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가라사대
성숙한 크리스천 히브리서 5:11~6:12 히브리서 강해 11/하용조 목사
Ⅰ. 서론
Ⅱ. 본론
1. 초보에서 벗어납시다.
2. 완전한 데로 나아가십시오.
3. 끝까지 진실하게 믿으십시오.
Ⅲ. 결론
Ⅰ. 서론
본문 말씀을 통해 성도들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며, 또한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하는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 가운데 아직도 젖만 먹는 어린 신자가 있는 반면에, 이제는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성숙한 신자도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당신이 얼마나 교회생활을 오래 했으며 봉사와 헌신을 얼마나 많이 했느냐를 묻고 있지 않습니다. 12절에 보면 어린 신자가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린 신자는 12절에 의하면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즉 기초를 다시 반복해서 배워야 하는 사람이며 그리고 하나님의 의의 말씀이 무엇인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사람은 교회는 오래 다녔고 신앙생활은 오래 했지만 아직도 어린 신자로서 젖만 먹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14절에 보면 성숙한 신자는 지각을 사용하여 말씀을 밝히 깨닫고 환경의 여러 시험 속에서도 잘 견디며 선악을 구별하는 사람을 지칭합니다. 단단한 것도 먹을 수 있는, 어떤 역경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는 사람을 성숙한 신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영원한 대제사장 멜기세덱에 대해서 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예수에 대한 더 깊은 진리를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듣는 것이 너무나 둔해서 그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듣는 것이 너무나 둔한, 영적으로 둔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이큐가 낮은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학벌이 낮은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진리를 깨닫는 그 수준이 너무나 약하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예수 믿고 교회 나온 지 3년쯤 되었으면 이제는 가르치는 입장이 되어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10년, 20년 다녀도 10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똑같기만 하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마음이 답답해하시고, 아파하실 것인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영적인 깨달음과 성경 지식과 진보가 없고 유년주일학교 때나 중고등부 시절에 배운 지식, 또는 부모로부터 받은 지식에 머물러서 어린아이처럼 생 때 쓰고 삐죽거리고, 곧장 화를 내고, 자기 뜻대로 안되면 소리 지르는 이런 어린아이의 신앙을 여기서 이야기합니다. 성숙한 크리스천은 성장을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성장해야 합니까? 성숙에로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 한국은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회는 아닙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성숙한 교회에는 아직 미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고 성경공부를 하고 열심히 성장을 향하여 몸부림쳤으나 과연 성숙한 크리스천에 도달했는지 우리는 또 스스로 물어보게 됩니다. 성장입니다. 그 성장은 우리 주님의 분량까지, 주님의 지혜의 분량까지 성숙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Ⅱ. 본론
[1. 초보에서 벗어납시다]
우리는 어떻게 성장할 수 있으며 성숙한 크리스천이 될 수 있겠습니까? 6장 1절에 그 답이 나오고 있습니다. 첫째는 젖만 먹고 떼쓰는 식의 신앙 즉 그리스도의 진리의 기초단계에서 벗어나라고 하는 권면입니다. 1절에 나타나는 “버리고”라는 말은 진보를 뜻합니다. 버린다라는 말은 포기하고 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극복해 가라는 뜻입니다. 어려움을 뛰어 넘으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결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향한 진군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사고방식과 가치관과 우리의 삶의 터전을 고정시켜 놓는다면 믿음은 자라나지 않습니다. 변해야 합니다. 변할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성장할 결심이 있어야 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변화를 원하면서도 막상 자기 자신에게는 변화하기를 주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변화되기를 결심하셔야 합니다. 변화되기를 결심하지 않는 한 우리는 변화될 수 없습니다. 성장이라고 하는 것은 가만 있어도 성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껍질을 깨야만 성장이 가능한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모습을 버리지 않는 한 어른의 성숙한 옷을 입을 수 없습니다. 계속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가지면서 아무리 성숙한 신앙을 외쳐본들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치한 신앙의 모습을 스스로 버리도록 자신을 결단시켜야 합니다.
