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히어로는 이 양반입니다.
1986년 1월 4일 Thin Lizzy의 메인맨 필 리놋이 사망했습니다. 밴드의 핵심 인물인 필 리놋은 1949년생으로 마지막 여름의 밤을 잡고 (8월 20일 생이다) 태어났다 필 리놋의 어머니 Philomena (Phyllis) Lynott은 아이리쉬계 독실한 카톨릭 집안의 여식으로 보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하여 런던으로 가서 일했는데 어느 날 매혹적인 남미계 흑인을 만나 아름다운 원 나잇 스탠드를 치루고 원치 않는 임신을 하고 만다 독실한 카톨릭 집안의 여식이었던 그녀는 비록 사랑하지 않는 남자의 씨앗이지만 지우지 않고 낳는다 만약 그분께서 독실한 카톨릭 신자가 아니었다면 필 리놋은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필 리놋은 이렇게 태어났는데 그의 어머니는 무지막지한 양육비를 벌기 위하여 필립(필의 애칭)을 자신의 고향인 더블린으로 맡기고 다시 런던으로 가서 열심히 일했다 이런 고로 필립은 본의 아니게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할아버지,할머니 글구 자신보다 나이가 10살 정도 많은 사촌들 사이에서 바둥 거리며 그다지 밝지 않은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필립이 처음 밴드에 들어간 것은 10대 초반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그 동네(더블린)에서 쪼까 잘 나갔다는 로칼 밴드 Black Eagles 에 가입하여 노래를 부른다 당시에 필립은 베이스를 연주하지 않고 노래만 전문적으로 불렀다고 한다 블랙 이글스에는 브라이언 다우니라는 드러머가 있었는데 이 녀석은 필립의 학교 친구로 이후 리놋이 죽는 날까지 그와 찰거머리처럼 붙어 지낼 운명에 처하게 된다 블랙 이글스는 그 동네에서 나름대로 잘 나갔다고 한다 당시 필립의 보컬 실력은 지금과는 달리 하이톤에 능통했고 상당히 히스테리컬 했다고 한다 웅?? 근데 씬 리지 시절엔 왜 그렇게 됐냐구?? 좀만 기둘려라~~ 내가 자세하게 설명해주겠다 필립이 18세 되던 날 그는 돌연히 블랙 이글스를 해체시키고 Brendan "Brush" Shiels' 라는 자가 이끄는 Skid row라는 밴드에 들어간다 (세바스찬 바하가 있던 스키드 로우와는 동명의 밴드) 밴드의 리더인 브러쉬라는 자는 필 리놋을 받아들인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당시 우리들은 멤버들에게 공짜로 대주는 그루피들이 필요했죠~~ 소위 빠순이들 말입니다~~ 노래를 잘하고 못하고는 사실 중요한게 아니었습니다~~ 당시 우리들이 원하는 프론트맨은 졸라 잘 생긴 놈이었죠 그래서 필립을 뽑은 것인데~~ 실제로 그가 들어온 후부터 그루피들이 많아졌죠 ㅋㅋㅋ" 1968년에 스키드 로우에는 새로운 기타리스트가 들어오는데 그가 바로 게리 무어였다 게리 무어의 가입은 스키드 로우의 사운드에 일대 혁신을 일으키는데 이것은 필 리놋에겐 일종의 위기의식으로 작용하게 된다 왜냐면 게리 무어는 기타만 잘 치는게 아니라 노래도 졸라 잘하는 뮤지션이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필 리놋은 노래 연습을 무리하게 한 듯하다 단순히 얼굴만 잘 생긴 보컬이 아니라 (근데 이 부분 좀 아햏햏하다~~ 암만 보아도 잘 생긴 얼굴 아닌데~~) 노래도 잘 하는 보컬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목에서 