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삶의 균형 더블 라이프
데이비드 히넌 지음/박현 옮김
영진닷컴/2004년 1월/310쪽
▣ 저 자 데이비드 히넌
히넌은 윌리엄&메리 대학에서 경제학 학사 학위를, 컬럼비아 대학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국제비즈니스 전공)를 받았으며, 펜실베이니아 대학 훠턴스쿨에서 국제비즈니스와 응용경제학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훠턴스쿨과 컬럼비아 대학 경영대학원 교수로 재임했으며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슬론 매니지먼트 리뷰」「월스트리트저널」「뉴욕타임스」, 그리고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 등 다양한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또한 홍콩에 기반을 둔 다국적기업인 자딘 매디슨의 북미 지주회사인 테오 H. 데이비스 사의 CEO, 하와이대 경영대학원 학장을 역임했다. 현재 그는 20억 달러 이상의 자산을 보유한 미국 최대의 부동산회사인 에스테이트 오브 제임스 캠벨의 자금운용이사로 재임 중이다. 주요 저서로 『위대한 이인자』『새로운 기업 전선』『재연합된 미국』 등이 있다.
▣ 역 자 박현
1992년 서울대학교 서어서문학과를 졸업했으며, 2001년 서강대학교 경제대학원을 졸업했다. 1992년 「서울경제」 신문 기자를 거쳐, 1999년에는 시사주간지 「한겨레21」 경제 담당 기자를 지냈으며, 2000년에는 벤처전문 주간지 「dot21」(현 「Economy21」) 창간 작업에 참여했다. 1994년부터 「한겨레신문」의 사회부, 국제부를 거쳐 현재 경제부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공저로 『전환기의 세계 IT 산업과 벤처캐피털』이 있다.
▣ Short Summary
경제학 교수였으며 현재 미국 최대 부동산 회사의 자금운용 이사로 성공적인 더블 라이프를 이룩했던 저자는 일과 삶이 균형을 이루는 명확한 틀을 제시함으로써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가르쳐준다. 사회적으로 성공하면서 자신의 관심사도 살려 취미 또한 철저히 즐기는, 나아가 그 취미를 또 하나의 즐거운 직업으로 만든 이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또 성공적인 더블 라이프를 이루는 공통적인 포인트를 20가지로 정리해 놓았다.
▣ 차 례
제1장 내 인생의 행복을 위한 더블 라이프
제2장 윈스턴 처칠 - 붓을 든 수상
제3장 오가 노리오 - 두 개의 모자를 쓴 마에스트로
제4장 샐리 라이드 - 우주에서 웹 공간까지 탐험하는 여전사
제5장 론 켄트와 처크 왓슨 - 예술의 낙원을 이룬 비즈니스맨
제6장 테스 게리슨 - 소설가로 변신한 메디컬 닥터
제7장 래리 스몰 - 금융인, 박물관장 그리고 기타리스트
제8장 짐 울픈손 - 세계를 위한 은행가
제9장 호세 리살 - 필리핀의 횃불
제10장 토머스 린치 - 죽음을 위한 소네트
맺음글 - 성공적인 또 다른 삶을 위한 20가지 핵심 포인트
일과 삶의 균형 더블 라이프
데이비드 히넌 지음/박현 옮김
영진닷컴/2004년 1월/310쪽/11,000원
내 인생의 행복을 위한 더블 라이프
20세기 프랑스의 해양 탐험가로 유명한 자크 쿠스토는 젊은 시절 해군항해사가 되고 싶었으나 치명적인 교통사고로 새로운 길을 선택해야만 했다. 그는 부러진 팔을 단련시키기 위해 26세에 수영을 시작했고, 그 때문에 바다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수 년이 지난 뒤 쿠스토는 선원, 탐험가, 발명가, 베스트셀러 작가, 아카데미상 수상 영화제작자, 환경운동가, 사업가 등 다양한 직업을 갖게 되었다. 지금도 쿠스토의 다양한 삶은 오직 하나의 직업에만 충실할 것을 가르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이해되지 않는다.
이제 직업은 수많은 경험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몇몇 현명한 이들은 일과 삶이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수많은 잡지 기사들과 자기계발서들은 일과 삶의 절충점을 찾아가고 있다. 이제 직업과 열정의 대상 - 본업과 취미 - 사이의 구분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일뿐만 아니라 다양한 관심사도 함께 만족시키겠다는 목표는 언제든 가능하다. 더블 라이프에 관한 탐구는 단 하나의 직업에 충실해야 한다는 오래된 믿음에 대한 도전이었다. 왜 사람들은 과거의 전통적인 성공가도를 버리고 자신들의 제1의 직업에 충실하지 않게 되었을까? 그들 대부분은 "이렇게 하면 내 삶이 좀더 충만했을 텐데" 하고 나중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인 경우가 많다.
