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진아, 준혁이형 왔어."
거의 반년 만에 준혁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현백회의 킬러로 말이다. 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들어오는 준혁을 반갑게 맞이했다.
"얼굴 잊어버리는 줄 알았어. 많이 바빴지?"
진은 대답 대신 웃어 보이며 소파에 앉으라 말했다. 웃고는 있었지만, 준혁의 얼굴에는 근심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이곳으로 오면서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치긴으로부터 들었다. 어린 동생들에게 이렇게 큰일을 맡겨둔 채 자리를 비웠던 준혁은 마음이 불편했다. 세 사람은 소파에 앉아 본격적인 이야기에 돌입했다.
"다른 일은 다 미뤄놓고 우선 철물파부터 처리하자. 아직 노정필은 살아있다고 했지?"
준혁이 이치긴과 진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그러자 고개를 끄덕이는 두 사람.
"노정필 쪽에서도 신중하게 움직일 거야. 우리가 신혈회와 싸우는 틈을 타서 뒤통수를 치려고 했다면, 철물파에게 있어서 우리는 그만큼 위협적인 존재가 됐다는 거니까."
새삼 조직이 커졌다는 것에 실감이 되기 시작했다. 철물파는 긴 역사를 지닌 조직이었다. 일제강점기 김두환과 뜻을 함께했던 야인들의 핏줄이 담겨있는 조직이기도 했다. 세월 앞에 삼류 깡패로 변질하고 말았지만.
"우선 철물파 숙소 주위에 애들 배치하고 행동 주시하라고 해. 그리고 민첩한 애들 둘만 노정필에게 붙여."
"그거라면 벌써 지시했지, 우리도 이제는 어엿한 한 조직의 상급간부라고~"
이치긴의 말에 준혁이 픽 웃었다. 이 모습을 다희가 본다면 참 좋아할 텐데. 준혁은 퇴원하자마자 다희를 찾아갔었다. 오랜만에 본 다희는 상태가 많이 나빠져 있었다. 준혁을 보자마자 이유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준혁은 다희가 보는 앞에서 총을 맞고 쓰러졌으니까. 아마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던 것 같다.
"마음 같아선 직접 노정필을 처리하고 싶지만, 아직 온전히 회복되지 않았어. 그러고 보니, 새로운 킬러를 영입했다고 하던데.“
준혁이 별생각 없이 ’새 킬러‘의 이야기를 하자, 마치 유령이라도 지나간 듯 분위기가 싸해졌다. 불안? 짜증? 동생들의 표정은 상당히 복잡해 보였다. 준혁은 둘을 번갈아 쳐다봤다.
”뭔데.“
여태까지의 부드러운 분위기가 아닌, 날카로운 눈빛으로 준혁이 묻자 이치긴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 심각한 일은 아니고~“
쉬는 동안 실력이 떨어지고 집중력이 흩어졌다고 하더니 준혁의 눈빛은 여전히 살아있다. 강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남자. 이치긴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암호명은 칼리야. 본명은 라리사 V. 스미르노바. 러시아인, 여성이고...”
“... 다희 누나한테 이상하게 집착을 해.”
끝이 흐려지던 이치긴의 말을 유진이 이어줬다. 잠깐 이해가 되지 않아 준혁이 고개를 기울였다. 집착을 한다고? 알고 보니, 칼리는 일을 잘 받지 않기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런 칼리를 데려올 수 있었던 건 유진이 예의상 내밀었던 간부진의 사진 덕이었다. 사진에는 다희, 유진, 이치긴, 준혁이 있었는데, 사진들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칼리가 다희의 사진을 집어 들더니 일을 승낙했다는 것이다.
"... 좀 위험한 것 같군.“
”그래서 내가 일을 더 시키지 않으려고 보수를 지급했는데, 안 받고 버티고 있어. 지금은 바로 옆 호텔에서 지내고 있고.“
유진이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이치긴은 영 마음에 안 든다며 투덜거렸고, 준혁은 당장 해치워야 할 일이 아니니 일단은 알고 있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직원을 건드린다면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끊으면 그만이기 때문에.
오랜만에 만난 세 사람은 칵테일바를 찾았다. 준혁은 와인이나 도수 높은 양주를 좋아하게 생겨놓고선 칵테일을 좋아한다. 며 이치긴이 놀렸다. 바는 버건디와 골드로 인테리어된 적당히 프라이빗한 곳이었다. 준혁이 종종 들르는 곳. 사장은 오랜만에 찾은 준혁을 한눈에 알아보는 듯했으나 아는 척을 하진 않았다.