피를 토할 듯 악을 쓴게 분명하다 1969년에 스키드 로우는 자신들의 독자적인 인디 레이블에서 첫 싱글 New Faces, Old Places를 발표하는데 이것은 명실공히 필 리놋의 첫 번째 스튜디오 음반 (비닐) 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싱글 발매 후 필 리놋은 편도선 제거 수술을 위하여 밴드를 떠나는데 어느 누구도 그가 다시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 말인 즉슨 필 리놋은 떠났다기 보다는 숙청당했다고 보는게 옳을 듯 싶다) 우리나라에선 권위 있는 몇몇 평론가들에 의하여 필 리놋이 자신의 음악을 위하여 팀을 떠났다고 하며 게리 무어가 그것을 못내 아쉬워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명백한 거짓말이다 게리 무어와 필 리놋의 우정을 미화(??)하기 위한 소설이자 픽션,허구이다 필 리놋이 떠난 후에 게리 무어가 스키드 로우의 보컬을 맡아 앨범을 냈는데 그 음반을 들어보면 해답이 나온다 어쨌거나 스키드 로우에서 축출된 필 리놋은 음악을 자신의 직업으로 삼는 것에 대하여 많은 고민을 때리고 있었는데 이를 측은하게 여긴 브러쉬가 그에게 베이스를 사사해주기 시작한다 "노래를 못해두 음악을 할 수 있어~~" "근디 왜 베이스를 가르쳐 주시는 겁니까??" "아따~~ 이 염병할 놈아~~ 기타는 줄이 여섯 개라서 완숙하게 연주하는데 시간이 걸려부러~~ 걍 네줄이나 튕겨부러~~" 이렇게 해서 브러쉬로부터 베이스를 사사받은 필립은 빠른 시간 내에 베이스를 마스터 하게 되고 자신의 오랜 친구였던 브라이언 다우니에게 달려가서 소리를 지른다 "야!!!!! 이 새끼야!!!!!! 내가 돌아왔다~~ 나랑 다시 밴드 하자!!!!!" 브라이언은 필립의 목소리가 별루 마음에 안들었지만 그의 노력과 열정을 가상하게 여겨 다시 가담했고 이후 Pat Quigley,Joe Staunton같은 자들을 규합하여 Orphanage라는 밴드를 만들었다 브라이언은 이 밴드에 대해서 이렇게 회고한다 "이 밴드에서 사용했던 멜로디들은 대부분 초창기 씬 리지의 음악에 삽입되어 있답니다 확실히 이 밴드는 씬 리지의 전신이었죠~~" 브라이언은 계속 말한다 "당시 우리들은 히피사상과 마리화나,약물등에 심취되어 있었지요~~ 음악적으로는 전혀 개선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말이죠~~ ㅋㅋ 그래도 생각해보면 즐거웠던 시절이에요 ^^" 1969년말에 필 리놋과 브라이언 다우니는 에릭 벨이라는 기타리스트를 만나고 기존의 멤버들을 해고한다 사실 에릭 벨은 필 리놋에겐 별루 관심 없었고 브라이언 다우니의 빼어난 드럼 실력을 보고 씬 리지에 참여했다고 한다 1970년초 밴드는 이름을 Thin lizzy로 개명하고 키보드주자 Eric Wrixon를 수혈하여 본격적인 프로 밴드의 길을 걷게 된다 1970년 7월 31일 씬 리지는 The Farmer라는 싱글을 공개하는데 이것은 명실공히 씬 리지 최초의 음반이었다 이 시점에서 키보드 주자 에릭이 밴드를 떠나고 3인조가 된 씬 리지는 일주일에 4~5일 연주를 강행하며 자신들을 알리는데 이 시기에 대하여 씬 리지의 로드 매니저였던 Peter Eustace이라는 자가 한 마디 했는데 한번 들어보련?? "솔직히 씬 리지 초창기 시절을 회상하면 생각나는 사람은 에릭 벨 밖에 없어요 씬 리지는 사실 에릭의 밴드였죠~~ 솔직히 필 리놋은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지미 헨드릭스,제프 벡과 비견할 만한 에릭 벨의 기타 솜씨는 정말 굉장했죠!!!!!" 