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뉴스메일을 보낸 직후, 적지 않은 오류가 있음을 제 스스로 발견했습니다. 디바의 <왜불러>는 도저히 리메이크라 보기 어려운데, 제가 순간적으로 실수했습니다. 또 <아빠의 청춘>은 남진이 아니라 오기택(64년)의 노래였습니다. <아빠의 청춘>은 <만리포 사랑>(80년대말 개그맨 김의환이 <유머1번지> 등에서 `똑딱선 기적소리’라는 이 노래 첫 구절을 따 유행어를 만들기도 했죠)을 부른 박경원도 부른 적 있습니다. 남진도 이 노래를 잘 불렀는데, 그 때문에 제가 착각한 것 같습니다. 남진의 트로트 가요로는 <가슴 아프게> 외에 <미워도 다시 한 번>이 유명하죠.
그 다음 많이 지적해 주신 부분이 <센터포드>(Centerfold)인데, 축구 포지션인 centerfoward와 centerfold가 우리 말로는 `센터포드’, `센터폴드’로 구분되겠지만, 실제로 우리가 듣기에는 연음으로 인해 거의 똑같이 들린다는 점 때문에 한글표기를 `센터폴드’가 아닌 `센터포드’로 했습니다. 노래 끝부분의 `angel of centerfold’라는 부분도 `엔젤 오브 세너포드’ 라고 들립니다.
이밖에 길옥윤이 패티 김과 헤어질 때, 패티 김에게 준 노래제목도 <후회>가 아니라 <이별>이었습니다.(노래가사 중에 `그날밤 그 언약을 생각하면서 지난 날을 `후회’할거야’라는 대목이 있어 착각했습니다)
그리고 혜은이와 웃는 모습이 비슷하다고 들었던 요즘 탤런트도 서민경이 아니라 서민정이더군요(요즘 탤런트에는 약하다보니)
서론이 너무 길었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제게 개인적으로 메일을 보내주신 분들 중에서 `왜 김추자는 빼먹느냐’, `바니걸즈는 어디 갔냐’, `통기타 가수들은 왜 언급 않냐’, `국보자매가 보고 싶다’는 등 아마도 제게는 형, 누나뻘이 되는 40대 또는 30대 후반 선배님들의 요구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80년대를 이야기하기 앞서 먼저 70년대에 비록 가수왕이 되진 못했지만, 시대를 풍미한 노래꾼들을 스치고 지나갈까 합니다.
먼저 김추자. 김추자는 제게는 `첫번째 여인’(?)입니다. 요즘 아이들은 걸음마를 떼면서 듣는 음악이 모차르트나 브람스 이지만, 저는 김추자가 그 역할을 대신했습니다.(아이를 방치한 무심한 저의 부모님) 전축에 레코드판을 올려 놓으면 노래가 나오는 게 신기해 집에 있던 LP판을 이것저것 들었는데, 저는 김추자 판을 가장 좋아했습니다. 보컬이 강렬하고, 리듬이 빨랐기 때문이겠죠. 아이들이 드라마보다 쇼나 광고에 더 빨려드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김추자는 불세출의 여인이었습니다. 51년 춘천에서 태어난 김추자는 공부도 잘했고, 강원도 기계체조 대표선수와 응원단장까지 맡을 정도로 활달했습니다.
그는 춘천향토제에서 <수심가>를 불러 입상한 경력도 있고, 이때 <배뱅이굿>으로 유명한 명창 이은관으로부터 많은 칭찬을 들었다고 합니다. 김추자는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뒤, 교내 노래자랑대회에서 1등을 차지한 뒤 신중현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69년 <늦기전에>로 데뷔합니다. 신중현은 이때 사이키델릭에 매료될 즈음이었고, 그런 음악적 탐구는 김추자를 통해 추구됐습니다.
김추자는 그때까지 여자가수라면 다소곳하게 서서 노래를 부르는 게 모본인 줄 알았던 흐름을 뒤흔들었습니다. 터질 듯한 몸매(김추자는 얼굴, 가슴, 다리 등 온몸이 마치 부풀은 찐빵 혹은 풍선 같았습니다. 하지만 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늘씬한 모습이었습니다)에 현란한 율동으로 청중들의 넋을 빼놓았습니다. <거짓말이야>, <늦기 전에>, <님은 먼곳에>(20년 뒤 조관우가 리메이크) 등등. <거짓말이야>는 박정희 대통령의 심기를 거슬려 금지곡이 됐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박정희가 71년 3선개헌 뒤, 대선 유세장에서 `다시는 대통령 후보로 나서지 않겠다’는 말을 1년만에 유신정권 수립으로 뒤집었는데, 라디오에서 김추자가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라고 하니 도둑이 제발 저린 격이었다는 게 당시 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추자의 또다른 노래,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는 박정희의 애창곡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김추자는 텔레비전 화면에 자주 등장하지 않아 신비감을 풍기기도 했습니다.