잔이 나오자 이치긴의 '준혁이 형의 귀환을 축하하며'라는 말과 함께 잔이 부딪쳤다. 얼마 만에 들이키는 알코올인가. 준혁은 오늘따라 칵테일이 더 달게 느껴졌다. 한 잔, 두 잔… 그들은 이 분위기에 차차 스며들고 있었다. 그동안 못 나누었던 이야기, 술만 먹으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어릴 적 과거 이야기 그리고 앞으로 해야 할 일 등등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술에 젖고 감상에 젖어 들고 있었다.
"마음대로 하라고 해...! 돈... 돈...! 나도 이제 진절머리가 난다고...!"
콰당! 거의 반대편 테이블에 자리 잡고 있던 누군가가 분노를 터뜨리며 의지와 함께 넘어졌다. 일행이 냉큼 일어서 넘어진 사람을 부축해 일으켰다. 넘어진 사람은 이미 취할 대로 취해 똑바로 일어서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작은 소란에 술을 마시던 사람들의 시선이 주목되었고, 준혁 일행 역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틀비틀. 일행이 꽤 애를 먹고 있었다. 넘어진 여자는 금방이라도 세상이 무너질 듯 허망하고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오는 울음을 꾹 참은 얼굴을 한 그녀는 한아였다. 잔을 잡은 준혁의 손이 멈췄다.
"아휴, 정신 좀 차려봐요!"
"놔… 후우... 머리야..."
"그러게 천천히 마시랬잖아요!"
한아의 맞은 편에 앉아있는 사람은 그녀의 동료 의사였다. 준혁이 한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자 이치긴이 고개를 돌려 다시 한아를 바라봤다. 그때서야 준혁의 주치의였던 한아를 알아본다.
"형 담당 의사였던 사람 아니야?"
"... 맞아."
"완전히 취했네..."
준혁의 눈빛이 심상치 않자 유진과 이치긴이 눈빛을 교환했다. 늘 올곧은 모습만 보여주던 한아의 흐트러진 모습은 준혁의 시선을 한 번에 사로잡았다. 인사불성이 된 한아의 동료는 술 깨는 약을 사오겠다며 사장에게 그녀를 잘 봐달라고 부탁한 채 잠깐 나가버렸다. 한아는 동료가 나간 줄도 모르고 여전히 분에 못 이겨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한아 또한 사람이니, 다른 이들과 똑같이 술을 먹고 취했을 뿐인데. '의사는 똑똑하고 올바른 사람들' 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일까. 신선하다.
"너희끼리 마시고 있어."
준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과 이치긴은 그럴 것 같았는지 흥미롭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잔을 부딪혔다.
준혁은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있는 한아에게 다가갔다. 동료가 앉았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쿵, 쿵. 일정한 간격으로 머리를 박는 한아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누가 말리지 않는 한 무모한 행위는 계속 될 것 같았다. 한아의 머리가 내려오는 타이밍에 맞추어 왼쪽 손을 낙하 지점 위에 올려놓았다. 툭. 한아의 머리가 준혁의 손 위로 떨어졌다.
"뭐야..."
이마에 닿은 물컹한 느낌. 한아는 겨우 한국말 처럼 들리는 말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항상 똑바르게 무언가를 바라보던 눈동자가 초점없이 준혁에게 향했다. 준혁을 알아보지 못한걸까, 아니면 알아보려 노력하는 것일까. 한아의 눈이 스무번 정도 꿈벅대고 나서야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너 뭐야…?"
결국 알아보지 못 했다. 낯선 이의 등장이 심히 불쾌했는지 한아는 미간을 좁혔다 폈다를 반복한다. 준혁은 검지와 중지로 이마를 문지르며 작게 웃었다. 자기를 알아보지도 못하는 사람 앞에서 뭐하는 짓인지. 준혁은 약간의 후회가 들었지만 재밌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밀려왔다. 동생들이 분명히 보고 있을 텐데. 남의 일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자신이 관심을 보이며 다가왔으니. 게다가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사람 앞에서 난감해하는 그의 모습은 돈 주고도 볼 수 없는 광경일 것이다.
"오한아 선생님. 저예요, 도준혁이요."
"뭐? 도준혁? 음... 아, 그 잘생긴 양반… 그런 환자만 있으면 좋을 텐데..."
"... 선생님. 정신 좀 차려봐요."
칭찬에 입꼬리가 올라갈 법도 한데, 앞뒤 좌우로 흔들거리는 한아의 어깨를 부축하는 것이 먼저다. 한아가 벌떡 일어났고, 그녀가 다칠까 얼른 옆으로 다가간 사이, 한아가 머리를 툭. 하고 준혁의 가슴께에 기댔다.