1970년말에 씬 리지는 Decca Records와 싸인을 하고 이듬해인 1971년 4월에 데뷔 앨범 Thin lizzy를 공개한다 이 앨범에 대하여 에릭 벨이 한 마디 했는데 중요한 이야기니까 모두 귀를 쫑끗 세우고 들어보자 "쩝쩝,,, 그때만 술회하려면 짜증이 절로 나네뇨,,, Scott English라는 프로듀서 때문에 많이 힘들었어요 그 녀석은 약간 음치였죠,,, 우리들이 튜닝을 제대로 맞추지도 않았는데 녹음을 해서 여러 모로 작업을 힘들게 했어요~~ 레코딩 또한 아주 미숙했죠~~ 우리들은 당시 녹음할 때 정말 힘들었어요,,, 완전히 정신이 나가 버릴 정도로 지쳐 있었죠" 씬리지의 두 번째 앨범 "Shades of a Blue Orphanage"는 1972년 3월에 공개되고 1972년에 인상적인 유럽 투어를 시작하는데 그들의 매니저였던 Ted Carroll이 차분하게 회상을 한다 "우리들은 산기슭에서 LSD를 처먹고 축구를 하며 오후를 보내곤 했죠 그러다가 공연때가 되면 호텔로 돌아와서 재충전을 하고,,, 무대에서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음악을 연주했습니다 대략 45살 정도 먹은 여자가 광란의 몸부림(??)을 치며 괴로워하다가 죽을 지경에 이르렀지요 결국 그녀는 촛불로 자위행위를 하고 말았답니다 쩝 - ㅜ 당신은 상상할 수 있나요?? 우리들은 아직도 믿을 수 없어요,,, 그놈의 LSD가 당체 뭔지 쩝쩝,,," 초창기의 씬리지는 이토록 떠들썩한 실로 요란한 빈수레 밴드였으며 막가파식 스타일의 광적인 무대는 그들의 경력을 통틀어 이례적인 일로 구분이 된다 대부분의 락 밴드와 마찬가지로 씬 리지는 값진 히트 싱글을 보유하지 못했고 그로 인하여 그들의 재정상태는 위태위태했다 그나마 모국인 아일랜드에서의 인기 덕분에 간신히 파산 위기를 면할뿐 영국에서의 그들의 활동은 본질적으로 불우했다 밴드는 돈을 벌기는 커녕 점점 적자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돈이 떨어질 만하면 고향인 아일랜드로 돌아와 투어를 해서 근근히 연명하는 처지에 시달리고 있던 씬 리지,,, 그들은 영국 시장을 공략하기 위하여 갖은 짠돌을 굴렸지만 세상 일은 그들의 생각처럼 잘 돌아가지 않았다 1972년말에 이르러 씬 리지는 슬레이드의 서포트 밴드로 기용되어 투어를 하는데 그들의 소속 회사인 데카 레코드가 묘안을 낸다 그것은 투어와 동시에 싱글을 공개한 것인데 이것은 에릭 벨과 브라이언 다우니는 말할 것도 없고 밴드의 리더인 필 리놋에게 적잖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주었다 데카가 선택한 싱글은 필 리놋이 만든 창작곡이 아니라 아일랜드의 전통적인 민요였던 "Whiskey in the Jar"였다 물론 씬 리지가 커버한 버전은 원래의 민요와 많이 다르게 편곡된 것이긴 하나 씬 리지 측으로서는 상당히 기분 나쁜 일임에 틀림 없다 아티스트의 의지를 존중하지 않고 출신 성분의 메리트를 끄집어내어 상업적으로 이용한 레코드 회사의 사업수단에 씬 리지 측은 크게 실망을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싱글은 상업적으로 커다란 성공을 거두어 그들을 가난의 늪에서 구출할 수 있었다 "Whiskey in the Jar"는 아일랜드 차트 넘버 원에 무려 17주간이나 머물렀으며 영국에서도 6위에 랭크되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Thin Lizzy의 3집 "Vagabonds of the Western World"가 공개된 것은 1973년 9월이었고 멤버들은 앨범의 내용물에 꽤나 흡족했다 이하는 드러머 브라이언 다우니의 인터뷰 중에서 발췌했다 "필립의 진일보한 작곡력과 조금 더 호전적으로 변한 우리들의 연주가 좋은 앨범을 만든 것 같아요. 