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에의 심리학
따뜻한 입김마저 얼게 하는 차가운 삶을 견딘다, 날아오른다
박형준의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는 성에의 시집, 서리의 시집이다. 현실의 온도가 늘 빙점 저 아래로 떨어져 있으니, 박형준의 화자들이 내뿜는 입김은 서리나 성에가 될 수밖에 없다.
어머니에 대한 연민은 세상의 모든 약한 것들에 대한 연대감으로 이어져 잔잔한 목소리로 부르는 내성적인 노래들은 버젓이 민중시로 읽는다
앞서 연이어 살핀 고정희 김남주 정지원은, 그 궁극적 정향(定向)과 무게중심 그리고 미적 전술에서는 서로 조금씩 다를망정, 좀더 살 만한 세상의 도래를 앞당기려는 공동체적 노력에 시가 앞장서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시인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눈길이 머무는 곳은 흔히 ‘우리’나 ‘그들’ 같은 집단적 범주였다.
오늘 읽을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2002년. 이하 ‘물속까지 잎사귀’)의 시인 박형준(39)은 시에 대한 생각이 이들과 사뭇 다르다. 그의 눈길은, 앞의 세 시인들과 달리, 대체로 ‘나(의 내적 상태)’나 ‘그(녀)(와의 사적 교감)’ 같은 개별적 범주에 멎는다. 요컨대 박형준의 시 세계는 내성적이고 실존적이다.
그런데도 막상 ‘물속까지 잎사귀’를 끝까지 읽고 나서 겪는 정조(情操)는 지난 세 주간의 시집 산책 연장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세상은 비참하다는 판단, 그 세상으로부터 비상(飛翔)하고 싶다는 욕구가 그 정조의 바탕에 깔려 있다.
김남주에서 박형준으로 가는 길은 까마득히 멀어 보이지만, 김남주에서 정지원으로 가는 길이나 정지원에서 박형준으로 가는 길은 한 달음이면 될 것 같다.
전혀 달라 보이는 이들의 시 세계가 깊숙한 곳에서 공유하고 있는 비극적 세계인식과 탈바꿈의 욕망은 사람들의 정서적 지적 생김생김이 인류라는 종(種)의 가족유사성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렵다는 증거처럼도 보인다.
‘물속까지 잎사귀’에서 독자들의 마음을 거듭 뭉클하게 하는 것은, 더 나아가 더러 울적하게 하기도 하는 것은, 화자들이 어머니와 맺고 있는 정서적 연대의 질김이다.
그 연대는, 일차적으로, 늙어 가는 어미와 커 가는 자식이 자연스럽게 맺는 생물적 연대이기도 하지만, 자식의 궁핍과 무력(無力)이라는 맥락을 통해 한층 더 강화되는 사회(심리)적 연대이기도 하다.
그 어머니는 “팔순을 내다보면서부터/ 손바닥으로 방을 닦”(‘방바닥에 떨어진 머리칼’)거나, “잠결에 앓는 소리를 하며/ 무릎을 만진”(‘바닥에 어머니가 주무신다’)다. 그 머리카락과 아픈 무릎이 화자를 어머니에게 굳게 묶는다.
‘방바닥에 떨어진 머리칼’에서, “어머니의 머리카락은 하얗고/ 내 머리칼을 짧다.” 방문객이라고는 어머니뿐인 듯한 화자의 방에 이 두 사람말고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이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정체불명의 것도 있다/ 빗자루로 아무리 쓸어내도 방바닥에는/ 어머니와 내 것이 아닌/ 흔적이 떨어져 있다.” 화자는 그걸 골똘히 보고 있다가 이내 생각한다. “어머니의 지문이 다 닳아져/ 우리 둘 외의 다른 머리칼로 변하게 아닐까”, “한 달에 한 번 다녀가실 때마다/ 못난 자식을 두고 가는 슬픔이/ 방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래서 “버스정류장 앞에서 나는 그녀를 보낼 때마다/ 이것이 마지막으로 보는 게 아닐까/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을 쓸어보게 된다.” 화자가 ‘어머니와 내 것이 아닌 정체불명의 흔적’을 ‘못난 자식을 두고 가는 (어머니의) 슬픔’으로 여기는 것은 사적 감정이지만, 화자와 어머니가 서로에게 느끼는 (듯한) 슬픔은 모든 사회적 연대의 내면적 시발점인 측은지심이라 할 만하다. (지나는 길에, 박형준의 ‘흔적’이 우리가 다섯 주 전 이진명을 읽으며 주목한 ‘무늬’와 닮았다는 것을 적어두기로 하자.)
