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 내용 구분 않고 같이 적습니다. 영화 이야기지만, 역사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만한 것들이 있어서 나문답에도 올려봅니다. 이 영화 '19금'인 건 아시죠? ^^)
이 영화를 대체로 남녀 애정물로 보는 시각이 많은 듯 하다. 하나의 영화를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겠지만, 역사물이라는 관점에서 이 영화를 본다면... 아마추어 테러 조직의 지리멸렬... 쯤으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먼저 영화의 내용과 설정을 조금 살펴보자.
치열한 첩보전이 되어야 할 미인계는 아마추어적인 어설픈 접근 방법 때문에 흔들린다. 화려한 다이아몬드 반지는 애초에 계략으로 오해되었지만, 오해가 걷히자 흔들린 남자의 진심을 보여주는 매개로 변화한다. 어쩌다 감당하기 힘든 첩보전의 요부가 된 순진한 여자(영화 상으로는 미인계를 구사하는 요부는 누구나 맘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만... -_-)의 흔들림은 이 매개로 인해 진폭이 더욱 커지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실착(失着)으로 이어지는데...
영화는 육체적 관계의 묘사에 많은 것을 할당하면서도, 그 관계를 통해 흔들리는 여자와 남자의 감정 묘사 같은 것에는 별로 할당하지 않았다. 극중 역할 상 보여서는 안될 여자의 흔들림이 관계를 통해 전달되지 않았더라면, 남자도 캐릭터 특성이 쉽게 흔들릴 종류가 아니다. 따라서, 남녀의 흔들림과 진심, 교감 이런 것이 있었어야 함에도 이 부분에서 묘사가 부족하거나 의도적으로 생략했기 때문에 남자의 진심이 담긴 선물이 오해를 유발하기도 하고, 오해가 걷혔을 때 의외감이 크기도 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영화는 멜로물로 보기에도 약간 애매한 면이 있다. 만약, 멜로물의 공식에 따라 남자가 조금 더 여자에게 다정다감한 면모로 묘사되었더라면, 여자가 갈등 속에 자기를 희생하는 신파극으로 영화가 흐르거나, 혹은 여자가 자기 조직을 홀라당 배신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도 이상해 보이지 않았을텐데 말이지.
잡힌 여자를 남자가 주저 없이 즉결처분(-_-)하는 것 역시 이 영화가 일반적인 멜로물에서 벗어난 형태임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야 남자와 잡힌 여자가 감옥 창살을 사이에 두고 만나서 최루성 장면을 연출하던지, 마음 속 감정을 억누르면서 결연히 각자의 사회적 입장을 따르던지 하는 장면이 있었을텐데... 참고로, 남자의 빠른 형집행은 정권에서 첩보전의 중심 요직에 있으면서 학교동창까지 고문해야 하는 남자(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정형근에 근접한 인물?)가 사회적 위치를 보존하려 한 정치적 행위로 해석할 수 있다. 부관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었고 '색'에 흔들려 판단력 잃은 자신보다 상황 파악을 잘 하고 있었다는 설정은, 여차하면 남자의 정치적 지위가 위태로울 수 있는 극도의 경'계'심이 요구되는 상황임을 보여준다. 여러가지 면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진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데, 개인적 감정을 떠나 그런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것은 중국 역사물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설정이다. |
'중국' '첩보전'이라는 키워드로만 생각했을 때는 중국영화 특유의 머리 잔뜩 굴리는 계략과 반전이 난무하는 어지러움을 연상하기 쉽겠다. 하지만 감독이 누군가? 이안이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상당히 simple(!)한 형태이고, 남녀 주인공 뿐 아니라 다른 주역들의 두뇌 회전도 거의 멈춘 것으로 설정된다. 어지럽게 난무하는 것도 정신 사납지만, 그렇다고 아예 멈추게 하는 건 또 뭔지... 이안 감독... 세계적인 흥행작 '와호장룡'(臥虎藏龍: Crouching Tiger, Hidden Dragon, 2000)으로 요새 말로 "이건 무협도 아니고, 무협이 아닌 것도 아니여"라며 정작 중국인들은 혼란스럽게 만들며 거부감을 불러일으킨 전력이 있는 그가 '색, 계'(色, 戒: Lust, Caution, 2007)에서는 항일운동을 혼란스럽게 묘사한다. 아마도 제목처럼 극도의 경戒심을 가져야하는 제약된 상황에서 色을 갈구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는 게 영화의 목적이고, 항일운동이나 첩보전이나 비극적 결말 따위는 그 목적을 포장하는 소품 정도로나 생각했을 거다. 원작 소설부터 그런 면이 있다고 하는데, 어째건 그나마 그 묘사 대상이 현 중국본토의 공산정부와 대결했고 현재 대만에서도 반감이 커가는 장개석 정부의 활동이라 이번에는 거부감을 크게 줄일 수 있었겠지. 요즘이 항일운동을 신성한 표현 영역에 두려는 태도가 많이 줄어든 시대이기도 하고... 하지만, 영화의 모델이 되었던 실존인물의 가족이 영화를 책망하는 통한의 기자회견을 가지는 것만은 피할 수 없었다. 이것마저도 영화 흥행의 장식거리로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에서 여자가 다이아몬드 때문에 임무를 망치는 것에 어떤 정치적 표현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는 의견도 있다. 직설적인 표현이 아니기 때문에 그 의도가 어떤 것인지 단언해서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 어떤 의도이건 항일운동의 희생 같은 것을 비하하는 식으로 표현된다면,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겠다. |
영화의 배경이 되는 중국 현대사에 대한 설명은 이 글을 참조하면 좋을 것 같다.