앨범 수록곡중 The Rocker는 그 당시 씬 리지의 모든 것을 하나로 압축하는 좋은 노래라고 생각해요." 1974년 1월에 Eric Bell이 밴드를 떠나고 곧바로 Gary Moore가 투입되어 아일랜드와 영국 투어에 기용되지만 그 역시 4월에 밴드를 떠나게 된다 게리 무어의 탈퇴 사유는 거의 매일밤 계속되는 음주와 다음날 숙취의 콤보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4개월 동안 음주와 숙취가 계속됐어요~~ 더 이상 씬 리지에 있다간 죽을 것 같더라구요 ㅜ.ㅜ" 결국 Thin Lizzy는 새로운 기타리스트를 구하는데 약관 17세의 Brian "Robbo" Robertson과 William Scott Gorham이 그들 이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씬 리지의 사운드가 정립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듯 하다 브라이언 로버트슨과 스캇 고햄의 트윈 리드 기타 사운드야말로 씬 리지의 사운드를 지탱하는 든든한 버팀목이었으니 말이다 이 시기에 이르러 씬 리지는 Decca와 계약이 만료되고 새로운 회사인 Phonogram과 계약을 체결한다 그들의 통산 4번째 정규 앨범인 "Night Life"는 1974년 11월에 발매되었는데 이 앨범은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하지도 못하고 예술성 또한 높게 평가되지 못했지만 밴드의 정체성을 확립했다는 면에서 커다란 의의를 둘 수 있겠다 1975년 3월 Thin Lizzy는 최초로 미국을 방문하여 Bob Seger와 Bachman-Turner Overdrive의 오프닝으로 공연을 했다 스캇 고햄의 말에 따르면 이 공연은 그들로서는 처음 서는 대형 무대에서 행해졌으며 그만큼 메인 밴드들의 매니저로부터 간섭과 위협(??)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공연시간을 철저하게 엄수하길 강요받았다고 하는데 스캇 고햄은 그들의 행위로부터 프로 정신을 새삼 느꼈다고 고백하고 있다 영국으로 돌아온 씬 리지는 더욱 타이트한 밴드로 각광 받았고 동연 9월에 발매했던 통산 5집 "Fighting" 앨범은 차트 상위권에 랭크되고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를 계기로 씬 리지는 12월 31일에 거행된 Great British Music Festival에 참전(??)하기도 했다 씬 리지의 통산 6집 "Jailbreak"가 발매된 것은 1976년 3월이었다 스캇 고햄의 말에 의하면 이 시기에 이르러 브라이언 로버트슨과의 트윈 기타가 보다 명료하게 개선되었다고 한다 전 앨범인 "Fighting" 에서 대충 대충 제시되었던 쌍기타의 이론들이 현실적으로 정립되었으며 그들 이전에 트윈 기타 사운드를 선보였던 Wishbone ash의 양날개를 무참하게 짖이겨 놓을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씬 리지의 트윈 기타 사운드는 위시 본 애쉬의 그것에 비하여 확실히 더 하드하고 공격적이다 앨범에서 가장 돋보이는 곡은 역시 "The Boys Are Back in Town"을 들 수 있겠다 생전의 필 리놋이 가장 좋아하는 곡으로 알려졌던 이 노래는 동년 4월에 싱글로도 발매되어 영국 차트 8위에 랭크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을뿐만 