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벌써 퇴원해요? 아직 아픈데. 아야야."
도윤은 퇴원 절차를 밟으라는 간호사에게 배를 움켜쥐며 아픈 시늉을 해본다. 지루하고 무료할 것 같던 일주일이 벌써 지나가 버렸다. 도윤은 막상 퇴원하라니 섭섭했다. 아무래도 그새 이 병원에 정을 많이 준 것 같다. 그러잖아도 어제 최 반장과 동료 형사들이 와서 퇴원 언제 하냐고 시끄럽게 굴다 갔는데 정말 퇴원을 하게 될 줄이야…. 도윤은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병실로 들어왔다.
"나보고 퇴원하래요."
"축하해주려고 했는데, 퇴원하기 싫은가 봐요?"
베개에 머리를 비벼대던 도윤이 준혁을 바라봤다. 어떤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은 얼굴이지만 축하해주고 싶다는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는 듯했다. 진심일 수밖에 없었다. 형사랑 같은 병실을 쓴다는 게 여간 찝찝한 게 아니니까…. 잠자코 도윤의 행동을 주시하던 준혁이 침대에서 내려왔다. 도윤을 스쳐 지나가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래도 축하는 해줘야겠죠? 퇴원 축하해요."
준혁은 속삭이듯 말하며 병실을 나갔다. 단순히 축하한다는 말이었는데 그 말이 왜 이렇게 냉소적으로 들리는지… 도윤은 준혁이 사라진 병실 문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아무래도 준혁의 상처에 관해 이야기한 것이 이 분위기의 화근인 것 같았다. 도윤은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한 거 같아 두 손으로 머리를 쥐 뜯었다.
"에이 씨... 그때 괜히 팔 얘기를 해가지고..."
준혁은 아침부터 몸이 찌뿌둥해 산책이라도 할 겸 병원 밖으로 나왔다. 병원 밖은 건물 안보다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병원을 둘러싸고 있는 울창한 숲이 한눈에 들어왔다. 가을의 산뜻한 바람이 살랑 불어와 준혁의 가슴을 뚫어주는 듯했다. 준혁은 병원 앞에 마련된 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 준혁의 눈이 천천히 감긴다. 평온하다.
벤치 앉아 평화로운 오후 한때를 보내고 있던 준혁이 문득 눈을 떴다. 오늘 아침, 한아가 회진을 돌지 않았다. 단 하루도 빠짐없이 왔었는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오지 않았다. 준혁은 고개를 기울이며 한아가 있을 병원 건물을 올려다봤다. 높게 솟은 병원 건물이 어딘지 불안한 기운을 뿜고 있었다. 준혁의 눈동자가 짙게 변해갔다.
"저… 오한아 선생님 어디 가셨나요?"
병원 안으로 들어온 준혁은 한아의 밑에서 일하던 간호사를 붙잡고 물어봤다. 그러자 간호사가 눈에 띄게 당황하며 말을 얼버무린다.
"아 그게…"
"오늘 아침에 회진을 안 오셨더라고요."
"잠깐 어디 가셨어요."
말을 더듬는 간호사를 보며 준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디 가셨는데요."
"그건 선생님의 사생활이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만약 오한아 선생님이 자리를 비우셨다면 다른 의사라도 왔어야죠."
"저, 저는 잘 몰라요!"
간호사가 황급히 뛰어가 버렸다. 준혁은 누가 봐도 이상한 반응을 하는 간호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주위를 훑어보았다. 한아가 없다는 것을 빼면 평소와 다름없는 분위기. 준혁은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병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다인용 병실을 지나칠 때, 준혁은 아주머니들의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여기 S그룹 아들이 왔대, 글쎄! 그 아들이 지금 VIP실에 있다지?"
"그래, 뉴스에 한창이잖아. 망나니 아들 있다고 소문이 자자 하더니만 오토바이 몰다가 다쳤다며? 아직 어린애라던데."
