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가볼만한 곳 다대포 몰운대
부산의 동쪽은 기장군이 여행지로 인기를 끌고 있다면 부산의 서쪽은 낙동강 하류에 위치하고 있는 다대포 해수욕장이 아닌가싶다. 부산역, 노포동 부산종합버스터미널에서 지하철1호선 한 번의 이용으로 접근할 수 있는 곳이라 편리하다. 다대포 해수욕장은 노을과 낙조 분수도 유명하지만 몰운대는 그 중심이라 하겠다. 2시간 정도 할애를 하면 파도소리와 손에 잡힐 듯한 여러 섬 풍경 그리고 역사적 현장도 함께 볼 수 있다. 그럼 몰운대를 상세하게 살펴본다.
부산 다대포 몰운대
부산시 사하구 다대동 산114
섬이었던 몰운대
낙동강 하구의 최남단으로 다대포 서남쪽 해발 78m의 몰운대는 아주 오래 전에는 몰운도란 섬이었다. 그것은 1763년 일본통신사 조엄(趙曮)이 해사일기(海擄日記)에 해운대와 몰운대의 경치를 비교한 뒤「몰운대는 신라 이전에는 조그마한 섬으로 고요하고 조용한 가운데 아름다워 아리따운 여자가 꽃 속에서 치장을 한 것 같다」고 한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리고 1544년 2월의 중종실록에서도「몰운대」에 왜선의 후망처(지금의 감시소)로 봉수대를 설치할 것을 의논하고 있다. 그래서 서구지(西區誌)는 중종실록의「몰운도」(지금의 몰운대)란 기록은 예부터 불러오던 지명이기 때문에 그리 쓴 것이지 중종 때는 이미 육지와 이어져 있었을 것이라 했다.
그러나 부산시가 편찬한「부산의 문화재」에서는 몰운대를 16세기까지는 섬으로 전해진다고 했다. 중종실록을 따른 것 같다. 신라 이전과 16세기 이전은 적게 잡아도 6백년의 거리가 있다. 한데 신라 이전을 말한 조엄의 해사일기도 함부로 그리 말했다고 보아지지 않는다. 【출처 : 사하구청】
아미산 전망대 쪽에서 본 다대포해수욕장과 몰운대
부산의 3대(臺)중 하나
해운대, 태종대와 함께 '부산의 3대(臺)'로 일컬어지는 몰운대(沒雲臺)는 예로부터 우거진 숲과 기암괴석, 출렁거리는 파도와 수려한 모래밭 등 빼어난 경승지로 이름나 있을 뿐 아니라, 갖가지 모양의 크고 작은 무인도가 몰운대 주위에 흩어져 있다. 몰운대는 낙동강 하구에 ‘안개와 구름이 끼는 날에는 섬 전체가 안개와 구름 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다‘는 데서 유래하였다는데, 몰운대의 지형은 마치 학이 날아가는 형상을 하고 있다. 여기는 군사작전지역으로 민간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가 1997년 이후 출입이 허용되었으며, 청명한 날이면 멀리 대마도가 보인다.
몰운대는 16세기까지만 해도 몰운도(沒雲島)로 불리던 섬이었으나, 점차 낙동강에서 내려오는 토사의 퇴적으로 다대포와 연결된 전형적인 육계도(陸繫島)다. 몰운대에서 낙동강 칠백 리 물길을 따라 흘러내린 모래와 흙으로 강과 바다 사이에 형성된 삼각주인 대마등과 장자도, 그리고 부산의 제일 끝에 해당하는 남형제도와 북형제도, 나무섬 등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해낸다.
아미산 전망대에서 본 도요등과 백합등
다대팔경(多大八景) 중 2경
몰운대의 빼어난 풍광은 다대 팔경(多大八景) 중 제1경인 ‘몰운관해(沒雲觀海)’로 몰운대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아름다운 경관과 또 다른 제1경은 ‘화손낙조(花孫落照)’로 몰운대 동쪽 끝자락 화손대(花孫臺)에 깔려 드는 저녁노을의 빼어난 아름다운 경치이다.