김추자가 70년대 중반, 활동이 뜸하자 일각에서는 `김추자는 고정간첩’이라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무대 위에서 반지로 다른 간첩에게 신호를 보낸다는 만화같은 이야기였는데, 초등학생들에게까지 이 소문이 퍼졌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저는 친구로부터 이 소문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놀라움보다는 아, 이제 김추자 노래는 더 들을 수 없겠구나 하는 아쉬움이 더 컸습니다), 그리고 이 소문을 철석같이 믿었습니다.(매카시즘의 무서움이란) 김추자도 75년 대마초 가수로 묶여 무대에서 물러납니다.
김추자는 3년간의 공백 뒤, 78년 컴백 리사이틀을 합니다. 그러나 당시 결별한 매니저가 소주병을 깨 휘두르는 바람에 얼굴 등에 상처를 입습니다. 그러나 김추자는 얼굴을 붕대로 칭칭 감은 채 무대에 섭니다. 무대에서 그는 “쓰러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팬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섰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김추자의 재기 리사이틀은 인산인해를 이뤘지만, 이 리사이틀은 `여왕벌의 마지막 비행’같은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김추자는 86년 KBS <백분쇼>에 출연하고, 몇 차례 음반을 내기도 했지만 김추자의 시대는 75년이 끝이었던 것 같습니다.
음반표지에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 알록달록한 판타롱 바지를 입고서 허리를 뒤로 한껏 제쳤던(지금 생각하면 히트곡 편집음반인 것 같습니다) 그 김추자도 지금 50대 초입에 들어선 중년 아주머니가 됐겠죠? 김추자는 부산의 대학교수와 결혼했습니다. 제 삶에서 거의 처음으로 만난 대중가수인 탓인지, 김추자 얘기가 길었습니다.
김추자를 만든 신중현은 사실 당시 저는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7살짜리가 신중현을 이해하긴 힘들었으니까요. 미8군에서 활동한 신중현은 작곡가로서 김추자, 펄시스터즈, 김상희 등을 스타덤으로 올려놓은 뒤에 본인도 직접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73년 나온 <미인>은 대표곡이죠. 쇼프로(토요일토요일밤에)에서 전자기타를 울러메고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싶네. 딩~딩딩딩 딩디디디디딩~’ . 저는 도대체 뭘 이야기하려는건지 이해할 수 없었고, 너무 생소한 리듬에 거부감만 느꼈는데, 이 노래는 광고음악 등으로 쓰이는 등 높은 인기를 누리는 게 신기해 보였습니다. 그러다 이 노래가 `저질’을 이유로 금지곡이 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였으니, 나중에 커서 신중현씨에게 미안한 마음 금할 길 없었습니다.
신중현은 74년 `신중현과 엽전들’이라는 그룹사운드도 만듭니다. 여기에는 80년대 그룹사운드계에 큰 영향을 준 `사랑과 평화’의 멤버 이남이가 함께 합니다. 신중현은 일종의 반항아였습니다. `엽전들’이라는 이름도 유신정권에 대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일반시민들에 대한 자조적 표현이라고 해석됩니다. 일설에 의하면, 신중현은 당시 청와대쪽으로부터 `정권을 찬양하는 노래를 만들어달라’는 요구를 거절한 뒤, 이후 대마초 가수로 낙인찍힌 것으로 전해집니다. 당시 신중현이 정권의 요구를 거절하고, 만든 노래가 대곡 <아름다운 강산>이었습니다. 74년 만들어진 이 노래는 오랜 은둔기를 거쳐 81년 `신중현과 뮤직파워’라는 그룹에 의해 비로소 세상의 빛을 봅니다. 이후 86년께 이선희에 의해 이 노래는 더욱 승화됐죠. 이 노래는 전두환 대통령이 아주 좋아했다고 합니다.(박정희를 피해 만든 노래가 전두환에게 사랑받는 역사의 아이러니)
신중현의 노래는 지금 들어도 전혀 구닥다리 냄새가 전혀 안나니, 그가 얼마나 시대를 앞선 인물인지 알게 해줍니다. 또한 그는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록음악계의 대부입니다. 여러갈래로 가지뻗은 국내 록그룹을 거슬러 올라가면, 90년대 그룹들은 대부분 신중현의 아들 신대철이 주도한 `시나위’로 모아지고, 시나위를 포함해 들국화, 사랑과평화, 송골매 등 80년대 그룹들의 원형질도 신중현으로 드러납니다.
