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이른 아침. 아직 한창 잠에 빠져 있던 준혁은 조용한 발걸음 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곧, 그의 쌍꺼풀 없는 눈이 떠지고 아무도 없는 병실 안에는 고요한 적막이 감돌았다.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에 준혁은 침대 밑에 놓아두었던 총을 잡았다. 기습일 수도 있다. 준혁은 긴장하며 총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얼마 후 병실 문이 벌컥 열렸고, 간호사가 들어왔다. 하마터면 총을 겨눌 뻔했다.
“안녕하세요, 준혁 씨. 벌써 일어나셨어요?”
“안녕하세요.”
준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간호사는 준혁에게 아침 인사를 건넨 후, 비어있는 옆 침대 표면을 탁탁 털기 시작했다. 곧 뒤이어 멀끔하게 생긴 남자 하나가 잔뜩 찌푸린 인상으로 들어왔다.
“입원 같은 거 필요 없다니까요.”
“앞으로 이 침대 사용하시면 돼요. 죄송하지만 저도 어쩔 수가 없네요. 위에서 지시를 받은지라.”
간호사는 남자를 억지로 끌고 와 침대에 눕혔다. 어깨도 넓고, 키도 크고, 누가 봐도 운동 좀 한 몸의 그는 뭐가 그리 불만인지 입술이 댓발 나와 있었다. 간호사는 그의 링거를 옆에다 걸어둔 후, 준혁의 링거도 확인한다.
“준혁 씨 당분간은 심심하지 않겠어요. 이 환자분 말이 좀 많거든요.”
“아, 정말 누님까지 이러깁니까?”
“풉. 저한테 칭얼대봤자 소용없다니까요.”
간호사는 누님이라는 호칭이 마음에 드는지 미소를 지은 후 병실을 나가버렸다. 그동안 준혁 혼자 썼던 2인용 병실. 이곳에 한 남자가 들어오게 되었다.
“여기 밥은 맛있어요?”
도윤은 벌써 병원 신세에 질린 듯한 목소리로 물어봤다. 준혁은 피식 웃음을 지은 후 고개를 도리질 쳤다. 간호사가 말한 대로 당분간은 심심하지 않을 듯했다. 도윤이 입을 열었다.
“여기서 도망치다 걸리면 격리됩니까?”
“… 글쎄요.”
“아, 벌써 이렇게 따분하니… 일주일을 어떻게 견디라는 거야!”
남자는 끊임없이 툴툴거렸다. 그때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문이 열리는 순간 준혁의 눈은 반가운 눈빛으로 변했고, 남자의 눈은 잔뜩 찌푸려졌다.
“안녕하세요. 도준혁 씨, 그리고 하도윤 씨.”
병실에 들어온 사람은 아침 회진을 나온 한아였다.
‘아, 제길… 하필 저 사람이 주치의라니.’
도윤은 한마디도 지지 않으려 하던 한아의 모습을 떠올리며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
“카르텔 녀석들이 철물파 구역 건드렸다며?”
이치긴의 목소리는 다른 때보다 유쾌하지 않았다. 아침 신문을 보고 있던 진은 신문을 접으며 그를 바라봤다. 그걸 이제 알았냐는 듯한 눈빛을 보낸다. 노골적인 그의 눈빛에 이치긴은 멋쩍은 웃음을 보이며 말을 이어갔다.
“야쿠자에서 쫓겨나온 놈들치고는 만만치 않은데?”
이치긴은 사무실 가운데에 마련된 푹신한 소파에 앉았다. 그때 비서가 노크하며 들어왔다.
“차 내어드리겠습니다.”
“아니야, 됐어. 아침에 눈 뜨자마자 커피 마셨거든.”
“네, 형님.”
이치긴은 비서에서 싱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비서가 나가자 얼굴에 담고 있는 미소가 사라지고, 조금 걱정이 담긴 표정으로 진을 바라봤다.
“이러다 우리 구역까지 넘어오는 건 시간문제겠는데.”
진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소파에 덜렁 누운 이치긴이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입을 열었다.