"그러니까 회장이 그렇게 아들을 꼭꼭 숨기고 다녔지. 나 같아도 그런 망나니 자식 어디다 못 내놔."
"망신살이지 망신살. 아 맞다 맞아! 그 이야기는 들었어?"
누가 이야기를 듣든 말든 입방아 찧기에 신난 세 명의 아주머니들. 모두 오랜 병실 생활에서 친분을 튼 사이 같았다. 준혁은 대한민국 아줌마들은 참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걸음걸이를 옮겼다. 그러나 그 뒤로 흘러나오는 이야기에 그의 걸음이 우뚝- 멈춰졌다.
"여기 의사 한 명이 그 아들내미 시계 훔쳤대. 그 시계가 엄청 비싼 거라 아들이 노발대발 난리가 났다는 거야, 글쎄."
"어머, 어머. 간도 크다. 의사면 돈도 많이 벌 텐데 왜 그랬대?“
”S그룹 아들이 그냥 비싼 거 끼겠어? 한정품 이런 거 꼈겠지.“
준혁은 방망이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한동안 멍한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다 목에 걸린 깁스를 풀고 다른 손에 꽂혀있던 링거를 거칠게 빼내며 비상구 계단을 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VIP 병실은 병원의 가장 꼭대기 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몇 층을 뛰어 올라왔는지 모르겠지만 준혁은 작음 숨소리조차 내뱉지 않았다. 굳건히 닫혀있는 비상구 문고리를 잡았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보이는 것은, 고급 원단의 카펫과 화려하게 장식된 화환들. 그리고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경호원들. 준혁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경호원들 때문에 들어갈 수가 없다.
아무리 틈을 노려보려 해도 단 1초의 빈틈도 나지 않는다. 준혁은 초조한 마음을 뒤로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섬광처럼 떠오른 누군가의 얼굴에 준혁은 비상구 문을 도로 닫으며 미친 듯이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단숨에 계단을 뛰어 내려온 준혁은 도윤이 있을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도윤은 병실에서 짐을 챙기고 있었다. 거기다 사복 차림이다. 헐레벌떡 뛰어온 준혁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뜨던 도윤이, 거칠게 링거를 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팔을 보며 더욱 놀란다.
"도준혁 씨, 꼴이 왜 그 모양…"
"하아, 하아… 좀 도와주시죠."
준혁은 도윤의 말허리를 잘라버리고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한 번도 준혁이 침착하지 않은 모습을 본 적이 없는 도윤이 얼레벌레 끌려가며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무, 뭔데요?!"
"시간이 없어요. 가면서 설명해요!"
준혁은 아예 도윤의 손을 낚아채 뛰기 시작했다. 준혁보다 키가 큰 도윤이 질질 끌려가는 모습은 그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좋은 구경거리를 선사하는 꼴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지 그들은 빠르게 엘리베이터에 당도했다. 한숨을 돌리고 나서야 준혁이 입을 열었다.
"오한아 선생님. 오늘 아침 회진 안 오신 거 알죠.”
“아, 네... 그래서 나도 찾고 있었는데.”
“누명 쓴 것 같아요.”
도윤은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듯 표정을 일그러뜨렸다가, 곧 자신들이 꼭대기 층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과 준혁의 말에 대략적인 상황 파악이 되기 시작했다. 며칠 전, 이 병원에 실려 온 S그룹의 아들, 오늘 아침 회진을 돌지 않은 한아. 그리고 그들과 관련되어 한아가 누명을 쓰게 됐다.
엘리베이터가 꼭대기 층에 도달하자 밖에 있던 경호원들이 살벌한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을 쳐다봤다. 준혁 역시 그들에게 뒤지지 않는 눈빛을 보내며 맞대응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오른쪽에 서 있던 경호원이 물었다.
"강서구 강력반 형사, 하도윤입니다."