아니라 미국 차트에서도 20위권 안에 올랐다고 한다 앨범 역시 처음으로100,000장을 팔아치워 드디어 밴드의 주머니는 불룩해졌다고 한다 전작 "Jailbreak"가 발매된지 정확히 7개월후인 1976년 10월 씬 리지는 7번째 정규 스튜디오 앨범 "Johnny the Fox"를 발매하는데 이 작품은 "Jailbreak"의 이상적인 후속타로서 씬리지를 행운의 절정에 오르게 하였다 앨범은 영국 차트 12위에 랭크되었고 11월과 12월에는 전미 투어가 잡혀 있었는데, 이 무렵 씬 리지는 또다시 골치아픈 해프닝으로 인하여 공연을 취소해야 하는 상황에 봉착했다 그 해프닝이란 다름이 아니라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로버트슨이 술집에서 싸움을 하다가 깨진 병에 손이 작살나서 기타를 연주할 수 없게 된 사건이다 손이 작살난 후 브라이언 로버트슨은 의사로부터 재기 불능의 판정을 받고 공연 엔트리에서 제외되고 (물론 그의 손가락은 얼마후 만화처럼 재생된다) 브라이언 로버트슨의 대타로는 다시 게리 무어가 기용되어 1977년에 씬 리지는 퀸의 서포트 밴드로 미국 공연을 하게 된다 게리무어는 투어 말미가 되자 또다시 Thin Lizzy를 떠나고 남겨진 3인은 8번째 정규 스튜디오 앨범 "Bad Reputation" 을 제작하게 되는데 모든 작업은 1977년 4월과 6월 사이에 이루어진다 이 앨범에는 브라이언 로버트슨이 밴드로 다시 돌아와 참여하긴 하나 그는 이제 멤버가 아니라 한낱 세션에 불과했다 그 증거로 본앨범의 자켓을 보면 브라이언 로버트슨의 사진이 배제된채 3인의 얼굴만 나와있다 세션의 설움을 느껴보라 모 그런건가?? ㅋㅋㅋ 9월에 "Bad Reputation" 이 발매되고, 영국 차트 4위로 급등했다 이 무렵 부터 씬 리지는 서서히 비평가들과 팬들,매스 미디어,동료 음악가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밴드로 성장했지만 호사다마랄까?? 필 리놋이 서서히 병들어가기 시작했다 필 리놋은 1977년을 전후하여 자기관리를 전혀 하지 못하고 마약의 노예가 되어갔다 그들의 투어 매니저 Frank Murray의 말을 한번 들어보자 "그 당시 우리들은 너무나도 많은 음주,담배,코카인을 비롯한 각종 마약에 찌들어 있었는데 필 리놋은 한발 더 나아가 진정제까지 복용했답니다 그는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새벽 5시까지 잠을 못 이루다가 진정제를 먹고 잠들면 정신을 아주 못차렸죠 결국 우리들은 강제로 그를 버스에 태워 다음 도시로 가는 짓을 반복했죠 그 결과, 그는 거의 항상 지저분한 상태였고, 호승심에 들떠있었죠" 라이브 사운드 엔지니어였던 Peter Eustace 또한 한 마디 했다 "필 리놋은 코카인과 드럭을 비롯한 각종 마약을 찾기 전에는 공연할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1978년 6월 "Live and Dangerous" 가 발매되었는데 이것은 처음으로 스튜디오에서 가공하여 만들어진 라이브 앨범이라고 한다 1978년 여름 투어는 브라이언 로버트슨이 참여한 마지막 공연으로 멤버들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이하는 브라이언 다우니의 이야기다 "브라이언 로버트슨은 뮤지션이라기 보다는 전사에 가까웠죠 그는 항상 뼈가 부러져 있고, 어딘가 잘려있고, 멍들어있고, 아킬레스 건이 잘려있었어요 그가 왜 그런 인생을 사는지는 오직 신만이 아시겠죠?? 그와 함께 공연을 치룰 때마다 불안해했던 우리들의 마음을 당신은 절대 모르실거에요. 