‘바닥에 어머니가 주무신다’에서는 어머니가 아들 옆에서 자고 있다. 이 모자는 ‘방바닥에 떨어진 머리칼’의 모자와 같은 사람들인 듯하다. “생활이 되지 않는 것을 찾아” 밤늦게까지 눈을 뜨고 앉아 있는 아들이 잠자는 어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 어머니는 “듬성듬성 머리칼이 빠진 숱 없는 여인”이다.
그 어머니가 잠결에 앓는 소리를 하며 무릎을 만지는 것을 보고, 화자는 깨닫는다. “들어온다, 삶이란/ 조금씩 무릎이 아파지는 것,/ 가장 가까운 사람의 무릎을/ 뻑뻑하게 하는 것이다./ 이미 저 여인은 무릎이 비어있다.” 자식이 자라는 과정은 곧 어미가 빈 깍지가 되어 가는 과정인 것이다.
해가 중천에 왔을 즈음 화자가 깨어보니, 어머니는 벌써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아들의 거처를 떠났다. 화자의 머리맡에는 “일제시대 언문체”의 편지가 한 장 놓여 있다. “어머니가 너잠자는데 깨수업서 그양 간다 밥잘먹어라 건강이 솟애내고 힘이 있다.”
이 ‘언문체 편지’에서도 자식의 밥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드러나 있지만, ‘물속까지 잎사귀’의 화자들을 어머니에게 이어주는 끈은, 방바닥의 낯선 머리카락이나 어머니의 아픈 무릎 못지않게, 밥의 기억이다.
“어머니는 겨울밤이면 무덤 같은/ 밥그릇을 아랫목에 파묻어두었습니다/ 내 어린 발은/ 따뜻한 무덤을 향해/ 자꾸만 뻗어나가곤 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배고픔보다 간절한 것이/ 기다림이라는 듯이/ 달그락달그락 하는 밥그릇을/ 더 아랫목 깊숙이 파묻었습니다”(‘해당화’). 보온밥통이 없던 시절, 밥이 식지 않도록 밥그릇을 이불로 덮어 아랫목에 두던 어머니들의 지혜를 요즘의 젊은 독자들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밥그릇은 화자의 “발이 자라나는 만큼/ 아랫목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고, “쫓길 데가 없어진 밥그릇은/ 어느날부터 보이지 않았”으며, “봄이 되자 나는 밥그릇에 대한/ 미련이 사라졌”지만, 다시 말해 화자는 이미 어른이 되어있었지만, “세상은 쉽게 시골 소년에게 열리지 않았”다.
해당화꽃 그늘 속에 늙은 어머니를 배치하고 있는 이 시의 후반부에서, 화자는 “사라졌던 밥그릇은 어머니의 가슴속에/ 묻혀가고 있었던 것”을 깨닫는다.
‘물속까지 잎사귀’의 공간 속에서 어머니는 가난하고 예사로운 민중에 속한다. 그에겐 자식 걱정이나 식구 생각이 앞설 뿐 별다른 사회의식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이룬 것이 사회이고 그런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것이 역사라는 사실도 엄연하다.
이 시집의 화자들이 어머니에게 건네는 애틋한 눈길은 어머니와 비슷한, 또는 형편이 더 어려운 다른 여성들에게로 번져나간다. 그 여성들은 “밥 한 그릇을 머리에 쓴 수건에다 싸고 있는/ 젊은 아낙”(‘역전 뒤 식당에서 만난 여인’)이기도 하고, “주름살에 가린 쑥 들어간 눈”을 하고 “한쪽 다리를 의자에 올린 채 앉아” “사람을 쬐는”(‘11월’) 늙은 여인이기도 하다.