”......“
”... 나 병원에서 쫓겨났어요.“
한아의 말은 혼란스럽던 준혁의 정신을 바짝 들게 했다. 방금 말은 단순한 주정이 아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졌다. 준혁은 한아의 발밑에 놓인 가방을 바라봤다. 가출한 청소년 또는 정년퇴임을 당한 60대 아저씨가 들고 있을 법한 큰 가방이었다.
한아는 코트 주머니에서 집게손가락 크기의 네모난 플라스틱을 꺼내 놓았다.
'외과 오한아’
명찰이었다. 더 자괴감에 빠져드는 한아의 얼굴이 준혁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의사 자격을 박탈당하고 병원에서 추방되었다. 오늘 낮에 열린 병원 윤리위원회에서 결정된 일이다. 결국, 그 일은 한아의 오진으로 결론지었고, 유족들에게 적당한 보상과 사례금을 주는 것으로 결론 지었다. 한아가 그토록 부탁하고 간곡히 청했던 정밀검사의 '정'자는 그 누구의 입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이번 사건에서 철저히 제외된 강순철 과장. 아무도 결과에 대해 반기를 들지 않았다. 한아는 그들의 희생양이 되어 병원에서 쫓겨났다. 아무도 그녀를 동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직하게 산 그녀를 손가락질하며 멸시했다. 만약 신이 계신다면 멱살을 쥐어 잡고 흔들며 따지고 싶었다. 이번 일은 돈과 권력이 있는 자들의 승리였다. 돈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지금쯤 강순철과 그 무리는 승리의 축배를 들고 있을 것이다.
"… 이상하지... 난 의사인데...”
“... 한아 씨.”
“강순철이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
한아는 그 말을 끝으로 정신을 잃었다. 그대로 자신의 몸으로 쓰러지는 그녀의 몸을 가뿐히 잡아냈다. 한아에 대해 아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인사불성이 되어 누군지도 모르는 ―한아는 준혁임을 인지한 후였지만― 남자에게 기댈 사람이 아니다. 그녀에게서 의사 자격 박탈이란,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는 것과 같은 뜻인 것이다. 아직 오른손을 제대로 쓸 수 없는 준혁은 왼손으로 한아의 몸을 끌어올렸다가, 조심스레 그녀의 의자 쪽으로 몸을 뉘여줬다.
참 이상한 일이다. 병원이 아닌 곳에서 보는 한아는 한 없이 작아 보였다. 당당하고 건강하던 그녀가 오늘만큼은 가냘프고 여려보였다. 그래서 이 작고 여린 사람을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들었다. 의사와 환자라는 관계로 만났지만 지금 이 순간 만큼은 한아에게 큰 힘이 되어주는 특별한 관계가 되고 싶었다. 준혁은 눈빛을 바꾸더니 동생들에게 다가갔다.
”애들 네 명만 불러. 여성으로.“
그들이 어떤 대화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꽤나 심각한 것 같다. 하지만 준혁 답지 않은 행동이다. 현백회에 관한 일이면 모를까 남에게 이런 친절을 베풀만한 사람이 아닌데. 하지만 형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으므로, 진이 빠르게 연락을 돌렸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한아의 입에서 나온 누군가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발언. 이토록 사명감이 투철한 사람에게 지독한 미움을 받고 있는 그 사람. 한아의 동료가 돌아왔고, 이걸 버릴 수도 없고... 라는 걱정 반 짜증 반의 목소리가 들려오기가 무섭게 준혁이 부른 부하들이 동료에게 양해를 구하고 한아를 데려갔다.
* * *
한아가 눈을 뜬건 아침 해가 머리위에 올랐을 때였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상체를 일으켰다. 푹신한 침대와 부드라운 이불. 정신을 차리려 눈을 비볐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져 있는 방의 인테리어를 둘러봤다. 낯선 곳...?! 한아의 눈이 번쩍 떠졌다.
”미쳤나, 오한아. 아...“
한아는 자신의 옷이 제대로 입혀 있는지, 어디 다친 데는 없는지 등을 바로 확인했다. 정말, 천만 다행히도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 분명 동료와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 이후로 기억이 없다. 잘 정돈된 방을 보니 모텔이나 여관은 아니다. 그렇다고 호텔도 아닌 듯한데.
”일어나셨습니까.“
문밖에서 들려오는 여성의 목소리. 한아의 기척을 느끼고 말을 건 건가? 노크하더니 들어와서는 예를 갖춘다..