정말이지 그 새끼는 진짜 다루기 힘든 놈이었어요~~" 스캇 고햄 또한 한 마디 한다 "브라이언 로버트슨은 정말 굉장한 기타리스트였어요 저는 그와 함께 연주했을 때 정말 좋았어요 그런데 필 리놋은 항상 어떤 이유를 갖다대서 그를 조롱하였고, 끝내는 저까지 꼬득여서 그를 해고하도록 동의하게 했어요" 자 이제 문제의 브라이언 로버트슨의 말을 들어보자 "제가 생각해도 저는 정말이지 통제불능의 완벽한 또라이 새끼였어요 저는 항상 술에 쩔어 있었고, 졸라 위력적인 뽕을 빨고 있었죠 저는 다혈질이었고, 아주 쉽게 흥분해서 사고를 쳤어요 마치 다이나마이트가 '뻥' 하고 터지듯 말이죠 일단 술과 마약에 취하게 되면 그때부턴 도무지 제어가 안되더라구요~~" 가을에 접어들어 씬 리지는 새로운 멤버들과 함께 무대에 올랐다 기타는 필 리놋의 오랜 친구이자 씬 리지에 위급한 상황이 생길 때마다 구원투수로 등장했던 소방수 게리 무어가 맡았고 드럼은 과로로 지쳐 쓰러져버린 브라이언 다우니 대신 이언 길런 밴드에서 활동한 전력이 있는 Mark Nauseef가 맡았다 이 무렵의 이야기를 게리 무어로부터 들어보자 "밴드는 LA에서 드러머 오디션을 행했는데 꽤 괜찮은 드러머가 하나 보이더라구요 이름이 테리 보지오라고 하더군요~~ 근데 이 녀석은 우리들이랑 핀트가 좀 안맞았어요 보지오는 마약도 하지 않구, "좆,씹,개,뻑" 이런 말도 하지 않구, 한 술 더떠 투어할 때 마누라를 항상 옆에 끼고 다니길 원하더라구요 그래서 우리는 그에게 다른 밴드로 가보라구 말하구 이안 길런 밴드에서 활동한 전력이 있던 Mark Nauseef를 드러머로 기용한 것이죠" 투어가 마쳤을 때 게리 무어와 Nauseef는 L.A로 돌아갔고, 잔여멤버들은 런던으로 귀환하여 다음 앨범을 제작했다 필 리놋과 스캇 고햄은 환골탈태한 브라이언 다우니와 규합하여, 1979년 4월에 통산 10집 "Black Rose" 앨범을 공개했는데 이 앨범이 바로 게리 무어가 전곡에 참여했던 씬 리지의 유일한 앨범이다 앨범에 참여한 게리 무어는 미국 공연 또한 참가하는데, 이하는 게리 무어의 이야기다 "상황은 점점 안좋게만 변해갔죠. 필 리놋은 점점 이상해져갔어요. 그는 공연 자체 보다는 공연 후의 뒷풀이에 점점 집착하기 시작했죠. 모랄까?? 그는 언제부터인가 음악을 진지하게 접근하려 하지 않고 즐기려고만 하더라구요 나는 점점 더 그와 일하기가 힘들어지더라구요 어느 누구도 그를 호텔에서 끄집어낼 수가 없었어요 때문에 항상 우리들은 공연 시간을 맞출 수 없었죠 스캇 고햄은 씬 리지를 가리켜 가장 프로답지 않은 프로밴드라고 비아냥 거리곤 했어요" 게리 무어와 필 리놋 사이의 마찰은 7월에 극도로 가열되었고, 결국 게리 무어는 투어 도중 팀을 나가 버렸다 "도무지 참을 수가 없드라구요. 어느 누구도 필 리놋을 통제할 수가 없었어요. 나는 정말 누군가 나를 해고시켜주길 절실히 원했어요." 게리 무어의 공백은 Midge Ure라는 기타리스트로 교체되었고, 9월 일본 공연에는 또다른 기타리스트 Dave Flett을 추가하여 아이언 메이든같은 트리플 기타 시스템을 갖추었다 이런 상태에서 Ure는 몇몇 곡에서 키보드를 연주했다고 한다 1980년 성 발렌타인 데이때, 필 리놋은 그의 14달 된 딸인 사라의 어머니인 Caroline Crowther와 결혼했다 결혼식의 압권은 신부 아버지인 엔터네이너 Leslie Crowther의 낭독이었다 "사위 녀석이 그러더라구요~~ 제 딸내미를 자신에게 줄 수 없냐구요~~ 전 그 녀석에게 이렇게 말했죠~~ 야 이놈의 새끼야, 넌 이미 내 딸을 두 번이나 임신시켰자너 - ㅜ" 레슬리의 말대로 캐롤라인은 결혼 당시 둘째 Cathleen을 임신 중이었고, 그녀는 5개월 뒤에 태어났다 필 리놋의 결혼식에 즈음하여, 씬 리지는 그들의 새로운 기타리스트의 이름을 