도윤이 경찰 수첩을 꺼내 들며 대답했다. 그 모습이 늠름하게 보여 준혁은 처음으로 도윤이 형사라는 게 마음에 들었다. 어떤 공격도 다 막아낼 듯 냉철하게 서 있던 경호원들이 경찰 수첩을 보고 당황하자, 도윤이 당당하게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을 열자 병실에는 한아를 비롯한 강순철 과장, S그룹 회장과 관계자들이 죽 들어서 있었다. 그 많은 사람이 있는데도 병실은 넉넉하게 크다는 사실이 배알이 꼴렸지만 놀란 표정의 한아가 우선이었다. 평소보다 기운이 없어 보이는 몸, 축 처진 어깨와 눈, 그리고 어두운 표정. 도윤은 한아의 표정만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김 실장, 경호를 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어어. 경호원들 혼내지 마시죠. 강서구 강력반 형사, 하도윤입니다.“
비서로 보이는 남자가 소리치자 도윤이 능글맞게 사이를 파고들며 아까와 똑같이 경찰 수첩을 들이밀었다. 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도윤은 여유로움을 놓치지 않으며, 오히려 뻔뻔하다 싶을 정도로 당당한 얼굴로 비서를 보며 말했다. 비서가 굉장히 못 미덥다는 눈으로 찬찬히 도윤의 위아래를 훑어본다. 그 눈빛이 굉장히 건방지고 짜증스러웠지만, 도윤은 자신이 지금 완전히 당당한 입장으로 들어온 게 아니기에 가만히 있었다. 그리곤 곧바로 비서를 지나쳐 병실 중앙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아는 도윤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지금의 일이 매우 수치스럽게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푹신한 1인용 소파에 앉아있던 S그룹 회장이 입을 열었다.
"형사 나리가 왔으니 다행이군. 당장 이 의사를 연행해 주게."
회장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 회장의 옆에 있던 강 과장은 혹여 이 일 때문에 기부금이 날아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모습이었다. 그는 회장의 옆에 딱 달라붙어서 한아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배은망덕한 년! 내가 널 어떻게 가르쳤는데!“
도윤과 준혁은 강 과장의 태도가 몹시 마음에 안 들었다. ‘년? 녀언?’ 자신의 직계부하를 감싸주지는 못할망정. 도윤은 강 과장을 째려보고는 사건의 피해자라 말하는 S그룹의 아들을 바라봤고, 그 아들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도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너 이새끼 왜 여기 있어!?”
도윤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S그룹 아들이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황급히 피했다. 도윤의 반응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도윤을 쳐다봤다.
"너, 꼴에 갑부집 아들이었냐? 어쩐지 네가 그 지랄을 하고 다녀도 매번 운 좋게 빠져나간다 했어."
도윤은 그를 잡아먹을 듯이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며 다가갔다. 그는 '10대 폭주족 뺑소니' 사건에 연루된 놈이었다. 그 사건은 10대 폭주족들이 만취 상태에서 도로를 질주, 애꿎은 시민 하나를 덮쳐 죽게 한 후 도주했던 사건이었다. 10대라는 이유로, 그리고 위에서 내려온 지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녀석을 훈방조치 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애초부터 한아가 도둑질을 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지만, 녀석의 얼굴을 보니 더 기가 막혔다.
"이봐요 형사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회장의 표정이 굳어지자 비서가 정색하며 도윤에게 달려와서 무어라 소리를 질렀다. 한아는 무슨 말을 하고 싶지만 억울하게도 그러지 못하는 듯, 큰 눈에 눈물이 고인 채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도윤은 침대 옆에 마련된 의자에 앉으며 수첩을 꺼냈다.
"사건 경위부터 듣기로 하죠."
지금, 이 순간, 도윤의 눈빛이 날카롭게 바뀌고 있었다.
사건은 간단했다. 회장 아들이 한아가 회진을 다녀간 후 자신의 시계가 없어졌다는 이유로 한아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그리고 한아는 자신의 도둑질을 자백했다. 중간에 비서가 자신이 이야기한다며 계속 끼어들었지만, 도윤이 무시했다.
