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곡리
玫谷里는 무안읍소재지에서 북쪽으로 3㎞ 떨어진 곳에 있다. 감방산에서 내린 물이 무안천을 이루고 영산강으로 흐르는데 그 천을 사이에 두고 양림 수반과 도산 신촌/발산 등 두 마을 씩 매곡리를 이루며 자리하고 있다. 모두 무안박씨 집성촌이다.
마을의 위치가 감방산을 포함한 삿갓봉[笠峰], 옥녀봉, 병풍봉 임자봉 등 다섯 개의 봉우리가 이 마을을 향하고 있어 풍수지리로 보면 마치 다섯 명의 노인이 밥상을 받는 형국이라 해서 盤谷리라 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그들 식으로 한자 이름을 玫谷里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행정구역 이름에 ‘谷’이 들어 간 것은 마을 앞에 펼쳐진 들판이 영산강 둑을 막기 전까지는 바닷물이 들어오는 水路로 마치 계곡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본래 외읍면의 지역으로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楊林리 壽盤리 鉢山리 詠花亭 新村 등으로 나온다.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도산리 발산리 수반리 양림리 신촌리 등을 합하여 매곡리라 해서 무안읍에 속하게 되었다.
매곡리는 신촌/발산 도산 수반 양림 등 4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신촌에 보평사라는 사찰과 발산에 3개의 재각과 2기의 비가 있다. 도산에는 2개의 정자와 2개의 비 1개의 재각이 있다. 또한 수반에는 죽헌정과 3개의 효열각 11개의 비가 있으며 양림에는 양림사와 2개의 재각과 2개의 효열비 등이 있다.
보평산 아래 서당골이 있는 마을 - 매곡1리 신촌/발산
무안읍에서 고절리를 지나 감방산 방면으로 3㎞ 쯤 가면 만나는 마을이 신촌 마을이고 조금 더 가면 발산 마을을 볼 수 있다. 두 마을 다 행정 구역명으로 무안읍 매곡1리에 속한다.
신촌이나 발산 마을은 무안 박씨 무안파祖 애한정 박익경(1438 - 1520)의 5대손인 항길의 자손들이 터를 잡았다. 신촌 마을은 1668년에 태어난 서문이, 발산 마을은 1671년에 태어난 진문이, 도산 마을은 1688년에 태어난 승문이 각각 터를 잡았는데 이들은 모두 형제들로 각 마을의 입향조이기도 하다.
신촌마을은 큰몰 작은몰로 이루어졌다. 지명의 유래를 보면 ‘고절리에서 떨어져 나와 새로 마을을 이루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심정적으로 주민들은 고절리의 평촌과 더 가깝게 지내고 있다. 지금도 신촌과 평촌 사람들이 모여 만든 신평회라는 모임이 운영되고 있다.
신촌마을은 흥이 있었다. 마을 굿패가 활발하였기 때문이다. 울력을 할 때나 모내기를 할 때 그리고 당산제를 지낼 때는 모든 주민들이 나와 신명을 펼쳤다. 마을에는 당산나무를 포함하여 세 개의 입석(도로옆 논머리 대밭속)이 마을을 지켜주고 있었다. 예전에는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그림 같은 마을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길가에 우람하게 서있던 두 그루의 당산나무가 고사되고 젊은 사람들이 객지로 떠나면서 예전의 신명은 없어졌다. 정자나무 옆에는 2ⅿ가 넘는 입석이 지금도 마을의 안녕을 지키고 있으며 얼마 전까지 연자방아도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다.
이 마을 뒤 보평산 자락에는 매곡리 수반 출신인 박정암이라는 비구니가 1986년에 세운 법화종 사찰인 보평사가 있다. 현재는 박정암스님이 타계하고 딸이 지키고 있다. 또한 보평사 옆에는 성암 박경래 선생의 신시가비와 만해 박영술의 효자각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고절리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에는 함평이씨열부각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 뒤에는 각시봉 또는 옥녀봉이라 부르는 자그마한 봉우리가 있다. 이 산은 병풍산의 병풍을 뒤로 하고 단아하게 앉아 있는 각시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앞의 논은 ‘배논’이라 불렀다. 예전에는 마을 앞을 지나 도산 마을 밑에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해서 배가 들어온 논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실지로 마을 입구에 있었던 당산나무는 배를 맸다는 말이 있었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자주물 잉깟밭 경변 뒷매 영화정 서당골 수밑에 등이 있다.