동래부사 이춘원 시비(詩碑)
몰운대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동래부사 이춘원(李春元, 1571∼1634)의 시가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에 전한다. 이 시비는 1999년 6월 12일에 세웠으며, 원문인 한시는 오른쪽, 번역문은 한시의 왼쪽에 새겨져 있다.
浩蕩風濤千萬里(호탕풍도천만리)
白雲天半沒孤臺(백운천반몰고대)
扶桑曉日車輪赤(부상효일거륜적)
常見仙人賀鶴來(상견선인하학래)
호탕한 바람과 파도 천리 만리로 이어지고
하늘가 몰운대는 흰구름에 묻혔네
새벽바다 돋는 해는 붉은 수레바퀴 같아라
언제나 학을 타고 신선이 오시네
이춘원(李春元,1571∼1634)
본관은 함평(咸平). 초명은 신원(信元)·입지(立之). 자는 원길(元吉), 호는 구원(九畹). 증좌통례 이세달(李世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감 이윤우(李允宇)이고, 아버지는 증좌찬성 이역(李㻛)이며, 어머니는 부마인 능창위(綾昌尉) 이구한(李具澣)의 딸이다.李春元은 李信元을 改名한 이름이다.
일찍이 남양의 홍지성(洪至誠)에게 글을 배웠고, 뒤에 박순(朴淳)이 영의정을 그만두고 영평(永平)에 은거할 때 그를 찾아가 다시 배우니 단연 학문에 두각를 나타내었다. 20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6년(선조 2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에 등용되고 이듬해인 1597년에는 광양현감으로 남원을 포위한 왜군과 싸웠다.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쳐 좌승지에 이르렀을 때인 1613년(광해군 5)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에 반대 항론하다가 파직되었다. 이듬해 다시 승지로 복직되었다가 병조참의가 되었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되었다.
1617년 충청도관찰사로서 권신들이 인목대비의 존호를 폐하고 대비에 대한 모든 의식을 없애려고 하자 이에 극력 반대하다가 파직되었다. 1620년 지돈녕부사가 되어 명나라의 사신을 안주까지 나가서 맞이하였는데 갑자기 중풍에 걸려 사직하고 돌아왔다. 1623년 인조가 반정하여 구신들을 많이 등용할 때 한직을 맡겨 정양하게 하려 하였으나 사퇴하였다. 저서로는 『구원집(九畹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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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필자가 몰운대에 들렀을 때 이 시를 보고 답시를 썼다.
동래부사 이춘원의 시(詩)에 부쳐/ 낭만도사
호탕한 웃음소리만 남긴 채
그대가 학을 타고 떠난 지 오백년
몰운대 저녁노을은 지금도 붉은데
신선은 神魚山에 숨은 지 오래일세
옛 기록들
1740년(영조 16) 편찬된 『동래부지』 고적조에 “몰운대는 다대포 남쪽 1리에 있다”라고 하였다. 또 진재(眞宰) 김윤겸(金允謙, 1711~1775)이 1770년(영조 46) 소촌도 찰방(召村道察訪)에 임용되어 진주를 중심으로 한 인근을 유람하고 그린 『진재 김윤겸필 영남기행화첩(眞宰金允謙筆嶺南紀行畵帖)』(보물 제1929호)에 실려 있는 몰운대 그림은 당시 실제 경치를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다대진 동헌(多大鎭 東軒)
: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3호
동헌은 조선시대 지방관서에서 첨사가 정무를 보던 건물로 아사(衙舍)·군아(郡衙)·현아(縣衙)·시사청(視事廳) 등으로 부르기도 하였고, 다대진성 내에 있던 관아건물 중에서 유일한 건축유구(建築遺構)로 지금은 몰운대 내의 부산광역시 사하구 몰운대1길 73(다대동 산144)에 옮겨져 있다. 원래는 관아 일곽의 하단 구역에 위치했던 동헌 건물로 수호각(睡虎閣)이라 불렀다.
