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인우는 손끝까지 타들어온 담배를 마지막으로 입에 가져다 대며 조직원들에게 말했다.
"여기가 확실해?"
"예, 형님! 노정필이 말한 주차장이 여기입니다."
인우는 담배를 끄며 손목시계를 내려다봤다. 시계는 새벽 4시를 향해 있었다. 철물파의 보스 노정필에게 들은 정보대로라면 지금쯤 이치긴이 눈앞에 나타나야 했다.
생각도 못 한 타이밍에 노정필에게 전화가 왔을 땐 선전포고인 줄 알았다. 인우의 시나리오대로라면 지금쯤 자신들은 현백회가 아닌 철물파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노정필은 친근한 말투로 인우에게 살살 제안을 했다.
노정필이 아니었더라도 현백회를 칠 계획이기는 했으나, 두 번 다시 걷지 못하게 된 상두(인우의 오른팔)를 위해서라도 그냥 둘 수 없었다. 인우는 병상에 누워있는 상두를 생각하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무리 냉정하게 생각하고 판단해도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는 이, 기습에는 기습. 그게 인우의 철칙이었다.
"형님."
노정필의 의도를 파악하려 고심하는 중 조직원이 그를 불렀다. 고개를 살짝 들어보니 현백회 차량으로 추정되는 다섯대의 차가 줄지어 들어왔다. 그중 맨 앞에 있던 새까만 벤츠에서 젊은 남자가 내렸다. 바로 인우가 기다리던 이치긴이었다. 인우는 타이밍을 기다리며 초조하게 차 안에서 이치긴의 행동을 주시했다. 녀석들이 가장 방심하고 있을 때 단번에 칠 계획이었다. 인우는 차례대로 내리는 현백회 조직원들의 수를 눈으로 잡아내고 있었다. 그때 뒷모습을 보이던 이치긴이 살짝 고개를 돌렸다. 착각이었을까, 인우는 이치긴과 눈이 잠깐 마주친 것 같았다.
아니, 착각이 아니다. 이치긴은 아예 몸을 돌려 인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쥐새끼처럼 숨어있지 말고 나오시죠."
순간의 정적. 고요한 지하 주차장에 이치긴의 목소리가 메아리를 치며 울려 퍼졌다. 이치긴의 말에 인우는 약간 당황을 한 눈빛이었다. ‘어떻게 알았지…?’ 이미 이치긴이 야귀단의 잠입을 눈치채고 있던 건가? 계획이 어긋나자 인우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미간을 좁혔다. 여기서 도망갈 수도, 그렇다고 조직원들과 함께 함성을 지르며 튀어 나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인우는 조직원들에게 차에 있으라 지시를 내린 후 혼자 차에서 내렸다.
“......”
인우의 발소리가 공허한 공터에 흩어졌다. 인우가 모습을 드러내자 현백회 조직들은 웅성대며 경계태세를 취했지만 이치긴의 제지로 일순간 조용해 졌다. 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 부딪혔다. 인우는 인우 대로, 이치긴은 이치긴 대로 서로의 모습을 훑으며 생각에 잠겼다. 오랜 침묵을 깬 건 인우였다.
"어떻게 알았지?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음성. 인우는 두 손을 주머니에 넣으며 턱을 쳐들고 이치긴을 보고 있었다. 이치긴 역시 기죽지 않으려 얼굴에 비소를 한가득 머금고 있었다. 부딪힐 듯 부딪히지 않는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조직원들은 저절로 침을 꼴깍 삼키며 긴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닐 텐데요. 내가 어떻게 알았냐는 것 보다, 어떻게 기습을 할지가 더 궁금한 거죠?"
"어린놈이 입만 살았군."
"노련함이라고 하죠."
분명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이치긴이었지만, 그의 태도는 그의 말처럼 노련함이라고만은 표현할 수 없는 자신감이 물씬 풍기었다. 신경에 거슬린다. 저런 놈한테 상두를 쉽게 내주다니. 인우의 눈이 번뜩였다.