김추자, 신중현 이외에 70년대 초반 활약가수로는 한국의 `비치보이스’인 `키보이스’가 있습니다.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요. 해변으로 가요오~. 달콤한 사랑을 속삭여봐요’로 시작하는 <해변으로 가요>가 대표곡이죠.
어릴 때, 매년 8월1일만 되면 부모님들과 함께 당일치기 휴가를 떠났습니다. 5인가족이 오붓하게 떠나는 휴가가 아니라, 아버지가 함께 일하던 직원(직원이래봤자 10명 남짓), 그리고 고모, 친척들(아버지에게는 사촌동생이 되는)을 몽땅 데리고 가는, 무슨 수학여행 같았습니다. 가는 곳도 늘 해운대였습니다. 이때 해운대 백사장(그때는 백사장이 까마득히 길었는데, 요즘에는 손바닥만하더군요)에서 가장 많이 들린 노래가 이 <해변으로 가요>였고, 윤형주의 <조개껍질 묶어>, 그리고 나훈아의 <해변의 여인>(물 위에 떠~오르는) 등이 단골 레퍼토리였습니다.
70년대는 남성 또는 여성중창단들이 활발한 활동을 하던 시기였습니다.
서수남-하청일은 70년대 초반 <팔도유람> 등의 히트곡을 남겼는데, 이들은 재치와 순발력이 뛰어나 쇼프로 단골멤버였습니다. 당시 변웅전이 사회를 보던 <유쾌한 청백전>(매주 수요일, <가족오락관>의 원조격) 등이 주요무대였습니다. 변웅전은 이후 일요일 아침마다 문화체육관에서 했던 <명랑운동회>의 장수 사회자이기도 했죠. 흰 추리닝을 입고, 연예인들이 실수할 때마다 `허허허허허’ 하는 특유의 좀 썰렁한 너털웃음을 웃곤 했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팔도유람>은 한순간도 쉴틈없이 쏟아내는 속사포 가사로, 요즘의 랩에 견줄만합니다.(<팔도유람>에 앞서 서영춘씨의 <시골영감>이 있긴 했습니다) 요즘 일부 얼뜨기 래퍼들은 말을 빨리하는 것을 랩으로 착각해 가사전달력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는데,(이는 랩을 노래로 생각하지 않고, 대사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랩도 어떤 의미에서 가사이기 때문에 리듬과 멜로디 규정을 준수해야 전달력이 올라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개인적으로 DJ DOC의 이하늘을 최고 래퍼로 꼽습니다. 이하늘의 랩은 아무리 빨라도 무슨 이야기를 하는건지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이하늘은 랩을 할 때,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를 부른다는 것을 숙지하고 이를 수행해낼 능력도 있기 때문입니다) 서수남-하청일은 요즘의 랩보다 더 빠른 속도여도 한 음절 한 음절을 정확하게 표현했습니다.
서수남-하청일은 처음에는 둘 사이에 여성멤버가 하나 끼어있었습니다. 한혜정이든가, 현혜정이든가. 그런데 언제부턴가 여성멤버는 빠지더군요.
80년대 들어 서수남-하청일의 인기도 쇠퇴하면서 이들이 기존 동요 <과수원길>을 부를 때, 개인적으로 저는 좀 서글펐습니다. 이후 이들은 `한일 자동펌프’ 등의 광고를 하거나 밤무대 활동 등에서 함께 하기도 했으나, 대부분 각자의 삶을 찾아갑니다. 서수남씨가 라디오MC를 거쳐 이후 주부노래 강사(아마도 88년 시작된 <주부가요열창>의 덕을 많이 본 듯), 아마추어 골퍼 등으로 또다른 성공적인 삶을 살아간 반면 하청일씨는 사업을 하다 실패해 현재 LA에서 청소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서수남-하청일 콤비 이후 70년대 중후반으로 접어들면 <편지>의 어니언스, <처녀뱃사공>의 금과은 등의 남성듀엣들이 활동합니다. 그런데 당시 박정희 정권은 국어사용운동을 펼치면서 대중가수들의 영어식 표기를 우리말로 고치도록 합니다. 그래서 하루아침에 `어니언스’는 `양파들’, `바니걸스’는 `토끼소녀’로 바뀌기도 합니다.