”놀라셨을 것 같습니다.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도준혁 님의 부탁으로 제가 어제 모신 거니까요. 갈아입을 옷과 욕실은 바로 옆에 있으니 편하게 이용해주십시오.“
그녀는 예의 바르게, 칼같이 전할 말을 남기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도준혁...? 갑자기?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려 했지만 생전 처음 겪어보는 숙취가 몰려와 힘들었다. 귀신같이 놓여 있는 숙취해소제를 마시고는 한동안 멍을 때리니, 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났어요?”
허... 설마 했는데. 한아가 있는 방에 들어온 사람은 놀랍게도 진짜 준혁이었다.
“어, 어떻게…”
“기억 안 나나 봐요. 어제 저한테 안겼잖아요."
“... 네?”
“이렇게, 제 여기에다 얼굴 묻으시고.”
“잠깐, 잠깐만요.”
분명히 장난이다. 그러니까 안겼다는 건 말 그대로 안겼다는 거고, 일부러 헷갈리게 말한 거다. 그래, 그 정도는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설명이 되지? 한아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자 준혁이 웃었다.
“어제 선생님이 술에 흠뻑 취해 있더라고요. 그래서 데려왔어요. 집도 모르고.”
준혁은 술 깨는 약을 하나 더 가져왔는지 한아의 손에 쥐여주었다.
“아,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지금 이게 맞는 상황인가? 평소의 한아였으면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갔겠지만, 아니 애초에 이런 일이 생길 상황을 만들지 않았겠지만 변명할 거리도 없어 그저 사과했다. 준혁이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그러니까, 도와주신 거죠? 감사합니다.”
“무슨 술을 그렇게 마셔요. 안 좋은 일 있었어요?”
준혁이 일부러 물었다. 갑자기 안색이 어두워지는 한아의 얼굴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한아는 표정을 굳히며 입을 다물었다. 자신에게 일어난 악몽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이유도 따지지 못하고 쫓겨나게 되었다. 위에서 내려진 결정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강순철 과장에게 따지고 싶었지만, 그는 절대로 만나주지 않았다. 분하다. 억울하다. 술 때문에 지끈거리는 머리가 더 아파졌고 가슴은 답답해져 왔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괴로운 표정을 짓던 한아는 머리를 감싸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의사가 되기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쳤는데 더는 의사 일을 할 수가 없다. 막막하기만 하다..
“병원에서 쫓겨났죠?”
준혁의 말에 한아가 고개를 들었다. 쫓겨났다는 말이 상당히 거슬렸기 때문이다. 준혁은 어떠한 표정도 짓고 있지 않았다. 무덤덤하고 어떻게 보면 냉정한 표정으로 한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어느새 한아의 짐가방이 놓여 있었다.
“아니요. 그런 곳은 애초에 제 발로 나왔어야 했어요. 쫓겨나다니...”
한아가 준혁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예상 이상으로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한 한아는 헛웃음이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도 얄팍한 자존심을 챙기는 자신이 우스웠다.
“도와줄까요.”
나지막한 준혁의 목소리. 하지만 그 음성에는 단단한 힘이 들어있었다. 한아의 눈동자가 완전히 준혁에게 향했다. 준혁의 손에 들려있는 검은 물체를 본 한아의 눈이 커졌다. 그의 손에는 분명 총이 들려있었다. 모든 이성과 사고가 마비된 듯했다. 준혁이 한아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와 그녀의 무릎 위에 총을 내려놓았다. 자신에게만 들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도와줄 수 있어요.”
한아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넋 나간 사람처럼 허공을 바라볼 수밖에. 준혁이 어째서 이런 무시무시한 것을 가지고 있을까. 그리고 지금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이 기운은 대체 뭘까. 준혁은… 뭘 하는 사람일까.
“... 준혁 씨 뭐 하는 사람이에요.”
한아의 목소리가 단단해졌다. 마치 추궁하는 듯한 말투.
“뭐 하는 놈 같아요?”
준혁은 아주 여유로운 얼굴로 대답했다.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악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한아는 그가 두렵다고 느껴졌다. 한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던 숙취보다도 총을 봤다는 충격에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사고를 지배했다. 땅바닥에 놓인 짐가방을 들고 황급히 문으로 걸어갔다. 그때, 뒤에서 준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었으면 좋겠다고.”
“......”
“... 했죠, 어제.
한아의 심장이 저 밑으로 떨어졌다. 단 한 번도 입 밖에 꺼내본 적 없는 말. 의사가 사람을 죽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사람만큼은... 강순철만큼은 죽도록 밉다. 한아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어느새 준혁이 다가와 문에 기대며 한아의 앞에 섰다. 그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한아에게 말했다.
“도와줄 테니…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
가까이서 들리는 준혁의 목소리가 매혹적이다. 한아의 심장이 터질 듯 빠르게 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