“글쎄…. 근데 카르텔이 철물파를 뒤엎으려 작정하고 덤볐다면 누가 피를 보든 끝장을 봤을 거야. 하지만 이상하게도 카르텔은 그 구역 외엔 손도 안 댔어.”
“하지만 철물파한테는 충분히 자극일 텐데. 철물파가 그냥 두진 않을 거야.”
“물론 자극은 받았겠지. 하지만 그것뿐이야. 지금 카르텔의 세력도 만만치 않으니까.”
“우리가 걱정해야 할 정도일까?”
“걱정은 나중에 하더라도 대비는 해야 할 것 같아. 카르텔 녀석들…. 생각 외로 세력확장 속도가 빨라.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이치긴의 얼굴엔 변화가 없었지만, 카르텔에 대한 경계심은 강하게 나타났다. 3개월 전쯤 부산에서 나이트클럽을 운영하고 있던 한 사장에게 연락을 받았다. 일본에서 넘어온 야쿠자(카르텔)들이 소리 없이 세력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고… 그때만 해도 가벼이 넘겼던 둘이었다. 그놈들이 서울까지 치고 올라와 자리를 잡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현재, 카르텔은 눈덩이가 불어나듯 막강한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진이 깍지 낀 손을 입에다 가져다 대며 말했다.
“철물파가 그냥 넘어가진 않을 거야. 스나이퍼를 고용할지도 모르겠는데.”
“나도 딱 그 생각. 그래도 일단 우리는 철물파랑 카르텔. 둘이 싸우게 내버려 두자고. 끼어들 필요도, 끼어들 이유도 없어. 둘 중 하나가 제거된다면 오히려 우린 땡큐지.”
진은 피곤한 듯 눈언저리를 매만졌다. 이치긴의 말대로 두 세력의 움직임만 파악하면 됐다. 굳이 어느 편에 붙어서 도와줄 필요도, 응원할 필요도 없었다. 이곳은 강한 자만 살아남는 법. 끊이지 않는 배신과 음모로 얼룩진 세계였다. 카르텔에 관한 이야기가 끝나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깬 건 진이었다.
“형, 누나 보러 안 올 거야?”
“……”
“한 달은 넘은 거 같은데.”
“나 바쁜 거 알잖아.”
일부러 능글맞은 말투로 말하는 이치긴. 이 이야기를 피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형. 누나가…”
“시간 나면 내가 알아서 갈게.”
차가운 그의 태도에 진은 입을 다물었다. 다희가 병을 앓기 시작하면서 이치긴도 이상해졌다. 남매처럼 지내던 사이였는데 한순간에 다희에게 등을 보이기 시작한 이치긴. 진은 얼핏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다희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잘 아는 이치긴. 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새 주치의를 알아봐야겠어. 이번에도 그냥 나가버렸거든.”
주치의가 또 나갔다는 말에 이치긴의 얼굴에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포착한 진. 분명히 걱정하는 얼굴이다. 이치긴은 애써 표정을 지우며 진을 바라봤다.
“어디 가게?”
“준혁이 형한테. 병문안 못 간 지 일주일이 넘었거든. 그리고 그 병원에 괜찮은 의사 소개 좀 받아보려고.”
이치긴은 손을 올려 짧게 인사를 한 후 나가버렸다.
***
이치긴이 병실에 도착했을 때 준혁은 한가하게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이치긴을 보자마자 준혁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안 와도 된다니까.“
말은 그렇게 해도 이치긴이 반가운 그였다. 그는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끄며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몸은 괜찮아, 형?“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이치긴이 물었다. 준혁은 깁스한 오른쪽 팔을 들어 올려 보이며 씩 미소를 지었다. 준혁은 현백회의 중심부에 있는 킬러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야? 퇴원은 언제래?"
"곧 할 거야."
"이렇게 있다가 실력 죽는 거 아니야?"
"내가 죽을 실력이라도 있나.“
준혁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미니 냉장고에서 차가운 음료수를 건넸다.
"누가 들어온 모양이네.“
음료수 캔을 따며 이치긴이 말했다. 그의 눈은 도윤의 구겨진 침대 시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응, 어제부터 이 병실 같이 쓰는 사람이야."