"노정필 아저씨가 그러던데요. 야귀단이 기습할 테니까 조심하라고."
인우의 눈이 커졌다. 노정필이 설마...!
"설마설마했는데 의외로 순진하시네요. 정말 이곳에 와 있을 줄이야."
이치긴의 말은 인우의 화를 폭발시키는 데 충분했다.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서로 시간 끌어봤자 좋아질 게 없었다. 인우가 몸을 풀 듯 고개를 까닥거리자 차 안에 있던 조직원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동시에 맞은편에 있던 현백회 조직원들도 이치긴의 뒤로 바짝 붙으며 일촉즉발의 긴장감을 자아냈다.
"... 시작해."
인우의 한마디가 신호탄이 되어 건장한 사내들의 고함이 한데 뒤섞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둔탁한 마찰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인우의 주먹을 아슬하게 피한 이치긴은 바로 인우의 배로 주먹을 날렸다. 그러나 방어하는 인우의 손이 더 빨랐다. 기습 찌르기가 특기인 이치긴은 인우가 자신의 공격을 손쉽게 막아내자 속으로 당황했다. 그제야 만만치 않은 놈, 입만 살은 놈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현백회든 야귀단이든 조직원들이 하나둘 바닥으로 구르기 시작했고 주차장은 피비린내로 진동하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사시미와 각목, 쇠파이프를 든 조직원들이 상대의 대가리를 치기 위해 사정없이 달려들었다. 덕분에 인우와 이치긴의 결투는 잠시 휴전상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야야!"
인우의 뒤에서 시퍼런 사시미를 든 현백회 조직원이 달려들었다. 인우는 짜증 섞인 표정으로 뒷발을 올리며 놈의 턱을 정확히 강타했다. 놈은 사시미를 공중으로 놓치며 나뒹굴었다. 한 놈을 쓰러뜨리면 다른 놈이 덤비고, 그놈을 쓰러뜨리면 또 다른 놈이 달려들었다. 그건 이치긴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이치긴의 주먹을 맞고 나가떨어진 놈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치긴을 잡아!"
"와아아아!"
야귀단 조직원들이 소리치며 이치긴에게 달려들었지만 그를 보호하는 현백회의 조직원들 때문에 쉽게 접근할 수가 없었다. 현백회의 조무래기들을 상대하고 있던 인우는 잠시 숨을 고르며 이치긴을 찾았다. 이치긴만큼은 자신의 손으로 끝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그는 구석에서 한 조직원과 싸우고 있는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치긴. 어린 놈이었지만 날쌔고 재빠른 녀석이었다. 인우는 복잡하게 뒤엉켜있는 사내들을 밀치며 이치긴에게 걸어갔다. 도중 겁대가리 없는 현백회 놈들이 인우에게 달려들었지만 모두 그의 주먹과 발차기에 힘없이 나가떨어졌다.
"이리 나와!!"
이치긴에게 소리쳤다. 마침 야귀단의 조직원 한 명을 쓰러뜨린 이치긴은 거친 숨과 함께 인우를 바라봤다.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언제든지 응해주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치긴이 인우에게 걸어 나왔다. 그 짧은 거리 동안 두 세 명의 조직원들을 가뿐하게 물리쳤다.
"이유가 뭐지?"
인우가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릴 듯하던 그가 이유를 물어오자 웃음이 나왔다. 이치긴은 인우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주먹만 믿고 달려드는 무식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그의 보스가 어지간히 어리석은 걸까. 이치긴은 먹히지 않을 말이라는 걸 알았지만 진실을 말했다.
"오해예요.“
"하아..."
역시 믿지 않는군. 인우의 분노가 안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인우는 좀 전의 싸움으로 흘린 땀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이치긴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상두를 위해서라도 이치긴을 반쯤 죽여놔야겠다 생각했다. 금방 주먹이 올 것이다. 이치긴이 방어 태세를 취하며 입을 열었다.