같은 행정구역인 발산은 매봉 뒷골 솟도골 건너말로 이루어졌다. ‘鉢山’이란 독특한 이름의 지명유래를 이해하기가 어렵다. 마을유래지의 기록으로 본다면 ‘鉢山은 신촌 북쪽에 있는 마을로 보평산의 오연봉이 마치 비둘기가 날아가는 형태라 하여 이름 하였다’ 하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을의 뒷산은 普平山(寶平山으로 쓰기도 한다)이다, 자료에 의하면 이 산은 시대별로 이름을 달리하는 성이 있었다. 신라시대에는 ‘綿州城’으로 부르는 성이 있었으며, 고려시대에는 ‘勿良古址’라 부르는 토성이 있었다. 현재 용월리 약곡 마을 주변 문안재로 부르는 곳에 토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시대에는 세종에서 문종까지 이어지는 관방시설 정비에 따라 그때까지 토성이었던 성을 돌로 쌓아 만든 보평산성이 있었다.
서당골에 서당이 있어
주민들은 지금도 ‘성재’라는 이름으로 보평산의 능선을 부르고 있다. 실지로 능선의 등산길을 따라 성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이러한 점을 두고 봤을 때 뒷산에 성이 있어서 ‘발산’이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또한 마을의 형국이 조리형이라 ‘鉢’의 語義를 살려 바루처럼 생긴 마을이라 해서 발산이라 했을 것이라 추정해본다.
현재의 발산 마을은 주민들의 푸념대로 3개의 악재를 만났다. 우측에는 군부대(제8332부대 2대대 주둔)요, 좌측으로는 고속도로(망운 - 광주)가 지나고 있으며 마을 위로는 고압선인 철탑이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이 마을만 일본군이 주둔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보평산에 포진지를 구축하기 위해 신촌 도산 등에 일본 공병대가 주둔했지만 유독 이 마을만 피해나가 주민들은 마을의 지형 때문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마을에는 인근 주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무재샘이 있었다. 무지개샘이라고도 하며 이슬비나 안개가 피어오를 때면 샘을 중심으로 해서 무재개가 피어올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물이 시원하고 약수로 소문이 나서 멀리 목포에서도 물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고속도로가 나면서 없어지고 옆 자리에다 郡에서 새롭게 무재샘을 만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발산 마을에는 영화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詠花亭은 도산 마을 입향조의 아들인 박면( 1728-1792)의 호인데 그는 科擧의 뜻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하면서 종족과 문하생들을 모아 놓고 詩禮와 풍류를 강론하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원래는 발산 마을에 있었으나 보평산 아래로 옮기는 등 네 차례의 이건을 거쳐 현재는 박염의 경신재와 함께 도산 마을에 있다.
또한 마을에는 1944년에 박병도가 건축한 삼해재와 면강정사라는 편액이 걸려있는 정자가 마을에 남아있다. 하지만 관리 소홀로 잡초가 우거지고 문짝은 떨어져 나가 있으며 방안에 보관하였던 족보를 비롯한 문중의 각종 문서들은 이미 없어져 버렸다. 외얏골에 연모재와 마을 앞 방죽너머에는 관람재가 있으며 ‘열부김해김씨기행비’가 있다.
마을 회관 옆에는 1999년에 세운 표제석이 있으며, 마을 앞에는 1987년 지역의 유림들이 뜻을 모아 세운 ‘병소 박기룡선생 숭모비’가 있었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거무동, 사락가운데, 해망굴, 용당굴 등이 있다.