"내가 형 혼자 쓰게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괜찮아. 석 달 동안 혼자 있으려니까 심심해 죽을 거 같았는데. 잘됐지."
"그래도 형… 만약 스파이거나..."
"그런 사람 아니래도."
준혁이 웃으며 캔 주스를 입에 갖다 댔다. 이치긴은 여전히 못 미더운 눈초리로 도윤의 침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준혁은 아니라고 했지만 모르는 일이다. 이따 애들을 시켜 뒷조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별일은 없고?“
준혁이 물었다.
"응. 별일은 없는데… 카르텔 녀석들이 말썽을 부린 것 같아."
"카르텔? 그 일본에서 넘어왔다던?"
"응, 그 녀석들이 철물파 구역을 건드렸어.“
준혁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카르텔의 세력이 어느 정도인지 그는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석 달 전, 그러니까 카르텔이 한국으로 넘어왔던 때에 현백회와 철물파의 큰 충돌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준혁은 총상을 입었다. 그리고 진이나 이치긴은 되도록 병상에 누워있는 준혁에게 조직 일을 말하지 않았었다. 그렇기에 준혁은 이치긴의 이야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로 세력이 크단 말이야? 이제 석 달밖에 안 됐는데?“
준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이치긴이 잠깐 실눈을 뜨더니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우리나 철물파의 부주의야. 카르텔 놈들이 생각보다 머리가 잘 굴러가더라고. 특히 거기 행동대장이 엄청난가 봐. 남인우라고. 싸움은 기본이고 머리까지 잘 돌아간다는데.“
한숨 섞인 이치긴의 말투. 그 말투에서 준혁은 느낄 수 있었다. 카르텔이 절대 만만치 않은 녀석들이라는 것을. 어쩌면 철물파보다 더 막강한 놈들일지도 몰랐다.
"아직 우리 쪽엔 손댄 건 없고?"
"어, 조만간 철물 파랑 부딪칠 거 같은데 우리는 우선 빠져 있으려고."
"그래도 모르니까 대비라도 해놔."
"풉, 어 알았어.“
준혁의 말에 이치긴이 실소를 터트렸다.
"왜 웃어?"
"아니, 나도 진이한테 똑같은 말 했거든."
“싱겁긴. 그러고 보니 진이 얼굴 보기 힘드네.”
일주일에 한두 번씩 꼭 병문안을 오는 이치긴에 비해 진은 부쩍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다희 때문이겠거니 싶어 넘기기는 하지만. 준혁은 가물가물한 기억을 끄집어내며 말했다.
"진이 녀석, 네가 농땡이를 부려서 일할 게 많을 텐데 걱정이다.“
”뭐? 나도 나름대로 열심히 뛰어다녀, 형.“
준혁의 장난기 어린 말투에 이치긴도 장난기 어린 대답을 했다. 그리고 준혁이 잠깐 머뭇거렸다. 마치 이 말을 하려고 일부러 분위기를 장난스레 잡은 듯하다.
"다희는 어때."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형하고 의논할 게 있어.“
준혁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치긴을 바라봤다.
"다희 누나 주치의가 또 나가버렸어. 그래서 말인데 혹시 이 병원에서 괜찮은 의사 있으면 스카우트하려고. 괜찮은 의사 없어?"
"여기서?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내가 무슨 이 병원 원장도 아니고…"
"그래도 몇 달 있으면서 봐왔을 거 아냐. 형 사람 보는 눈 장난 없잖아."
"... 다 똑같아. 그냥 잘난 의사들이지 뭐."
"그래? 흠... 나도 따로 알아보긴 할 건데 형도 알아봐 줘. 이번엔 정말 제대로 된 사람을 구해야겠어.“
이번 주치의는 정말 신중히 골라야 할 것 같았다. 의사가 자주 바뀌는 것이 환자에게 좋을 리가 없다.
... 새 주치의를 구할 때까지 다희의 곁에 있어야겠다.
이치긴이 다희에게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적어도 주치의가 나간 자리를 채워주고 싶었다. 한 시간 정도 준혁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이치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 나면 또 올게. 몸조리 잘하고, 아까 그 이야기 부탁 좀 할게."