”... 윽...!“
인우의 빠른 주먹이 이치긴의 입을 강타했다. 그의 주먹을 피한다고 피했지만, 인우의 속도는 이치긴이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이치긴의 입술 끝이 터지면서 피가 입안으로 스며들어왔다. 입가에 터진 피를 닦아내며 헛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피 맛, 그리고 고통. 이치긴도 정신이 바짝 들기 시작했다.
"왜 반격하지 않는 거지?“
”그야 우리가 싸울 이유가 없으니까요.“
인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다시 한번 이치긴에게 주먹을 날렸다. 이치긴은 집중을 하며 인우의 허리를 굽혀 그의 주먹을 피했다. 그의 주먹이 허공을 다 가르기 전에 이치긴이 재빨리 허리를 펴며 인우의 배를 발로 가격했다. 인우가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인우는 또다시 이치긴에게 주먹과 발을 연달아 날렸다. 두 사람은 서로의 공격을 간신히 막아내고 있었다. 인우와 이치긴이 한 곳에서 싸우고 있는 동안 조직원들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듯했다. 비슷한 숫자로 서 있는 두 조직원은 쓰러져있는 동료들을 한 곳으로 옮기며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렇게 눈치를 보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조직원들이 지친만큼 인우와 이치긴의 입에서도 호흡 소리가 거칠어졌다. 땀은 두 사람의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결판이 나지 않는... 그야말로 명승부였다.
"…한 번에 끝내자. 애들이 많이 다쳤다."
인우의 말에 이치긴이 눈길을 옆으로 돌렸다. 이치긴은 눈빛을 냉정하게 바꾸며 다시 인우를 바라봤다. 이치긴의 입술이 화가 난 듯 씰룩였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귀를 찌르는 총성이 들려왔다.
탕! 탕!
총소리가 멈추자마자 인우의 옆구리에서 검붉은 피가 터져 나왔고 그는 작은 신음과 함께 무릎을 꿇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인우의 피가 눈앞에 튀어 올라 이치긴의 얼굴을 적셨고, 앞으로 넘어지는 인우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상황이 이치긴으로썬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인우는 희미해지는 정신을 똑바로 잡으려 애썼지만 타들어 갈 듯한 고통에 힘겨워했다. 총알이 옆구리에 박힌 듯했다. 그의 옆구리에선 피가 멈추지 않고 흘러나오고 있었다.
인우가 쓰러지자 야귀단 조직원들이 단번에 달려와 그를 부축했고, 주위를 둘러보며 총의 소재를 찾아내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것은 현백회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누가 총을 쏜 거지?
"저기 있다!"
한 조직원이 주차장 기둥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모든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고 기둥 뒤에는 신원불명의 사람이 서 있었다. 얼굴에 튄 피를 닦아내며 이치긴이 기둥을 향해 걸어갔다. 지금 그는 인우와의 싸움을 방해한 그 사람에게 엄청 화가 나 있었다. 뚜벅뚜벅 걸어가는 이치긴의 발걸음에는 그의 화를 알려주는 묵직함이 배어 있었다. 이치긴이 기둥으로 다가갔을 때 기둥 뒤에 서 있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치긴은 물론이고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눈이 모두 커졌다.
"오랜만이네, 꼬마야."
이치긴을 꼬마라 칭하는 그놈은 철물파의 이인자 차혁태였다. 예상대로 그의 손에는 45구경의 권총이 들려있었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여기저기서 철물파 일원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치긴의 눈썹이 꿈틀댔다. 이거 왠지 철물파의 계획에 말려든 기분이었다. 야귀단과 현백회를 충돌시킨 다음 어느 정도 힘이 빠지면 두 세력을 모두 치려는 개 같은 계획. 이치긴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제대로 말려들었다.
"이런 이런, 이런 곳에서 한바탕 전쟁을 치르셨군."