신촌 마을을 포함한 발산 도산 주민들은 후손들의 교육에 관심을 가져 마을별로 교육자금을 거출하여 1850년 서당골에 영화정 서당을 건립하였다. 이어 1935년에는 면성자립진명학원 설립하였으며, 1941년 면성공립학원인 매곡간이학교 2년제를, 그리고 1946년 면성북국민학교 6년제를 설치하였다. 현재는 평촌 마을에 무안북국민학교가 있다.
선비가 사는 감방산 아래의 마을 - 매곡2리 도산
이 마을은 도산을 포함하여 이팝골 승기촌 용당골이 모여 이뤄졌다. 처음 들어온 사람은 무안 박씨 무안파祖 애한정 박익경의 5대손 항길의 자손이 터를 잡았다. 매곡1리의 신촌 마을은 1668년에 태어난 서문이, 발산 마을은 1671년에 태어난 진문이, 도산 마을은 1688년에 태어난 승문이 각각 터를 잡았는데 이들은 모두 형제들로 각 마을의 입향조이기도 하다.
문헌으로 지명의 유래를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매곡리에서 유일하게 이 마을이름만 나오지 않고 詠花亭이란 지명이 나온다. 詠花亭은 이 마을 입향조의 둘째 아들인 박면의 호이다. 이후 1912년이 되어서야 외읍면 道山으로 나타나며 이후에는 전부 같은 이름으로 쓰여지고 있다. 道山이란 선비들이 모인 마을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마을 앞을 지나 함평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돗재’라 하는데 지명에 대한 유래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 고개의 풍수적 형국이 돼지[豚]의 형상이어서 사람들이 ‘돈재’라고 부르다 현재의 이름이 되었다 한다. 두 번째는 산이 험준하여 도둑들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함평의 우시장에서 소를 팔고 돌아오는 농부들의 호주머니를 노리는 도둑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대부분 칼[刀]을 들고 있었다 해서 돗재라 했다. 또한 이 고개는 해제, 운남 지도의 사람들이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였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도둑들이 지키고 있어 재를 넘을 때는 상당한 준비를 해야만이 넘을 수 있었다고 한다.
마을의 主山인 坎防山은 영광의 불갑산을 거쳐 함평의 군유산을 지나 뻗어온 노령산맥의 줄기로 승달산으로 이어진다. 예로부터 너무 높아 깜박산으로도 불려졌던 이 산에는 용굴, 금굴, 호랑이굴 등 세 개의 굴이 있는데 그중의 하나인 ‘용굴’이 팔부 능선쯤에 있다.
용굴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어느날 이 굴에 사는 용이 오랜 기다림 끝에 때를 만나 승천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하늘로 올라가던 중에 사람들의 눈에 띄어 부정을 타 하늘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결국 용은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내려오면서 꼬리로 감방산의 꼭대기를 내리쳐 화풀이를 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후로 흙이 무너져 내리면서 산의 높이가 낮아졌으며 용은 이무기가 되어 굴로 들어가 칠산바다로 사라졌다는 사연을 안고 있다.
또한 이 산에는 99개의 골짜기가 있었는데 한 개의 골짜기가 모자라 서울이 될 수 없었다는 전설을 안고 있으며 그 골짜기 중 하나인 승지골에는 극락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터만 남아있을 뿐이다.
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골짜기도 많다. 돗재고랑을 비롯하여 토끼안고랑 쑥대고랑 안고랑 호랑이고랑 성주고랑 용굴 무재샘 금굴 밑산재 여시굴 선바위재 버버리굴(메아리가 들리지 않는다) 작은돗재 당너머 등이 있다.
한때는 녹두밭 웃머리라 칭할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지만 1955년 마을 앞 저수지가 완공되면서 인근 마을에 비해 부촌이란 말을 들을 정도가 되었다. 골짜기 골짜기마다 농작물을 심을 수 있었고 발산 마을 앞까지 농지를 확대해 주변 마을에 폐를 끼치지는 안했다.
예전에는 마을 위에 있는 작은 돗재를 지나는 한양길이 나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다 보니 고개에는 돌무더기를 쌓아놓은 서낭당이 있었다. 주민들은 지금도 당 너머라고 부르는데 한때는 그곳에 나환자들이 살기도 했다.