"알아는 보겠는데 너무 기대는 하지 마. 그리고 조심해."
"알았어.“
AM 02 : 00
「 제 1 응급실 오한아 선생님. 제 1 응급실- 」
직원 휴게소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있던 한아가 힘든 몸을 일으켰다. 이제는 구내방송만 나와도 자동으로 몸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몸이 돌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한아는 직원 휴게소 구석에 마련된 조그마한 세면대에서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한 후 그녀를 찾는 제1 응급실로 달려갔다.
"54세. 인근 공사장에서 일하던 인부예요. 야간 일을 하던 중 쓰러졌어요."
의료보조원의 말을 들으며 한아는 환자를 살펴봤다. 의식은 없는 상태였다. 한아는 가운 윗주머니에 있던 작은 손전등을 꺼내 환자의 눈을 비춰봤다. 동공이 미세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동공이 반응한다는 건 목숨엔 지장이 없다는 뜻이었다. 한아는 일단 안심을 하며 환자의 몸 전체를 살펴봤다. 겉으로 드러나는 상처는 없었다.
"좌파하선상에 의한 쇼크 상태예요. 혈압은?"
"안 잡혀요...“
간호사가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당장 수술실로 옮기세요. 박 선생! 수술준비“
긴박하게 돌아가는 응급실이니만큼 한아의 목소리도 다급했다. 한아의 수술 집도하에 있게 된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5분 후 수술실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수술은 약 2시간에 걸쳐 이루어졌고, 도중 환자의 쇼크 상태가 악화해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한아의 침착하고 정확한 대처에 목숨은 구할 수 있었다. 남자는 수술을 마친 뒤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생각보다 어렵고 위험한 수술이었기에, 수술하는 동안 극도의 긴장감이 넘쳐났었는데 한아의 마지막 인사로 하여금 모두 긴장감이 풀린 듯했다.
"수고하셨어요, 선생님.“
수술보조 간호사의 인사를 받으며 한아는 수술실을 빠져나갔다.
'부족한 잠을 자러 한번 가볼까나…'
한아는 기지개를 쭉 켜며 직원 휴게소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나 곧 한아를 찾는 구내방송이 들려왔다. 그녀의 얼굴이 죽겠다는 표정으로 바뀐다.
'… 이건 사람의 할 짓이 못 된다고… 아아… 제발…'
속으로 구시렁거려도 그녀의 발걸음은 이미 응급실에 와있었다. 그렇게 한아는 새벽 내내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가 부러진 환자, 술 먹고 싸우다 흉기에 찔린 환자, 화재로 인해 온몸에 화상을 입은 환자 등등 총 7명가량의 환자를 봐야 했다. 모두가 깊게 잠이든 고요한 밤에도 응급실은 환한 불빛을 쏟아내며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도준혁씨."
아침 회진 시간이었다. 책을 보고 있던 준혁은 한아의 목소리에 읽던 책을 덮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한아의 얼굴엔 피곤함이 배어 있었지만, 표정은 밝았다.
"안녕하세요."
준혁도 상쾌한 인사를 건넸다.
"밤새 불편한 점은 없으셨죠? 팔 통증은 여전한가요?"
준혁의 링거 체크를 하고 깁스를 한 오른팔을 매만지며 물었다.
"통증은 거의 사라졌어요. 움직이는 게 불편해서 그렇지."
"아직 뼈들이 완전히 붙지 않아서 그래요. 그래도 아주 좋아지고 있어요. 뼈는 금방 붙을 테니까."
"고맙습니다. 선생님."
"고맙긴요. 점심 지나서 물리치료 받으시면 돼요. 그리고 깁스를 좀 더 가벼운 걸로 바꿔드릴 거예요."
한아는 아무런 막힘 없이 준혁의 상태에 대해 술술 내뱉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준혁의 입가엔 작은 웃음이 번졌다. 지루한 입원 생활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은 바로 이 순간이었다.
하얀 가운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여자. 그리고 의사라는 일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여자. 준혁은 한아를 볼 때마다 받는 묘한 감정이 무슨 의미인지 아직은 몰랐지만, 한아를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하도… 하도윤씨 어디 갔죠?"
