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양보와 롯의 선택
창세기 13:8-18절(22.1.16.오전)
미우라 아야코 여사는 일본의 유명한 여류작가로 그녀의 유명한 작품으로 빙점이 있습니다. 그녀는 작가로 유명하기 전에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고 있었습니다. 남편의 수입만으로는 먹고 살기 어려워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차렸습니다. 경제적인 자립을 이루고, 가게에 오는 손님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가게가 너무 잘돼 물건을 트럭으로 가져올 정도로 번창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분주히 일하는 아내를 안쓰럽게 여겨 “우리 가게가 이렇게 잘되는 것은 좋지만 주위 다른 가게들이 우리 때문에 안 되면 어떻게 하느냐” 하고 염려했습니다. 미우라 아야코 여사는 지금까지 그런 생각은 못했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때부터 그녀는 처음부터 가게에 많은 물건을 들어놓지 않았습니다. 손님이 물건을 찾으면 다른 가게로 가라고 했습니다. 장사는 전날처럼 잘되지 않았지만, 시간적인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틈틈이 펜을 들어 글을 쓴 것이 빙점이라는 작품입니다. 나만 잘살면 된다는 식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살기 위해서 이웃을 위해 양보하고,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을 보게 됩니다.
본문은 애굽에서 벧엘로 돌아온 아브라함과 롯이 목장 문제로 분가한 이야기입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제안에 따라 요단 온 지역을 택하여 소돔까지 이르게 되었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두 가지 약속을 듣고 헤브론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제단을 쌓게 됩니다.
아브라함과 롯은 왜 벧엘에서 살게 되었습니까? 가나안 땅에 찾아온 기간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그곳에서 어려움을 만났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을 가지고 돌아와 벧엘에서 양과 소를 치면서 더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양과 소가 많아졌습니다. 많은 양과 소로 인해서 벧엘의 목장은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좁은 목장으로 인해 아브라함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자주 다투었습니다.
13:7절을 보면 “아브라함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비좁은 목장 문제로 서로 다투고, 이렇게 다툰 모습을 주변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도 자주 보았다라는 것입니다. 원주민들은 목자들끼리 다투는 것을 보면서 아브라함과 롯이 다투는 것으로 인식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손가락질을 하면서 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왜 그래, 꼴좋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이주해 왔으면 싸우지 말고 잘 살아야지 하면서 비난을 했을 것입니다.
집안에서 가족이 다투면, 아무도 안 듣는 것 같아도, 말은 날개가 있어서 담을 넘어서 이웃이 듣고, 보게 됩니다. 잠언 20:3절에 “다툼을 멀리 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거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킨다”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6:5절에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난다” 했습니다. 다툼은 근본적으로 마귀적입니다. 다툼이 생기면, 어- 내가 미련한 행동을 하는구나, 내 마음이 부패해졌나보다, 욕심이 생겼나보다 자신을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생각할 때, 이런 식으로 살다가는 다툼은 반복적으로 발생할 것이고, 문제 해결은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에게나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다툼의 문제를 속히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선택한 문제 해결책은 롯과 헤어지는 분가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롯에게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좌우는 요단 동편과 요단 서편을 의미합니다. 분가는 평화적인 해결책이었습니다. 원만한 분가를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양보가 필요했습니다. 말만 하는 배려, 사랑, 용서, 친절은 의미가 없습니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실천이 동반될 때, 그 해결책은 감동을 주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양보는 롯에게 우선권을 줌으로 나타났습니다. 양보의 사전적인 의미는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여 자기의 주장이나 생각을 굽히고 그의 의견을 좇는 것을 말합니다. 또, 양보는 다른 사람에게 길이나 자리, 물건 따위를 내주고 물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한문으로 보면 양보는 겸손할 양자와 걸음 보입니다. 즉, 양보는 겸손하게 뒷걸음을 치며 물러가는 모습입니다.
롯에게 우선권을 준 아브라함의 양보는 나는 지금부터 그 어떤 것도 먼저 주장하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이해득실에 있어서 이익은 고사하고, 손해가 나도 감수하겠다는 자기희생과 헌신의 마음입니다. 이런 양보는 하나님의 마음이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십자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좋은 방향성을 제시해 줍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손해를 감수하고 양보할 수 있는 마음은 어디서 왔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잠언 28:25절에서는 “욕심이 많은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아마 아브라함은 왜 그동안 목자들이 싸우는 것을 그냥 두었을까? 내 마음속에 더 좋은 목장을 차지하고 싶은 욕심은 없었나? 롯을 미워하고 있었나? 객관적으로 반성해 보았다면, 어쩌면, 내 속에 욕심이 많구나, 이렇게 살면 안 되지,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데, 하나님의 인도로 가나안 땅까지 왔는데—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했을 것입니다.