마을에서 시작되는 무안천이 매곡리를 가르고 지나는데 주변 마을의 이름을 빗대어 전해오는 노래가 있다. “도산에서 돈 벌어서 발산에서 밥 사먹고 신촌에서 신발사고 수반에서 술 사먹고 고절에서 곯아버렸다”. 마을에 있는 군부대에서는 매년 1차례 이상씩 대민 지원 형식으로 주민들에게 음식을 대접한다.
동족상잔의 아픈 기억이 남아있어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감방산은 숲이 울창하고 산이 깊어 한국전쟁 때에는 빨찌산 활동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실지로 도산 마을은 낮에는 국군들이 들어오기 때문에 태극기를 달아야 했고, 저녁에는 빨찌산이 들어오기 때문에 인공기를 달아야 했던 동족 상잔의 아픈 기억을 갖고 있는 마을이다. 이러한 경우는 당시에 산중에 있는 마을들에게는 흔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극심한 이념의 갈등 속에서도 주민들이 슬기롭게 대처해 다른 마을에 비해 희생자가 적었다고 한다.
마을 뒤에는 원형이 잘 보존된 2기의 고인돌을 포함한 6기의 지석묘가 있다. 마을 사람들의 설명에 의하면 이 고인돌의 배열이 현경면 평산리 ‘팔바우등’을 거쳐 외반리의 화산 운남면의 양곡까지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새마을 사업 등을 통해서 사람들이 가져가거나 밭을 개간하기 위하여 땅을 파고 묻어버려 현재 남아있는 것은 몇 기가 아니라고 한다. 이는 1986년 목포대학교 박물관 팀이 조사한 무안군 문화 유적 조사에도 빠진 새로운 발견으로 사료적 가치가 있는 유물들이다. 이현석 전 함평군 문화원장은 “도산 마을 지나 돗재를 넘어 함평 지역에는 100여개의 지석묘가 있었다”고 말했다.
마을의 유적으로는 경신재와 영화정 두 개의 정자가 있고 마을 입구에 나주 김씨 열녀비와 염재박기삼시혜비가 있다. 또한 무안박씨 재각인 매곡재가 있다. 나주 김씨 열녀비는 마을 주민 박선화의 처 김귀임의 열행을 기념한 비다.
경신재(敬愼齋)는 마을 입향조의 아들인 박 염(1720 - 1777)의 정자이고 영화정(詠花亭)은 그의 동생인 박 면(1728 - 1792)의 정자이다. 두 사람 다 도암 이 재 선생에게서 수학을 하였는데 경신재와 영화정이라는 호도 도암 선생에게서 받은 것이다. 두 형제는 1721 - 1722년의 신임(신축 임인년의 화)지화를 보고 느낀 것이 있어 관계(官界)의 뜻을 버리고 이곳에 경신재와 영화정을 짓고 도학을 닦으며 후생 교화에 평생 진력하였다. 영화정은 원래 발산 마을 서당골에 있었으나 보평산 아래로 옮기는 등 네 차례의 移建을 거쳐 현재는 도산 저수지 위에 경신재와 함께 있다. 두 정자의 내부에는 다수의 편액이 걸려 있다.
전통과 유적이 어울리는 마을 - 무안읍 매곡3리 수반
오래 전 이 마을에는 능성 구씨와 당악(棠岳) 김씨가 살았다고 한다. 또한 온양 정씨도 거쳐 갔다고 하나 정확한 기록은 없다. 그러다 조선시대가 되어서야 단종 복위운동과 관련하여 낙향한 고절리 무안 박씨 무안파 입향조인 박익경의 증손인 朴 恬(박염, 1526-1603)이 을사사화 이후 이 마을로 내려와 정착하면서 비롯되었다. 박염은 시를 쓰고 글을 읊으며 김안국, 유희춘, 김인후 등 쟁쟁한 당대의 문인들과 교류하며 생활했다.