비어있는 도윤의 침대를 보며 한아가 말했다.
"화장실 간다더라고요.“
준혁이 대답했다. 그러자 한아는 바로 병실 안에 있는 화장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거기 말고 밖에 있는 공동화장실이요. 그 화장실 냄새난다고 안 쓰던데요?"
"냄새요?"
"병원 냄새가 싫다고…“
준혁이 재미있다는 듯 눈웃음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한아는 기가 막혔다.
‘하… 밖에 있는 공동화장실은 병원 냄새가 안 나는 줄 알아? 어차피 병원에 있는 거잖아!’
화장실 문을 쾅 닫았다. 회진 시간 때는 꼭 병실에 붙어있어 달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했건만… 정말이지 제 멋대로인 환자였다. 한아는 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병실을 벗어났다.
"아침 회진은 여기까지입니다. 이따 오후 때 뵈어요."
도윤에 의해 날이 서 있는 한아 덕에 신임레지던트들은 슬슬 눈치를 보며 해산을 했다. 한아는 잠시 제자리에 서서 호흡을 가다듬으며 냉정함을 되찾았다.
'이러면 안 되지. 침착하자, 오한아.'
마음을 가다듬은 한아는 오늘 수술 일정을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던 중 한아의 눈에 간호사들과 시시덕거리는 낯익은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자물쇠로 잠긴 창고 문을 제가 발로 뻥 차서 열었어요. 그랬더니 그 안에 있던 마약밀매 범들이 기겁하며 연장을 하나씩 드는데…. 아 정말 그때 생각하면 얼마나 아찔한지...!"
"어머어머! 그래서요. 혼자서 싸우신 거예요?"
"그럼요! 맨몸으로 뛰어 들어가서 멋있게 ‘묫자리는 봐놨냐.'라고 말하니까..."
언제 친해졌는지 간호사들에게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는 도윤. 한아가 다가가도 그는 기척조차 느끼지 못하며 열심히 뻥을 치고 있었다. 진료 파일을 들고 있는 한아의 손이 힘이 들어갔다.
"그중에 가장 덩치 좋은 놈을 딱 골라서 선제공격을 휙 날리고…"
"하도윤씨"
"두 번째 놈이 달려드는데, 내가 발을 올려서 그놈의 얼굴을…"
"하도윤씨!"
한아가 빽 소리를 지르자 도윤이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아,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질러요?"
간호사들은 이미 자신의 업무에 열중한 지 오래였다.
"지금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어... 입 운동이라고 하면 혼내실 거죠?"
"제가 회진 시간 땐 병실에 있으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아, 근데 11시까지 온다고 해놓고선 늦었잖아요. 환자는 딱 대기하고 있어야 하고 의사는 늦어도 됩니까?"
"하아... 대체 왜 이래요? 퇴원할 생각은 있는 거예요?"
도윤은 어째선지 한아와의 말싸움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그에 비해 한아는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지만. 한아가 더 잔소리하려는 찰나, 외과 '강순철' 과장이 달려왔다.
"오 선생, 이게 무슨 소란인가!"
강순철 과장은 주위 눈을 보며 한아를 다그쳤다. 그러고 보니 간호사들은 물론이고 환자들까지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순간 한아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한아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윤은 빨개진 한아의 얼굴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도윤의 웃음이 더 수치스럽게 느껴지는 한아. 한아는 강순철 과장에게 죄송하다는 인사를 한 후, 직원 휴게소로 달려갔다. 아직도 도윤의 웃음소리가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으으! 제길! 밥맛 없어, 하도윤!"
직원 휴게소에 들어오자마자 한아는 진료 파일을 내던졌다. 휴게소에서 쉬고 있던 동료 의사들이 그녀의 행동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한아가 이렇게 열을 내는 것을 처음 보기 때문이었다.
"으하하하!"
허리가 꺾일 듯 웃어젖히는 도윤. 병실에 돌아와서도 도윤의 웃음은 멈추질 않았다.