"애미애비도 없는 게, 뻔하지. 어릴 때부터 도둑질이 습관이 됐던 거야. 쯧쯧.“
강 과장의 망언에, 순간 의자에 앉아있던 도윤과 병실 문 밖에 서 있던 준혁의 숨소리가 멈췄다. 언제나 완벽해 보이던 한아의 출생 비밀을 알아서였을까? 아니면 '고아는 불쌍하다'라는 고정관념 때문일까. 아니, 둘 다 아니다. 그저 강 과장이 미친 발언을 했다는 것. 그리고 그 발언이 한아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리라는 것 때문이다. 도윤이 앉고 있던 의자를 팍 걷어차며 이를 갈았다.
”아저씨.“
”......“
”좀 닥치세요.“
도윤이 난폭한 행동을 보이자 또다시 병실에는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도윤은 지금 상황이 무척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나머지 사람들을 쳐다봤다. 번득거리는 그의 눈빛에 강순철과 장은 꼬리를 내렸고, 비서도 그와 말싸움을 피하겠다는 듯 안경을 검지로 밀며 시선을 돌렸다.
"이 사건과 관련 없는 분들 다 나가요.“
그는 활짝 열려있는 병실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성깔 드러내며 욕을 내뱉었지만, 그것도 많이 참고 있는 것이었다.
"이봐 형사 양반. 내, 아들놈 하나 믿고 살아온 인생이오. 아들놈이 이런 꼴을 당했는데 어떻게 그냥 나가겠는가. 별일 아니라고 해도 어쨌든 절도사건도 범죄에 해당...”
“저기, 실례합니다...”
회장이 화가 난 도윤을 타이르듯 조심스럽게 말하는 사이, 병원을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들어오셨다. 그리고 그 아주머니가 들어온 순간, 병실 안 모든 사람들이 서로 다른 이유로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왜냐하면 바로 다음에 이어질 스토리가 너무 뻔했기 때문이다.
“청소를 하다가 이런 걸 발견했는데... 한눈에 봐도 보통 물건은 아닌 것 같아서 이리로 왔지요. 여기 분들 것 맞죠?”
아주머니가 민망할 정도의 정적이 감돌았고, 모두의 시선이 한아와 도윤, 그리고 회장 아들을 훑었다가, 마지막에는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롤렉스 데이토나 레오파드(한화 2억 상당, 한정판.)가 빛나고 있었다.
아주머니가 조심스레 경호원의 손에 그것을 쥐어주고 나갔고, 회장은 한숨을 지으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아들이 하도 발악을 하길래 그런 줄만 알았다. 비서도 한아의 자백을 받았다고 했고, 한아가 아무말이 없었기에 믿었던 것이다. 회장은 눈앞이 깜깜해지면서 진한 현기증을 느꼈다.
도윤의 차가운 시선이 닿자 회장 아들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누군가의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도윤은 침대 왼쪽편으로 자리를 이동해 바짝 다가섰다. 차갑던 도윤의 얼굴은 점점 평온해졌고, 그 표정에는 아무런 자비도 없었다.
“왜, 그리고 어떻게 저 선생님이 범행을 시인하게 했는지 불어.”
“아, 쌤. 죄송해요. 내가 너무 아끼는 거라...”
“제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 장난기 어린 말투에, 결국 한아의 얼굴이 시뻘개지더니 참고 있던 분노가 터져나왔다. 그녀는 자신의 분노를 어떻게 쏟아내야 할지, 사람이 너무 억울하면 말이 나오지 않는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갑자기 터진 그녀의 고함에 강 과장은 충격을 받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아의 눈에는 투명한 물기가 가득 고여있었다.
"전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과장님이 시키는 대로! 아드님이 시키는 대로! 입 다물고 있었어요! 저한테 이러시면 안 되는 거잖아요! 안 되는... 하아, 하아...!"