마을유래지에나 마을입구의 표지에도 마을 이름을 ‘水盤’으로 하고 있는데 어찌된 것이냐고 묻자 주민들은 이구동성으로 잘못 쓴 표기로 ‘壽盤’으로 써야 맞다는 것이다. 실지로 마을 곳곳에 있는 노인정이나 마을유래 표지석에도 ‘壽盤’으로 썼다. 조선시대 문헌인 호구총수에는 외읍면 壽盤里로 나오나 1912년과 1917년의 자료에는 水反里로 나온다. 이런 현상이 나온 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자기들 입맛에 맞게끔 지명을 바꾼데서 비롯된 것이라 추정된다. ‘壽盤’이라 한 것은 마을의 지리적인 형국이 ‘감방산을 主山으로하고 병풍봉, 옥녀봉, 입자봉과 보평산의 다섯 개 연봉을 바라보며 노인이 밥상을 받는 형국이어서 붙인 이름이다’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이 마을을 부를 때 ‘수바위’라고 한다. 그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수반’을 발음할 때 오는 현상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이 마을에는 조선시대 뿐만 아니라 일제 시대에도 ‘나가는 곡물 대신 들어오는 곡식이 많았다’, 또는 ‘마을 곳곳에 김이 폭폭 날 정도’로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고장이었다.
이 마을에 처음 들어서면 분지형으로 아늑한 느낌을 준다. 마을 안내를 하고 있는 박원호노인회장은 새마을 사업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하여도 울창한 송림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어서 현재보다는 훨씬 좋은 마을이었음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특히 예전에는 무안읍에서 마을 단위로는 마을인구도 많고 마을의 규모도 큰 마을이었다고 자랑한다.
무안 박씨 자작일촌으로 서로 돕고 양보하는 풍습이 있어 마을회관도 官의 도움 없이 주민들의 도움으로 郡에서 제일 먼저 1991년에 지었다. 회관명이 수양경로당이다. 수반과 양림의 머릿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인데 옆 마을인 양림에 그때는 경로당이 없었기 때문에 함께 사용하자는 의미에서 지은 것이다. 또한 매년 봄철이면 경로잔치를 하는데 마을의 출향인사들 협조로 풍족하게 지낸다고 한다.
마을 앞에는 1992년에 매립된 샘(현재는 마을유래기가 세워져 있다)이 있는데 마을의 선조 되시는 이가 ‘이 샘이면 우리 마을 사람만이 아니라 주변 마을에도 먹을 수 있을 것이다’고 예언했던 것으로 주민들이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이 우물 주변은 주민들의 공동체 놀이터였는데 명절 때면 강강수월래를 하는 등 마을 주민이 모두 모여 잔치를 벌이는 터였다.
이 마을에는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먼저 입향조의 호를 따서 지은 죽헌정이 있다. 여러 차례 중수를 해서 예전의 당당한 모습은 많이 없어졌지만 정자 안에 걸린 현판과 주련을 통해서 과거의 화려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자의 주인공인 죽헌 박 염은 1544년 學行으로 天文習讀과 군자감판관에 제수되었다가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 어진 선비들이 화를 당하는 광경을 보고 스스로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와 이 정자를 짓고 유유자적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아우인 박제(진위장군)로 하여금 국가사직을 위해 나아가 싸우라 독려하고 장남인 경록에게는 백미 수백 석을 의주행재소(임금이 대궐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잠시 머무는 곳)에 헌상케 하고, 또 본인은 의병장 조헌선생의 막하를 찾아 군사들의 사기를 올려주기도 하였다.
죽헌정의 구조는 팔작지붕의 형태로 시멘트 기와를 얹었다. 처음에는 내부에 서책을 보관할 수 있는 방이 있고 바닥은 마루로 있었다고 하나 1994년 중수한 현재의 모습은 바닥이 전부 시멘트로 마감되었다. 8개의 內柱에는 최영조(최익현의 子)가 글씨를 쓴 주련이 있고 17개의 活柱로 받쳐져 있다. 내부에 상량문과 모재 김안국, 하서 김인후, 미암 유희춘 등의 次韻, 題咏文 등 19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정자 주변에는 마지막 중수 때 세운 것으로 보이는 죽헌정 유래비와 오래된 소나무 한 그루가 과거의 화려했던 조상들의 모습을 반추해주고 있다. 죽헌정 아래에는 세한정박공기적비, 박학재공적비, 나주정씨효열비, 석헌박공기적비, 성재박공유적비 등이 있다.