더블 라이프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인 천재들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 책은 어떤 사람도 더블 라이프를 만들 수 있다는 관점에서 시작한다. 누구나 새로운 고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상상력과 본능적 욕구, 그리고 그 과정을 돕기 위한 몇 가지 유용한 도구들만 있으면 된다.
신경제(New Economy)는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최근 르네상스의 원인이자 결과이다. 긍정적 측면에서 보자면 신경제는 많은 이들의 삶을 풍요롭게 만든 기술 혁신을 가져왔다. 그러나 정보시대는 부정적 측면도 갖고 있다. 즉, 사람들이 모두 일에 얽매여 살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가치 전환에 관해서는 경영전문가인 피터 드러커가 가장 명료하게 설명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더블 라이프에서 개성과 감흥을 찾도록 권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직업에서 정열을 소진해 기진맥진하고 지루해하기 전에 미리 새로운 관심사를 개발하라고 제안했다.
과거의 규칙은 더 이상 맞지 않다.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는 것은 수명과 아무런 상관 관계도 없다. 생명의 연장은 모든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을 설계할 기회를 제공한다. 이는 미리미리 관심사를 결정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기본 원칙을 세우라는 것을 의미한다. 인생에서 항상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이들은 무엇이 인생을 즐겁게 만드는지를 알고 있다. 그들은 숨겨둔 꿈을 펼침으로써 즐거움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많은 사람들은 직장에서부터 더블 라이프를 시작한다. 이것은 종업원뿐만 아니라 고용주에게도 이익이 될 수 있다. 진화론적 패러다임이 작용하는 경제시대에서 재능은 매우 중요한 것이며, 유능한 지도자들은 인간의 창의성을 질식시키는 게 아니라 발산시키는 기업 문화를 형성하려고 노력한다. 마이크로 소프트, 제너럴 일렉트릭, 그리고 시스코 시스템스 같은 영리한 조직들은 사람들이 또 다른 취미를 갖게 되면 기업의 따분함과 지루함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더블 라이프에 대해 고민한다. 조직은 짧은 기간 동안이라면 동조하겠지만 그들이 다른 분야에 더 흥미를 보이면 궁극적으로 불편해한다. 모든 조직에는 그 조직을 지배하는 독특한 문화가 있다. 르네상스적 인간들은 이를 뛰어넘고 통제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물론 모든 사람이 더블 라이프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될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는 불편한 길이 될 수도 있다. 영혼이 건강한 사람들은 종종 색다른 방식으로 삶에 대한 음미 방법을 발견한다. 그들은 또 다른 삶에 대한 도전을 행복에 관한 리트머스 테스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자크 쿠스토처럼 부유하고 유명해진다면 그것을 받아들이면 된다. 그러나 그들이 기대했던 것만큼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좀더 즐겁게 사는 방법을 발견한 것이다.
윈스턴 처칠 - 붓을 든 수상
윈스턴 처칠은 작가, 예술가, 연설가, 군인, 정치가 등등 이 모든 것 이상이었다. 처칠은 일 외의 다른 분야에서도 성공을 거둔 이상적인 개성의 소유자였다. 그는 폭넓은 분야에서 자신의 재능을 계발해나갔다. 그는 글쓰기로 부와 명성을 얻었고, 대중 강연을 통해 국내외에서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그림 그리기를 통해 공무의 중압감을 덜어냈다. 그는 "직업과 취미는 서로 이득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직접 보여준 사람이다.
윈스턴 레오나드 스펜서 처칠은 1874년 11월 30일 영국 옥스퍼드셔의 블렌하임 궁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랜돌프 처칠 경은 말버러 공작의 후손으로서 토리 당 정치가였다. 그리고 처칠의 어머니 제롬은 강인하고 성공한 뉴욕의 금융가이자 신문사 사주의 딸로, 아름다운 사교계의 명사였다. 원기 왕성하고 반항아 기질이 있던 키 작고 붉은 얼굴의 처칠은 공부에서 흥미를 찾지 못했다. 그는 어떤 종류의 필기 시험도 통과하지 못한 채 학교를 떠났으며, 세 번의 시도 끝에 가까스로 샌드 허스트에 있는 왕립군사학교(현재의 왕립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다. 처칠은 군대에서 군인과 글쓰기를 함께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25세에 쿠바와 인도, 수단에서 장교이자 종군 기자로 활동했다. 나중에 그는 보어 전쟁에서 보어인들의 포로가 됐으나 국경에서 약 48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적의 영토에서 대탈출을 감행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영국 군대를 지휘했으며 전쟁 영웅으로 귀국했다.