차혁태는 능청스럽게 말을 하며 웃음 지었다. 그의 뒤에 있는 철물파 녀석들은 사흘 굶은 호랑이 새끼들처럼 눈이 번뜩였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두 조직원을 마음껏 밟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이치긴이 뒷걸음질을 쳤다. 아무리 냉정해지려 해도 이건 승산 없는 게임이었다. 상대는 총을 들고 있었다. 이치긴은 차혁태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이치긴의 싹수없는 눈빛에 꽤 마음에 안 들었지만 차혁태는 여유를 부리기 시작했다.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내뱉으면 좋아 웃기도 하고 뒤에 있는 조직원들한테 말을 걸며 야귀단과 현백회를 조롱하기 시작했다. 이치긴은 속이 타 죽을 것 같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여기서 덤비기라도 한다면 자신을 물론이고 조직원들까지 전멸하고 말 것이다. 이치긴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머리를 빠르게 굴리기 시작했다.
"내가 일 년 전에 네깟놈한테 존나게 당하고 개 밟듯 밟힌 건 알고 있냐? 씨벌."
차혁태가 비아냥댔다.
"아저씨가 못나서 당한 걸 왜 이제 와서 화풀이야. 애들은 보내줘요."
"하핫. 이 미친 새끼가 끝까지 멋있는 척이네. 이 새끼야, 지금 니가 살려달라고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국에 뭐? 애들을 보내줘? 아놔, 이 씨발새끼 말하는 꼬라지 하고는."
"어차피 나 하나만 잡으면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보내 달라고."
"형님!"
이치긴의 말에 현백회 조직원들이 울상을 지으며 그를 불렀다.
"난 처음부터 니네가 마음에 안 들었어. 좆만 한 새끼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뛰어들어. 겁대가리 없이 뛰어드니까 하나는 병신된거 아냐. 안 그래?"
다희를 조롱하는 말에 이치긴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그러자 차혁태가 껄껄거리며 욕을 퍼부었다.
"아놔 이 씨발놈보게. 야리냐? 씨발 눈 안 깔아?"
"보내 달라고."
"깔라고 이 새끼야!"
"일 년 전처럼 또 존나게 처맞지 말고 여기서 합의 보자고요. 그때는 아저씨 혼자였지만 지금은 애들도 있는데, 애들 앞에서 개쪽 당하고 싶지 않으면 합의 보는 게 좋을걸요."
이치긴이 일 년 전 이야기를 꺼내자 차혁태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는 끓어오는 분노를 참지 못하며 총구를 이치긴의 이마로 향했다. 현백회 조직원들이 어찌할 줄 몰라고 하며 욕설을 내뱉었다. 총구가 이마로 향했지만 이치긴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며 차혁태를 노려봤다. 악에 받친 이치긴의 표정이 더 마음에 안 드는 차혁태.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장전을 하며 낄낄거렸다.
"언젠간 니 새끼 머리통을 날려주는 꿈을 꿨었지. 그게 현실로 나타나게 된다니, 완전 돼지꿈인걸."
차혁태가 말하자 철물파 일원들이 크게 웃기 시작했다.
"잘 가라 꼬마. 나중에 저승에서 보자."
이치긴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허무하게 죽다니. 서글픈 마음이 들었지만 괜찮았다. 다희의 회복된 모습을 보지 못하고 간다는 게 아쉬울 뿐. 이치긴의 목으로 침이 넘어갔다. 그리고 타앙! 하는 총소리가 주차장 안에 울려 퍼졌다.
"형님!!!"
찢어질 듯한 조직원들의 목소리를 들려왔다.
‘... 어?’
분명 총성이 울려 퍼졌는데 이치긴은 어떠한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다. 조금 전까지 깝죽대며 이치긴을 조롱하던 차혁태가 땅바닥에 누워있었다. 그리고 그의 심장에선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아 나오고 있었다. 이치긴은 또 한 번 눈을 크게 뜨며 상황파악에 나섰다.
"어떤 새끼야!!!"
철물파 일원이 미친 듯이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그때 이치긴의 눈에 들어오는 한 남자, 아니... 여자? 키가 엄청나게 커서 순간 남자인 줄 알았지만, 여성이 분명했다. 이치긴의 동공이 확대되었다. 그곳엔 손을 뻗은 채 총을 들고 있는 ‘칼리’, 실명 라리사 스미르노바가 서 있었다.