[2. 완전한 데로 나아가십시오]
2절 말씀을 보면 성장의 목표가 있습니다.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우리의 성장 목표는 성숙입니다.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는 것은 성숙한 데로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가을에 익은 곡식과 과일처럼 성숙한 사람은 보기가 좋습니다. 그리고 성숙한 사람은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줍니다. 성장하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괴롭힙니다. 그 사람의 시간을 뺏습니다. 그 사람의 관심을 자꾸 자기에게 끄집어들입니다.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언제나 남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남의 영적 유익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으로 탈바꿈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뛰어넘어야 할 여섯 가지 장벽, 즉 어린아이의 신앙에서부터 뛰어넘어야 할 여섯 가지 장벽을 성경에서는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 죽은 행실에 대한 회개입니다. 이 죽은 행실은 죽음을 가져왔던 나쁜 행실이었습니다. 나의 인격을 파괴했던 행실이었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이런 죄들을 짓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눈물을 흘리면서 이 죄를 심각하게 고백하며 가슴을 찢고 그리고 통회 자복을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다시 똑같은 죄를 반복하는데 있습니다. 똑같은 죄를 반복하면서 괴로워하며 고민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신앙의 어린아이의 모습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 단계를 벗어나라고 성경은 권면합니다. 똑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선을 행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미워할 시간이 없습니다. 전도하는 사람에게는 불평할 시간이 없습니다.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악을 저지를 수 있는 가능성이 점점 적어집니다. 그러므로 나의 모든 시간과 나의 모든 생각과 나의 모든 삶 전체가 선을 행하는 쪽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전도하는 데 생애를 보내십시오. 남을 도와주는 데 생애를 보내십시오. 그럴 때 우리는 죄를 지을 수 있는 확률이 점점 적어지며 똑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이 생깁니다. 이제 우리의 기도가 주여 이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이런 기도는 사라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 앞에 선을 행했던 귀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하나님께 보고할 수 있는 기도로 가득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우리가 극복해야 할 또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보면은 “그가 계신 것과 또한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한다” 고 말했습니다. 비가 오고 폭풍이 치고 먹구름이 친다 할지라도 태양은 존재하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먹구름 속에 은빛 광채가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연약한 신자들은 환난이 오면 하나님을 의심합니다. 그리고 모든 일이 잘되면 하나님을 섬깁니다. 이것은 어린아이의 신앙입니다. 우리의 신앙 속에 찾아오는 이 의심의 마귀를 없애야 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며 신앙 생활을 하면서 환경이 좋고 모든 것이 잘 되면 하나님을 잘 섬기지만 병이 오고 가정이 어려움에 부딪히고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의심이 생기고 절망하고 좌절하는 것 이것은 어린아이의 신앙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약해질 때 하나님도 약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약할 때 하나님은 더욱 강해집니다. 하나님을 계속 바라보고 어떤 일을 만나도, 어떤 절망도, 어떤 역경도, 어떤 고통이 나를 괴롭힌다 할지라도 신실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포기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세 번째, 세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세례들이라는 복수를 사용했는데 구약 유태인들의 전례 예식과 또 신약의 세례 등 여러 가지 종류의 세례에 관한 것들로 생각할 수도 있고, 물세례와 불세례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세례할 때 보면 이 세례를 분명히 알지 못하고 세례 받으시는 분이 요즘도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과거에 세례를 시원치 않게 받았다고 또 다시 세례를 새롭게 받아야 되겠다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는 시원찮다고 두 번 받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를 받는데 진리의 내용을 모르고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신앙 고백이 분명하지 않으면 세례를 안 받는 것이 옳습니다. 분명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이 있고 난 다음에 세례가 베풀어집니다. 그러므로 세례에 대한 갈등 속에 있는 사람은 아직도 어린 신자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라고 성경은 부탁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 안수에 관한 혼돈에서 벗어나라고 하는 권면입니다. 구약에서 짐승에게 안수를 합니다. 그래서 그 짐승을 죽였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전가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안수였습니다. 그러나 또 구약에 보면 아브라함이 자기 자손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를 합니다. 이것은 죄의 전가가 아니라 축복의 전가입니다. 그리고 직분을 임직할 때 안수를 합니다. 이 때도 안수를 씁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성령이 임할 때 안수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실 때도 안수한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안수에 대해서 더 이상 혼돈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확신과 영생과 천국에 대한 확실한 진리를 소유하고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불안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은 분명히 있습니다. 다시는 이 문제에 대해서 기초를 닦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는 영원한 심판에 대한 확실한 진리를 가지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일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여러분, 천국이 있지만 동시에 지옥이 있다고 하는 사실에도 우리는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현대인들은 지옥에 관한 설교를 하면 싫어합니다. “목사님 다른 설교는 다 해도 지옥에 관한 설교는 하지 마십시오. 그거 참 재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많은 목사님들이 지옥에 관한 설교를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인들이 다 떠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옥에 가는 설교를 해야 합니다. 지옥은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죽는 얘길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왜 지옥에 관한 설교를 좋아하지 않는가 하면 다 지옥 갈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 잠재 불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대한 불안이 있기 때문에 그 설교만 하지 말라 것입니다.