참고로 하서 김인후 선생이 죽헌정을 찾아 선생과 담론하는 자리에서 아래와 같은 시를 지어 현판으로 보존하고 있는 것을 옮겨 본다.
幽軒高出世人間 그윽한 난간은 높이 세속에 뛰어났는데
前秀壺峰後坎岳 앞에는 호봉이 빼어나고 뒤에는 감방산이 돋았네
樂道應無嫌地僻 도를 즐기니 어찌 벽지를 싫어하랴
安貧何有憾天寒 가난을 예사로 여기니 추운날도 걱정이 없소
雲常住藪眞緣訪 구름은 항상 숲에 머무니 참 인연을 찾았고
鳥或投林宿約看 새는 어쩌다가 숲에 나니 미리 약속함인가
白座淸談相對夕 저녁에 마주 앉아 맑은 시를 주고 받는데
楊明秋月掛東山 어느새 양명한 가을달이 동산 위에 솟았네
도지정문화재로 지정 받았던 박봉기가옥은 1927년에 세워진 것인데 그 당시 천석꾼이었던 지방 부호의 전형적인 가옥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건립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아들이 가옥을 관리하면서 도지정문화재 지정을 취소했다. 가족이 스스로 원해서 문화재 지정 취소신청을 한 것이다.
안채는 박봉기의 호를 따서 ‘매곡재’라 하고 사랑채는 할아버지 호를 따서 ‘농은재’라 이름 하였다. 또한 아버지의 호를 따서는 정자를 지어 ‘면산정’이라 하였다. 가옥의 뒤켠에는 전라남도의 보호수로 지정 받은 세 그루의 팽나무가 있다. 그리고 마당 가운데에 1999년에 세운 효부각이 있으며 각 안에는 ‘효부나주임씨사행비’가 있다. 마을 중앙에 숭안문을 세워 조상들을 모시고 있다. 숭안문 앞에는 박봉기공적비 박병석공적비 심영례효행비가 있다.
박봉기 가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박용화(1869-1951. 자-明一. 호-孝友堂) 효자문이 있다. 주민들에 의해서 ‘박용화효손문’으로도 불리는 이 문은 현재 증손인 박원호 노인회장이 살고 있다. 종손의 집 앞에 있는데 정면 삼 칸으로 2층 구조의 솟을 문만 있을 뿐 뒤쪽에는 아무 것도 없다. 앞에는 네 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으며 단청이 퇴색되기는 했으나 당당했던 위용이 남아 있다. 2층 다락에는 1894년에 포상을 받은 ‘정려’와 1899년에 지은 ‘효우당박공정려기’가 걸려있다.
이 효자문의 주인공인 박용화는 조실부모하고 조부모 슬하에서 자랐다. 조부모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자란 그는 조부모의 상을 당해서 슬픔을 가누지 못해 쓰러지기까지 했다. 양림 마을 뒤 월산에 시신을 안장하고 그 옆에 묘막을 짓고 3년을 시묘하면서 조석으로 애통해하니 겨울인데도 산에 과일이 열고 호랑이가 나타나서 눈을 녹여주었다고 한다. 이를 보고 주위에서 하늘이 내린 효자로 칭송이 자자하였다. 효자문은 아들인 박병인이 1960년에 세운 문이다.