군대 생활의 단조로움에 싫증이 난 그는 책읽기에 의욕적으로 몰두했다. 그는 천천히 언어 능력을 계발했으며, 파트타임 저널리스트로 전선에서 생생한 기사들을 보냈다. 그는 1898년에 두 달 동안 하루 다섯 시간씩 글을 써서 인도 북서 지방에서의 전투를 묘사한 그의 첫 책 『말라칸드의 야전군 이야기』를 완성했다. 그 책은 호평을 받았고, 9개월 동안 8500권이 팔렸다. 스물여섯의 나이에 그는 글쓰기를 통해 1만 파운드라는 상당한 밑천을 모았다. 이후 1899년 군대에서 퇴역해 다음 해 보수당 하원의원으로 당선된 그는 60여 년 동안 공직에 몸담았다. 내무장관, 재무장관, 통상장관, 그리고 국방장관 등 국가의 가장 위대한 장관직들을 수행했다. 영국의 수상들 중 독특하게도 처칠은 당적을 두 번이나 바꿨다.
세계대전 초창기에 해군장관이었던 그는 갈리폴리 작전의 실패로 실각했다. 그 다음 20년간 그는 공직을 떠나 있었으나 많은 저술과 강연을 시작하면서 다시 문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작가로 활동하면서 그는 정치적으로 유랑 생활(특히 1922년에서 1939년까지)을 했음에도 대중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 술과 시가 같은 취미에도 불구하고 처칠의 글쓰기에 대한 강한 애착은 결코 약해지지 않았다. 모두들 그렇겠지만 그는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더블 라이프를 택한 부분도 있다. 대부분 영국 상류층 정치가와는 달리 처칠은 부자가 아니었다. 그는 낭비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지원하고, 가족을 부양하며, 정계에서 계속 활동하기 위해서 상당한 돈을 벌어야 했다. 게다가 그는 미국 주식시장에 많은 돈을 투자하고 있었는데, 1929년 대공황으로 모든 것을 날려버렸다. 결과적으로 처칠은 항상 돈이 부족했다. 작가로서의 두 번째 삶은 처칠에게 재정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처칠은 글 쓰는 것 외에도 대중 연설가로서의 명성을 얻고 싶어했다. 그는 "연설의 달인이 되는 것은 내 평생의 야망이었다."고 말했다. 연설 장애와 즉석 연설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처칠은 놀랄 만한 기억력과 비범한 영어 구사력을 이용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스가 유럽 대륙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던 1930년대 말, 그는 고립된 광야에서 외치는 외로운 목소리로 연설했다. 1940년 5월, 새로 선출된 수상의 "피와 수고와 눈물, 그리고 땀방울"이라는 한 구절은 하원과 낙심한 국민들을 각성시켰다(처칠은 당시 신임 수상으로서 의회에서 행한 최초의 연설에서 "나는 피와 수고와 눈물과 땀방울 이외에는 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말했으며, 만장일치의 결과를 얻었다).
처칠의 재능은 또 다른 분야에서도 나타났다. 1915년, 41세의 처칠은 동생의 아내가 수채화를 그리는 것을 보고 자신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몇 년 동안 폼페이의 유적부터 암스테르담의 운하와 이탈리아의 알프스까지 많은 이국적 경치를 그렸다. 그는 정물화, 꽃 그림, 실내화들처럼 대부분 영국을 배경으로 한 풍경화를 그렸다. 저술이나 연설과는 달리 그는 정치적 경력이나 돈을 벌기 위해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다. 몇 년 동안 그는 자신의 작품들을 기증했으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고무시키기 위해서 예술을 활용했다.
그가 취미삼아 그림을 그린 지 30년 정도 지난 뒤, 처칠은 한 친구에게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나는 살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일로 생기는 긴장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처칠은 『취미로 그림 그리기』에서 더블 라이프를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마흔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붓과 팔레트의 매력을 느껴보라고 권했다. 아마추어이긴 했지만 그의 그림들은 주목 받았다. 1921년 "찰스 모린"이라는 이름으로 파리 전시회에 출품한 5점의 작품 중 4점이나 팔렸다. 1947년 "미스터 윈터"라는 이름으로 내놓았던 2점의 그림은 왕립미술아카데미에 인수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윈스턴은 아카데미의 명예회원으로 특별 대우를 받았다.
