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 지역대표급 건물, 특히 백화점 건물 외벽에 미디어 파사드가 설치된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어떤 건물은 아예 외벽에 패널을 달아 홍보를 위한 미디어아트 전시에 할애하는 경우도 있다.
21세기를 살아가면서, 코로나 시대를 거치면서 미디어라는 소재가 너무나 친숙하고 다양하게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있다. 미디어를 통해 의식주가 변하고 생활이 달라진다. 심지어 취업에도 사용자 저작물(ucc)이 제출될 정도다,
미디어라는 말이 우리에게 더 친숙하게 다가온 배경으로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영향력을 떠나 캔버스가 아닌 텔레비전을 사용한 작품 세계가 어디를 가든 눈에 들어온다. 길거리에서도 집 거실에서도 방에서도 손안에서도 비디오를 감상할 수 있는 멀티시대가 우리 눈 앞에 펼쳐진다. 그러다 보니 멀티시대가 우리에게 충분조건은 아닐지라도 필요조건이 돼 있는 게 사실이다.
요즘은 굳이 작가가 아니라도 미디어에 관심만 있다면 누구든 충분히 미디어 예술작품을 만들 수 있다. 이미 우리는 유튜브 시대에 살고 있지 않는가. 미디어 아트 즉 융합예술은 사진, 전화, 영화 등과 같은 기술들을 활용하는 예술을 말한다. 뉴미디어 아트라고도 불린다. 매체예술로 번역되기도 하고 화학, 기계 등 매체 기술을 사용하는 예술로 정의되기도 한다. 1960년대 텔레비전과 방송의 등장으로 대중매체가 도래한 이후 위성방송, 인터넷, 웹사이트, 컴퓨터를 이용한 멀티미디어, CD-ROM, DVD 등 가상현실을 활용하는 방향으로 확장됐다고 정의되기도 한다.
이 중에서 컴퓨터나 인터넷 등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고 탐구하는 예술을 뉴미디어 아트라고 한다. 뉴미디어 아트라는 용어는 새로운 매체를 사용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을 뿐, 미디어아트라는 용어와 뚜렷이 구분되어 사용되는 건 아니다. 뉴미디어라는 용어 자체가 시대에 따라 가변적이기 때문에 부적합하다는 지적도 일부에서 나온다. 가령 과거에는 비디오가 새로운 매체였지만, 오늘날에는 CD나 USB조차 기성매체가 됐으니 말이다. 사실 뉴미디어아트 뿐만 아니라 미디어 아트라는 용어도 매우 광의적이고 모호한 것이다. 넓게는 행위예술(퍼포먼스)이나 신체예술(바디아트)도 미디어아트에 포함될 수 있다. 이는 넷아트, 웹아트, 상호작용 예술 등의 용어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이러한 용어 정의의 모호성은 아직 이런 예술이 진행되는 단계에 있어 작가, 관객, 대중, 평론가, 예술시장 등 관련자들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이런 양상은 다양성과 혼종성이 강조되는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문화의 일면이기도 하다.
미디어아트가 기존의 예술과 다른 점은 작가와 관객의 상호작용에 있다. 전통적인 예술, 즉 회화나 조각은 정적인 제작물로서 심리적 상호소통이 우선적인데 비해 미디어아트는 대중매체를 이용함으로써 심리적 상호작용뿐만 아니라 인터페이스를 통한 물질적인 상호작용도 일어난다. 은유적인 대중과의 소통이 보다 직접적으로 바뀐 것이다. 대중매체가 발달 된 오늘날 미디어아트는 단순한 예술을 넘어서 일상으로 발전하고 있다.
인터넷이 대중화되고, 스마트폰이 상용화되면서 미디어아트 소재가 다양해지자 여러 지자체가 앞다투어 미디어아트를 진행하고 있다. 울산 시립미술관 개관전에서도 볼 수 있었다. 미디어아트의 창시자, 백남준의 거북작품이다. 166대 TV모니터를 거북 형상으로 설치한 이 작품을 울산시립미술관 관계자는 "`거북`은 미디어아트 특화 미술관을 지향하는 울산시립미술관의 소장품"이라며 "기술과 자연의 조화, 현대와 역사의 융합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미디어 아티스트들은 과학과 공학기술을 기반으로 여러 가지 미디어아트 작품을 만들어 왔고 앞으로도 과학과 공학 기술은 미디어아트의 변함없는 필수요소일 것이다. 미디어아트는 당대의 기술들을 특징화하는 경향이 있고, 기술적 영역에서 드러나지 않은 잠재력을 발견하기 위해 미디어 아티스트들은 실험적인 작품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미디어아트가 그 시대의 기술 발전을 주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문화의 발전에 따라 같이 발맞추어 진화하고 발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