또한 마을 앞에는 얼마 전에 지은 반곡정이 있으며 반곡정준공기념비와 박형호공적비가 있다. 맞은편에는 후손이 없어 향교에서 1993년에 세운 旌門 안에 ‘나주김씨정절비’가 있다. 나주김씨는 시집을 오자마자 남편이 병환을 얻어 자리에 눕자 어쩔줄 몰라했다. 갖은 방법을 다해 남편의 병구완을 했으나 끝내 회생하지 못하고 눈을 감자 같이 따라 죽으려 했으나 주변의 만류로 죽지도 못했다. 부인은 자식이 없어 양자를 얻어 집안의 대를 잇게 하고 끝까지 수절하여 남편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이외에도 유물 유적으로는 선사유적지(土器圓低壺와 마제석촉, 석부가 발견되어 광주박물관에서 보관중임)가 있었다고 하나 주민들은 모르고 있었다. 마을에는 세운지가 오래 된 성산교회가 있다. 전해지는 지명으로 동산 고부랑쟁이 교회뒤의 산을 청용산 우산 아간 정신들 개미들 닭너머 건너뜸 등이 있다.
조선 시대 1506년에 박익경의 조카인 정간공이 당시 전라 관찰사로 재직시 기와집을 지어 고절리 박익경에게 준 것을 이곳으로 이건한 것으로 안채와 사랑채만 남은 박익경의 유택이 있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다.
양림사가 있는 버들 숲 마을 - 매곡4리 양림
무안에서 무안 박씨의 자작일촌을 이루고 있는 마을은 현경면의 평산리, 양학리, 무안읍의 매곡리 등을 들 수 있다. 그중에서 매곡리의 양림 마을은 전 세대 중 두 가구만 장씨 고씨 등 他姓이 살고 있고 그 외 가구는 무안 박씨들이 살고 있는 집성촌이다.
양림은 매곡4리에 속하는 마을로 무안읍에서 현경 쪽으로 고인돌 길을 지나가다가 병산 잔등을 넘어 식골 잔등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면 보이는 마을이다. 이 마을을 안고 있는 玫谷里는 원래 盤谷里였다. 마을의 위치가 감방산을 포함한 보평산 삿갓봉[笠峰], 옥녀봉, 병풍봉 임자봉 등 다섯 개의 봉우리가 이 마을을 향하고 있어 풍수지리로 보면 마치 다섯 명의 노인이 밥상을 받는 형국이라 해서 반곡리라 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그들 식으로 한자 이름을 바꾸어 버린 것이다.
이처럼 일본인들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등을 기회로 마을 이름을 쓰기가 어렵다거나 어려울 때는 쉽게 고치거나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꿔버린 예가 전국적으로 많이 나타난다. 우리 지역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많았는데 대표적인 예가 청계면 구로리의 ‘龜’자가 ‘九’자로 바뀌어진 것이다.
이 마을의 원래 이름은 ‘鶯林이었다’고 한다. 마을의 지형이 꾀꼬리가 노니는 숲 형국으로 현재의 지명인 楊林으로 변한 것은 발음의 편의성과 버드나무나 꾀꼬리가 선비들이 즐겨 찾는 대상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문헌으로 지명의 변화를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외읍면 楊林리로 나온다. 이후 1912년의 자료에는 외읍면 良林리로 1917년의 자료에는 외읍면 매곡리 良林리로 나온다. 광복 이후에는 본래의 이름인 무안읍 매곡리 楊林리 즉 버들 숲 마을로 자리 잡는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이웃한 수반 마을의 입향조인 박염의 다섯째 아들 朴慶補(자-욱여. 1587-1660)가 결혼하여 이 마을에 분가해 살면서 마을의 터전이 닦아졌다. 공은 학문이 깊었으며 주위의 추앙을 받았다. 마을의 전체적인 지형이 감방산을 주산으로 하고 앞에는 병산을 바라보고 있다. 마을의 뒷산인 동산(평림 마을에서는 망산으로 부른다)은 또 다른 이웃마을인 평림마을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은 수반 마을이나 현경면의 평림 모촌 마을처럼 숲으로 둘러싸인 아담한 분지형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에는 자랑거리가 두 개나 있다. 하나는 다시 살아나고 있는 당산나무이고, 다른 하나는 학문을 숭배해 유명한 학자를 모셨던 사당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당산할머니라고 부르는 느티나무는 마을 중앙에 자리하고 있었다. 둘레가 4ⅿ90㎝가 넘는 크고 오래된 나무로 길이도 20여 미터가 넘는다. 400여 년 전 이 마을의 입향조가 심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이다. 한때는 나무 가운데에 크게 구멍이 파져 있어서 살쾡이가 살기도 하고 껍질이 벗겨져 죽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해서 1980년대 초반까지도 나무가 시들시들하고 회생의 기미가 없었는데 주민들이 뜻을 모아 마을 뒤에 숲을 조성하고 영양주사를 놓는 등 정성을 다하고, 당산제를 다시 지내면서 나무가 기력을 찾기 시작했다고 한다.