그는 폴로에서부터 도박, 사냥, 해외여행, 그리고 심지어 벽돌쌓기까지 많은 것들을 즐겼다. 그에게 변화는 최고의 "만능열쇠"였다. 그는 "마음에서 지친 부위는 다른 부위들을 이용해 회복될 수 있다."고 했다. "일상적인 관심 분야에 비추는 등불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새로운 관심 분야에 등불을 비춰야 한다." 비행도 처칠의 여러 관심사 중 하나였다. 그는 비행을 두려워하면서도 30대 후반에 비행을 시작해 하루에 열 번까지 비행을 하려고 했다.
처칠은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없는 것은 짧은 인생 외에는 제약 조건이 없다."고도 했다. 그는 나이가 들어 기력이 떨어질 때까지 실제로 가능한 모든 경험들을 시험했다. 의심할 바 없이 그의 알코올과 시가에 대한 오랜 애착과 비만(172센티미터의 키에 몸무게 95킬로그램의 땅딸막한 체격), 그리고 운동에 대한 경멸("마음의 에너지는 육체의 에너지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로 그는 평생 뇌졸중, 고혈압, 폐렴, 그리고 다른 만성적 질병들과 싸워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가 아서 마더는 "그의 정력과 지구력은 경이적이었다."고 썼다. 1965년 6월 24일, 처칠은 90세의 나이에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많은 이들이 애도를 표했고, 국장으로 장례식이 치러진 뒤 처칠은 옥스퍼드셔의 블레이든 교회 묘지에 있는 가족묘에 묻혔다.
그를 다른 사람과 구별짓게 하는 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강인한 그의 용기였다. 처칠에게는 어떤 것도 가능했으며, 항상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는 항상 학생들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했다.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샐리 라이드 - 우주에서 웹 공간까지 탐험하는 여전사
샐리 라이드는 결코 우주비행사가 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내 성격은 물리학자 타입"이라며 "유명인사가 되고자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고 회상한다. 1983년 6월 18일, 그런 그녀의 생각이 바뀌었다. 최초의 우주비행 후 22년이 지난 뒤, 라이드는 우주를 밟은 첫 미국 여성으로 유명해졌다. 그녀의 역사적인 비행 이후, 지난 2000년 10월 100번째 우주왕복선을 조종한 파멜라 멜로이 공군 중령을 포함한 30명 이상의 여성들이 남자들로만 구성된 남성 우월주의적 우주 클럽을 깨뜨렸다.
라이드는 물리학자, 교수, 우주비행사, 저술가, 테니스 선수, 그리고 기업가 등의 많은 일을 해냈다. 그러나 그녀는 "과학이 나에게는 항상 변하지 않는 상수였다. 그것은 항상 나의 동기 부여의 핵심이었다. 과학자로서의 나는 우주비행사나 다른 어떤 직업을 가진 나와는 전혀 다르다. 이것이 바로 나를 정의하는 방법이다."라고 말한다. 직업을 바꾸는 것은 자신 있는 과학자에게는 쉬운 일이다. 실제로 그녀는 몇 년마다 자신을 재창조했다.
샐리 라이드는 1951년 5월 26일 캘리포니아 주 엔시노에서 태어났다. 재능 있고 경쟁심이 강했던 라이드는 또래 소년들과 함께 미식축구, 야구, 그리고 축구를 했다. 열정적인 독서가였던 라이드는 특히 스포츠 면을 즐겨 읽었으며, 좋아하는 선수들의 타율을 줄줄 외울 정도였고, 과학소설도 아주 좋아했다. 열 살 때 라이드는 테니스를 치기 시작했다. 열두 살 때 라이드는 전국주니어테니스대회에 참가해 주말에 전국을 돌아다니며 토너먼트를 했다. 1968년 라이드는 펜실베이니아 주 소재 스워스모어 대학에 입학해서 물리학을 공부하고, 학교 테니스팀에서도 활동했다. 그녀는 전국대회에서 상위를 차지하는 스탠퍼드 카디널 여자 테니스팀에서 톱클래스의 선수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과학에 매료되어 있었다.
1973년 그녀는 스탠퍼드에서 물리학과 영어 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2년 뒤 물리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공부를 계속했다. 1977년 라이드는 학교 신문에서 광고를 보고 천체물리학 박사 프로그램에 등록했다. 이때 NASA(미국항공우주국)는 새로운 우주비행사를 찾고 있었다. 미래의 우주비행에서 "미션을 수행할 전문가들"과 함께할 비조종사들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8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지원했고 그녀도 그 프로그램에 응시하여 합격했다.