여성중창단은 60년대 <마포종점>을 부른 은방울 자매가 있긴 하지만, 현대적 의미의 여성듀엣은 역시 신중현이 발굴한 펄시스터즈가 시초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배인순-배인숙 자매로 구성된 이들은 <님아> <커피 한잔> <떠나야할 그 사람>(이들 노래는 지금 들어도 시대와 뒤떨어졌다는 느낌을 전혀 주지 않습니다) 등을 연달아 히트시킵니다. 펄 시스터즈는 70년대 초반 김추자와 함께 기존 여가수의 이미지를 바꾼 가수입니다. 쭉 빠진 몸매, 서구적 외모, 현란한 율동, 당시에는 생소한 소울풍 가요 등등(김추자와 펄 시스터즈 둘 다 신중현이 동시대에 한꺼번에 키워냈으니, 신중현의 위대성은 여기에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저는 펄 시스터즈의 무대를 직접 본 적은 없습니다. 제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볼 수 있을 나이가 됐을 때쯤, 이들은 무대에서 이미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대신 이들의 음반은 어릴 때 많이 들었습니다. 펄시스터즈는 76년 언니 배인순이 동아그룹 회장 아들 최원석씨와 결혼하면서 팀이 해체됐고, 동생 배인숙씨는 79년 솔로로 <누구라도 그러하듯이>라는 노래를 히트시키기도 했으나, 그게 끝이었습니다.
펄 시스터즈의 명성은 이후 쌍둥이 자매 바니걸즈가 이어갑니다만, 펄 시스터즈가 아티스트였다면, 바니걸즈는 엔터테이너쪽이었다고 봐야할 겁니다. 70년대 중반 당시, 저의 고모의 멘트입니다. “펄 시스터즈가 무대를 휘어잡는다면, 바니걸즈는 무대에서 잘 논다(좋은 의미에서)”
음색이 약간 허스키한 바니걸즈는 당시 가요계의 귀염둥이였습니다. <그냥 갈수 없쟎아>(최근까지 포장마차 제목으로 많이 쓰였습니다)가 히트곡이었습니다. 바니걸즈는 만능 엔터테이너였습니다. 코미디언 뺨치는 말솜씨 덕분에 퀴즈, 오락프로그램 단골로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했고, 노래도 일반가요 뿐 아니라, 선배들의 트로트를 불렀다가, 색동저고리에 족두리까지 쓰고 나와 민요를 불렀다가, 군부대 위문공연에는 <육군 김일병>을 불렀다가, 어떨 때는 등이 푹파인 시커먼 드레스를 입고 나와 <I can boogie> 등 팝송을 부르다가, 크리스마스가 되면 산타 복장을 하고 캐롤을 부르기도 했습니다. 바니걸스는 80년대 초반까지 활동했으나, 나이가 들면서 `귀여운’ 이미지에서 또다른 변신을 하기가 힘들어 더 이상 나아가지는 못했습니다.
이후 여성중창단은 국보자매, 희자매(`인순이’가 리더보컬, 10대의 김완선이 백댄서를 잠시 맡기도), 숙자매, 그리고 80년대 후반의 서울시스터즈(`방실이’가 리더보컬) 등으로 이어집니다. 어찌보면 최근의 SES나 핑클도 펄 시스터즈나 바니걸스의 연장선이라고 봐야 하는 걸까요?
70년대를 이야기하면서 통기타 가수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송창식, 윤형주(트윈 폴리오), 김세환, 양희은, 박인희, 은희, 라나에로스포,정종숙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하겠죠.
통기타 가수들은 가수라고 하면 이전까지 `딴따라’ 이미지가 강했던 개념을 바꿔놓습니다. 대학생 시절부터 노래를 시작한 이들은 `학사가수’라는 별칭이 따라붙곤 했죠. 당연히 이들의 노래는 7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에게 유신정권의 폭압이라는 엄혹함 속에서 `낭만’을 느끼게 해준 묘한 이중성을 갖고 있습니다.
송창식은 80년대에서 다시 언급하도록 하고. 트윈 폴리오 해체 이후, 윤형주도 성공을 거둡니다. 윤형주는 <별> <어제 내린 비> <바보> 등으로 70년대 후반까지 높은 인기를 누렸습니다. 윤형주는 윤동주 시인의 6촌 동생이기도 합니다.
김세환은 아버님이 유명한 연극배우이자, 대학교수였습니다. `가방을 울러멘/그 어깨가 아름다워/옆모습 보면서/정신없이 걷는데/활짝 핀 얼굴이 내 모습 가벼웁게/온종일 걸어다녀도/즐겁기만 하네/길가에 앉아서 얼굴 마주보며/지나 가는 사람들 우릴 쳐다보네/랄랄라 랄라라 랄라라라라라~’
김세환의 히트곡이었는데, 제목은 기억이 안나네요. 가사에서도 알 수 있듯 유복하고 화목한 집안에서 자라난 김세환은 부잣집 도련님 분위기를 풍기며, 구김살 하나없는 대학생 오빠 모습을 띄었습니다.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와 편안한 분위기. 그리고 여유에서 배어나오는 유머 등도 그의 또다른 매력이었습니다.
양희은에 대해서는 얼마나 이야기해야 할까요?
