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소정의 문학마실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사랑방 이야기 스크랩 [권이종의 ESSAY] 막노동하다 派獨 광부 지원해 끈기로 버틴 막장 생활
ginasa 추천 0 조회 52 15.01.08 01:1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권이종의 ESSAY]

奇蹟(기적)을 만든 50년 전 치열했던 時節

막노동하다 派獨 광부 지원해 한민족 끈기로 버틴 막장 생활


권이종교수
권이종 한국교원대 명예교수·전 파독 광부
몇 년 전 '국제시장' 제작진이 영화를 만든다며 파독 광부 시절 이야기를 취재해간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영화 '국제시장' 첫 부분부터 나오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 이야기는 바로 우리 부부의 이야기와 같기 때문에 처음부터 영화에 몰입해 버리고 말았다.

우리 부부는 치열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 추억에 잠겼다. 너무나 가난했기에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선택한 길이었지만 쉽지 않은 길이었다. 섭씨 37도에서 40도에 가까운 지열(地熱)과 탄가루가 가득해 매캐한 막장에서 우리는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극한의 환경을 경험했고 "글뤽 아우프(살아서 만나자)"라는 인사를 나누며 하루하루를 버티었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이역(異域)에 볼모처럼 와서 우리나라도 잘살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가족을 위해 매일매일을 버티려고 고향에서 날아온 편지를 읽고 또 읽고 동백아가씨는 매일 밤 들어야 잠이 올 정도였다.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방문했던 1964년 12월 10일, 행사장에 울려 퍼진 애국가는 그 누구도 다 부르지 못하고 눈물바다가 되었다. 박 대통령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라가 못사니 한국 젊은이들을 독일 막장으로 보내 지하 수천 미터에서 일하는 여러분을 보니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외교관처럼 열심히 일하고 독일 기술도 배워 우리 당대에는 못살더라도 후세대들에게 부강한 나라를 물려줍시다." 연설이 이어질 때 한없이 흐느껴 울었다. 이후 누군가 애국가나 아리랑을 부르면 모두 감정에 북받쳐 울음바다가 되기 일쑤였다.

나는 전라북도 장수 시골마을에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서울에 올라와 막노동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독일 광부를 모집한다는 신문광고를 보고 다시 없을 기회를 놓치지 않고자 무작정 지원했다. 광부가 되기 위해서는 영화에서처럼 신체검사와 50kg 모래 가마니 들기를 비롯해 역기 들기, 턱걸이 등을 통과해야 했다. 그 외에도 광산 근무 경력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브로커를 통해 허위 경력을 사고파는 일이 빈번했다. 체중이 60kg이 안 되어 미달이었던 사람들은 내의 속에 쇠뭉치를 넣기도 했고 신체검사 직전 자장면이나 수돗물을 잔뜩 먹어서 체중을 늘린 사람도 있었다.

에세이 일러스트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독일 광산에 도착해 보니 독일인 체형에 맞춰진 무거운 연장은 이런 시험들이 왜 필요했는지 절감할 수 있었다. 사고로 다치거나 목숨을 잃는 이들의 소식은 광부 경험이 없는 사람을 왜 걸러내려 했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지하 수천m 막장의 작업 환경은 모든 움직임이 생과 사의 갈림길이었다. 자욱한 석탄가루는 마스크로도 해결할 수 없어 차라리 코담배로 버텼고, 언제 천장이 무너져 죽을지, 가스가 폭발할지, 발을 잘못 디뎌 기계에 말려들어 가거나 떨어지는 돌덩이에 깔리진 않을지,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목숨을 담보로 한 하루 8시간 근무는 마치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한국인이 대단한 것은 추가 근무수당을 받아 가족에게 조금이라도 더 보내기 위해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근무 후에 또다시 막장으로 향했다는 사실이다. 탄광업체와 다른 나라에서 온 광부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의 집념과 노력은 왜 한국이 다른 저개발국들과 달리 독보적으로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한다.

크고 작은 사고를 무수히 겪으며 광부 임무를 마쳤고 현지 지인의 추천으로 독일 국립사범교육대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그때 그분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을 것이다. 독일 탄광은 힘든 광부 생활뿐 아니라 아내와 만날 수 있었고 대학교수가 될 기회를 준 곳이기도 하다.

영화가 끝나고 손녀가 살며시 내 손을 잡는다. "할아버지가 이 손으로 석탄을 캤구나. 많이 아팠어?" 딸은 아내를 꼭 끌어안으며 "엄마, 고마워"란 말을 속삭였다. '국제시장'은 가족의 소중함과 한국의 근현대사를 이끌어온 아버지·어머니들의 이야기다. 광복 이후 또는 6·25전쟁 이후 기성세대들이 어떻게 이 나라를 만들어왔고 가정을 지켜왔는지를 보여주는 교육적 효과가 큰 영화라고 생각한다.

'한강의 기적'은 우리네 아버지들의 피땀과 밥은 못 먹어도 학교는 보내려고 희생했던 어머니들의 교육열로 이룩한 기적이다. 귀국하고 한국교원대 교수로 재직하며 교육의 힘을 절감했던 나는 은퇴 후 교육을 통해 또 다른 기적을 일으키고자 아프리카아시아난민교육후원회라는 국제구호단체를 이끌며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다. 원조 수혜국에서 원조국으로 발전한 유일한 국가인 대한민국의 발전 경험은 수많은 개발도상국의 롤모델이 되고 있다. 많은 방법이 있겠지만 나는 '교육이 희망'이라는 신념을 갖고 교육을 통해 이들을 돕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굶주리고 고통스러웠던 나의 어린 시절 모습을 꼭 닮은 아이들을 배고프지 않게, 공부할 수 있게 도와주는 일은 두 번째 삶을 사는 것처럼 행복하고 보람되다. 영화 '국제시장'을 통해 많은 사람이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지금 우리의 과거를 살고 있는 아이들에게 작은 관심과 배려를 나눈다면 세계 곳곳에서 또 다른 '한강의 기적'을 목격할 수 있지 않을까.


    ● 출처 : 조선일보 2015.1.7 /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