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당시 학살당한 피해자와 그 아기의 모습에 대한 주민 증언을 토대로 그린 강요배 화백의 ‘젖먹이’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되는 제주 4·3 사건
"제주도민을 다 죽여도 대한민국의 존립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 라는 상상할 수도 없는 말을 내뱉으며 미군정과 이승만이 제주도민을 무참히 학살한 제주 4·3 사건.
“우리 마을 북촌리에 대학살이 벌어지던 그날, 아침부터 갑자기 총소리가 나더니 군인들이 마을 동쪽부터 불을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연설이 있으니 학교 운동장으로 집합하라 했습니다. 군인들은 우선 경찰 가족, 군인 가족을 따로 분리시키더군요. 낌새가 이상하다 여긴 사람들은 사돈의 팔촌이라도 경찰이 있으면 경찰 가족 쪽으로 줄을 섰습니다.군인은 우선 민보단 간부를 불러 내 바로 총살했습니다.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하자, 군인들이 사람들 머리 위로 총을 난사했는데, 그 과정에서 너댓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 중엔 한 부인도 있었는데, 업혀 있던 아기가 그 죽은 어머니 위에 엎어져 젖을 빨더군요. 그날 그곳에 있었던 북촌리 사람들은 그 장면을 잊지 못할 겁니다.”
-김석보, 1998년 63세, 조천읍 북촌리
제주 4·3 사건 [濟州四三事件]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 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해방 이후 제주도는 사회주의 세력과 미군정의 지지를 받은 우파 세력이 대립하다가 1947년 3·1절 기념 집회에서 미군정 경찰이 제주도민들에게 발포하여 6명이 사망하면서 갈등이 증폭된다.
*경찰과 서북 청년단 등 우파가 행한 제주도민에 대한 탄압에 대항하여 제주도민들이 1948년 4월 3일을 기해 일제히 봉기했다.
*폭력적 탄압 중지, 단독 선거 반대, 단독 정부 반대, 민족 통일, 미군정 반대, 민족 독립 등의 정치적 구호를 내세웠다.
*미군정은 군을 투입했고 진압 과정에서 약 28만 명의 도민들 중 약 10%에 해당하는 3만여 명이 군·경 토벌대에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발발 1년여 만인 1949년 봄에 종결되었는데 언급 자체를 금기시하다가 1990년대 들어서야 역사적 재조명 되었고 2000년 1월 국회에서 '제주4·3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진상 조사와 피해자 파악이 실시되었다.
고등 한국사 < 냉전 체제와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 대한민국과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의 수립>
#제주43사건 #제주43 #제주43희생자추념일 #76주년 #제주 #제주도
첫댓글 이승만이 저지른 거라 그런가 2년연속으로 대통령이 추념식 불참했대잖아
독재자들은 하나같이, '불순한 이념이 문제'라는 식으로 이유를 '만들어가며' 고문과 살인을 했는데.. 만약에 그렇다 한들, 그게 정말 정당 사유가 되나? 중요한 문제일 순 있어도 그게... 한 사람 한 사람 삶을 파괴하는 것만큼 심각한 문제인가? 독재자들 심리를 알아내려는 게 무모한 짓이긴 하지만 진짜 지옥에 갔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