일단 70년대 이야기만 하겠습니다. 여고를 졸업하던 71년 남산 숭의학당(?)에서 친구들과 친지들을 모아놓고 첫 발표회를 열었던 양희은은 70년대 초반 `서강대가 낳은 3대 인물’(박근혜, 그리고 또 한 명이 남덕우였던가 헷갈립니다)로 불려지기도 했습니다.
양희은은 김민기를 쫓아다니며, 김민기로부터 많은 곡을 받았습니다. 요즘의 양희은은 50줄 퉁퉁한 중년 아줌마지만, 70년대 가끔 텔레비전 화면에 나온 양희은은 단발머리에 청바지를 입은 씩씩한 대학생이었습니다. 양희은은 집이 가난해 텔레비전에 나올 때도 운동화를 신고 나온 적도 많았습니다. 양희은의 노래 상당수가 70~80년대에 금지곡으로 묶여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70년대의 양희은은 대학가에서 불려지는 노래와 기성 가요계에서 불려지는 노래가 이중화됐습니다. 먼저 대학가에서 불려지던 노래(금지곡 목록이기도 합니다) <아침이슬> <서울로 가는 길> <작은 연못> <천리길> <늙은 군인(투사)의 노래> <알캉달캉> <아름다운 사람> <상록수> 등등.
<아침이슬>은 설명이 필요없는 노래이지만, 저는 진정한 양희은을 잘 모르다가 고3 여름방학때 친구들과 고시촌에 공부한답시고 들어갔다가, 그곳에 온 대학생 형들을 통해 이 노래를 처음 알게 됐습니다. 테이프에서 이 노래를 처음들었을 때의 그 떨림이란. 이후 뒤늦게 양희은의 열렬한 팬이 돼 양희은의 숨겨진 노래를 듣기 위해 테이프 노점상을 기웃거리며 <금지곡 모음곡> 테이프를 몇 개씩 사곤 했습니다.
<서울로 가는 길>. `우리 부모 병들어 누우신 지 3년에/뒷산에 약초뿌리 모두 캐어드렸지/나 떠나면 누가 할까?/늙으신 부모 모실까?/서울로 가는 길이/왜 이리도 멀으냐?’ 저는 이 노래를 양희은 노래인지도 모른 채 고모의 기타반주에 맞춰 배웠고, 어른들 앞에서 재롱떨며 노래부르곤 했습니다. 그때 이 노래를 잘 모르던 어른들은 “애 노래가 왜 이리 청승맞냐?”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식모살러 가는 옛 누이들 노래 같습니다.
<작은 연못>도 이 시기에 배운 노래입니다.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에/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 것도 살지 않지만/먼 옛날 그곳에는 예쁜 붕어 두 마리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지요/깊은 산 오솔길 옆./(…중략…)그놈 살이 썩어 들어가/물도 따라 썩어들어가/연못 속에는 아무 것도 살 수 없게 되었죠.’
붕어 두 마리가 살다 서로 싸우다 한 놈이 죽고, 그 놈이 죽는 바람에 물이 썩어 나머지 한 놈도 죽고 만다는, 동화라고 하기에는 썸뜩한 이야기입니다. 또 장조에서 단조로 바뀌면서 분위기도 어둑해집니다. 이 노래는 남북한이 싸우는 것을 비유했기 때문에 금지곡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당시 저의 고모가 제게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천리길>은 요즘 SK정유 광고에 어린아이 목소리로 나오고 있습니다. 80년대 캠퍼스에서도 애창됐습니다. `동산에 아침햇살 구름뚫고 솟아나’로 시작되는. 양희은의 대부분 노래가 금지곡으로 묶이면서 정치성을 배제한 노래만이 오롯이 남게 됩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내 님의 사랑은> <세노야>(고은의 시) <한사람> <백구> 등입니다.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은 실연당한 사람들의 애창곡으로 오랫동안 사랑받았었죠. <내 님의 사랑은>도 마찬가지인데, 양희은의 노래는 정치성을 뺀 노래들도 참으로 처연한 곡들이 많았습니다. <내 님의 사랑은>의 가사를 보면, `~사랑하는 그대여, 내 품에 돌아오라/그대 없는 세상, 난 누굴 위해 사나~’라고 하는 등 70년대 정서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시기 유행가들을 보면, 남녀를 불문하고 `가지마, 돌아와’ 등 매달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80년대로 접어들면 `갈테면 가라’는 식의 가사가 늘어납니다.