1970년대만 해도 NASA에는 우주비행사 후보자들을 위한 특별 체력 프로그램이 없었다. 우주비행에 요구되는 체력을 준비하는 것은 후보자 개개인의 몫이었다. 라이드는 주중에는 날마다 6∼8킬로미터, 주말에는 12∼16킬로미터를 달리면서 건강 상태를 유지했다. 또한 그녀는 테니스와 배구를 계속했다. 장차 우주비행사가 될 사람은 누구나 훈련용 제트기에 사용되는 20킬로그램의 낙하산을 끌어당길 수 있어야 했으므로 그녀는 웨이트 트레이닝도 했다. 스쿠버다이빙과 낙하산 훈련도 NASA의 생존훈련 코스에 들어 있었다.
1979년 라이드가 28세가 되었을 때, 그녀는 드디어 우주비행사가 되었다. 그러고 나서 2년 동안 공학팀에 배속되었는데, 그곳에서 캐나다 기술자와 함께 우주의 인공위성들을 배치하고 회수하는 데 사용되는 원격 장비(기계로 만든 팔)를 설계했다.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의 2, 3차 비행 때 라이드는 미션통제센터에서 "캡컴"으로 활동했다. 우주선 발사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보조 조종사인 캡컴은 비행 동안 우주왕복선 승무원과 통신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며, 우주조종사들을 안전하게 착륙, 귀환시키는 책임을 맡고 있다. 캡컴의 실수는 곧바로 우주선 실종이나 고립, 그리고 승무원의 사망을 의미한다. 이런 핵심적인 자리를 맡은 첫 여성으로서, 라이드는 우주선 발사부터 착륙까지 미션에 대한 모든 것을 이해해야 했다.
그런데 왜 라이드가 선택됐을까? 당시 선정심사위원단이었던 NASA의 애비는 라이드가 적극적으로 팀과 협력하는 팀 플레이어로서 뛰어났다고 한다. 또한 그는 자신들의 일을 하는 데만 열중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여기서는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라이드는 여러 미션을 훌륭하게 수행해냈다.
1986년 1월 28일, 챌린저 호가 이륙 직후 73초 만에 폭발해 승무원 7명 전원이 사망했다. 그녀는 이 비극을 조사하기 위해 윌리엄 로저 전 국무 장관을 위원장으로 한 대통령 직속 조사위원회에 배속됐다. 이 위원회는 폭발이 고체연료 보조 로켓에 있는 "O-링"이라는 고무 부품의 결함 때문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더 놀랄 만한 것은 조사위원회가 안전불감증을 밝혀내고, NASA의 전면적인 개혁 필요성을 제기했다는 것이다. 로저 보고서는 사실상 미국의 우주 프로그램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11개월 동안, 라이드와 우주 전문가들로 구성된 태스크포스팀은 우주에서 미국이 할 수 있는 역할에 관한 포괄적인 연구보고서를 작성했다. "라이드 리포트"로 알려진 이 보고서는 네 가지 목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인공위성 감지기의 도움으로 지구의 과학 현상에 대해 조심스럽게 고찰하는 임무, 새로운 세대의 탐사용 로봇으로 태양계의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을 탐험하는 작업, 영구적인 달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달로 복귀하는 것, 화성에 대한 시험 탐사 등을 추진하는 것이다. 그녀는 NASA를 원상 회복시키기 위해 그 결점을 적나라하게 비판했다.
1987년, 서른여섯 살이 된 라이드는 스탠퍼드 대학 국제안보군비통제센터의 특별연구원이 되기 위해 NASA에서 퇴직했다. 그녀는 "변화는 내가 꽤 오랫동안 생각해 왔던 것이다."고 말했다. 스탠퍼드에서 그녀는 NASA 이후의 삶을 발견했다. 그녀는 국가 안보, 군비통제 분야에서 일하게 될 과학자들을 양성했다. 1989년, 그녀는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 대학의 물리학 교수가 되었다. 라 졸라에 있는 캘리포니아 우주 연구소도 맡았다. 연구소에서 그녀는 캘리포니아 대학의 8개 캠퍼스에 있는 우주 연구 작업을 조정하고, 우주의 잠재력에 관심이 있는 캘리포니아 소재 회사들을 지원했다.
라이드는 과학의 장점을 보다 널리 알리기 위해 어린이들을 위한 네 권의 책을 저술했다. 1999년 초, 라이드는 우주 탐험과 우주 산업에 관한 뉴스와 정보를 제공하는 웹사이트인 스페이스닷컴의 이사회에 참여하면서 또 한 번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라이드는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교수로 계속 재직하면서 전략기획을 담당하는 수석 부사장으로 일했다. 그녀는 회사가 궤도에 오르자 2000년 9월, 또 다른 삶을 추구하기 위해 스페이스닷컴을 사직했다.
