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을 정립한 신학자, 정암(正岩) 박윤선
필자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재학하는 3년간 정암 박윤선 박사에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주석으로만 보던 정암에게서 성경신학의 정수를 배웠고 개혁주의 신학을 체계화하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지난후 필자가 총신 교수가 되었을 때 교수회를 모이면 정암과 사제동석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정암은 교정에서 필자를 만날 때마다 “내가 결혼 주례를 해 주기로 했는데 한 주일 전에 갑자기 입원하게 되어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암이 필자의 얼굴을 볼 때마다 늘 그 말씀하셔서 괜찮다고 그만 하시라고 해도 그는 만날 때마다 “결혼 주례 못해줘서 미안해요”라고 만날 때마다 늘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몇년이 지나도록 그것이 마음에 걸리셨던 모양입니다. 정암은 그런분이셨습니다.
정암에 대한 연구서가 여러 종류 나와 있기에 여기서는 통사적(通史的) 특성을 개진하려고 합니다.
정암은 1905년 12월 11일(음력)에 평안북도 철산군 백량면 장평동 351번지에서 박근수와 김진신의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9살 때부터 마을 서당에서 한학을 배워서 사서삼경을 암송할 정도였습니다. 19세 되던 해에 정암은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고향에서 30km 정도 떨어진 선천군 국산면 장공동에 있던 대동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간 공부했습니다. 이 학교는 1885년에 김도순이라는 부자가 사립으로 세운 일종의 기독교 학교입니다.
정암이 기독교를 접한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10대 중반으로 여겨지고 집에서 15리(6km) 떨어진 동문동교회에 나갔습니다.
그는 18세 때인 1922년 11월에 15세된 김애련과 결혼했습니다. 이때 정암은 대동소학교에 재학중이었습니다.
1923년 4월에 남강 이승훈이 세운 정주 오산학교 2학년에 편입했습니다. 그 학기 말에 교장 배척 데모가 일어나 방학식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정암은 1924년 봄에 보결입학시험을 치루고 선천 신성(信聖)학교 3학년에 편입했습니다.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습니다. 그는 신성학교 설립자인 양전백 목사가 시무하는 선천북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정암은 1927년(23세)에 숭실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1931년 3월에 졸업했습니다. 이 기간에 부인을 보성여학교에 입학시켜 4년간 공부하게 했습니다. 숭실에 재학하면서 방지일, 김진홍 등의 친구들과 함께 모란봉 뒤 숲속에서 새벽마다 기도를 하여 그들을 ‘조기부대’로 불리웠습니다.
정암은 하나님을 위해 평생을 바치기로 하고 1931년에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배웠습니다. 당시 교장인 나부열(Stacy L. Roberts, 1881-1946) 선교사와 여러 교수들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정암은 이 학교에서 평생지기인 방지일, 김진홍과 함께 <겨자씨>라는 잡지를 간행했고, 숭실중하교 학생 방문을 하는 사감 활동도 했고, 주일에는 모란봉 뒤의 가현리에 있는 가현교회 조사로 시무하기도 했습니다.
정암은 1934년 3월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제29회로 졸업하고, 가족을 고향인 철산 장평리에 초가삼간을 얻어 머물게 하고, 1934년 8월에 미국 유학의 길에 올랐습니다.
한국을 떠나 일본 고베에서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넜습니다. 망망대해에서 기도하면서 요한계시록을 전부 암송했습니다.
정암은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하여 1936년에 신학석사(Th.M.) 과정을 마쳤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평생의 동지인 한부선(Brouce F. Hunt,1903-1992)을 만났습니다. 또 칼빈주의 원리와 체계를 받아들여서 그의 신학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1936년 8월에 귀국하여 총회의 표준주석 작업과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원어 강사, 고등성경학교 강사 등을 하다가 신사참배 강요가 심해지자 1938년 가을에 다시 웨스트민스터로 유학을 가서 1940년까지 연구하였습니다. 주로 어학과 반틸의 변증학을 연구하여 개혁주의 신학적 입장에서 주석 작업을 할 기초를 마련하였습니다.
정암은 일본 도쿄에서 가족을 만났고, 1940년 3월에 만주의 신경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여러 교회에서 시무하면서 만주신학원(현 동북신학원) 신약학 교수로 후진을 가르쳤습니다.
해방이 되어서 귀국한 정암은 한상동 목사의 권유로 고려신학교 설립에 참여하였습니다. 1946년 5월에 ‘진해신학강좌’를 개설하고 3개월간 교육하다가 9월 17일에 고려신학교를 개교하였습니다. 여기서 교수로 가르치다가 초대교장 박형룡에 이어 2대교장으로 사역하면서 고려신학교의 개혁주의 신학을 정립하였습니다.
정암이 스스로 밝힌 바와 같이 그의 사역은 세 가지로 집약됩니다. 신학교육, 주석 집필, 목회와 설교가 그것입니다.
1949년에 (요한계시록 주석>을 시작으로 신구약 주석을 완간하는 위대한 사역을 이루었습니다. 이것은 한국교회사에서 기록할만한 일입니다.
정암의 연구는 계속되어 1953년 11월에 네델란드 자유대학교로 유학을 갔으나 부인의 교통사고 사망으로 연구를 중단해야 했습니다.
정암의 신학 교육 여정은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고려신학교, 개혁신학교, 총회신학교, 합동신학원으로 이어지며 이 땅에 개혁주의 신학을 뿌리를 내리게 하는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는 교수 사역을 하면서도 목회 또는 설교 목사로 강단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강단과 교단의 일치성을 몸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정암의 신학사상을 연구한 책과 논문들이 많습니다. 서영일의 <박윤선의 개혁신학 연구>는 서영일의 박사논문입니다. 또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가 간행하는 정암에 대한 연구서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암은 이 땅에 개혁주의 신학을 정초시킨 신학자입니다. 조직신학자 이승구는 정암의 신학사상을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의 신학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평생지기 방지일이 말한대로 ‘이 땅의 나다나엘’이었습니다. 그는 1988년 6월 30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정정숙, 삶의 길목에서 만난 사람들(서울:도서출판 베다니, 2016을 참고하세요).
출처 : 웨스트민스터 신학회 밴드에서 가져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