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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29일 수요일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오늘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의 동료 순교 복자들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124위의 복자들은 103위 성인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순교 사실이 새롭게 드러나고 각 지역에서 현양되던 한국 천주교회의 초기 순교자들이다. 대표 순교자인 윤지충 복자의 순교일은 12월 8일이지만, 이날은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이라, 그가 속한 전주교구의 순교자들이 많이 순교한 5월 29일을 기념일로 정하였다. 한국 교회는 순교자 현양을 위하여 이날을 성대하게 지내며, 교구장의 재량에 따라 성 바오로 6세 교황 기념일도 선택하여 거행할 수 있다(주교회의 2019년 추계 정기 총회).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24-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25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새싹을 키우며 껍질만 남으려는 저희를 어여삐 여기소서.
가을에 콩 거두기를 끝내면 쟁기질을 잘하는 사람이 밭을 잘 갈아둡니다. 고랑과 이랑을 만들고 농부는 쇠스랑으로 보리나 밀을 심고자 밭고랑을 잘 다듬습니다. 그리고 농부는 깜부기나 다른 균 소독을 하기 위해서 하루 동안 소금물에 담가 두었던 보리나 밀 씨앗을 적당하게 뿌립니다. 그러면 물기를 적당하게 머금은 씨앗은 밭에서 적당한 무게로 흙에 아주 잘 떨어져 반쯤 묻힙니다. 그러면 쇠스랑으로 고운 흙으로 씨앗의 세 배에서 다섯 배 정도의 깊이로 묻어줍니다. 며칠이 지나서 밭에 흙을 헤집어보면 싹이 나오면서 씨앗이 점점 껍질만 남고 새싹을 키워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뿌리가 나오고, 새싹이 나오면 씨앗은 완전히 빈 껍질만 남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키우고 기운이 다 빠져 허리가 굽어지고, 주름살투성이가 되는 것과 같은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밭고랑이 밭이랑의 흙으로 새롭게 나온 싹의 뿌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계속 두텁게 묻어줍니다.
농사를 지을 때 흙이 좋지 않으면 또 습기가 적당히 유지되지 않으면 씨앗은 죽지 않고, 알곡 그대로 남아 있게 됩니다. 정말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씨앗의 죽음을 통해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밀알의 의미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무엇을 밀알로 비유하시며 말씀하시고 계실까? 그리고 밀알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이고, 한 알로 남아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가?
1. 밀알의 의미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생각입니다.
우리의 마음 밭에 주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뿌리고 흙을 덮어주시며, 당신의 자상하신 손길로 굵은 흙을 부수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겸손하게 그 말씀을 사는 것이 더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죽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말씀을 말과 행실로 실천하고 다른 사람에게 모범을 보이고 사는 것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2. 밀알의 의미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라는 생각입니다.
나는 가장으로 집안을 두루 살려야 하며, 번성하게 하여야 하는 역할을 맡은 밀알입니다. 내가 죽고 희생하고, 부모님과 자식들과 아내를 위해서 빈 강정처럼 껍질만 남도록 싹을 내고, 뿌리를 내며, 새싹에게 영양을 공급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또한 직장이나 교회나 학교에서도 언제나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목숨을 버리고 죽어야 하는 존재라는 생각입니다.
3. 밀알의 의미는 은총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밀알이 싹을 틔우기 위해서는 적어도 적당한 수분과, 태양 빛과 공기와 열이 필요합니다. 이 모든 것이 적절하지 않으면 그냥 말라 버리고 말 것이며, 뿌리나 싹을 내지도 못하고 그냥 썩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작은 씨앗 하나에도 주님의 은총이 아니면 생명은 생각할 수도 없고, 새 생명은 꿈도 꾸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똑똑하고 가진 것이 많다고 하여도 결국 주님의 은총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더 소중한 것을 잊고 눈에 보이는 것만 찾는다면 결국 우리는 그 모든 것에 의해서 아주 소중한 자신의 생명을 잃게 될 것입니다.
4. 밀알의 의미는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죽고 썩어야 할 밭이 있어야 합니다.