2001년 1월, 라이드는 여학생들과 젊은 여성들이 수학, 과학, 그리고 공학 분야에서 커리어를 쌓도록 돕기 위해 이매지너리 라인스 사를 설립했다. 샌디에이고에 근거지를 둔 이 벤처회사는 커뮤니티를 만들고, 브랜드 제품을 개발하며, 젊은 여성과 그들의 부모, 교사, 그리고 미래의 고용주들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했다. 라이드는 이매지너리 라인스 사의 일을 추진하면서도 미국 우주탐사의 대변인 역할을 계속했다. 사업과 대학에서 맡고 있는 일 외에도 그녀는 많은 강연 일정을 소화하고 있으며, 마이터 사(항공 시스템과 방위 기술 등 첨단 기술을 연구하기 위해 미국 국방부, 연방항공청 등이 1958년 낸 자금을 기반으로 설립된 비영리 연구조직)에서부터 대통령 산하 과학기술자문위원회까지 다양한 조직의 이사회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최근 그녀는 유에스 로보틱스 사의 텔레비전 광고에서 운동선수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CBS <천사의 접촉>에서 단역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라이드는 "내가 주목받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단지 내 삶을 갖고 싶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50세가 된 그녀는 자신이 그랬듯이 젊은이들에게 다양한 라이프 스타일을 갖추라고 조언한다. "분명한 것은 여러분이 다양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제2, 제3, 그리고 제4의 삶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비교적 자주, 매우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래리 스몰 - 금융인, 박물관장 그리고 기타리스트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11대 관장인 로렌스 M. 스몰은 관심 분야가 많은 사람이다. 그는 열광적인 토속 예술품 수집가이자 플라멩코 풍의 기타리스트이며, 전에는 금융기관의 사장이었다. 그는 4개 국어에 능통하며, 윈드서핑, 스쿠버 다이빙, 장거리 자전거 타기 등을 즐긴다.
미국을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부유한 영국 과학자 제임스 스미스슨은 172년 전에 그의 전 재산을 미국에 남기고 사망했다.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은 현재 수도 워싱턴과 7개 주, 그리고 파나마에 있는 16개의 박물관과 갤러리, 국립 동물원, 그리고 11개의 연구센터로 구성되어 있다. 매년 약 4000만 명이 1억 4200만 개 이상의 동식물 표본과 예술작품들이 소장된 전시관들을 방문한다.
뉴욕에서 태어난 뒤 근교인 뉴로셀에서 자란 스몰은 브라운대 신입생일 때 우연히 기타를 접하게 되었다. 그 후 40년 동안 기타는 그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이후 스몰은 브라운대에서 스페인 문학을 공부하는 한편 주말에는 기타 레슨을 받기 위해 뉴욕으로 통학을 했다. 그의 대학 지도교수인 앨런 S. 트루블러드 교수는 그가 스미스 칼리지 2학년생들의 스페인 연수 프로그램에 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스몰은 "스페인에서 생활한 지 반 년쯤 지나서 나는 세계의 톱10에 드는 플라멩고 기타 연주자들의 리스트를 만들어봤다."고 말한다. "리스트를 분석한 결과, 모두 열두 살 전에 무대에 데뷔한 신동들이었으며, 스페인 집시였고, 키가 170센티미터 이하였고, 그리고 굵고 검게 빛나는 머리카락과 청동색 광대뼈를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10명 중 단지 2명만 기타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2명만이 읽고 쓸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것을 하겠다고 미국 아이비리그에서 온 키가 192센티미터나 되는 학생이었다. 잘 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스페인으로 갔으나 실패했다." 스몰은 실패했지만 기타에 대한 애착은 여전했다.
그는 직업 음악가가 되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스페인어 실력이 유창하고, 해외 생활을 좋아하므로 다른 일을 하기로 했고 국제 금융 분야에 뛰어들었다. 브라운대 4학년 때 지금은 시티그룹이 된 시티뱅크/시티코프가 그에게 6,136달러 연봉에 국제부문 일자리를 제공했다. 트루블러드 교수는 무척 화를 냈다. 기업이 가장 우수한 스페인 문학도이자 잠재적인 동료 중 한 사람을 빼앗아갔기 때문이다. 그러다 트루블러드는 스몰에게 월러스 스티븐슨의 시집을 선물했다. 트루블러드는 시집에 "월러스 스티븐스는 보험사 임원과 퓰리처상 수상 시인이라는 두 가지 삶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다"고 적었다. 스몰의 커리어 변경을 인정한다는 뜻이 담긴 이 선물은 스몰에게 음악과 언어에 대한 애정을 비즈니스와 균형 있게 추구하라는 격려의 뜻도 담고 있었다.
