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화랑유치원 교육의 회고(1)
설립자 김영호
지나온 자취를 회고하는 것은 있을 수 있긴 하지만, 질년(耋年)의 나이가 되니 가끔 석일(昔日)의 범사(凡事)들이 회억되기도 하였다. 운명이 특수하여 매우 바쁘게 생활해 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1942년 5월 9일에 출생하여 내남초등학교에서 1학년을 수료하고 월남분교(오릉초등학교)에 전학하여 열심히 공부하여 5년간 내내 성적이 1등이었고, 수석으로 졸업하면서 교육감표창을 받았다.
1955년에 경주중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1958년에 경주고등학교 입학시험에 9등으로 합격하여, 1961년 2월 14일에 경주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고교 3학년 때 폐결핵에 걸려 투병한다고 대학교 입학응시를 할 수 없었다. 일본에 계시는 숙부님이 보내주신 폐결핵 최신 치료제인 닛파스 칼슘, 네오 이스코친을 복용하고 스트렙토마이신 주사를 맞으면서 치료 하느라 몸은 여위었고, 얼굴은 약독에 의해 새카맣게 기미가 끼어서 몰골은 해골과 유사하였다.
그 때 5.16군사혁명 정부는 대학입학정원을 무조건 50% 줄였고, 1961년에 최초로 시행한 대학입학자격국가고사에 학과별로 응시하여 합격한 자(입학정원의 120%)만이 대학입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재학생도 국가가 시행하는 학사고시에 합격해야만 학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다.
당시 대학입학자격국가고시에 합격자는 일간지에 발표 되었는데, 재수생 포함하여 다수 합격자 순으로는 대구・경북에서 경주고는 76명이 합격하여 3위로 발표되었다.
대학입학자격국가고사에 합격은 하였으나, 투병 중에 살아나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입학준비공부도 할 수 없었고 최초의 객관식 출제에 대한 정보를 접하지 못하여 성적이 마땅하지 않아 서울지역의 상위권 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다.
경주고 특수반에서 10등 이내의 성적이면 서울대와 고려대, 연세대의 인기학과에 진학할 수 있었다. 당시 우수 대학입시합격자로는 서울대: 상대1명, 의대1명, 육사: 2명, 해사:1명, 고려대: 법대2명, 연세대: 법대2명, 해양대: 1명 등이며 대부분 인기대학에 진학하였다.
영남대학교 화학공학과 입학하여 ROTC과정을 마치고 1966년 2월 8일에 공학사 학위를 받고, 1월 17일에 결혼을 하였으며, 2월 20일에 예비역 육군소위로 임관되었다. 약 한 달 동안의 휴식 기간을 마치고 3월 19일에 육군포병학교에 입교하라는 소집통보를 받아 광주시에 소재하는 육군포병학교에 입교하어 3개월 동안의 초급장교교육과정을 이수하였다.
그 후 1주일 동안의 휴가를 마친 후 27사단 포병 259대대 C포대에 배치되었다. 전포대 보좌관, 관칙장교, 양송이재배사 관리장교, 전포대장, 대대사격지휘장교 등 보직을 거쳤다. 김신조 등 북한 무장간첩이 침투하여 복무기간이 3개월 연장되어 육군중위로 진급한 후 2년 3개월 만인 1968년 6월 30일부로 군복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청주비료공장, 울산정류공장, 나주비료공장 등이 건립되어 1960년 초반부터 공업화학시대가 사작 되었으나 군복무를 마치고 나니 사원모집이 이미 끝났고 신입사원 모집은 없었다. 롯데제과 입사시험에 합격은 하였으나, 경주상업고등학교 교사 임용 통보가 먼저 와서 가친(家親)의 명(命)에 따라 서울로 가지 못하고 29세 때인 1969년 3월 10일부로 부임(赴任)을 하게 되었다.
백부(伯父) 사후(后嗣)로 입양(入養)되어 4대(代) 봉제사(奉祭祀)를 맡아야 하는 주손(胄孫)으로써 객지에는 갈 수 없다는 말씀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월성중학교 3학년과 경주상업고등학교 3학년을 중등준교사 응용화학 자격증을 가지고 수학을 지도했기 때문에 상치교사였다. 이하우 교감선생님으로부터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중등교원양성소 수학과에 응시해 보라는 권유를 받고 응시하였더니 13:1이란 다소 어려운 경쟁이었으나 다행스럽게도 합격이 되어 소정의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증등 수학정교사(2급)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었다. 응시 기회를 알려주고 응시를 권유한 이하우 교감선생을 감사하게 생각하였다. 당시는 고교수학을 지도할 수 았는 수학정교사 자격증을 소지한 교사를 초빙하기 어려워서 포항여중, 문화고교 등의 학교애서도 초빙 연락이 있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그후 모교인 경주고등학교 교사초빙에 이력서를 제출하고 면접심사에 통과되어 합격하여 사무분장까지 받아 사직서를 제출하니, 재직학교에서 적극 만류하여 부임하지 못했다.