그 밭은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입니다. 아귀다툼도 하고, 전쟁도 하고, 아름답지 못하고 추한 모습으로 뒤엉켜져 있다고 하여도 우리가 일구고 가꾸어야 하는 세상입니다. 그 밭은 우리의 마음이며, 그 밭은 가정이며, 교회이며, 직장이며, 공동체인 것입니다. 매일 싸우고 살아야 하는 우리 삶의 현장이고 현실이 바로 밀알이 죽어야 하는 밭이랍니다. 밭을 거부하면 많은 열매는 고사하고 나 자신도 생명을 유지하지 못하고 살 것입니다. 이 추악하고 더러운 세상이라고 하지만 눈을 돌려보면 너무 아름답고 사랑하고 고운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이 우리의 세상이며, 밭이며, 우리고 살고 죽는 곳이라는 생각입니다.
5. 밀알의 의미는 많은 소출을 위해서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 감춰진 생명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천년, 이천년, 그 이상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많은 시간을 기다리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 씨앗에게 생명을 부어 넣어 주신 주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땅에 뿌려지지 않으면 썩어버리게 되고, 다른 것도 덩달아 썩게 합니다. 내 주변을 썩게 하고, 냄새를 피우면서 시꺼멓게 죽어갈 것입니다. 똑 같이 죽어 썩더라도 싹을 내고 영양분이 되어 썩는 것과 땅에 묻히지 못하고 세상의 더러운 것에 오염되어 썩어버리고 만다면 얼마나 불경스러운 일이겠습니까? 내가 그런 모습이라면 얼마나 후회되겠습니까?
밀알이 혼자 남아있기를 원하면서 마음을 열지 않고, 씨앗을 받아들이지 않고, 주님의 마음이나 다른 사람의 품에 파묻히지 않는다면 나는 아마 무미건조하여 말라버리거나 악마의 간교한 유혹에 빠져 썩어버려 냄새를 풍기며 아주 추악하게 병들어 죽어버릴 것입니다. 결국 나를 살리는 길은 주님의 사랑 안에 완전히 의탁하고 주님의 품 안에서 죽을 자리를 빨리 알아보는 것입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는 생각을 한답니다. ‘자리를 보고 몸을 뉘라’는 말씀이 더욱 가슴에 남아듭니다.
<나는 거룩한 법을 위하여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지 그 모범을 남기려고 합니다.>
▥ 마카베오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6,18.21.24-31
그 무렵 18 매우 뛰어난 율법 학자들 가운데 엘아자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미 나이도 많고 풍채도 훌륭하였다.
그러한 그에게 사람들이 강제로 입을 벌리고 돼지고기를 먹이려 하였다.
21 법에 어긋나는 이교 제사의 책임자들이 전부터 엘아자르와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그를 따로 데리고 가,
그가 먹어도 괜찮은 고기를 직접 준비하여 가지고 와서
임금의 명령대로 이교 제사 음식을 먹는 체하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24 “우리 나이에는 그런 가장된 행동이 합당하지 않습니다. 많은 젊은이가 아흔 살이나 된 엘아자르가
이민족들의 종교로 넘어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25 또한 조금이라도 더 살아 보려고 내가 취한 가장된 행동을 보고 그들은 나 때문에 잘못된 길로 빠지고,
이 늙은이에게는 오욕과 치욕만 남을 것입니다.
26 그리고 내가 지금은 인간의 벌을 피할 수 있다 하더라도,
살아서나 죽어서나 전능하신 분의 손길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27 그러므로 이제 나는 이 삶을 하직하여 늙은 나이에 맞갖은 내 자신을 보여 주려고 합니다.
28 또 나는 숭고하고 거룩한 법을 위하여 어떻게 기꺼이 그리고 고결하게 훌륭한 죽음을 맞이하는지
그 모범을 젊은이들에게 남기려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바로 형틀로 갔다.
29 조금 전까지도 그에게 호의를 베풀던 자들은 그가 한 말을 미친 소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마음을 바꾸고 악의를 품었다.
30 그는 매를 맞아 죽어 가면서도 신음 중에 큰 소리로 말하였다.
“거룩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 주님께서는, 내가 죽음을 면할 수 있었지만,
몸으로는 채찍질을 당하여 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마음으로는 당신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이 고난을 달게 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십니다.”
31 이렇게 그는 젊은이들뿐 아니라 온 민족에게 자기의 죽음을 고결함의 모범과 덕의 귀감으로 남기고 죽었다.
축일5월 29일 복자 윤지충 바오로 (尹持忠 Paul)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신분 : 진사, 양반, 순교자
활동 지역 : 한국(Korea)
활동 연도 : 1759-1791년
윤지충(尹持忠) 바오로(Paulus)는 1759년 전라도 진산 장구동에 거주하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자는 ‘우용’이며,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전주에서 순교한 윤지헌 프란치스코가 그의 동생이다.