이치긴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라리사를 바라봤다. 총을 들고 있는 라리사의 눈은 딱딱했고,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수십 명의 사람이 한 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섬뜩할 정도의 침묵이 흘렀다. 이치긴의 앞에 쓰러져 있던 차혁태는 경련이 일어난 듯 몸을 부르르 떨더니 곧 숨을 거두었다. 너무나도 쉽게 죽어버린 차혁태의 모습에 철물파 놈들은 극도로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현백회와 야귀단 일원들을 밀어버리는 건 시간문제였다. 비록 라리사가 총을 들고 있었지만, 총알의 수는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다 죽여!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쓸어버려!!!"
차혁태 다음으로 서열이 높은 녀석이 소리쳤다. 그러자 철물파 녀석들은 옷 안에 숨기고 있던 연장들을 하나씩 꺼내 놓으며 지쳐있는 야귀단, 현백회 조직원들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다친 사람, 정신을 잃은 사람 신경 쓰지 않으면 밟히면 밟히는 대로 보이면 보이는 대로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또 한 번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탕!
소란스럽던 주차장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행동이 멈춰졌다. 이번에도 라리사가 발포한 것일까. 발포했다면 누구에게 쏜 것일까. 모든 시선이 라리사에게 쏠렸다.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부상자는 없었다. 라리사는 천장을 향해 총을 발포했고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려는 듯 다시 한번 방아쇠를 당겼다. 시끄러운 총성이 메아리를 치며 사라졌다.
"이제부턴 내가 처리할게."
언제 왔는지 라리사의 뒤로 유진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치긴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라리사가 눈앞에 나타난 것만으로도 놀랄 일인데 유진과 함께 있다니 입이 떡 벌어질 일이었다. 유진이 이곳에 왔다는 건 다른 곳에 있던 현백회 조직원들도 함께 왔다는 뜻이었다.
"저 새끼가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아직 유진의 등장이 어떤 뜻인지 모르는 듯, 철물파 일원이 말했다. 유진은 라리사에게 귓속말로 뭐라 속삭인 후 몇 걸음 걸어 나왔다. 철물파 녀석들은 금방이라도 모든 걸 뒤엎을 듯 떵떵거리며 소리쳤지만, 유진이 막상 당당하게 걸어 나오자 잠시 움찔한 모습을 보였다. 그들도 눈과 귀가 있으니 유진에 대해 잘 알고 있으리라. 유진은 입고 있던 정장 마이를 벗고 목을 죄고 있는 셔츠 단추를 두세 개 끌렀다. 그에 이치긴이 재미있다는 듯 웃고는 입을 열었다.
"엑스트라 출연이 길어지면 재미없어요. 아저씨들은 이제 그만 사라져 줘야겠는데요?"
"이, 이 새끼가!!"
자극적인 이치긴의 말에 눈이 뒤집힌 철물파 일원들. 그들이 일제히 유진과 이치긴에게 달려들기 시작했을 때, 그들의 뒤로 현백회 조직원들이 뛰어 들어왔다. 철물파 녀석들은 잠시 주춤거리며 갈등을 했지만, 곧바로 연장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유진 역시 입술을 깨물며 뛰어나갔다. 다시 한번 전쟁이 시작되었다. 더럽고 잔인하기로 유명한 철물파는 모두 날카로운 연장을 들고 있어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들이 뒤엉켜 싸우는 동안 몇몇 현백회 조직원들은 쓰러져 있는 동료들을 병원으로 옮기기 시작했고, 지쳐있는 이치긴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갔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있을 이치긴이 아니었다. 이치긴은 잠시 차오르는 숨을 돌린 후, 유진이 있는 싸움판으로 뛰어들었다. 유진은 철물파의 연장에 찔려 피를 쏟아내는 조직원들을 보며 한시라도 빨리 끝을 내야겠다 생각했다. 대체로 손목을 먼저 공격한 후 연장을 떨어뜨리게 했고 단숨에 때려눕혔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현백회와 철물파가 뒤엉켜있는 사이 인우는 그들의 차 뒤에 앉아있었다. 옆구리에서 쏟아져 나오던 피는 어느 정도 멈춘 듯했다. 조직원들이 옷을 벗어 급한 대로 지혈을 해줬기 때문이다. 인우는 고통스러웠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철물파와 현백회의 싸움을 바라봤다. 철물파에게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인우였다. 총만 맞지 않았더라면 당장이라도 저 싸움판에 뛰어들어 아군 적군 가리지 않고 분이 풀릴 때까지 때려죽이고 싶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꾹 누르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어냈다.