그는 남미에서 일하면서 부족 예술품을 모으고 복원하는 취미도 갖게 되었다. 특히 그는 깃털 장식품들을 전문적으로 모았다. 이러한 다양한 관심사에도 불구하고 스몰은 시티코프 내에서 훌륭한 경영인이라는 명성을 빠르게 쌓아갔다. 스몰은 엄격했지만 냉정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엄격하게 통제하고, 그 다음에는 느슨하게 통제한다는 그의 자세는 1970, 80년대에 시티코프가 급성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85년, 그는 부회장 겸 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승진했다. 6년 후, 회사의 회장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졌을 때 그는 자신의 다양한 관심사를 추구하기 위해 퇴직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때 캘리포니아 부동산 투자가인 엘리 브로드가 스몰을 미국 최대의 주택담보대출 제공 전문회사인 패니 매에 추천했다. 1991년 스몰이 세계 최대의 비은행계 금융서비스 회사에 합류했다.
9년 동안 스몰은 빠르고 단호하게 행동했으며, 패니 매를 보다 효율적이고 훌륭한 금융회사로 변모시키는 데 일조했다. 1998년, 스몰은 봉급과 성과급으로 425만 달러를 벌었다. 패니 매에 있는 동안, 그는 기타 연주를 계속해서 연습했으며, 바쁘지 않을 때는 지역 병원과 기관에서 연주를 했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아내와 함께 그들의 늘어가는 예술품들을 전시할 공간을 찾았다. 그리고 집 근처 70평짜리 아파트를 개조해 개인 갤러리를 만들었다.
1998년, 57세가 된 스몰은 3년 뒤에 퇴직을 하고 "음악, 미술, 그리고 언어에 일생을 바칠 계획"을 세웠다. 이때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이 부부는 지인들에게 할리데이 카드를 보냈다. 그들은 이 카드에 자신들이 소장한 아마존 깃털 작품을 실었다. 1999년 2월,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관장의 후임을 찾던 이사회 멤버 웨슬리 S. 윌리엄스 주니어가 스몰의 할리데이 카드를 발견했다. 윌리엄스는 패니 매의 이사회 멤버인 아내에게 물었다. "래리는 어때? 그는 훌륭한 금융가일 뿐만 아니라 예술과 과학을 좋아하고, 모든 인종의 예술품들을 수집하며,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등 여러 언어를 구사할 수 있어. 또한 그는 워싱턴을 잘 알며, 여러 곳의 인상적인 이사회(브라운대, 모어하우스 칼리지, 시티코프, 파라마운트 커뮤니케이션 등등) 멤버로 활동했어."
하지만 스몰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당신이 과거에 관장으로 모셨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세요. 지난 153년 동안 10명이 거쳐갔는데, 10명 모두 학계 출신이며 9명이 과학자였어요." 그러나 위원회는 그를 원했다. 일부 사람들은 그가 스미스소니언 관장이 되기 위해 연봉 90퍼센트나 깎이는 것 - 400만 달러 이상(패니 매)에서 33만 달러로 - 을 감수할 수 있을지 의문을 표했다. 일부에서는 그가 박물관 운영 기금의 70퍼센트를 제공하는 의회뿐만 아니라 기업 및 개인 기부자들로부터 지원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게다가 내부 다툼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걱정했다.
그러나 스몰은 이 모든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는 박물관을 더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한 달에 300만 명이 방문하는 인터넷 사이트(www.si.edu)의 예산을 늘리고, 많은 과학적 자원들을 몇몇 선택된 분야에 집중했다. 그리고 경영에 있어 보다 엄격한 기준을 도입했다. "스미스소니언은 오늘날 다른 거대하고 복잡한 기업을 지배하는 것과 같은 경영 원칙을 준수할 정도로 성장했다."
기금 모금으로 스몰의 입지는 확실해졌다. 부임한 지 9개월 만에 그는 개인 기부금과 관련한 이전의 모든 기록을 깨뜨렸다. 1999년 개인 기부금은 1억 4700만 달러에 이르렀으며 다음 해에 약 2억 달러로 증가했다. 기금 모금을 위해 거물 기업인들과 연방 정부를 접촉하는 것 외에도 스몰은 전국에 있는 다른 박물관들과 생산적인 파트너십을 발전시켰다.