http://office.kbs.co.kr/kinocine/contents_view.html?log_no=2916
영화를 통해서도 대충 짐작할 수 있지만, 중국의 항일전쟁 시절 장개석 국민당정부는 일본과 화평을 주장하는 왕정위의 남경 친일괴뢰정부와 대립하고 있었고, 이것이 영화의 역사적 배경이다. 장개석과 모택동의 대립이 배경인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가끔 있더라는... 남자 주인공이 모시는 것으로 영화에도 가끔 언급되는 왕정위에 대해서 약간 더 설명하면, 젊은 나이부터 청나라 타도에 앞장 선 혁명가이자 이론가로 날리던 인물이고, 모택동처럼 내놓고 좌파는 아니더라도 친좌파 성향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장개석의 국민당에 합류한 후에도 국민당 내부의 친좌파 대표인사였으나, 항일전쟁 당시에는 일본과 화평을 주장하며 친일 괴뢰정권인 남경 국민당정부를 수립하여 장개석과 대결한 인물이다. 현대 중국에서는 한간(漢奸)이라며 나찌 점령하 프랑스의 비시정부처럼 부정적인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다. 일제 말기에서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시절, 친일로 변절한 인물이 우리나라에만 있었던 것은 아닌 모양...
위 글 중 영화 속 여주인공의 모델이 되었던 실제 인물 정빈여에 대한 설명을 옮겨본다. 무엇을 위해서였건 항일운동에 가족 중 여럿이 자신을 희생했음에도 영화처럼 묘사된다면... 누군들 비분하지 않겠는가...
"영화 [색계]가 공개된 뒤 미국에서 살고 있던 정빈여의 여동생(이미 80이 넘은 할머니!)이 원한에 차서 기자회견을 연다. 언니 ‘정빈여’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청춘을 바친 애국투사라고. 영화에서처럼 미인계로 묘사될 그럴 인물이 결코 아니었다고. 실제 알려지기로는 정빈여가 체포된 뒤 정빈여는 가족을 살리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정빈여의 아버지는 이듬해 병사했고, 남동생은 전투기 조종사로 일본군과 싸우다 격추당해 죽는다." |
다시 요새 말로, "멜로도 아니고, 첩보전도 아니고, 항일운동도 아니여"로 다시 한번 요약될 수 있는 영화 '색,계'는 여주인공 탕유의 순진함과 요염한 화장에 강한 contrast를 주면서, 진한 화장을 한 여인의 진한 향수 내음처럼 잔향을 오래 남기는 것이 장점이겠다. 소설책 읽은 느낌이라 영화다운 시각적 풍부함도 적고 플롯도 단순한 이런 영화가 잔향을 오래 남기는 것은, 그 잔향이 마음에 들건 안들건(진한 향수 내음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라), 이안 감독의 관록 있는 연출력 때문임은 물론이다. 영화 흐름의 완급이나 표현의 강약 조절 등을 통해서 일반을 벗어나는 파격적인 형식을 보이는 것까지, 이안 감독은 서양 평론가들의 입맛에 맞추는 법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여기에, 다양한 영화에서 다양한 색깔의 역할을 맡으면서도 송강호 수준의 excellent까지는 아니라도 항상 자기 역할을 잘 소화해 내는 양조위에 대한 언급을 빼놓을 수 없다. 이렇게 보면 영화는, 감독-남녀주연배우가 삼위일체를 이뤘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는 상당한 영화다. 그러나 이것은 그 외 등장인물과 스토리 등의 존재감은 미약하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남자는 분명히 부인이 있고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불륜 맞는데도, 관객은 남자의 부인이나 불륜에 대해서 관심을 두기 어렵다. 또 남자와 여자가 처한 역사적/사회적 상황 역시 보통은 인물의 내적/외적 갈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인데, 이 영화에서는 그런 게 중요한가 하는 생각까지 들어버린다.
그렇게 해서 이 영화는... 어떤 관점에서는 무척이나 뜨거운 영화이고... 또 따라서... 어떤 관점에서는 냉소의 대상인 영화이기도 하겠지. |
여기서 비교해 볼 영화가 있다. '블랙북'(Zwartboek, black book, 2006)... '색계'와 닮은 영화라고 해서 봤는데, 진짜 여러모로 닮았다. '로보캅'(RoboCop, 1987), '원초적 본능'(Basic Instinct, 1992) 등으로 한 때 유명했던 폴 버호벤이 감독한 이 영화의 대략적인 스토리 라인은... 2차세계대전을 배경으로 나찌에게 가족을 학살 당한 유태계 여자가 레지스탕스에 가담해서 미인계를 이용해 보안국 장교에게 접근한다. 그러다 상대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원초적 본능' 정도는 아니지만 나름 화끈한(?) 장면도 많고... 거기에 '블랙북'이 2006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영씨네마상을 받고 '색계'는 2007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 이쯤 되면 이안의 '색계'가 '블랙북'에 영향 받았다고까지 생각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뭐가 잘못됐다는 뜻은 아닌데, 그래도 좀...