철물파와의 싸움은 생각 외로 쉽게 끝나버렸다. 연장을 다루는 기술만 습득했는지 연장을 뺏긴 철물파는 맥없이 쓰러져 나갔다. 허무하다 싶을 정도로.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유진과 이치긴은 싸움판에서 빠져나왔다. 이치긴은 유진에게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차오르는 숨 때문에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숨을 고르며 기둥에 기대섰다.
"굿 타이밍이죠?"
이치긴에게 생색이라도 내고 싶었는지 유진이 웃으며 말했다. 이치긴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유진을 바라보며 그저 어이없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때 유진의 옆으로 사람 형체와 함께 검은 금속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철물파의 일원이 총을 빼든 것으로 생각한 이치긴이 재빨리 움직였지만, 유진이 팔을 잡으며 막아섰다.
"돌아가라 했을 텐데요."
유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라리사였다. 유진은 필요 이상으로 침착한 목소리였고, 라리사를 바라보고 있지도 않았다. 그 총이 두렵지 않다는 듯. 아니, 라리사가 쏘지 못할 것을 안다는 듯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불안한 건 이치긴뿐이었다. 총을 겨누고 있는 라리사의 눈은 약간의 즐거움을 띄고 있었다.
"… 다시는 이 짓 안 하려고 했는데."
피식 웃은 그녀가 빠르게 주차장을 벗어났고, 현백회 몇몇이 뒤따랐지만, 유진의 제지로 그만뒀다. 라리사가 사라지자 이치긴이 화가 난 듯 언성을 약간 높이며 말했다.
"타이밍 진짜! 죽는 줄 알았잖아요!"
"살았으면 됐지, 왜 지랄이야.“
사실은 처음부터 이치긴과 유진이 꾸민 일이었다. 이치긴의 목숨이 이렇게까지 위협당할 줄은 몰랐지만 다행이었다.
"며칠 전에 일어났던 불미스러운 일은 죄송하게 됐어요."
그들이 하는 양을 어이없게 바라보던 인우에게 뜻밖에도 이치긴은 사과하고 있었다. 철물파를 다 밀어버린 현백회, 그것도 이 싸움의 최고 승자가 된 이치긴이 사과를 하자 정말 기분이 더러워졌다. 병 주고 약 주는 건가. 그의 말이 진심이든 아니든 관심 없었다. 그저 거만해 보이는 녀석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 뿐이었다. 유진에게서 시선을 떼며 고통과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저 멀리서 망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혀, 형님!"
우렁찬 망치의 목소리는 모든 사람의 시선을 끌 만했다. 망치는 피를 쏟으며 앉아있는 인우를 보자 식겁하며 그에게 달려왔다. 주위에 철물파, 현백회가 있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은 채 오두방정을 떨며 인우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리고 동료들에게 소리치며 말했다.
"시방 지금 형님이 죽어가는데 뭐 하는 거야! 후딱 차 문열지 않고 뭐하냐, 느그들 배때기에 상처 났다고 형님을 이리 굴리면 안돼제! 이 썩을 것들아! 언능 차 출발시켜!"
한바탕 난리를 치고 사라진 망치와 인우. 그리고 그 뒤로는 야귀단 조직원들의 차가 따랐다. 그 누구와도 결판을 짓지 못한 인우는 자리를 뜨는 것을 반대했지만 더는 버틸 힘이 없었다. 그들이 주차장을 뜨고 나서도 망치가 여기저기 흘리고 간 부산스러움은 여운처럼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