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전남 진도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되던 해 625전쟁으로 아버지 행방불명. 어머니는 행상으로 두 아들 뒷바라지. 진도 농협 계장으로 일하던 1981년 새벽, 잠든 다섯 살, 세 살 남매와 만삭인 아내를 뒤로하고 어머니(고 이수례), 동생(박근홍), 숙부(박경준)를 비롯한 가족 8명이 함께 연행되었다. 안기부 남산 지하 취조실에서 60여일의 고문 끝에, ‘아버지를 만나 두 차례나 월북하고 간첩활동을 했다’고 안기부 요원들이 시키는 대로 허위자백을 했다. 그런데 똑같은 상황에 놓인 어머니는 죽음을 넘나들던 그 혹독한 고문 속에도, 오로지 당신이 배 아파서 낳은 두 아들 걱정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부끄럽고 부끄러워 얼굴을 똑바로 쳐들고 하늘을 볼 수 없고, 어머니께 죄스럽기만 하다. 어머니는 4년, 선생은 18년 징역살이를 했다. 35세 가장이 쉰셋이 되어 세상에 나왔으나 가족들과 재회에 어려움을 겪었다. 현재 진도에서 양봉업. 2009년 11월 13일 서울고등법원에서 무죄판결.
![이수례.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truth2013.cafe24.com%2Ffiles%2Fattach%2Fimages%2F114%2F226%2F679b6b5cf13e34575f05bde6695e7de3.jpg) | 故 이수례 | 박동운 박근홍 씨 어머니. 진도군 쌍정리. 방 한칸 부엌 한 칸이 전부인 집에서 홀로 앉아서 하루를 난다. 1950년 전쟁이 나자 남편은 실종되었고 어린 세 남매를 데리고 서울에서 고향 진도까지 피난을 왔다. 막내아들은 병으로 잃었고 두 아들을 행상으로 키워 장가도 들이고 손자들도 생겼다. 남들처럼 사는가 싶던 1981년 3월, 서울 남산 안기부로 연행되어 며칠이 지났는지도 모를 날 동안 고문을 당하고 ‘진도가족간첩단’으로 조작되었다. 큰아들 18년, 작은아들 3년6월, 시동생 7년, 그리고 당신은 4년... 그렇게 온가족이 같이 징역을 살았다. 2009년 재심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2010년 5월 영원히 잠드셨다.
![박근홍.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truth2013.cafe24.com%2Ffiles%2Fattach%2Fimages%2F114%2F223%2F876532df5d7626553feb1129c30f3b74.jpg) | 박근홍 | 1947년 출생. 전매청에 근무하며 돌도 안 된 아이와 아내, 세 식구가 단란히 살던 어느 날 새벽, 러닝셔츠 차림으로 끌려갔다. 625때 행방불명되어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가, 간첩이 되어 내려와 포섭되어 간첩을 했다는 안기부의 각본대로 간첩이 되었다. 어머니도, 형도, 아버지처럼 따르던 숙부도... 둘째 딸은 간첩자식으로 살게 할 수 없어 미국으로 입양을 보냈다. 2009년 11월 서울고등법원에서 무죄판결.
![한등자.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truth2013.cafe24.com%2Ffiles%2Fattach%2Fimages%2F114%2F220%2Fa8c35a2a620f67820790a338ab9bfd58.jpg) | 한등자 | 전남 진도군 지막리에서 태어나 지막리 사람 박경준과 결혼. 시부를 모시고 6남매를 키우면서 새벽부터 밤중까지 농사일을 했다. 1981년 3월 남편, 조카 둘, 동서, 시누이가 끌려가고 자신도 “으리으리한” 남산에서 40일동안 고문을 당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시숙을 만나서 도시락을 싸주지 않았느냐는 허위자백을 강요하는 수사관들에게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지막리에서 훤칠하기로 으뜸이던 남편 박경준은 “풋노물 데쳐 논거 맨키로” 영 딴 사람이 되어 7년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청와대 앞에 거적이라도 깔고 우리 가족의 억울함을 풀어야한다”며 전국을 뛰어다니던 남편은 1998년 5월, 고문후유증을 끝내 견디지 못하고 잠들었다. 2009년 남편을 대신하여 무죄판결을 받은 법정에서 “우리 아배 평생 소원이 나 죄없소! 였다요”라며 한없이 울었다. 지금도 진도에서 경운기를 끌며 농사일을 하고 있다.