양희은이 마지막으로 10대 가수에 올랐던 적이 79년입니다. 당시 송창식과 함께 통기타 가수 대표격으로 10대 가수에 뽑힌 양희은은 막판 가수왕 발표 직전 혜은이, 이은하, 조경수, 전영록 등이 조마조마해할 때, `나랑은 관계없는 일’이라는 듯 치마입은 다리를 꼬고 앉아 좌우로 종아리를 이리저리 흔드는 장면이 슬로비디오 화면으로 잡혔는데, 어린 마음에도 `멋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제가 <한겨레21>에서 문화를 잠깐 담당할 때, 양희은씨를 직접 인터뷰한 적 있습니다. 97년 가을 어린 시절 흠모했던 이를 만난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설레었던지. 커피숍에서 만나 2시간 가량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시원시원한 대답이 퍽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때, 양희은씨는 `자기는 요즘도 늘 하루 4시간씩 연습한다. 방송끝내고 집에 가면 밥하고, 연습하는 게 전부다. 연습을 몇 일 안하면 금방 표가 난다’고 말했습니다. 양희은씨가 나이가 들어도 예전의 음색을 잃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이밖에 통기타 가수로는 <목마와 숙녀> <모닥불 피워놓고>를 부른 박인희, <꽃반지 끼고>의 은희(소녀같은 미성이었습니다. 요즘 눈으로 보자면 `왕내숭’이라고 해야할 지 모릅니다), <사랑해 당신을>의 라나에레스포(저는 지금도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해 당신을~ ( …) 예예예 예예예예~’로 유명한 이 노래는 지금도 집들이때 신혼부부가 서로 마주보며 `닭살 중창’ 할 때 가끔 불려집니다. 이밖에 <달구지>를 부른 정종숙도 있고, <시골길>을 부른 MC 임성훈(임성훈이 70년대 후반 가수로도 활동했다는 사실. 임성훈은 연세대 응원단장 출신이기도 합니다.)도 통기타 세대군에 포함시켜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이밖에 70년대를 풍미한 가수들로는 `한국의 레이 찰스’ 이용복(맹인가수), <고향이 좋아>의 김상진, 콧수염 가수 이장희, 최백호 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
이용복은 나이가 들 때까지 미소년의 외모를 유지했습니다. 음색은 아주 가늘었는데, <약속> <아이스크림 사랑> 등을 부른 80년대 임병수와 음색이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 왜 나를 낳셨나요?’로 유명한,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1943년 월 일생>을 비롯해 역시 자전적 노래인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고, 다람쥐 쫓던 어린 시절’로 시작하는 <어린 시절>. 두 곡은 모두 번안곡입니다만, 자신의 삶을 담고 있습니다. 이용복은 태어나면서부터 맹인은 아니었고, 7살때였던가 마을에서 썰매를 타다 썰매 지치는 송곳에 찔려 맹인이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용복은 <그 얼굴에 햇살이>(70년대에 제목 바꿔부르기 개그가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때 이 노래는 `그 낯짝에 땡볕이’로, 알랑 드롱이 나왔던 <암흑가의 두 사람>은 `껌껌한데 둘이’ 등으로 회자됐습니다), <쥴리아> 등으로 70년대 후반까지 높은 인기를 누렸습니다.
이장희는 자유주의자였습니다. <그건 너> <한 잔의 추억> 등에서도 그런 분위기는 물씬 풍겨납니다. 대마초 가수로 낙인찍힌 이장희는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현재 로스앤젤레스에서 <라디오 코리아> 사장을 맡고 있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지난 96년 역시 <한겨레21>에 있을 때, 다른 일로 미국출장을 갈 일이 있었는데 부장 지시도 받지 않았는데, 그저 이장희씨를 만나고 싶어 <라디오코리아>를 찾아가 인터뷰하고 기사를 쓴 적이 있습니다.
당시 이장희씨가 `이혼하고 대학생 아들과 사는데, 대학생 아들도 기숙사에 묵고 있어 혼자 산다’라고 말할 때 그 쓸쓸함이 제게도 전달이 되더군요.
최백호에게서는 바다 냄새가 납니다. 심한 부산사투리를 쓰는 최백호는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로 유명한 하수영씨 소개로 데뷔합니다. 최백호의 데뷔곡은 77년 <내 마음 갈 곳을 잃어>였는데, 이 노래는 77년 늦가을 김혜자, 박근형 등이 출연한 MBC 드라마 <후회합니다>에 박근형의 주제가로 쓰이면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합니다.
잠깐 이 드라마 이야기를 할께요. 김수현이 극복을 쓴 이 드라마는 아마도 주말연속극의 시초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지금같은 토, 일 주말연속극은 없었습니다. MBC 일요일 프로그램을 보면, 7시 <웃으면 복이 와요>, 8시 <수사반장>, 9시 <뉴스데스크>, 10시 <챔피언 스카우트>(권투 중계프로그램) 등으로 이어지는 인기 프로 중간에 다른 프로그램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던 것이죠. 그런데 <수사반장>과 함께 토요일날 하던 <113 수사본부>가 힘이 조금 빠지면서 그 틈을 주말연속극이 대신 채워나갔습니다. 아마도 77년 혜은이가 드라마에 출연한(혜은이는 연기도 곧잘 했습니다. 79년에는 이승현과 함께 영화 <제3한강교>에 주유원으로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왜 그러지>가 시초였던 것 같고, 후속 프로그램이 <후회합니다>였던 것 같습니다.