경주상업고등학교에서 후대를 받고 31세의 젊은 나이에 학생과장 보직에 임명되어 안정된 교직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학원에 진학하여 계속 공부를 하고 싶었다. 경주에서 교직생활을 하면서 대학원 공부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여, 1973년 3월 2일부로 서울시 종로구 종로5가 연지동에 소재하는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 수학담당교사로 자리를 옮겼다. 동국대학교 재단이사장이신 양가(養家) 외종숙어른의 특별한 배려에 의한 것이다.
3월 1일부로 동대사대부중 교사로 부임하라는 급한 통보를 받고 2월 27일 저녁에 경주상업고등학교 교장선생 저택에 가서 대학원 진학때문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사직하게 되어 죄송하다는 말을 드리면서 용서를 빌었다.
'사위지기자사(士爲知己者死)요 여위애기자용(女爲愛己者容)이라'. 즉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여인는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위하여 곱게 한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사죄의 말씀을 드렸던 것이다.
그해 2학기부터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하여 대학교수가 되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였다. 학교장의 배려로 1주에 두 번은 오후에 대학원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업무시간을 마친 다음에는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매일 2시간을 주6일은 학비마련과 주택구입 때의 은행대출금 상환을 위해 8년간 개인과외수업과 그룹과외 교사로 수학을 가르쳤다. 퇴근하여 밤 10시부터 이튼날 새벽 1시까지는 대학원 과제와 수학교과지도를 위해 자습하면서 무척 힘든 시간을 보냈다.
4년 만에 교육학석사와 이학석사 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다. 학과장 추천을 받아 동국대학교 교수 채용에 응시하였으나 여의치 못했다. 외종숙 이사장도 보직을 그만 두셨기 때문에 뜻을 이룰 수 없었다.
학생주임 보직을 맡아 1년이 지났을 때, 1979년(38세)에 서울의료보건고등학교(전신: 서울여자상업전수학교) 교감으로 초빙되어 자리를 옮겼다. 이 학교는 45학급에 학생수 2,700명의 거대한 고등학교로 문숙(門叔: 김일윤)이 경영하는 학교였다.
1980년 여름방학 때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중등교원 양성소 교감반에서 소정의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그 해 9월 7일부로 ‘중등학교 교감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어린 나이었다.
1981년 3월 1일부로 서라벌대학교(전신: 경주실업전문대학) 교수채용 공개경쟁에 지원하여 교수로 임용되어 유아교육과 초대학과장으로 보직 임명을 받아 다시 고향 경주 본제(本第)로 돌아오게 되었다, 1985년부터 교무처장 보직을 겸하면서 신설대학 발전을 위해 학사내규를 마련하고 교육과정 운영의 효율화를 위해 진성 노력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설립자의 국회의원 당선을 위하여 전교수들과 함께 노력하였다.
당시는 문교부장관이 교육학박사로써 유아교육에 국가적 관심을 가지고 유치원 신설과 보육시설을 장려하였다. 그래서 새로운 유아교육을 위한 이상적인 유치원을 설립해서 유아교육과 학생들의 견학과 교육실습에 도움을 주고자 하여 1985년 11월에 유치원 건축하가를 받아 착공하였다.
1986년 3월 15일 새화랑유치원을 준공하여 내외 귀빈을 모시고 개원식을 거행하게 되었고, 4월 1일에 제1회 120명의 입학식을 거행하였다. 1988년에 건물 제2동을 준공하여 5학급 190명을 인가받았다.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능가할 수 없다.” 말에 감명을 받아 국내외 학회 참가 및 각종 연수에 참여하여 배웠다.
1987년 계명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교육학과에 합격하여 1988년 3월 2일부터 3년간 교육과정을 수료하였다. 면학정진 했기 때문에 장학금을 받기도 하였고, 교육학회지와 영유아교육학회지, 계명대학교와 동국대학교 논문집 등에 논문을 발표하고 3학기 때 영어시업 통과 4학기에 제2외국(중국어) 시험을 통과하고, 외국 소재 대학에 연수를 마쳐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할 수 있는 규정에 맡게 준비하였다. 최종 졸업시험에 합격하여 박사학위 취득을 위한 논문을 발표하게 되었다. 1차, 2차, 3차심사와 마지막 면접시험에 통과하여 입학 4년만에 교육학박사를 취득할 수 있었다.
교육과정을 수료한 같은 전공의 입학 6,7,8년차 선배들이 7명 있었으으나 모두 한 두가지 학위규정을 충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위취득을 위한 논문을 발표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소 부끄럽긴 하지만 입학 4년만에 교육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것은 교육학과 개설 이후 처음이었다고 한다.