![이준호.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truth2013.cafe24.com%2Ffiles%2Fattach%2Fimages%2F114%2F217%2F90bed8be9ce19309619817de2d927034.jpg) | 이준호 | 1949년 강화도에서 태어났다. 부친과 숙부가 625전쟁 당시 행방불명되고 고향 강화에서 조부모와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1969년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에 입학하여 영화감독을 꿈꿨으나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대우자동차에 입사했다. 조부모와 어머니, 두 딸을 둔 가장으로 자리잡아 가던 1985년 1월, 어머니(배병희)와 함께 치안본부 옥인동 대공분실로 불법연행되어 30여일 동안 고문을 당했다. “모자간첩”으로 조작되어 어머니는 3년 6월을, 선생은 조작된 사건을 인정할 수 없어 ‘전향’마저 거부하며 꼬박 7년의 징역을 살았다. 작은 체구에 붉은 오랏줄로 꽁꽁 묶여 재판을 같이 다니시던 어머니의 묶인 모습은 지금 떠올려도 가슴 아프다. 2009년 7월 서울고등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현재 트럭운전을 하고 있다.
![박춘환.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truth2013.cafe24.com%2Ffiles%2Fattach%2Fimages%2F114%2F211%2F5302c73f665db4fb50dd231c4d16fe10.jpg) | 박춘환 | 1946년 개야도에서 7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열다섯 살 부터 배를 타며 가장 노릇을 시작했다. 1968년 연평도에서 조기를 잡다 북한 경비정에 끌려가 4개월 만에 살아 돌아왔다. 아들도 낳고 비로소 행복을 꿈꾸게 된 1972년 1월, 군산경찰서 형사들에게 끌려가, “두 눈에서 피가 흐르는” 참혹한 고문을 당한 끝에 ‘납북되었을 당시 북한에 포섭된 간첩’으로 조작 되었다. 시도 때도 없는 경찰의 가택수사와 남편의 중형선고에 놀란 아내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고 홀로 남은 어린 아들은 친척들의 손에서 자랐다. 7년의 감옥살이 끝에 풀려났으나, ‘간첩’이라는 냉대와 경찰의 감시로 고향에서 살수 없었다. 연고 없는 충남 연기군으로 이사해서 공장 야간 경비근무를 했다. 2011년 대법원 무죄판결을 선고받았다.
![임봉택.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truth2013.cafe24.com%2Ffiles%2Fattach%2Fimages%2F114%2F208%2F47c16a96141b69142d1c505ea54a6ebd.jpg) | 임봉택 | 1947년 군산 개야도에서 태어나 열세 살 때부터 쭈꾸미 배를 타기 시작, 지금껏 바다에서 살아가는 어부. 1972년 1월 군산경찰서로 끌려가 ‘친구 박춘환이가 북한을 찬양, 고무하는 말을 듣고도 신고하지 않았다’며 불고지죄로 구속, 기소되었다. 그 때 거꾸로 매달아놓고 고문을 하던 수사관들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한다. 부친은 “봉택이는 간첩이라더라”는 동네 사람들의 따돌림과 비난을 견디지 못해 그만 자결하고 말았다. 지금도 아버지를 생각나면 “맘이 울컥하여 자다가도 일어나 눈물을 콱콱 흘리고 가슴에선 전기가 팍 일어난다”. 2011년 대법원 무죄판결.
![유명록.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truth2013.cafe24.com%2Ffiles%2Fattach%2Fimages%2F114%2F205%2F2dedd25b2f02dd1aa372d501e1812b8e.jpg) | 유명록 | 1946년 군산 개야도에서 태어나 어부가 되었다. 1968년 동네 친구이자 어부인 박춘환이 탄 조기잡이 배가 납북됐다 돌아왔다. 이와 관련 1972년 1월 군산경찰서에 끌려가 ‘박춘환이 간첩이라고 자백’할 것을 강요당하며 두 달 동안 고문을 당한 끝에 허위자백했다. 반공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살고 출소했다. “개야도에서 나고 자란 깨벅쟁이 친구들을 서로 의심하게 만든 사람들”이 원망스럽다. 40년이 지난 2011년 무죄판결을 받았다. 지금도 배를 타고 있다.
| 한화자 | 전남 진도에서 농사일과 해태 김 양식을 하던 1980년 음력 7월 초, 시어머니, 남편, 시동생과 함께 서울 남산 안기부로 끌려갔다. 53일간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풀려났지만, 남편(김정인)은 사형 선고를 받았다. 징역사는 남편대신 시어머니, 5남매를 키우느라 면회도 자주 못 갔는데, “한 10년 지나면 나갈 수 있을 거”라던 남편은 1985년 10월 31일, 사형 집행된 주검으로 돌아왔다. “창자가 끊어지고 애간장이 녹아날 정도로 억울”했지만, 다섯 아이들에게 남편의 죽음을 도저히 설명할 방법도 능력도 없이 세월이 흘렀다. 2010년 7월 서울고등법원은 “법원이 사법부 본연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진실 발견을 소홀히 함으로써 무고한 한 생명으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것은 아닌가 회한을 떨칠 수 없다”며 “이미 고인이 된 피고인의 넋이나마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고, 그 가족들의 명예가 회복”되길 기원한다며 무죄판결을 선고했다. 검찰이 상고했으나 대법원이 기각하여 무죄가 확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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