끓어오는 분노를 얼마나 참고 있었는지 한아는 반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한아는 그대로 병실을 걸어 나가 버렸다. 강 과장은 여전히 충격받은 표정으로 한아의 뒤통수를 바라봤다. 그리고 곧 사건을 수습하려는지 굽실거리며 한아의 뒤를 따라 나갔다. 도윤은 한아의 말이 신경 쓰였다.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도윤은 거대한 손으로 뒤통수를 맞은 듯 정신이 멍해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S그룹 아들의 조용한 목소리.
"아, 재미없어. 서민 가지고 놀았던 것 중에 제일 재미없네. 형사까지 끼어들고."
S그룹 아들은 아주 조그맣게 말했지만, 도윤의 귀에는 마이크에 대고 말하는 것보다 더 크게 들려왔다.
도윤은 눈앞이 노랗게 변해갔다. 결국, 이 사건은 저 개 같은 회장 아들의 장난질이었다. 그리고 억울하게 놀잇감이 된 한아는... 도윤은 아랫배에서부터 목구멍까지 참을 수 없는 뭔가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가 회장 아들에게 돌진했다.
"야 이 개새끼야!!“
도윤이 이성을 잃으며 침대에 누워있는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주먹이 귀 뒤로 높게 들렸고 곧바로 녀석의 얼굴로 떨어졌다. 그러나 뒤에서 끌어당기는 힘에 주먹은 빗나가고 말했다.
"진정해요!"
어느새 준혁이 뛰어 들어와 도윤의 몸을 잡고 있었다. 도윤은 허공에다 주먹이며 발을 마구 휘둘러댔다.
"놔! 이거 놔!!"
"정신 차려요!!"
준혁은 오른손을 붕대로 감고 있었기 때문에 이성을 잃은 도윤을 말리는 게 역부족이었다. 결국 밖에 있는 경호원들에게 도움을 청했고 경호원들이 도윤을 양옆으로 붙잡아 병실 밖으로 끌고 나왔다. 도윤은 병실을 나오고 나서도 한참 동안 악을 써댔다. 간신히 자신들의 병실로 돌아온 준혁은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것 같은 도윤을 감시하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하아...“
"이제 좀 진정이 돼요?"
어느 정도 도윤이 안정되자 준혁은 밖에서 음료수 두 캔을 뽑아 왔다. 그의 숨소리와 표정은 많이 가라앉은 듯했지만, 여전히 불만이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준혁이 음료수 캔을 건네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도윤은 입을 꾹 다물고 앉아 주먹으로 침대만 퍽- 퍽- 쳐댔다.
"왜 말렸어요? 그런 새끼 반은 죽여놔야 하는데."
"그래도 살인은 안 되죠."
"준혁 씨는 참 성격도 좋네요. 그 새끼 보고도 그렇게 침착할 수 있다니."
그러자 준혁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음료수를 한 모금 마셨다. 도윤으로선 준혁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게 당연했다. 그런 말을 듣고도 그 누가 가만히 있겠는가. 정말 든든한 뒷배경이 아니었다면 그 자식은 벌써 황천길을 걷고 있을 게 뻔했다. 도윤은 음료수 뚜껑을 거칠게 따내며 벌컥벌컥 들이켰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탄산이 타들어 갈 듯 따끔거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준혁은 뜻 모를 눈으로 도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가 완전히 기울고 까만 하늘이 짙게 깔린 밤이 찾아왔다. 응급실은 여전히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응급실을 제외한 병원 내부는 일과를 마무리하듯, 점점 고요해 지고 있었다. 몇 시간 전, 여러 사람이 쳐들어와 시끌벅적했던 VIP 병실은, 지금 가습기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만이 병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누구도 이 고요함을 방해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병실의 한구석에서 아주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으음…"
S그룹 아들은 단잠에 빠져있었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병실 문이 열렸다. 왁스칠을 잘해놨는지 문 마찰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어두컴컴한 병실에 낯선 남자의 그림자가 침입했다. 병실의 기운은 그의 등장으로 곧 냉기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던 S그룹 아들은 으스스함에 살짝 눈을 떴다. 무서울 정도로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있었고, 반쯤 걷어낸 병실 블라인드 사이로 은은한 달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오늘따라 차가운 병실 기운에 몸을 부르르 떨며 이불을 움켜쥐었다. 그때 그는 고요한 병실 안에서 다른 낯선 이의 존재를 느꼈다. 눈을 재빠르게 굴리며 고개를 돌리는 찰나, 그의 미간에 시리도록 차가운 물체가 닿았다. 그는 화들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총이었다. 비명을 지르려고 할 때, 그의 귓가에 소름 끼치도록 나긋한 동시에 소름 끼치도록 살벌한 음성이 들려왔다.