다대진이 혁파된 후 공가(公家)로 방치되던 것을 다대포실용학교의 교사(校舍)로 사용되다가 다시 다대초등학교 교사로 전용되었고 1970년 다대초등학교 운동장 정지공사 때 지금 위치로 이전 복원되었는데 이때 학교 관계자들이 건물을 객사로 잘못 기록하였고 부산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3호(1972. 6. 26)로 지정될 당시 다대포 객사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가 2020년 7월 부산시 문화재 위원회 심의에서 다대진 동헌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다대진 동헌은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좌측 첫째 칸과 우측 첫째 칸은 온돌방으로, 가운데 세 칸은 우물마루를 칸 대청으로 꾸몄던 것으로 추정된다.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그 후 여러 번 중수하였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 팔작지붕으로 정당과 익실이라고 날개처럼 부속 건물이 있었는데 익실인 부속건물은 없어지고, 정당만 복원하였다.
다대포 객사 때의 편액은 회원관(懷遠館)이었는데 지금은 수호각(睡虎閣)으로 바뀌었다
정운공순의비(鄭運公殉義碑)
: 부산시 유형 문화재 제20호
임진왜란 당시 부산포해전(釜山浦海戰)에서 이순신(李舜臣)의 선봉장이었던 녹도만호(鹿島萬戶) 충장공(忠壯公) 정운(鄭運, 1543~1592)장군을 기리는 정운공순의비(鄭運公殉義碑)가 세워져 있다. 1798년 정조 22년 정운 장군의 8대손 정혁(鄭爀)이 다대첨사 시절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이조판사 민종현(閔鍾顯)이 짓고, 훈련대장 서유대(徐有大)가 썼다. 높이 172㎝, 넓이 69㎝, 두께 22㎝으로 비각은 1974년에 부산시에서 지었고, 1972년 6월 26일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순의비의 뒷면에 새겨져 있는 기록은 『선조실록』과 『국조인물고』, 그리고 『난중일기』의 내용을 적절히 절충한 듯한 문맥으로 부산시에서 발간한 『부산의 문화재』에 한글로 번역되어 있는 비문의 일부를 살펴보자.
'왜적이 온 나라의 병력을 동원하여 침략해와 먼저 영남 일대를 함몰시키니 임금이 위급한 소식을 듣고는 서쪽으로 용만(龍灣, 의주)으로 피란하시었다. 이때 충무공이 전라좌수사가 되어 수하 장수들을 소집, (왜적이 쳐들어와서 부산을 이미 함락했으니)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논의하였다.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하였다. 다만 녹도만호 정운만이 홀로 의연하게 말했다.'
비문은 이어 '정운이 이순신에게 "지금 적병이 영남을 함몰했는데(今敵陷嶺南) 앉아서 보기만 하고 구원하지 않으면(坐視不救) 이는 적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적병이 호남에 이르기 이전에(敵未至吾境) 나아가 치면 군사들의 사기를 왕성하게 할 수 있고, 우리의 수비를 튼튼히 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더욱이 지금은 임금께서 난리를 맞아 피란을 하고 계시는 지경이니(君父蒙塵) 군주가 치욕을 겪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신하가 목숨을 바쳐야 할 때입니다(臣死之秋). 내가 마땅히 한번 죽음으로써(我當以一死) 여러 장수들의 선봉이 되겠습니다(爲諸將先)."하고 말하였다. 충무공이 그의 말을 장하게 여겨 공의 (적을 공격하러 영남으로 진격하자는) 계책을 따랐다(而從其策). 충무공은 여러 군대에 명령을 내려 배를 타고 (5월 4일) 영남으로 출발하였다(乘船向嶺南).'라고 말하고 있다.
정운(鄭運, 1543~1592)
정운(鄭運)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창진(昌辰)이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1543년 조선 중종 38년 전남 영암(현 해남 옥천면 대산리[1])에서 훈련참군 정응정(應禎)의 아들로 태어났다.