물론 차이도 많이 있다. '블랙북'은 서사적인 이야기 구조이고 이야기구조의 완결성도 높다. 전쟁 멜로 첩보전 등 이야기 구성요소가 풍부하며, 각 쟝르의 기본을 충실히 따르고 따른다. 역사 의식도 명확하다. 또한, '블랙북'은 등장인물들이 머리도 제법 쓰는 것으로 나오고 반전도 이것저것 생기는 등등 볼거리가 많다. 그러니까, 이안의 '색계'가 "멜로도 아니고, 첩보전도 아니고, 항일전쟁도 아니여"라면 버호벤의 '블랙북'은 "멜로이기도 하고, 첩보전이기도 하고, 반나찌전쟁물이기도 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블랙북'이 장점만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에 비해 '블랙북'은 화면와 그 연결이 거치른 느낌이 든다. 사실 '원초적 본능'이 예외였지, 폴 버호벤 영화에서 종종 느껴지는 경향이다. 버호벤이 주로 찍은 영화 류의 특성 때문에 표가 별로 안났던 것. 그리고 인물과 상황 묘사에 깊은 맛이 안느껴지고, 하나의 영화에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한 듯 산만한 느낌을 준다. 이 점에서 이안 감독과 차이가 나는 것 같다. '색계'는 이야기구조 상으로 보면 빈약하지만, 그런 구조 안에서 화면과 영화 진행이 상당히 유려하다. 거기에 강조해서 집중할 포인트도 명료하고. 전체적으로 잘 다듬어졌다는 느낌을 준다.
개인적으로 이안 감독을 별로 안좋아하고 '색계'도 그저 그렇다고 보지만, 이렇게 비슷한 영화끼리 비교해 놓고 보면 이러저러한 단점에도 왜 '색계'와 이안 감독 손을 들어줄 수 있는지 명료하게 보이게 된다. 물론, 이것은 내용과 별개로 영화를 잘 만들었느냐의 관점에서 이야기다. 내용까지 살펴본다면 나는 '블랙북'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사실 서양 평론가들도 좀 그런 게, 이안이 나찌와 레지스탕스에 대해서 '색계' 같은 영화를 만들었으면, 아무리 유려하게 만들어도 그렇게까지 좋은 평가를 안했을 거다. 이것들이 잘 모르는 동아시아 이야기라고... -_-; |
곁다리로, 헐리웃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제법 규모 있게 재현한 1940년대의 상해 거리와 그 상해 거리를 오가는 수 많은 엑스트라들을 보면서, 비슷하게 1940년대가 배경인 우리 영화 '기담'(2007)이 재현한 경성 거리와 비교가 되더군. 우리나라 영화제작자들은 한류라며 세운 콧대가 금새 꺽이는 것만 걱정할 것이 아니라, 앞으로 중국영화와의 경쟁도 많이 걱정해야 할 것 같다. 이런 추세가 계속 된다면, 1990년대 무렵 홍콩영화 앞에서 한국영화가 지리멸렬하던 시대가 재현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듯...
처음에 간단히 적기 시작한 글이 이모저모 살펴서 넣다 보니 길어져버렸는데, 정리해 보면... 이안이 기본 형식을 벗어나면서도 유려하게 영화를 만드는 재능과 관록에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그러나, 내용을 살펴보면 '색계'는 훌륭한 영화라는 생각이 안든다. 거기에, 버호벤이 만든지 1년도 안돼 비틀어서 따라 만든 것도 그렇고... 영화만 잘 만든다고 다는 아니다. 영화 잘 만드는 감독이 한둘도 아니고... 세상을 바르게 보면서 뭔가 선도하고 개척하는 모습을 보여야 훌륭한 감독이라 존경도 받고 명작으로 두고두고 기억되는 거지. -_-; |
첫댓글 라임님 반갑습니다 라임님이 언급한 세영화-색계,블랙북,기담-를 모두 보았습니다 ^^ 요즘 중국영화들은 화면은 매끄럽게 흘러가는데 건조하고 무엇인가 따로논다는 느낌이 듭니다 배우들의 연기,베드신의 노출도 (음모까지 나옴),세트와 엑스트라에 쏟는 막대한 정성등 상전벽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중국정부의 통제때문인지 중국인들의 선호도때문인지 몰라도 모든문제를 철저하게 개인문제로 귀결시킨다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또 스토리가 무협영화시절보다 더욱 단순화되거나 더 황당해졌습니다 아무튼 화면은 풍성한데 보고싶은 느낌은 더욱 더 없어져가고 있습니다(심심하죠)^^
네... 아직 뭔가 좀 부족하긴 한데... 그래도 잠재력이 많이 보이는 게 중국영화 같아요. 암튼 정암님 잘 지내시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