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없는 무명업식의 불쌍한 존재
Q : 불교에서 신(神)을 어떻게 보나요?
A :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교는 무신론입니다. 신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신을 경외시하거나 숭배하지 않는 종교입니다. 신을 앞세워 빌고 구하는 불교는 옳은 불교가 아니며 지혜롭지 못한 처사입니다.
깨침은 내 앞에 그 어떤 것도 가려있지 않은 마음의 땅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임제선사의 살불살조(殺佛殺祖)가 깨달음의 경지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불교는 대각자인 석가부처님마저 신격화시키는 무리가 여기저기 수두룩합니다. 더 나아가 해탈자의 구세제민행인 보살상을 무슨 신쯤으로 여기는 수행 풍토는 고불고조의 피눈물을 강요하는 배신행위입니다.
삼라만상의 이치를 꿰뚫는 비법을 담고 있은 위대한 불교가 21세기 첨단시대와 동거할 수 없는 귀신교로 비추어지는 것은 인간의 무지가 낳은 비극입니다. 신은 진리의 화신도 아니며, 지혜와 사랑의 결집체로 보는 것은 가당치도 않는 궤변입니다. 신은 한마디로 몸 없는 불쌍한 중생입니다.
신은 높낮이에 상관없이 전생을 살 때 제행이 무상하고 제법이 무아인 이치를 깨닫지 못한 무명 업식의 인(因)이며 몸 없이 윤회하는 업 덩어리일 뿐입니다. 이런 신이 내생에 사람 몸 받아 불법 인연 만나는 것도 어렵지만 육도를 통달하여 또다시 윤회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진리의 실상은 무위자연이며, 만상과 통(通)하는 지혜는 신의 영역이 아니라 맑고 밝은 마음의 힘이 그 주체입니다.
불교에서 신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다소 모호한 표현을 한 것은 불교가 태동하던 시대상을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사방이 온갖 신을 섬기는 하열한 무리밖에 없는 상황에서 허망한 신의 실체를 밝혀놓았다면 아마 녹야원이 발칵 뒤집어졌을 것입니다. 근기 따라 신을 해석하라고 맡겨둔 것이 오늘날은 불교마저 가당치도 않은 영가천도 업장 소멸, 생전예수제 등을 만들어 귀신전문교로 여겨질 정도로 저질이 되었는데 회상 당시의 주변 상황은 오죽하였을까요. 깨우침이 본분사가 아닌 불교는 존재 의미가 없습니다. 타락한 불교는 인류발전을 저해하는 암적 요소가 될 뿐입니다.
사람들이 절대성을 부여하는 신들이 아직도 신으로 남아있다면 그것은 전생 업장이 무거웠다는 것의 반증입니다. 자신의 업도 해결하지 못해 삼계를 떠도는 몸 없는 중생인 신에게서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무엇을 빌어 구할 것이 있겠습니까? 신 입장에서 보면 두꺼운 전생 업(業) 때문에 아직 신으로 남아있는 것도 통탄할 노릇인데 못난 인간들이 나에게 기대어 빌어 구하려 드는 반연 때문에 빨리 윤회하기조차 어렵게 되었다고 하소연 할 것입니다.
지금 사회 저변에는 신을 섬기며 스스로 신의 종이 되어도 부끄러움을 느낄 줄 모르는 풍조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말법 시대 어리석은 중생의 추한 이면을 들추어 무엇 하겠습니까. 지혜로운 사람은 제 현상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흑백을 가려 제도하며, 모든 사람이 사(邪)에서 벗어나 정도(正道)를 걸을 수 있도록 발원하여 인도 합니다.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