<후회합니다>는 김수현이 극본을 쓴 것으로, 드라마 내용은 고부간의 갈등을 그린 것입니다. 탤런트 김용림이 시어머니역, 김혜자가 며느리, 박근형이 전문직 남편이었습니다. 지금 보면 이야기도 안되는 것이지만 당시 시어머니는 편집증적으로 며느리를 미워했고, 이 때문에 박근형은 중간에서 갈등하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박근형은 결국 아내를 사랑하면서도 어머니 때문에 별거하고. 여기에 김혜자의 친구이자, 김용림이 좋아하는 여자가 이 사이에 끼어들고. 김혜자는 강릉 내려가 혼자 지내고 있는데, 당시 남매인 손창민과 김민경(이름이 정확하지 않습니다. 제 또래인 이 아역탤런트는 <호랑이선생님> 등에 출연한 뒤, 연예계를 떠나 나중에 이화여대 정외과에 들어갔고, 이후 결혼하고 외국인회사에 근무중이라는 것이 `그때 그사람’류의 프로에 잠깐 나온 적 있는데, 지금은 뭐하는지 모르겠습니다)이 아빠와 함께 불쑥 엄마를 찾아옵니다. 바닷가에서 검은색 쇼울을 어깨에 두르고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던 김혜자는 저쪽 편에서 손창민(아마 그때 초등학교 6학년쯤 됐을 겁니다) 남매가 `엄마’하고 뛰어오자, 쇼울을 벗어버리고 슬로비디오 화면으로 활짝 웃으며 막 달려갑니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찬란하기 그지 없지만, 당시엔 저뿐 아니라 저
의 어머님도 눈물을 줄줄 흘리며 바라봤던 명장면입니다.
당시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싫어한 가장 결정적 이유는 김혜자가 아이를 못 낳기 때문인 것으로 기억합니다. 손창민은 고아원에서 줏어온 아이이고, 손창민의 여동생은 박근형의 여동생(시어머니 입장에서는 딸)이 결혼전에 사귄 남자친구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입니다. 당시 결혼을 약속했는데, 공군 파일로트인 그 남자친구는 작전수행중 비행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김수현 특유의 `출생의 비밀’을 적절히 섞어놓은 것이죠.
이야기가 너무 빗나갔습니다. 어쨌든 박근형(당시만 해도 박근형은 미남탤런트의 원형이었습니다)이 고부간 갈등에 괴로워하며 홀로 방안에서 담배를 피며 시름에 잠길 때마다, `가을엔,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로 시작하는 <내마음 갈 곳을 잃어>가 흘러나왔습니다. 이 노래는 이 드라마의 덕을 톡톡히 본거죠. 최백호는 이후 94년 내놓은 <낭만에 대하여>도 2년 뒤인 96년 김수현의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에서 한 남자탤런트가 중얼거리면서 뒤늦게 인기를 탔던 것을 생각하면, 아마도 김수현씨가 최백호 노래를 많이 좋아한 것 같습니다. 최백호는 이후 <입영전야> <그쟈> <영일만 친구> 등을 히트시켰습니다.
이밖에 여자가수로는 이은하(80년대 때 소개하겠습니다), 장미화, 옥희 등이 또 10대 가수 단골멤버였습니다.
펄 시스터즈와 바니걸즈와의 상관관계는 김추자와 장미화의 상관관계와 같다는 수학공식을 적용해도 될 것 같습니다. 김추자가 파워넘치는 율동과 시원한 가창력에서 뿜어내는 카리스마로 무대를 휘어잡았다면, 장미화는 온몸을 잠시도 가만두지 않고 흔들어대는(김추자가 주로 히프 등 하체 위주의 춤이었다면, 장미화는 어깨 등 상체 위주의 춤을 많이 췄습니다) 율동, 그리고 가창력은 김추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하지만 늘 명랑하고 자신감 넘친 목소리, 무엇보다 내숭끼 전혀 없이 입을 활짝 벌리고 깔깔대며 웃는 등 장미화는 이전까지 얌전한 여자가수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왈가닥 가수의 대명사로 활약했습니다. 장미화는 당시 군부대 위문공연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안녕하세요> <헬로아>(나중에 DJ DOC가 <여름이야기>에서 멜로디 부분을 리메이크합니다) 등의 히트곡이 있습니다. 장미화는 76년께 결혼하고 연예계를 떠난다며 고별 리사이틀을 가졌습니다.(당시만 해도 여자연예인들은 결혼하면-굳이 재벌가와 아니더라도- 연예계를 떠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리사이틀은 TV로 중계됐는데, 장미화는 `마지막 정열’을 불태웠던 것 같습니다. 고별 리사이틀이라고 해도, 장미화는 눈물 찔찔 흘리거나 하지 않고, 치렁치렁한 흰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도 흰 캡 같은 것을 쓰고, 손에는 커다란 반지를 낀 채 호쾌한 모습으로 마지막 팬서비스를 했던 것이 퍽 인상적이었습니다. 두 뺨에 짙은 화장을 한 장미화는 <안녕하세요>를 부르며, 몇 차례 팬들을 향해 완벽한 윙크를 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 동생이랑 윙크 연습한다고 눈 찡끗거리며 놀곤 했습니다.
