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이 도대체 어떤 산인가요
비록 지방에 속해있긴 하지만 대도시인 경상남도 창원에서 자란 나에게 국립공원은 참으로 먼 존재일 수밖에 없다. 서울이나 지하철에 사는 이라면 지하철을 타고 북한산 국립공원에 쉽게 갈 수 있지만 창원에서는 반드시 시외버스를 타야 국립공원에 갈 수 있다. 가장 가까운 국립공원은 통영과 거제를 통해 갈 수 있는 한려해상 국립공원이다. 한려해상 국립공원에 속한 아름다운 섬은 숱하게 많이 볼 수 있었지만 산악형 국립공원에 가려면 큰 맘을 먹어야 한다.
가야산 국립공원
경상남도에 속해있는 산악형 국립공원은 지리산과 가야산이다. 지리산이야 워낙 유명한 산이고 한라산 다음으로 높은 봉우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르는 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가야산은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속리산・계룡산・무등산 등 다른 지역의 국립공원에 비하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가야산은 경상도 출신인 나조차도 낯선 이름이었다.
가야산 국립공원의 진달래
가야산 국립공원 홈페이지에 들어가 지도를 살펴보니 지리산에 비해 규모도 작고 탐방로 또한 간단하기 그지없었다. 주봉인 상왕봉으로 가는 탐방로 두 개와 상왕봉을 북쪽으로 바라보고 있는 남산제일봉으로 가는 탐방로 두 개가 고작이었다. 지리산과 차이가 있다면 상왕봉으로 올라가는 초입에 엄청나게 많은 절과 암자가 있다는 점이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많은 절이 있나 하고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니 가야산이 품고 있는 절이 바로 ‘해인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야산의 상징인 해인사
‘한국의 산사’에 포함되어 있지 않고 단독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두 개의 절 중 하나다. 불국사가 불심으로 건설한 신라 시대의 화려한 건축물이라면 해인사는 우리 선조의 뛰어난 과학 기술을 알 수 있는 절이다. 많은 사람들이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알고 있지만,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것은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판전이다. 임진왜란에도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나무로 제작된 팔만대장경이 썩지 않도록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어 세계유산으로 등록될 수 있었다.
가야산의 실체를 알고 나니 시간을 내서 얼른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교 수학여행 때 들린 이후로 해인사에 가 본적이 없어 그 모습이 궁금하기도 했고, 가야산의 아름다운 풍광을 함께 볼 수 있어 즐거움이 배가 될거라는 기대가 컸다. 결심을 했다면 바로 실행에 옮기는 것이 좋다. 평일 어느 날 모자란 시간을 쪼개어 가야산에 가기 위해 창원에서 합천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국립공원 이야기 5 - 가야산 국립공원
가야산 국립공원은 1972년에 대한민국의 아홉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남부내륙 산간지역에 위치한 명산인 가야산은 예부터 해동의 10승지 또는 조선 팔경의 하나로 이름이 높았다. 면적은 76.256㎢이며 경상남도 합천과 경상북도 성주의 경계가 되고 있다. 주봉인 상왕봉은 1,430m 높이로 소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우두봉으로 불리기도 한다. 가야산은 명산의 기준이 되는 기암괴석과 아름다운 계곡을 둘 다 갖추고 있다. 회장암으로 이뤄진 산악경관과 화강암으로 이뤄진 홍류동 계곡이 있어 옛부터 가야산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가야산 국립공원 지도 (출처: 국립공원 홈페이지)
해동의 10승지는 <정감록>에서 나온 것으로, 전쟁이나 천재가 일어나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열 곳의 피난처를 의미한다. 10승지는 경상북도 영주의 풍기・경상북도 봉화의 춘양・충청북도 보은의 속리산・전라북도 남원의 운봉・경상북도 예천의 금당실・충청남도 공주의 유구와 마곡・강원도 영월의 정동・전라북도 무주의 무풍・전라북도 부안의 변산・경상남도 합천의 가야산을 가리킨다. 승지에 왕실이 있는 경기도와 북쪽 오랑캐의 침입이 잦고 추운 날씨인 이북 3도는 포함될 수 없었다. 왜적의 반복되는 침입으로 고통받는 경상남도 또한 피난처에 포함되기 어려운 지역이었지만 가야산은 당당하게 10승지 중 하나로 뽑힌 것이다.