"사람 목숨 가지고 노는 거, 참 쉬워.“
자신을 머리를 겨누고 있는 총 때문에 그는 이성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목구멍은 콱 막힌 듯 아무런 말도 새어 나오지 않았고, 온몸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총을 겨누고 있는 사내에는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미 그런 행동을 여러번 해봤다는 듯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사, 사, 사, 살려주세요."
"부자들은 돈으로 사람 목숨을 흔들고, 난 총으로 사람 목숨을 흔들곤 해."
"... 제, 제발… 살려… 주세… 요."
"돈은 돌고 돌며 죽은 사람도 살려내지만, 총은 거짓말을 못 해."
병실이 어두워 남자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이 남자가 오늘 있었던 사건과 관련된 남자란 것을 깨달았다. '그 형사인가?' 마른 침을 삼키며 생각했다. 그러나 처음 듣는 목소리였고, 형체 또한 형사보다 작아 보였다. 그리고 도윤에게서 느껴졌던 살기와는 또 다른 기운. 이 남자에게선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강한 살기가 느껴졌다. 어떻게든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에 재빨리 입을 열었다.
"자, 장난이었어요."
장난이었다는 그 말이 이 남자를 더 자극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미간에 닿았던 총이 그의 콧등을 타고 내려와 입으로 향했다. 그는 극도로 심해진 공포감에 온몸이 굳어가는 것 같았다. 차가운 총구가 입술에 닿았고, 살짝 벌어진 입 사이로 총이 들어와 치아와 맞닿았다. 그리고 철컥- 소리와 함께 총이 장전됨을 알렸다.
"장난이라는 말로는 당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그럼, 나도 지금 장난을 치는 중이겠네."
"… 으… 윽…"
그는 공포에 절어 힘겨운 신음을 내뱉었다. 모든 신경이 입으로 쏠렸고, 정신이 아찔해졌다. 하늘이 노랗게 변하는 것 같았다. 그의 눈에선 어느새 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나왔고, 입에선 허연 침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던 수술 부위의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는 사람 목숨으로 장난치지 마."
남자가 총을 거두며 말했다. S그룹 아들은 눈물, 콧물을 닦을 기운도 없었다. 그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눈물을 질질 흘리며 허공을 바라봤다. 그 남자는 총에 묻은 끈적한 침을 닦아내며 병실을 빠져나갔다. 남자가 병실을 나가자 차가운 기운으로 가득했던 병실은 제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남자는 총을 가슴팍에 숨기며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경호원들에게 웃음 지어 보였다.
"야근하려면 힘드시겠어요."
완전히 달라진 남자의 모습. 경호원들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의 말에 대답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온 남자는 오른 어깨를 붙잡으며 자신의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병실에 들어서자 조명등을 키고 앉아있는 도윤이 눈에 들어왔다.
"오밤중에 어디 갔다 와요. 팔 다 나았어요? 붕대는 왜 풀었대."
"… 다 나은 것 같아서 한 번 풀어봤어요. 근데 아직 무리인 것 같네요."
준혁은 침대 위에 있던 붕대를 팔에 감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잡아보는 총. 준혁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비록 총을 들고 있는 게 버거웠지만, 감각은 그대로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