옥희는 70년대 후반 미모의 인기여가수지만, 사실 이보다 권투선수 홍수환의 아내로 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홍수환이WBA 주니어페더급 챔피언이던 시절(4전5기 신화를 창조한), 홍수환의 인기는 아마 요즘의 안정환과 이승엽을 몇배 튀겨놓은 것과 비슷할 겁니다. 홍수환은 쇼프로그램에도 자주 나와 직접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부남이었던 홍수환이 옥희와 스캔들을 일으킵니다. 옥희와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명동시내를 걷는 모습이 사진에 찍힌거죠. 우여곡절 끝에 결혼합니다.
저는 <한겨레21>에 있을 때, 홍수환을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홍수환씨 부부는 강남에서 고기집을 하고 있었는데, 홍수환씨가 약속시간에 좀 늦어 옥희씨가 저를 대신 맞아주었습니다. 함께 저녁을 먹는데, 저는 어린시절 본 옥희씨를 기억하고 있었지만, 옥희씨는 예쁜 외모는 여전했지만(솔직히 말하자면 적당히 살이 올라 둥글둥글한 모습입니다) 마치 막냇동생 또는 조카 대하듯 편하게 대해주며 넉넉한 모습을 보여주는 등 식당 아주머니 분위기를 풍겨 더 정감있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옥희는 77년께 <나는 몰라요>로 큰 인기를 누렸고, 80년대 초반 <이웃사촌> 등을 내놓기도 했지만, 그때는 옥희의 시대는 아니었습니다. 시원한 가창력이 일품이었습니다.
잠깐 스치고 지나가려 했는데, 글이 너무 길어져 오늘은 도저히 80년대로 넘어 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70년대를 기억하지 못하는 80년대에 유년시절을 보낸 분들은 오늘은 형, 언니들한테 양보했다고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다음 번에 조용필을 필두로 한 80년대 가수왕들을 언급하겠습니다.
70년대 이야기를 하나 못한 게 있는데, 바로 대학가요제입니다. 대학가요제는 80년대를 이야기할 때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80년대 이야기는 너무 길지 않게 3~4차례로 나눠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번 2편을 포함해 앞으로도 `오류’를 저지르지 않으리라는 약속을 드리기가 힘든데, 개인적인 이유를 들자면, 저는 이 뉴스메일을 `일’이라고 여기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중음악 전문가도 아니고, 문화부 대중음악 담당기자도 아닙니다. 저는 살인사건을 쫓거나 사회의 달라진 변화를 취재하는 기동팀에 속해 있습니다. 뉴스메일이란 짬짬이 시간에 잠깐씩 유년시절 추억에 잠기는 `휴식’과도같은 것인데, 인터넷을 뒤지고 사실관계를 거듭 확인하고 이러다보면 이 뉴스메일 자체가 `또 하나의 일’이 되고 마는 까닭입니다.(물론 지난번 `허 일병 미스터리’나 `여중생 사망사건’ 등의 뉴스메일처럼 논란이 이는 부분을 어떤 `의무감’(또는 분노)에서 다룰 때는 반복해서 사실관계를 확인하곤 합니다)
또, 변명 같습니다만, 오프라인인 `신문’은 한 번 쓰고나면, 정정기사를 내기 전까지 어쩔 도리가 없지만, 온라인에선 잘못 쓰면 정정하고, 또 굳이 제가 아니어도 다른 분이 `그게 아니에요’ 라고 지적하고(이런 거 지적할 때, 짜릿하지 않습니까? 제가 그 재미를 왜 뺏어야 하나요?), 또 `잘못된 지적’을 하면 또 다른 분이 `그거 맞아요’라고 다시 재지적해주는 게(예를 들어, 지난번 변웅전 사례처럼) 더 `온라인’스럽지 않나 생각합니다.(아 이 가증스런 합리화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