가야산 국립공원 안내도 (출처: 국립공원 홈페이지)
가야산에 대한 명성을 모르는 이라도 가야산이 품고 있는 보물은 알 수밖에 없다. 불교의 성지인 가야산에는 법보사찰 (法寶寺刹)인 해인사 (海印寺)가 있다. 삼보사찰 (三寶寺刹)의 나머지 사찰인 양산의 통도사 (通度寺)와 순천의 송광사 (松廣寺)가 도립공원에 속해있는 것과 달리 해인사는 국립공원에 포함되어 있다. 해인사는 팔만대장경과 이를 보관하고 있는 장경판전을 갖추고 있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반드시 가봐야 할 절 중 하나로 꼽힌다.
너무나도 비용이 많이 들었던 가야산 탐방
합천시외버스터미널에 내린 시간은 오전 열시 정도였다. 해인사로 가기 위한 버스를 타기 위해 창구로 가보니 이게 웬걸. 터미널에서 해인사로 가는 버스는 하루에 고작 네 번밖에 운행하지 않았다. 농어촌 버스의 간격은 보통 길 수밖에 없는데 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은 내 탓이 컸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간표를 들여다보니 두 번째 버스의 출발 시간이 오전 9시 40분이었고 다음 버스는 오후 1시 10분에 있었다. 시간을 아끼려면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타야 했는데 이 또한 국립공원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해 생긴 불찰이었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산은 보통 높이가 높기 때문에 군이나 시, 크게는 도의 경계가 된다. 가야산 또한 경상남도 합천과 경상북도 성주의 경계가 되는 곳이다. 이 때문에 해인사가 합천에 속하긴 하지만 중심지인 합천읍에서 무려 37km나 떨어져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멋도 모르고 택시에 오른 내가 대충 얼마 정도 드는지 기사님께 물어봤을 때 기사님이 답변을 머뭇거린 이유는 비싼 요금 때문이었다. 택시를 탔음에도 해인사까지 가는데는 40분이 넘게 걸렸으며, 요금은 무려 4만원이나 나왔다.
가야산 칠불봉
이후에 안 사실이지만 해인사로 가는 가장 쉬운 방법은 대구에서 출발하는 시외버스를 타는 것이었다. 대구에서 해인사로 가는 버스는 하루에 무려 14번이나 있으며, 이는 명찰인 해인사로 가고자 하는 수요가 그만큼 대구에 있기 때문이다. 대구에서 해인사로 가는 거리도 그렇게 멀지 않아 1시간 30분이면 해인사 입구까지 갈 수 있다. 준비없는 여행은 항상 과소비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몸소 느낄 수 있었다.
홍류동 계곡
가야산의 홍류동 계곡을 제대로 느끼고 싶다면 해인사로 곧장 향할 것이 아니고 무릉교에서 내려 6km 거리의 가야산 소리길을 걸어야 한다. 오대산의 월정사 계곡 단풍을 즐길 때 상원사까지 가는 것이 아니라 월정사에서 내려 선재길을 걷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이 또한 준비 안 한 자는 얻을 수 없는 기회였다. 당시엔 소리길이 있는지도 모른 채 해인사 입구에서 내려 이른 점심을 먹으러 고바우 식당으로 향했다.
해인사 입구에는 산채비빔밥을 먹을 수 있는 식당이 많다. 고바우식당은 수많은 식당 중에서 맛있기로 정평이 난 곳으로 산채한정식과 산채비빔밥이 대표메뉴다. 아침식사도 먹을 수 있기 때문에 가야산 등산을 시작하기 전에 배를 든든히 하고 가면 좋다. 도시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채소가 곁들여진 산채비빔밥은 가야산의 또 다른 매력 중 하나다.