발표했다 그의 이름은 Terrence Charles "Snowy" White 로서 Peter Green, Al Stewart, Cliff Richard, 그리고 Pink Floyd 등 다양한 뮤지션들의 세션맨으로 활동한 전력이 있다 또한 씬 리지는 새로운 멤버를 영입했는데, 그는 바로 키보디스트 Darren Wharton이다 1980년 4월에는 필 리놋의 첫 번째 솔로 앨범 "Solo in Soho"가 발매되었고 5월에는 아직 스튜디오에서 작업하고 있는 신작 "Chinatown" 투어를 펼쳤다 투어는 형편없이 무력했고 대부분의 비난은 스노위 화이트에게 쏟아졌다 스노위 화이트는 대단한 기타리스트였지만 무대 위에서 보여주는 액션은 졸라 구렸다고 한다 그들의 통산 10번째 정규 스튜디오 앨범인 "Chinatown" 10월에 발매되었고 "Killer on the Loose" 가 싱글로 발매되어 제법 히트를 쳤다 1981년 Vertigo 레코드사는 "The Adventures of Thin Lizzy" 라는 제목의 컴필 앨범을 발매하여 영국에서 골드를 획득했다 씬 리지의 11번째 정규 스튜디오 앨범 "Renegade"가 발매된 것은 1981년 11월이다 "Chinatown"과 마찬가지로 "Renegade" 역시 잘 만들어진 작품이긴 하나 처참한 상업적인 실패를 맛보았고, 평론가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팬들로부터도 초기작들에 비하여 많이 외면받게 되었다. 홀대받은 이유를 분석해보자면 씬 리지의 사운드가 너무 당시의 트랜드였던 헤비메탈과 팝뮤직을 따라가는 듯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에 골수 팬들에게 실망을 주었고 새로운 팬들 또한 흡수하지 못했다 이 와중에 필 리놋의 마약의존도는 점점 더 심각해져갔다 1982년 거행된 "Renegade"는 사운드 면에서나 무대장치적인 면에서나 차이나타운 시절보다 향상되었는데 좋은 면이 생긴 반면 나쁜 면도 속출하였다 이하는 당시 엔지니어 Eustace의 말이다 "우리들의 콘서트장에는 항상 경찰들이 오곤 했죠 그들은 마약 거래를 하고 있는 관객들을 찾곤 했어요 그 와중에 필 리놋은 계속 약에 쩔어있었고 우리들은 경찰 몰래 마약 거래자들로부터 약을 구해 필 리놋에게 주었지만 필 리놋이 계속해서 약을 원하는 바람에 우리들은 서서히 지쳐가고 짜증이 나기 시작했어요" 이 시점에서 스노위 화이트가 탈퇴하고 (필 리놋에 의한 해고이지만 그 자신도 원하고 있었던) 1973년 이후로 밴드의 매니저로 군림했던 Chris O'Donnell마저 탈퇴했다 크리스는 밴드가 점점 악화되어가는 것을 도저히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이하는 그의 말이다 "Chinatown은 거대한 쓰레기이고, Renegade 역시 마찬가지이다 씬 리지는 한때 유망한 밴드였지만 어느새부터인가 볼품없는 쓰레기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필 리놋은 두 번째 솔로 앨범 "The Philip Lynott Album"을 내놓았는데 이때가 1982년 10월이었다 이 작품은 나약하고 감성적인 한 바보의 흐리멍텅한 앨범으로 평가를 받았으며 "Renegade" 앨범의 참패와 더불어 필 리놋과 씬 리지 양자의 미래를 더욱 어둡게 만들었다 신 리지는 재정적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한 장의 앨범과 하나의 투어를 기획하게 된다 사실상 파산 직전에 처해있던 밴드는 찬밥,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그들의 매니저인 Chris Morrison는 이렇게 회고한다 "그 시절에 신 리지에 들어가는 돈은 1년에 500,000 파운드 정도였습니다 그 시절의 스텝들은 돈 한푼 받지 못한 노예에 가까웠죠 그들의 임금은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었어요 사실 저는 지금(1993년)도 신 리지의 매니저를 하고 있지만 지금은 겨우 연간 50,000파운드밖에 들어가지 않거든요 당시 신 리지가 얼마나 무절제한 사치생활을 했는지 이제 알 수 있겠죠??" 