1570년 선조 3년에 28세로 식년시에 병과에 급제한 뒤 훈련원봉사, 금갑도수군권관(金甲島水軍權管) 등을 거치고 함경도 거산찰방(居山察訪)을 거쳐 1583년 함경감사 정언신의 추천을 받아 승진하여 웅천현감 등을 지냈으나 성격이 강직하고 정의를 지켰기 때문에 미움을 받아 몇 해 동안 벼슬을 하지 못하였다.
1591년 녹도만호(鹿島萬戶)가 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경상우수사 원균이 구원을 요청하자 전라수군절도사 이순신(李舜臣) 휘하에서 군관 송희립과 함께 결사적으로 출전할 것을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적을 토벌하는 데, 우리 도와 남의 도가 없다. 적의 예봉을 꺾어 놓아야 전라도도 보전할 수 있다.”
그 후 거제 앞바다에서 원균을 만나 옥포(玉浦)에서 왜선 30척을 격파하고, 노량진에서 적선 13척을 불살라 공을 세웠다. 당포(唐浦)·한산 등의 여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마침내 1592년 9월 부산포 해전에서 우부장(右部將)으로 선봉에서 싸우다가 절영도에서 적의 대포를 맞아 전사하였다. 이때 안타깝게도 이 적의 대포는 바로 붙잡힌 조선 포로가 쏜 대포라고 한다. 정운의 사망으로 이순신은 오른팔을 잃은 셈이 되어 목을 놓아 울었다고 한다.
정운 장군이 부산포에서 순절하자 고향 해남에서는 최산수, 최정한, 양예용이 함께 유림대표로 제문(祭文)을 지어 치제하였다. 선조는 1592년 대호군 정운을 북병사로 추층하였고, 1604년에 병조참판에, 1796년(정조 20)에 병조판서 겸 의금부훈련원사로 추증되었다. 1605년 선무원종 1등공신에 책록되었다.
영암(현 해남 옥천면 대산리)의 충절사(忠節祠), 흥양의 쌍충사(雙忠祠)에 제향되었다. 숙종 때 충절사라 사액하였으며, 정조 때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전남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 2202번지의 흥양 쌍충사(雙忠祠)에 이대원(李大源)과 함께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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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고흥 에 있는 쌍충사에도 정운장군이 모셔져 있다.
필자가 작년에 참배하였다.
☞주의사항
정운공순의비 위치를 네이버 지도, 카카오맵을 검색하면 아래와 같이 표시되어 있으나 잘못된 것이다. 몰운대 가면 위 동헌과 관리소 앞에 표시된 이정표를 따르면 된다. 군 막사 입구 까지 가야하는데 오르막길이고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으니 이점 유의해서 찾아보고 바란다.
몰운대 관리소
이 철책으로 지나야 순의비를 만난다
화손대(花孫臺)
다대 팔경(多大八景) 중 하나인 ‘화손낙조(花孫落照)’로 몰운대 동쪽 끝자락 화손대(花孫臺)에 깔려 드는 저녁노을의 빼어난 아름다운 경치이다. 이곳의 노을을 필자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상상은 된다. 아래 사진 낙조대 쪽의 노을이다. 꼭지지점에는 군초소가 있고 아래와 내려가면 넓은 바위를 만나는데 강태공들의 낚시터로 그만인듯하다.
화손대 쉼터와 군초소
화손대에서 본 주변 풍광들
전망대
몰운대 초입 안내판에는 '전망대' 표시가 없는데 숲속에 들어가면 아래와 같이 전망대 표시가 되어 있어 이게 문제다. 초행자들을 헷갈리게 된다. 실지로 이곳을 찾아가면 전망대라는 표시는 없고 그냥 군 초소가 있다. 답답해서 사하구청에 건의했는데 언제나 제대로 이정표가 정리될지 모르겠다.
낙조전망대(落照展望臺)
낙조전망대는 해수욕장 끝자락에서 해변을 따라 설치되어 있는 데크를 따라가면 된다.
[출처] 부산 핫플 가볼만한 곳 다대포 해수욕장 몰운대|작성자 낭만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