[3. 끝가지 진실하게 믿으십시오]
위로의 말씀이 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는 할 수 있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힘으로는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가능성과 방법과 구체적인 역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우리가 순종하고 그러한 방향으로 마음에 결심을 하면 이제 성숙한 신자로서의 성장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하고 난 다음에 4절에 들어가면 급격히 문장이 변합니다. 아주 무서운 경고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6장 4절입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참된 크리스천은 빛을 맛본 사람들입니다. 태초에 빛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빛이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믿는 자들에게 성령의 빛과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그에게 보여주십니다. 두 번째 참된 크리스천은 하늘의 은사를 맛보는 사람들입니다. 하늘에서 주는 평안과 하늘에서 주시는 기쁨과 하늘에서 주시는 자유와 그리고 수고하고 무거운 모든 죄짐과 죄의식을 벗어버리는 이 축복을 그는 맛볼 수가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이 이 하늘의 은사를 체험하는 크리스천들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 능력을 맛보고, 달고 오묘한 성경의 말씀을 밤새도록 눈물 흘리면서 읽어도 기쁨을 다할 수 없는 그 감격을 경험한 자가 크리스천입니다. 뿐만 아니라 내세의 능력을 맛본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참 재미있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천국을 오늘 내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이 크리스천들입니다. 우린 아직 천국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기가 천국입니다. 내 주 예수 모시고 사는 것이 초막이나 궁궐에 상관없이 바로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내세의 능력을 바로 오늘 현실에서부터 경험하는 사람들이 크리스천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경험하고 나서도 타락한 사람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성경구절은 성경의 난해 구절중의 하나입니다. 아주 여러 가지 해석이 많고 이것 때문에 많은 주경학자들이 고민을 많이 한 부분입니다. 제일 우리가 받아들이기 좋은 말씀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사함을 받을 수 없다는 말과 비교해서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 당시에 시대적 상황을 돌이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때가 바로 네로 황제를 비롯해서 무서운 박해가 크리스천들에게 임하던 때입니다. 그들이 성령을 체험하고 하나님을 믿고 신실하게 따르다가 이 무서운 박해와 잘못된 이단들에 빠져서 비참하게 최후를 마친 사람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이 부분이 기록된 것입니다. 또 이 부분은 그 다음의 성경과 연결시켜 보면 이런 사람들은 6절 후반부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고 수치를 당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사람이 그 말년에 하나님과 원수가 된 사람을 우리는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참 어쩔 수 없는 불행이 그들에게 있는 것을 봅니다. 초창기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잘 보냈는데 말년에는 완전히 마귀에게 사로잡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구약 성경에 많이 있고, 오늘 우리 주변에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처음 잘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끝까지 신실하게 잘 믿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시작도 중요하지만 끝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지금 잘 믿고 있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잘 믿지 않으면 이는 엄청난 멸망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을, 그 당시에 그 핍박과 이단의 모든 유혹 속에서 그런 경우들이 있었다고 하는 것을 미리 경고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경고입니다. 두 땅에 대한 비유가 나오고 있습니다. 땅에 비가 내립니다. 똑같은 비를 흡수하는데 한 땅은 채소를 생산하는 땅이 되었고 한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생산하는 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땅은 복 받은 땅이요, 한 땅은 저주받은 땅이 되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경고의 무서운 말씀이 있는 반면에 9절에 가면 또 한번 전환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9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사랑하는 자들이라는 말은 히브리서에 딱 한번 나오는 말입니다. 