해인사 대적광전
해인사 버스터미널에서 해인사까지 거리는 2km 정도로 걸어서 30분이나 걸린다. 해인사로 향하는 길을 걷고 있으면 해인사가 품고 있는 암자로 향하는 샛길이 곳곳에 등장한다. 해인사는 그 명성답게 가야산에 수십개의 암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일주문을 거쳐 봉황문으로 향하는 길은 숲으로 우거져 있어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봉황문과 해탈문을 지나면 해인사의 전각들이 펼쳐진 마당에 들어선다. 해인사의 건물들은 숱한 화재 속에 재건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들은 대부분 조선 말기에 지어진 것이라 다른 유명한 사찰의 불당과 달리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지 않았다. 다른 건물들이 불에 타 없어지기를 반복할 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건물은 바로 대적광전 뒤편 언덕에 있는 장경판전이다. 장경판전의 팔만대장경이 수백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멀쩡한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는 모습을 실제 눈으로 보게 되면 우리 조상들의 과학기술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다.
해인사 장경판전
해인사를 뒤로 하고 가야산 최고봉인 상왕봉을 향해 걸었다. 해인사에서 1,430m인 상왕봉까지 도달하는 데 2시간 30분이 걸린다. 해인사의 고도가 해발 700m 정도라 조금만 힘을 들이면 정상까지 가는게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불교성지인 가야산 답게 상왕봉에 도달하기 직전 봉천대에 가면 보물 제264호로 지정된 석조여래입상을 만날 수 있다. 광배와 대좌도 없고 무릎 아랫부분이 잘려나간 상태지만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양식을 계승한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상왕봉에 오르면 가야산의 절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가야산의 상징은 해인사라는 문화유산이지만, 가야산의 자연풍경 또한 아름답기 그지없다. 가야산 소리길을 걸으면 단풍으로 유명한 홍류동계곡을 만끽할 수 있으며, 상왕봉에 오르면 마치 금강산을 연상케 하는 가야산 만물상을 만날 수 있다. 아직 푸른 잎을 피우지 못 한 정상부와 달리 만물상에는 다양한 식물들이 따뜻한 봄의 기운을 알리고 있었다.
하산은 해인사가 아닌 백운동으로 정했다. 백운동 지구는 성주군 수륜면에 속해 있으며 만물상을 통해 가는 가파른 길과 완만한 길로 나눠져 있다. 시간과 체력이 허락한다면 만물상 코스를 택했을 테지만 이미 해가 늬엿늬엿 지고 있었기 때문에 완만한 길로 가 빠르게 하산하기로 했다. 해인사를 통해 가는 탐방로와 달리 백운동의 탐방로는 온통 숲이라 꽃이 피어있지 않다면 다소 심심하다. 덕분에 오후 5시에 하산할 수 있었고 운좋게 성주로 향하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성주에서 백운동까지 가는 버스도 하루에 다섯 번밖에 있지 않아 조금만 늦었어도 한참을 기다리거나 택시를 탈 뻔 했다. 성주에서 대구로 가는 버스는 많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가야산은 해인사의 기운이 산 전체에 퍼져있는 듯 했다. 홍류동계곡에 펼쳐져 있는 수많은 암자와 대한민국의 국보이자 세계문화유산인 장경판전을 품은 해인사. 굳이 가야산 꼭대기까지 오르지 않더라도 가야산 국립공원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반드시 가봐야 할 여행지로 손꼽을 만했다. 하지만 가야산 국립공원을 처음 찾을 당시 서둘러 등산을 해야하는 바람에 해인사를 제대로 살펴보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해인사 곳곳을 자세하게 보자는 일념 하에 다시 가야산 국립공원을 찾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 것이다. 다행히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대장경 세계문화축전이 열렸고 축제와 함께 해인사에 묵을 수 있는 기회까지 있었다. 오직 해인사만 보기 위해 가야산 국립공원을 다시 찾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