사람을 쬐는!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에 대한 쓰린 연민과 가책이 시인의 눈길을 그와 비슷한 처지의 외롭고 어려운 사람들에게까지 향하게 하는 것이다. 세상의 약한 것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은 담담하고 그것들을 그리는 화자의 목소리는 잔잔하지만, 그 담담함과 잔잔함에 은근히 배인 연민과 연대는 이 시편들을 버젓한 ‘민중시’로 만든다.
‘얼음장 위의 차가운 불꽃’을 비롯해 ‘물속까지 잎사귀’에는 얼음의 이미지, 하얀색의 이미지를 걸친 작품이 꽤 보인다. 그 얼음과 하양은 더러 불이나 열이나 빛과 버무려지거나 이웃한다.
나는 그 얼음에서 성에나 서리를 떠올린다. 이 시집 화자들의 따스한 마음자리와 현실적 삶의 차가움이 만나 이뤄진 결빙 말이다. 현실의 온도가 늘 빙점 저 아래로 떨어져 있으니, 박형준의 화자들이 내뿜는 입김은 서리나 성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들 눈에 비친 세상은 스산하다. 물물의 풍경까지 그러하니, 그들의 꿈에 들어오는 전원조차 삭막한 전원이다. “공기마저도 아픈 산정의,/ 마른풀 한줌이 육체의 전부인 땅./ 골짜기 아래로 조그만 마을이 보이고/ 웅덩이에 겨우 바지를 적실 만한 강이 흐르고 있었다”(‘ 잠 속에 포도나무가’).
살모사와 얼룩동사리 피차간의 죽고 죽임을 섬뜩하게 그려내며 화자의 죽음 충동을 내비치고 있는 ‘성(城)에서 1999’라는 작품 역시, 구약성서로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여러 겹의 이미지들에도 불구하고, 실존적 극지(極地)의 절망적 풍경을 보여준다. 표제의 연대가 상징하는 세기말의 땅거미 속에서, 생은 처절한 만큼이나 지긋지긋하다.
소멸에 대해 이야기하겠다는 선언을 첫 시집의 표제로 삼은 시인답게, 이 시집에서도 소멸(과 쇠락)에 대한 미적 탐구는 의연하다. 특히 “그루터기는 죽은 자가 쉬는 곳”이라는 오슬오슬한 단언으로 시작하는 ‘거미’는 소멸과 쇠락을 예외적인 아름다움으로 승화한 시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능구렁이 울음소리’ 같은 작품에서 엿보이는 미당의 그림자까지 포함해, ‘물속까지 잎사귀’는 아리따운 시집이다. 한 화자는 “심연을 잃고/ 물 밖에 떨어진 잎사귀/ 그게 나다”(‘폭풍의 날개’)라며 자조하고 있으나, 새나 사닥다리나 달 같은 것으로 상징되는 비상의 욕망은 이 시가 배치된 제4부에서 외려 가장 힘차다. 날아라 시인이여!
▲ 거미
그루터기는 죽은 자가 쉬는 곳,
아침 이슬에 젖은 거미가
숲을 뚫고 오는 늦가을 빛을 본다,
거미는 어둠 속에서 줄에 매달려 사는 삶을 잘도 참아왔다
그래, 처마 끝같이 사위어 가는
높은 나뭇가지에 올라가
젖은 태양을 바라보며 죽자.
늙은 거미는 추위가 오는 것을 느끼며,
가만히 줄을 흔든다.
가물거리는 햇빛에 타죽기 위해
나뭇가지와 나뭇가지 사이를 미친 듯이 건너뛰는
수천의 거미떼들이 떨어진다.
늙은 거미는 줄에 걸린 이슬 속에서
황홀을 본다, 숲을 뚫고 새어들어 오는
가느다란 가을빛.
일순 머리를 치켜들고 거미는
설움으로 까맣게 타서 죽는다.
아침에 한줌의 불꽃이 사그라지고
죽은 자가 그루터기에서 쉰다.
글: 고종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