크리스는 "Thunder and Lightning" 투어를 고별공연으로 정하고 티켓 판매를 증가시킨 결정적인 인물이다 그들의 공식 스튜디오 음반으로는 마지막인 "Thunder and Lightning"이 공개된 것은 1983년 3월이다 기타리스트는 그 유명한 John Sykes로 대체되었다 아마도 이 앨범은 1976년 이후로 가장 좋은 음반으로 평가받고 있다 물론 차트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4위에 랭크되었으니까 "Black Rose" 이후 가장 높은 성적을 거둔 셈이다 Farewell Tour 또한 대단했다 모든 티켓이 동이 날 정도였다 앨범이 대박 터졌을 뿐만 아니라 공연까지 성황리에 끝나 신 리지는 가까스로 죽음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으니까.... 1983년 10월 6일 공개된 실황음반으로 필 리놋 생전 최후의 씬 리지 앨범으로 기록되고 있다 1983년 해머스미스 구장에서 펼쳐졌던 고별 콘서트를 담은 것으로 지금까지 씬 리지를 거쳐갔던 기타리스트들이 대거 출동하여 많은 화제를 빚었다 원래는 더블 앨범으로 출시되었지만 국내에는 85년에 side c와 d면만을 발췌하여 축소 발매되었다. 사유는 국내 소비자들의 부담을 덜기 위한 것이라는 실로 웃지 못할 이유라고 북클릿에 쓰여 있다. 씬 리지 해산후 마지막 3년 동안 필 리놋의 헤로인양은 엄청나게 증가했다. 결국 필 리놋의 부인은 딸 사라를 데리고 그의 곁을 떠나버렸다. 이 와중에도 필 리놋의 음악적 갈망은 간절하게 이루어져서 1984년 로렌스 아처, 마크 스타인웨이와 함께 그랜드 슬램이라는 밴드를 결성하지만 이 밴드는 레코드 계약을 따내지 못하고 필 리놋의 헤로인 포스는 절정에 달해버렸다. 마크 스타인웨이의 말에 의하면 필 리놋은 리허설 기간 동안 2시간 내내 똑같은 프레이즈를 연주하고 그 사이에 가사를 까먹었으며 거기에 대해 태클을 걸면 신경질을 내는 그야말로 비정상적인 부루털함 을 노출했다고 한다. 1985년 들어 필 리놋은 게리 무어의 Run for cover 앨범에 참여하여 Out in the fields를 같이 만들었고 그랜드 슬램을 위해 만든 곡인 Millitary man을 이 앨범에 수록했다. 앨범은 영국 차트 5위에 랭크되는 기염을 토하지만 필 리놋의 건강상태는 날로 악화되었다. 1985년 크리스마스 필 리놋은 런던에 있는 자택에서 쓰러진 상태로 발견되었고 이후 병원으로 옮겨갔 지만 결국 1986년 1월 4일 안타깝게 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사인은 약물 과용에 의한 심장마비(Heart attack)라고 하는데 사실 그를 죽인것은 약이 아니라 바로 그의 라이프 스타일이였다. |
You Will Know My Name~~~^^;;
I will remember...^^;;
존경하고 사랑하지 말입니다
I will remem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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