8명을 사법살인 하였다. 고문과 조작, 위헌 법리의 옥사로 재심에서 무죄선고를 받은 자는 2021년 현재 총 864명이다. 분명한 사실은 유신체제는 박통에게 영구집권과 왕의 권세를 누리게 했다는 사실이다.
15) 1973.8.8. 중앙정보부 이후락이 지휘한 소위 'KT공작'이 일본 수도 동경에서 범행되었다. 유신체제를 반대해온 김대중을 호텔에서 납치 수장하는 공작이다. 이 만행으로 한국은 테러범죄국가로 세계에 이름을 떨쳤다. 반문명적 이런 행태는 미·일 애비의 회초리를 자초했다. 1978년 미의회 청문회는 박동선을 출석시켰다. 이를 통해 이후락이 관리하는 박통의 스위스은행 비밀계좌에서 19만불을 확인했다. 또 육영수 김성곤 박종규 정일권이 각 75만$에 상당하는 스위스은행 비밀계좌를 밝혀냈다. 이를 증언한 김형욱은 세상에서 증발되었다. 프랑스 농가 사료기에서 분쇄되어 닭모이가 되었다는 설과, "청와대 지하벙크에서 박통에게 총살되어, 폐차에 태워져 압착, 용광로에 던저졌다"는 증언(정일권)이 있다.
16) 1974.4.3. 긴급조치4호를 발동한 박통은 “민청학련이란 불법단체가 … 인민혁명의 수행을 (위해) … 적화통일을 위한 통일전선(을) … 발본색원" 한다는, 가짜뉴스로 증명된 담화문을 발표했다. 또 75.2.21. 박통은 문공부 년두순시에서 “내란음모죄는 ... 극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다”고 격앙된 목소리를 내질렀다. 권력의 종복 중앙정보부는 전기와 물 고문으로 피의자들을 조사했다. 고문으로도 부족해 피의자의 손을 강제로 끌어다 심문조서에 무인을 찍었다. 법정진술조차 “아니오”를 “예”로 변조하여 공판조서를 작성하였다. 이를 토대로 대법원(민복기) 전원회의는 살인의 재판범죄를 자행하여 박통에게 충성했다. 74.4월 연행 체포되어 75.4.9. 처형될 때까지 가족면회는 금지되었고, 변호사 접견까지 제한되었다. 이런 사실은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데도, 아니 알면서도 대법원은 덮었다.
1975.4.9. 신새벽, 4시55분부터 30분 간격으로 8의인을 처형 학살했다. 법적으로 반드시 갖추어야 할 대법판결문과 형집행지휘서가 서울구치소에 도착(14:00)하기 9시간 전에 처형을 불법 집행하였다. 살인 흉악범이나 남파 간첩 사형수에게도 주어지던 재심 기회조차 박탈한 전격처형이었다. 그리고 8의인의 최후유언조차 조작 기록했다. 생전 만남의 기회조차 금지당했던 유가족들은 시신을 안고 오열했다. 송산진·여정남 두 분은 화장으로 훼손된 시신이 되어 가족들은 만나야 했다. 연산군의 부관참시를 능가한 인간만행의 극치였다. 국제법학자들은 이날을 “세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했다. 그들의 이런 악질범죄의 민얼굴 때문에 처형당한 의인의 유가족과 관련자 가족, 관련피의자들은 24년동안 공안기관의 특별관리를 받아야 했다.
33년 고통과 고난의 세월 속에 2007.1.23. 재심법정에서 8의인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 한세대에 걸쳐 재판범죄가 조준사격한 인민혁명은 뜬구름처럼 세파에 실려간 회한이 된 것인가?
17) 세간에 "육박전"이란 유언비어가 사랑받은 때가 있었다. 문일봉, 정인숙, 김삼화, 윤정희란 굵직한 이름 외에도, 1974년8월 이후에만 궁정동 안가 행사에 불려간 아가씨는 200명이 넘는다는 박선호 팀장의 진술이다. 정보부 미림팀(채홍사)이 경호실장 차지철과 함께 수행한 성 약탈작업이다. 명색이 최고권력자가 연예인 아가씨 끼고 시바스리갈 마시며, 시위 시민에게 발포 명령을 과시했다. 이에 경악한 직계부하에게 확인사살까지 당해 피투성이가 되었다. 이런 세계적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아무리 공로가 지천이다 하더라도, 이 하나의 상징사건으로 모든 공이 헛빵이 될 수밖에 없는 추문의 결정판이다.
이런 반신반인에게 허리숙여 요배하는 TK여,
한강의 기적을 읊조리는 5.16 장학생들이여,
반신반인과 함께하는 개꿈은 영원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