본디 총명한 데다가 품행이 단정하였던 윤 바오로는 일찍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1783년 봄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또 이 무렵에 고종 사촌 정약용 요한 형제를 통해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되었으며, 다음해부터는 스스로 교회 서적을 구해 읽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3년 동안 교리를 공부한 그는, 1787년 인척인 이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윤 바오로는 어머니와 아우 윤 프란치스코, 외종사촌 권상연 야고보에게도 교리를 가르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또 인척인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자주 오가면서 널리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권상연(權尙然) 야고보는 1751년 진산의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디 그는 학문에 정진해 오고 있었으나, 고종사촌인 윤지충 바오로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운 뒤에는 기존의 학문을 버리고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하였다. 그때가 1787년 무렵이었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A. Gouvea, 湯士選)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 바오로는 권 야고보와 함께 이 가르침을 따르려고 집 안에 있던 신주(죽은 사람의 위패)를 불살랐다. 또 이듬해 여름, 윤 바오로의 어머니(곧 권 야고보의 고모)가 사망하자 유교식 제사 대신 천주교의 예절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이는 어머니의 유언이기도 하였다.
윤 바오로와 권 야고보가 신주를 불사르고, 전통 예절에 따라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소문은 얼마 안 있어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 소문은 조정에까지 전해져 그곳을 온통 소란스럽게 하였다. 그리고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해 오라’는 명령이 진산 군수에게 내려졌다.
체포령 소식을 들은 윤 바오로는 충청도 광천으로, 권 야고보는 충청도 한산으로 피신하였다. 그러자 진산 군수는 그들 대신 윤 바오로의 숙부를 감금하였고, 이러한 사실을 전해 들은 그들은 곧바로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진산 관아에 자수하였다. 그때가 1791년 10월 중순경이었다.
진산 군수는 먼저 그들을 달래면서 천주교 신앙을 버리도록 권유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천주교가 진리임을 역설하면서 ‘절대로 신앙만은 버릴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여러 차례의 설득과 회유가 있었음에도 그들의 태도가 조금도 변하지 않자, 진산 군수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들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전주 감영으로 이송토록 하였다.
전주에 도착한 윤 바오로와 권 야고보는 이튿날부터 문초를 받기 시작하였다. 전라 감사는 그들에게서 천주교 신자들의 이름을 얻어 내려고 갖은 방법을 다 썼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신앙을 굳게 지키면서 교회나 교우들에게 해가 되는 말은 절대로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특히 윤 바오로는,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면서 제사의 불합리함을 조목조목 지적하였고, 이에 화가 난 감사는 그들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다.
윤 바오로와 권 야고보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천주를 큰 부모로 삼았으니, 천주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결코 그분을 흠숭하는 뜻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전주 감사는 할 수 없이, 그들에게서 최후 진술을 받아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내 조정은 다시 한 번 소란스러워졌고, ‘윤지충과 권상연을 처형해야 한다’는 소리가 드높게 되었다. 결국 임금은 이러한 대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들의 처형을 허락하였다. 당시 전라 감사가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유혈이 낭자하면서도 신음 소리 한마디 없었습니다. 그들은 천주의 가르침이 지엄하다고 하면서, 임금이나 부모의 명은 어길지언정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하였으며, 칼날 아래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사형 판결문이 전주에 도착하자, 감사는 곧 윤 바오로와 권 야고보를 옥에서 끌어내 전주 남문 밖으로 끌고 갔다. 이때 윤 바오로는 마치 잔치에 나가는 사람처럼 즐거운 표정이었으며,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교리를 설명하였다. 그들은 ‘예수, 마리아’를 부르면서 칼날을 받았으니, 그때가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이었다. 먼저 칼날을 받은 윤 바오로가 32세였고, 권 야고보는 40세였다.
윤 바오로와 권 야고보의 친척들은 9일 만에 관장의 허락을 얻어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다. 이때 그들은 그 시신이 조금도 썩은 흔적이 없고, 형구에 묻은 피가 방금 전에 흘린 것처럼 선명한 것을 보고는 매우 놀랐다. 이후 교우들은 여러 장의 손수건을 순교자들의 피에 적셨으며, 그 가운데 몇 조각을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당시 병으로 죽어 가던 사람들이 이 손수건을 만지고 나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윤지충 바오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 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오늘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모든 순교자들이 성인품에 오르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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