1988년 7월 21일부터 28일까지 국제문화재단이 주최하는 제10차 한국대학교수 미국연수단에 참가하여 조지타운대학교를 비롯한 몇 개 대학에서 연수를 받았고, 일본 요코하마국립대학교(1989), 오사카시립대학교(1997.1.28 - 2.2), 구주대학(1997.7.16 - 22), 호주 멜보른대학교(1994.7.16 - 7.26) 등에서 유아교육의 연수를 받았다.
[한국대학교수 미국연수기념(뉴욕)]- 1988. 7. 21-28
-앞에서 3번째 줄 왼쪽에서부터 9번째(회색정장 차림)-
특히 한국피아제연구회에 가입하여 오사카 소재 피아제연구소에서 유치원피아제교육실천 프로그램을 수료(1993.7.23 - 7.31)하였고, 이탈리아 Reggio Emilia Children Centre에서 1966년 10월 19일에서 31일까지 12일동안 ‘Reggio Emilia Approach’를 이수하였다.
미국 버클리대학교 로렌스 연구소에서 개발한 유아수학과학 프로그램(GEMS), 일본유년교육회에서 개발한 사이버드림 유아영어교육 프로그램 등을 이수하여 유치원현장교육에 적용하고 있다.
특히 ‘Reggio Emilia 접근법은 뉴스위크(News Week)지가 선택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유아교육체제라 하여 세계 여러나라의 유아교육과 교수, 유치원설립자 및 원장 등이 이수하기를 원하는 프로그램으로 알려 져서 한국피아제제연구회 소속 회원과 유치원장 및 일부 유아교육과 교수들이 1998년 10월 19일부터 10월 28일(9박10일) 동안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이 과정을 이수하였다.
이 접근법은 이탈리아의 교육개혁론자인 말라꾸찌가 죤 듀이, 피아제, 비고스키 등 세 학자의 이론을 접목하여 독특하게 개발한 유아교육체제이다. 유아들이 지식을 사회적으로 구성하면서 고등정신능력을 길러가는 학습방법으로 알려지고 있다.
5명의 유아가 지도교사와 함께, 주제선정을 위한 토론하기, 1차 표상하기, 시뮬이션하기, 대체물 이용하기, 경험하기, 2차표상하기, 확장하기, 심화하기, 확장 및 심화하기 등의 아홉 개의 상징화 주기를 거치면서 지식을 자유롭게 구성하는 접근법이다.
[레지오 에밀리아 연수단]- 이탈리아 밀라노 두오모 성당 앞
이 과정을 배우고 와서 새화랑유치원 교사들에게 전달 연수를 하여 유아들에게 지도하여 그 결과물을 분석해서 『레지오 에밀리아 접근법의 이론과 실제』라는 교육사례 중심의 책을 저술하였다. 서울 학지사에서 출판 즉시 절판되어 재판하였다. 레지오 에밀리아 접근법에 의해 교육한 최초의 교육사례집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 이 사실이 알려져서 진주대학교 개교 70주년 기념 특강을 비롯하여 경북교육청 유치원 교사 자격연수 과정과 울산, 대구 지역의 대학 등에서 초청 특강을 하였다.
2005년 7월 24일에서 28일까지 신요코하마 프린스 호텔 대회의실에서 일본유년교육회 주체 유아교욱자 대회에 참가하여, 레지오 에밀리아 접근법에 의한 ‘성덕대왕 신종 프로젝트’ 교육사례를 분석하여, "소집단 협동학습에서 다상징화 방법이 유아의 도식적 표상능력과 변화에 관한 관계 분석"이란 논문을 발표하여 유아들이 상징화주기를 거치면서 변화되고 있는 지식의 구성을 시각적으로 확인 하게 하였다. 2005년 8월 7일에서 11일까지 중국 위해시 예술유치원에서 "Piaget 교육이론 및 유아교육프로그램'이라는 주제를 발표하였고, 2006년 8월 19알부터 20일까지 한국경제인연합회에서 주최하는 제6차 아시아유아교육자 세미나에서 '아시아 공동번영을 위한 유아교육의 방향'이란 연구논문의 발표 및 2010년 6월 24일부터 30일까지 '중국 상해 아시아 유아교육자 교류회'에 참석하여 '한국 Piaget교육의 실천'이란 논문을 발표하면서 유아교육실천과 이론을 소개하여 아시아 유아교육계에 새화랑유치원을 널리 알렸던 것이다.
해마다 유치원운영계획과 교육사례집을 편찬하여 학부모님께 제공하면서 새화랑유치원의 교육모습을 공개하는 등 성력을 다해 보았다. 편찬한 책들은 다음과 같다(추후에 계속 게재).
레지오 에밀리아 시
레지오 에밀리아 연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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