물론 사업을 하고, 장사를 해서 성공하려면 주어진 환경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지지도 않고, 많은 권리금까지 지불하게 됩니다. 그 만큼 환경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롯에게 우선권을 줌으로 나는 최선이 아니라 차선이라도 좋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양보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선택입니다. 아무리 환경적으로 좋아도,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부족한 조카 롯을 위한 사랑의 배려이기도 합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먼저 우선권을 행사해서 좋은 땅을 선택했다면, 믿음이 부족한 롯은 낙심하고, 큰 상처를 입고, 하나님과 아브라함을 원망했을 것입니다. 이것을 잘 알고 있는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롯에서 양보함으로 믿음의 좋은 본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떻게 생긴 것입니까? 예배의 경험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예배란 하나님과 교제를 의미합니다. 교제가 강해지면 믿음도 강해지고, 교제가 약해지면 믿음도 약해집니다. 여러분도 이런 경험을 자주 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영적으로 깨어서 하나님과의 교제, 예배 생활을 잘 하게 되면, 기쁘고 즐겁고, 삶의 활기가 넘칩니다. 반면 예배 생활이 약해지면 기쁨과 즐거움은 사라지고, 삶의 의욕 대신, 근심과 염려, 좌절을 경험하게 됩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아브라함의 예배 생활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온 아브라함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예배하는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서 제단을 쌓았습니다. 이후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갔고, 그곳에서도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점점 남방으로 옮겨가다가 제단을 쌓았다는 말은 없고, 그 땅에 기근이 들자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리고 애굽으로 내려간 아브라함은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바로 앞에서 자기 부인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고, 바로로부터 양과 소, 나귀, 낙타, 노비까지 받는 엄청난 대접을 받았습니다. 바로가 사라를 취하려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집에 큰 재앙을 내렸습니다. 바로는 재앙의 원인을 알게 되었고, 아브라함을 불러 책망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부인을 누이라고 해서 내가 아내를 삼게 했느냐며 데려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전에 주었던 짐승까지 다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졸부가 되어, 가나안 땅, 벧엘로 돌아오게 됩니다.
왜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을 떠나 애굽까지 내려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아주 비겁하고 불신앙적인 행동을 하게 되었습니까? 그 원인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배 생활의 약화입니다. 창세기 12:9절을 보면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고 했는데, 여기서 ‘점점’이라는 말과 ‘옮겨갔더라’에서 ‘옮겨’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같은 말입니다. 이 말의 뜻은 뽑아내다, 잡아 뽑다, 제거하다 입니다. 똑같은 단어가 두 번 사용되었다는 것은 강조를 의미합니다. 무엇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아브라함의 삶 속에서 무엇인가 뽑혀지고, 제거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의 삶 속에서 서서히 뽑혀지고, 서서히 제거되고 있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전체 문맥을 생각할 때에 예배 생활입니다. 하나님께 제단을 쌓는 예배 생활이 점점 남방으로 내려갈수록 약화되어 가다가 결국 가나안 땅에 찾아온 기근으로 인해, 자기 생각대로 애굽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예배가 강해지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되지만, 예배가 약해지면 자기의 뜻대로 살게 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약해지면 낯선 환경을 두려워하게 되고, 문제를 만듭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교제가 강해지면, 낯선 환경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문제를 해결하게 됩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정상적인 교제, 예배 생활을 했었다면, 기근으로 인해 애굽까지 내려가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하고, 내려갔어도 자기 목숨을 위해서 부인을 누이라고 속이는 비겁한 행동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께 있다고 믿습니까? 그렇다면, 날마다 예배 생활을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애굽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 돌아온 아브라함이 깨달은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아- 내 뜻대로 살면 안되는구나, 예배하는 것이 내가 승리하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3-4절을 보면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을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이곳에서 처음 신앙을 회복하고, 감격적인 마음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자신의 불신앙을 회개했을 것입니다.
예배가 회복되자, 아브라함은 롯에게 크게 양보할 수 있었고, 복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는 것이 복이 된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창세기 14장을 보면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돔 전쟁으로 인해 아브라함이 잡혀 간 포로들을 구출하고, 전리품을 찾아온 적이 있었을 때, 소돔 왕이 아브라함에게 다시 찾아온 전리품을 다 가지라고 말하자, 소돔 왕을 향해서 “천지의 주재이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라함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에 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고 하면서 그 많은 재물을 거절합니다.
이런 단호한 믿음의 태도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 복이라는 사실이고,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복이 된다는 믿음을 고백합니다. 이런 믿음은 예배 생활을 통해서 옵니다. 우리가 예배자로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필요성을 깨달으면 예배를 드리지 말라고 해도 드리게 됩니다. 예배와 다른 것들과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예배의 가치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브라함과 함께 예배를 드린 것 같은 롯은 하나님을 온전히 만나지 못한 사람이었을 알게 됩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양보할 때, 성숙한 신앙을 가졌다면, 삼촌, 아닙니다. 먼저 삼촌께서 좋은 땅을 선택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인도하시고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롯은 이기적으로 생각했고, 결국 탐욕의 마음으로 요단을 선택합니다. 10-11절을 보면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을 예배의 성공자로 말한다면 롯은 예배의 실패자입니다. 예배에 실패한 자의 길은 눈에 좋은 대로 살아가는 세속의 길로 나아갑니다. 롯은 계속해서 세속의 길로 내려가게 되고, 소돔까지 내려가 살게 됩니다. 13절에는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다고 말합니다. 결국 소돔과 고모라가 유황불에 망할 때에 롯은 두 딸과 함께 겨우 살아나게 됩니다. 탐욕을 선택한 인생의 결과입니다. 예배에 실패한 인생의 모습입니다.
롯과 분가한 아브라함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나타나 축복을 약속합니다. 14-17절을 보면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또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라.” 또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두 가지 축복은 땅과 자손입니다. 땅과 자손에 대한 축복은 하나님이 주셔야 합니다.
또 18절을 보면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브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고 했습니다. 헤브론이라는 말은 연합, 동맹입니다. 이 이름에서 느끼는 것은 축복은 하나님과의 연합, 동맹이며, 그 시작은 예배를 드리는 일임을 깨닫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아브라함의 양보와 롯의 선택에서 있어서 그 핵심은 예배 생활이라고 봅니다. 예배자가 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양보하지만, 롯은 탐욕으로 요단과 소돔을 선택합니다. 그 결과 실패자가 되었습니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예배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의 시간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예배의 성공이 인생의 성공임을 믿고, 날마다 예배자로 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