얼마나 소중한 말입니까? 무섭고 엄격한 말 뒤에 가장 사랑스러운 말이 그 뒤에 나왔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내가 너를 그처럼 사랑하지 않으면 너에게 그처럼 엄격한 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크리스소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실수하여 벌을 받고 슬퍼하는 것보다 차라리 나의 무서운 경고의 말을 듣는 것이 낫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실수해서 매 맞는 것이 낫습니까? 차라리 무서운 경고를 듣는 것이 낫습니까? 무서운 경고를 듣고 회개하는 것이 백 번 낫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받은 축복을 소홀히 여기지 않기를 부탁합니다. 축복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축복을 지키는 일입니다. 여러 가지 사소한 일로, 여러 가지 세속적인 일로, 여러 가지 개인감정으로 여러분이 받은 구원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 구원을 지켜 주십니다. 그러나 엄청난 배도의 길로 갈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 발견하게 됩니다. 10절에 보면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불의치 아니하사”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실 때 언제나 정확하게 심판하십니다. 어떤 때 예수 믿다 보면 하나님이 너무 하신다, 하나님이 내 사정을 알까? 하나님의 판단이 흐리신 것이 아닐까? 하나님도 부자를 좋아하시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도 권력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은 과연 역사를 주관하실까? 이렇게 세상이 험한 것을 보면서도 하나님은 어찌하여 그냥 놔두시는 것일까? 그러나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입니다. 한번도 그에게는 불의가 없었으며 잘못된 판단이 없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와 사랑으로 형제를 섬기는 것과 지금도 계속해서 형제를 섬기고 있는 것을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런 사랑의 권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장하라고, 어린아이의 신앙에서 탈피하라고, 무서운 배도의 길에 들어서지 말라고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그 잔을 마시고 축복의 길에서 계속 가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히브리서 기자는 두 가지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11절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이것을 새번역으로 보면 이렇게 쉽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 각 사람이 같은 열성을 끝까지 나타내어서 소망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열심을 가지고 부지런히 소망에 대한 확신을 끝까지 간직하십시오.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는 것이 바로 우리의 결론입니다. 도중에 포기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소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에 돌아올 때까지, 하나님의 지혜의 장성한 분량에 돌아가기까지 우리는 이 복음의 행진과 믿음의 행진을 계속 해야 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 결론은 12절 말씀입니다.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게으르지 말고 믿음과 인내로 약속된 것을 받은 사람들을 본 받으십시오. 여러분, 우리의 믿음의 행진은 나 혼자 걸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홀로 개척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이 그 길을 가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에는 믿음의 선진들, 허다한 구름처럼 둘러 싸 있는 믿음의 선배들을 그렇게 소개하면서 바라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악전고투 끝에, 험한 인생의 항로 끝에 항구에 도달한 배처럼 믿음의 승리를 한 사람을 바라보라고 오늘 우리에게 권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개척자가 아닙니다. 이미 주님이 가신 길을 뒤따라가고 있는 것이며 그리고 많은 순교자들과 믿음의 선배들이 뒤따라갔던 길들을 겸손히 우리가 뒤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숙으로 나아갑시다. 어린아이의 신앙을 벗어버립시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이여, 지금 우리가 어린아이의 신앙에서 몇 십 년 동안 헤매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탈바꿈 할 때가 된 줄로 믿습니다. 죽음에서 부활로 승리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도 옛 생활에서 벗어나 새 생활로 변화되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하용조/두란노서원선교회 원장이며, 온누리교회 담임목사이다. [광야의 삶은 축복이다],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라]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