"무슨 재미있는 일 있으셨나 보네요.“
준혁이 물었다. 그러자 손을 내저으며 웃음을 참겠다는 듯 큭큭 거린다. 도윤은 새빨개진 한아의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자기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으르렁대는 모습이 꼭 최 반장 같았기에 한아의 창피는 그에게 두 배의 기쁨으로 다가왔다. 처음 응급실에 실려 와서 한아를 봤을 때 솔직히 좀 취향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로 이어진 말다툼으로 한아는 그에게 ’이겨야 할‘ 상대로 인식되었다. 한마디로 그냥 한아를 보면 장난을 걸고 싶어졌다.
악의는 없었지만 당하는 한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아에게 있어 도윤은 최악의 환자로 인식되고 있었으니까.
***
늦은 밤, 이치긴은 일송정으로 차를 몰았다.
"오셨습니까."
이치긴이 차에서 내리자 언제나처럼 마담이 마중을 나왔다. 마담에게 예의를 갖춰 인사를 한 후 일송정 안으로 들어갔다. 늦은 밤인데도 일송정은 손님들로 가득 차 있었고, 손님들을 위한 가야금 연주도 들려오고 있었다. 마담의 안내에 따라 다희의 방 앞에 도착했다. 마담이 짧게 묵례를 한 후 뒤돌아갔다. 그때 이치긴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진이… 한텐 말하지 마세요."
"물론이죠."
마담은 단아한 미소를 지으며 물러갔다. 이치긴은 떨리는 손으로 문을 두드렸다.
"… 누나…"
"… 들어와…"
한참 후 다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치긴은 문을 조심스럽게 열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컴컴할 거라 생각했던 방안은 은은한 조명등 하나가 켜져 있었다. 다희는 곧은 자세로 앉아있었다. 이치긴은 방안에 들어오자마자 다희에게 인사를 했다.
"... 회장님."
"지랄. 원래 부르던 대로 불러."
"하핫. 누나 몸은 괜찮아요?"
"오늘은 괜찮아. 오늘은 밥도 먹었어.“
확실히 다희는 다른 때보다 기분은 좋아 보였다. 여전히 무표정이지만... 그래도 이치긴은 한시름 놓는 기분이었다.
"의사 또 나갔다면서요? 내가 암살이라도 해줄까요?"
"됐어. 그만한 가치도 없는 의사야.“
"아, 누나가 일어나야 우리 현백회가 사는데."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인데도, 서로가 의식적으로 서로를 피하고 있었는데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장난스레 말을 걸어오는 이치긴이 고마워서 다희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은은한 조명 빛에 반사된 다희의 얼굴은 실루엣을 걸쳐놓은 듯 신비스럽게 느껴졌다. 3개월 전, 철물파와의 충돌 때 다희를 데리고 가지만 않았더라면…. 그냥 자신의 손으로 해결했더라면 다희가 이렇게 되진 않았을 것이다.
"…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 안 돌아가도 돼. 그냥, 누나가 힘들지만 않았으면 좋겠어요.“
다희의 나약한 말에 이치긴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울고 싶었지만 애써 웃었다. 이치긴은 다희를 품에 안고 싶었지만, 그저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첫댓글 아 웃으면 안 되는데 첨부터 기습일 수 있다 하는 도준혁 왜케 외곬수같고 웃기냨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순간 준혁의 눈은 반가운 눈빛으로 변했고, 남자의 눈은 잔뜩 찌푸려졌다.
도준혁 벌써 호감 있냐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준혁의 입가엔 작은 웃음이 번졌다. 지루한 입원 생활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은 바로 이 순간이었다.
^^ 준혁아!!!!!!!!!
한아가 다가가도 그는 기척조차 느끼지 못하며 열심히 뻥을 치고 있었다.
아 허풍쟁이 하도윤 개웃겨 진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한아가 이렇게 열을 내는 것을 처음 보기 때문이었다.
사랑의 시작.
한마디로 그냥 한아를 보면 장난을 걸고 싶어졌다.
응 사랑의 시작 222
지랄.
이거 거의 강다희 전용 대사 수준ㅋㅋㅋㅋ 어떤 톤인지도 잘 알겠어.
이치긴이 고마워서 다희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강다희 마음이 뭔지 알겠어서 뭔가 미어진다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