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라이 지역(꽝응아이)은 어떤 곳이었나?
베트남에 대하여 관심이 가는 모든 지명을 잘 나타내 주고 있는 지도입니다. 북쪽 끝으로 사파,
서쪽으로 프랑스군이 대패하여 식민지를 포기한 디엔비엔푸, 하노이, 하이퐁, 하롱베이,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후에, 다낭, 마블 마운틴, 호이안, 미선, 꽝응아이, 뀌녕, 뚜이화,냐짱, 깜란, 판랑,
판티엣-무이네, 다랏, 사이공, 붕따우, 미토, 까마우까지 그 위치를 잘 보여 줍니다.
(필요하시면 가져다 쓰시기 바랍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202F140F4CB510CE85)
1966년 8월, 청룡부대는 "시련의 땅" 뚜이화(Tuy Hoa)를 떠나 꽝응아이(Quang Ngai) 성(省)의
추라이(Chu Lai) 지역으로 이동합니다. 먼저 성청이 있는 꽝응아이 시(市) 근처에 며칠
머물렀다가 할당된 전술지역으로 옮겨 갔습니다.
이곳 꽝응아이 성(省)의 북쪽 지역이 추라이 지역으로 불려진 것은 미해병대가 1965년에
다낭 항에 상륙하면서 다낭 공항을 지원하기 위하여 이곳 짜봉 강(Song Tra Bong) 하구의
둥꽛(Dung Quat) 만에 있는 작은 항구인 추라이(Chu Lai)에 또 다른 비행장을 건설하면서
"추라이 비행장"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우리가 이동하는 곳도 추라이 지역이라 불렀습니다.
(현재 이 "둥꽛" 경제특구에는 33만평에 이르는 두산중공업 공장이 들어서 있습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543821F4CB8F2844A)
(꽝응아이 성(省) 지도입니다. 맨 위에 추라이 비행장이 보이고 그 아래로 빈선(Binh So'n) 현(縣)과
선띤(So'n Tinh)현(縣)이 보입니다. 그 아래 꽝응아이(Quang Ngai) 시(市)가 있네요.)
전술지역은 꽝응아이 성(省)의 최북단에 있는 빈선(Huyen Binh So'n) 현(縣)과 빈선의 아래
선띤(Huyen So'n Tinh) 현(縣), 그리고 그 서쪽의 짜봉(Huyen Tra Bong)현(縣)입니다.
(베트남 문자의 o' 는 "어"로 발음됩니다. 그래서 '빈선' '선띤'이 현지 발음에 가깝습니다.)
청룡이 이동한 추라이 지역은 단순히 비행장을 보호하는 평범한 임무만이 있던 곳이 아닌
엄청난 배경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사실 꽝응아이 성(省)이 바로 베트남의 전(全)베트콩의
본거지(Stronghold)였습니다.
이 꽝응아이가 베트콩의 본거지가 된 배경은 오래되기도 했고 또 막강한 인물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844CD154CB950A310)
(쯩 딘; 張 定; Tru'o'ng Dinh ; 1820-1864)
그 첫째가 바로 "빈선 현"에서 태어난 "쯩 딘"이라는 인물입니다. 그는 1859년 프랑스가
베트남을 침공했을 때부터 자기 휘하의 지방군대를 조직하고 1862년 "뜨득" 왕이 프랑스와
체결한 남부 3개 성(省)의 식민지 할양을 왕명을 거스려 반대하면서 프랑스 군대에 대항하여
"게릴라"전투를 별였는데, 1864년 프랑스 군대에 포위를 당하여 퇴로가 없게 되자 자결했다고
합니다. 그 후 "판 보이 쩌우"를 비롯한 모든 베트남 독립 운동가들이 모두 그를 독립운동의
원조 영웅으로 받들어추앙했다고 합니다.
그 다음은 "팜 반 동(Pham Van Dong; 1906-2000)" 입니다. 꽝응아이 시내에서 가장 넓고
큰 길 이름이 "팜 반 동 길"입니다. 그는 호치민 휘하 제2인자로 사실상 베트남 전쟁과 협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한 인물입니다. 그의 고향이 바로 이 "꽝응아이"입니다.
(호치민은 베트남 전쟁이 시작된 1965년부터 병으로 누워 있다가 1969년에 사망. 호치민의
고향은 베트남 지도에서 목 부분 쯤에 해당하는 곳의 "응에 안-Nghe An"성(省)의 "낌 리엔
(Kim Lien)"이란 곳입니다.)
)
(베트콩 사령관 짠 반 짜 Tran Van Tra 1918-1996)
마지막 인물이 월남전 당시 월맹 정규군 중장이면서 "베트콩" 사령관으로 모든 베트콩 전투를
지휘하고 있었던 "짠 반 짜"입니다. 그의 고향이 바로 이 "꽝응아이"였습니다.
그는 1975년 소위 통일 이후 북쪽 출신과 비교해 남쪽 출신에 대한 너무 심한 차별과 홀대에
놀라고 실망하여 1982년에, 1968년 "구정 공세(Tet)" 때 하노이의 월맹 정치국이 얼마나
미군을 과소 평가하고 반면에 월맹군을 너무 과대평가한 오판으로 참패를 했다는 비판을 하여
숙청되고 종신 연금상태에서 죽었습니다.
청룡 2진의 한이 서려 있는 곳. 짜빈박, 푸억록, 짜빈동 전투를 치렀던 추라이 지역의 빈선과
선띤과 꽝응아이가 바로 이런 배경을 가진 베트콩의 본거지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대의 주민들은 어떤 한 사람도 그 당시에는 결코 양민이 아니었고, 전부
베트콩이라고 봐야 합니다. 어떤 주민도 그들의 가족 중의 한 사람이 베트콩이기 때문에
전투가 벌어지면 당연히 베트콩이 되는 겁니다. 양민은 절대로 없었습니다.
겉으로만 양민이었을 뿐 결코 그냥 양민은 아니었으며 베트콩만 있었을 뿐입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15733044CB70A716E)
(짜봉 강 위의 빈선 다리)
![](https://t1.daumcdn.net/cfile/blog/135733044CB70A726F)
(짜빈동 현장; 현재의 주소는 "Xom Don, Thu'o'ng Tho, Tinh Tho, So'n Tinh, Quang Ngai"
즉 꽝응아이 성, 선띤 군, 띤토 면, 토쭝 리, 도이짠입니다. 과거 베트콩이었던 렁의 오빠)
![](https://t1.daumcdn.net/cfile/blog/125733044CB70A7270)
(추라이 여단 본부 자리에서)
![](https://t1.daumcdn.net/cfile/blog/135733044CB70A7271)
(미군 전차 대대의 빈선 전투 사진)
우리는 바로 이런 곳에서 전투를 했던 것입니다. 양민은 없었던 그런 곳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