다시 살아나고 있는 당산나무
당산제는 매년 정월보름에 시작되는데 제를 지내기 며칠 전부터 제관을 뽑고, 뽑힌 제관은 비린 것을 먹지 않는 등 엄격한 자기 관리를 해야 한다. 그 후 堂木의 주위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리고 농악놀이와 함께 제를 지낸다.
실지로 현재의 느티나무의 모습은 여느 고목처럼 구멍이 나 있다거나 나무 껍질이 벗겨진다거나 하는 노화 현상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파진 구멍이 메꾸어지는 등 왕성하게 다시 생기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주민들은 마을이 다시 살아나고 있는 징조로 받아들이고 있다.
다른 하나는 죽헌정 아래에 있는 楊林祠다. 양림사는 이 지역의 대학자이던 竹坡 朴淇靑(1882-1963)의 손자 박광선과 죽파 선생의 제자들이 뜻을 모아 지은 사당이다. 박광선과 제자들은 죽파선생이 당신의 스승인 구한말의 대학자 松沙 기우만 선생(1984-1916)을 흠모하던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였다.
해서 1965년 마을 뒤에 楊林壇을 설치하고 송사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여 내려오다가 10년 후인 1975년에 유림들과 협의를 거쳐 楊林祠를 건립하였다. 특히 제자들은 一身契를 조직하여 성금을 갹출한 후 제답을 마련하고 사당 건립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러나 사당이 관리가 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다가 근래에 다시 증축한 것이다. 참고로 우리 지역에는 18개의 사우가 있는데 제자들이 세운 사우는 평산사와 양림사 두 개 뿐이다.
2006년에 중건된 양림사는 맞배 지붕으로 송사 기우만 선생을 봉안하였고 후일 죽파 선생을 추배하여 매년 음력 3월 3일에 이 지역의 유림들이 모여 제사를 모시고 있다. 제사일은 제자들의 모임 날이기도 하다. 내삼문이 있으며 사당 아래엔 제사 지낼 때 거처하고 준비할 수 있는 詠歸堂이 있다. 양림사 주변에 기적비 공적비 등 6개의 비가 있다. 죽파유고 4권이 남아 있다.
이 마을 출신의 인물로 주민들이 자랑스럽게 내세운 사람은 세계 미들급 챔피언을 지낸 박종팔이다. 박종팔은 객지에서 짜장면 배달을 하는 등 어려운 환경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권투의 꿈을 키어온 입지전적인 인물로 무안 군민의 상을 수상하는 등 무안의 자랑이기도 하다.
무안 쪽에서 들어오는 마을 입구에는 동학과 관련된 묘가 하나 있다. 후손들에 의해서 곱게 꾸며진 화포 박규상의 묘이다. 묘비에는 고인이 동학과 관련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양림사 옆에 세한정 박재린의 비가 있는데 세한정이 동학에 참여하였다고 짤막하게 무안군사에 나오나 관련 자료의 발굴이나 주민들의 증언을 들을 수가 없다.
마을회관 옆에 팔작지붕의 양은정이란 정자가 있다. 양은정은 주민 박혁채씨의 아버지로 선친을 추모하기 위해 아들이 세운 것이다. 정자 옆에는 박혁채씨의 효행비가 있다. 그 외 반림재와 영성정씨효열비가 있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소[牛]형국과 관련된 이름인 가마지성, 각골[角洞], 식골(구스통을 말하는 듯)이 있으며 약냉기, 달뫼[月山], 또따물, 초석쟁이, 장마등, 살피, 개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