사람들은 스몰이 여러 가지 일을 해내기 위해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묻는다. 답은 간단하다. 어떤 것에 충분히 열정을 가진다면 시간은 확장되는 것이다. 스몰은 잠을 줄이면서 시간을 확보한다. 보통 그는 새벽 2시쯤 잠을 자며 5시간에서 6시간 후에 일어난다. 스미스소니언 관장, 은행가, 음악가, 수집가 중 어느 것도 스몰이 꿈꿔오던 것은 아니다. 스몰은 "그 카드가 없었더라면 아무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우연한 삶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뜻밖의 행운이다."
전문가들의 시대에 우리는 종종 한 가지 이상을 잘하는 사람들을 잘못된 것처럼 비판한다. 그러나 래리 스몰의 다양한 성취는 인간 잠재력의 신축성을 보여준다. 항상 "무언가를 진행 중"이면서도 그는 영리와 비영리 세계에서 세계 최고 지위에까지 도달했다. 그는 더블 라이프를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그것을 하라!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라."
맺음글 - 성공적인 또 다른 삶을 위한 20가지 핵심 포인트
· 자신의 가슴에 귀기울여라
"행복은 하는 일, 희망하는 것, 사랑하는 사람에 달려있다."는 중국 속담이 있다. 제2의 정체성을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이 우선 관심 있어야 한다. 자신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명성? 엄청난 돈? 물질적 소유물? 자기 표현? 타인을 돕는 것? 그런 숨어 있는 꿈이 얼마나 강렬한가?
· 자신만의 잣대로 성공을 정의하라
자신이 정말 하고 싶어하는 것을 지금 하고 있는지 확인하라. 현명한 사람들은 그들이 좋아하고 잘하는 취미를 찾아낸다. 그들은 자신의 가슴으로 믿고 따르는 이유를 발견하고, 사람들의 삶을 개선시키는 프로젝트에 사랑과 에너지를 집중한다. 그들은 단순히 보상이 아니라 즐겁게 사는 방법을 찾아내고, 성공을 자신의 관점으로 정의한다.
· 매일 실천하라
날마다 자신만의 달력에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들 - 일, 가족, 기타 관심사 - 을 표시하라. 더블 라이프에 대한 진전을 주기적으로 재평가하라. 자신이 도달하지 못한 목표에 대해 이렇게 자문해보라. "내가 그것의 중요성을 달리 생각하게 됐기 때문에 이루지 못했는가, 아니면 도달하기 너무 높은 목표였는가?"
· 실패로부터 배워라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사람들의 의지를 약화시키는 가장 큰 요소 중 하나다. 그것은 사람들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한한다. 위기는 직접 부딪쳤을 때 기회를 제공한다. 좌절을 패배와 동일시하지 말라. 사실 또 하나의 삶을 얻는 과정에서 기대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다는 점을 예상하라. 한번에 성취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 배움을 멈추지 말라
평생 학습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키워라. 그러면 기회가 올 것이다. 물론 늘 새로운 정보와 경험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을 유지해야 한다.
· 자문 그룹을 만들어라
인맥은 매우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더블 라이프를 사는 데 자문해줄 수 있는 사람들 - 교사, 동료, 그리고 친구들 - 로 구성된 핵심 그룹을 개발하라. 이들의 의견을 구하는 것이 꿈에 도달하기 위한 전력들이 현실적인지 아닌지를 알아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 창의력을 재충전하라
항상 새로움을 추구하라. 육체적·물리적 환경을 바꾸어라. 즉, 밖으로 나가서 걷거나 조깅을 하라. 앉아 있지 말고 서 있어라. 음악을 틀어라. 물리적·지적으로 사고를 급속 충전하라.
· 스스로를 재충전하라
직업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고 평가하지 말라. 그것은 새로운 자극을 줄 수 있는 기회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선택권을 없애버리거나 뒤로 미루지 말라. 자신이 좋아하는 것, 자신이 잘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들을 끊임없이 탐구하라.
· 보스의 마음을 파악하라
어떤 조직들은 초기에는 더블 라이프를 지지하지만 직원들이 더블 라이프를 좀더 적극적으로 추구하기 시작하면 불편해한다. 적어도 상사의 암묵적 지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기업들은 진심으로 더블 라이프를 지지할 것이다. 그러나 허락받았을 때조차도 우선 조직에 봉사하라.
· 양립 가능한 목표를 추구하라
시간과 정력을 너무 많이 소비하는 목표는 피하라. 직장에서는 승진을 위해 업무 외 시간에도 일을 하고, 밤에는 소설을 쓰려고 무리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동시에 추구 가능한 목표인지를 가장 먼저 확인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