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ase 2. 균열
키라는 구김살 하나 없고 순진한데다가 착한 아이였다. 그러한 성격과 아담한 체격에 예쁘장한 얼굴 때문에 여자 선배들로부터 인기가 많은 키라였다. 그런 키라가 지금은 자신의 친구를 짓밟아버리겠다고 말한 것이다. 키라의 이런 표변에 밀리아리아, 톨, 카즈이 등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키, 키라..."
밀리아리아가 조심스런 손길로 키라의 어깨를 흔들었다. '어?'하며 키라가 고개를 들었을 때, 키라는 이미 평소대로의 그로 돌아와 있었다. '에? 다들 표정이 왜 그래?'라는 정신붕괴성 발언을 너무 순진한 얼굴로 내뱉은 키라를 바라보며 톨과 카즈이는 당장에라도 그를 죽기 직전까지 패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키라... 너 지금 다들 왜 그래라고 했냐!"
"우와아앗! 카즈이, 톨, 그만둬!"
카즈이와 톨의 헤드 락에 걸린 키라가 고통을 호소하며 아둥바둥 살기위한 몸부림을 치며 밀리아리아에게 구원요청을 보냈지만 밀리아리아 역시 간이 떨어질 뻔한 원한을 잊지않고 키라의 발을 꾸욱 밟아버리는 것으로 그의 구원요청을 가볍게 묵살했다. 서서히 질식까지 임계점에 도달하려는 키라를 괴롭히던 카즈이와 톨은 할 수 없지라는 표정과 함께 키라를 놔줬다. 켁켁거리며 괴로워하던 키라가 갑자기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떨구자 셋 다 조금은 침울해졌다. 키라가 사이와 아무리 친하다고는 해도 자신이 그렇게나 좋아하던 여자애에게 편지를 보낼 정도의 사이라면 누구라고 해도 괴로운 심정일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기 키라, 힘내."
"그래 키라, 세상에 여자가 프레이 알스터 하나냐? 게다가 저 애는 까다롭기로 유명하다고. 괜히 고생말고 다른 여자애나 찾아보는게 어때? 나도 도와줄게!"
"카즈이! 남의 일이라고 그렇게 막 말하지마! 키라가 지금 어떤 심정이겠어?"
본인은 제껴두고 열을 올리는 삼인방을 슬쩍 바라본 키라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억지로 웃음을 띈 채 밝음을 가장하고 셋과 어울려서 떠들기 시작했다. 그들이 실없는 잡담을 나누는 사이에 프레이는 도망가듯 무인택시를 타고 가버렸다. 아니 적어도 키라의 눈에는 자신이 볼 수 있는 곳에서 도망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한 행동은 그를 더 절망하게 만들 뿐이었다.
"흠흠."
넷의 사이에서 이러한 무의미한 말이 오가는 동안 무인택시는 계속 정지해 있었고, 기다리다 지쳤는지 그들의 뒤에 서 있던 검은 선글라스의 여성이 헛기침을 했다. 그녀의 기침소리를 듣고 키라와 밀리아리아가 뒤를 돌아보자 검은 선글라스의 여성은 살짝 웃어보이며 고개를 약간 기울이면서 비켜줄 수 있냐는 정중한 요청을 했다.
"죄, 죄송합니다. 어서 타세요."
"아, 그럼 실례."
선글라스의 여성과 동행한 남자 두 명까지 탑승을 끝내고 여자가 행선지를 입력하자 무인택시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어느새 화제가 변했는지 '키라의 짝사랑(?)'에 대한 토론을 계속하고 있는 카즈이와 톨에게 밀리아리아의 분노의 꿀밤이 작열했다. 자신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눈 앞의 자신은 안중에도 없는 카즈이와 톨을 보며 허탈한 듯 '하하하'하고 멍하게 웃기만 하는 키라도 이 풍경에서 빼놓을 수 없었다.
"아, 택시 다시 왔다!"
"빨리 가자, 대체 뭐 하다가 아직 타지도 않았더라?"
카즈이의 맹한 발언에 다시 한번 밀리아리아의 꿀밤이 작열했다.
헬리오폴리스에는 다른 곳에서 들어온 대형 화물들을 보관하는 창고가 여러 개 있다. 일단은 자원위성이다보니 수많은 자원을 오브 본국으로 운송해야하는 일도 있고 위치 상, 그리고 오브라는 나라의 정치적 성격 상 자프트나 지구의 화물이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그 창고 중에서도 최고레벨의 보안을 유지하는 여섯 개의 창고는 벌써 2년 전부터 '어떤 화물'이 들어서 있었다. 각각 20미터 내외의 높이를 지닌 저 화물들의 내용물은 현재로서는 확인된 바가 없었다. 수취인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다섯 개의 화물의 수취인은 '지구연합'이었고 단 하나의 화물 만은 그렇지 않았다. '키라 야마토', 마지막 하나의 화물의 수취인의 이름은 평범한 소년의 이름이었다.
황급히 교수의 연구실로 들어선 네 명의 소년소녀는 의문의 방문자와 마주쳤다. 고동색의 모자를 푹 눌러 쓴 금발의, 자신들 또래의 아이는 초조한 듯 발로 땅을 톡톡 치면서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고 서 있었다. 갈색의 재킷과 검은 셔츠가 잘 어올리는 그 아이는 키라들을 한번 슥 보더니 흥미가 없는지 다른 쪽을 보았다.
"저 애... 누구지?"
"글쎄, 교수님의 손님인가?"
톨과 밀리아리아가 서로의 귀에 대고 속닥거리는 동안 키라의 갈등을 조장한 인물, 사이 아가일이 '어? 너희들 왔냐?'라는 말과 함께 연구실의 구석에서 기어나왔다. 금발의 스포츠 머리에 무테 안경을 쓴 그 소년은 무너진 자료들에 파묻혔었는지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었다. 사이의 태연한 얼굴을 보는 순간 키라는 강한 구토감을 느꼈다. 마치 끈적끈적하고 악취가 풍기는 그 잔혹한 감상이 다시한번 표면 위로 부상하려는 것만 같았다.
'나는 사이 아가일이라는 자를 어떻게 하고 싶은 것인가... 아니 그 이전에, 그를 어떻게 하고 싶다라는 마음 이전에 나는 친구라 부르고 있는 이 남자에 대해 무엇을 아는가?'
심한 혐오감과 이유를 알 수 없는 끔찍한 감각이 전신을 덮쳤다. 키라의 허리가 꺾이며 그의 몸이 서서히 앞으로 무너져갔다. 그렇게 쓰러지는 순간 키라는 분명히 '무언가'를 느꼈다.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오탁의 분류가 그의 뇌세포 하나하나를 잔혹하게 유린했다. 하나, 전신의 감각이 배제 되었다. 둘,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오로지 뇌에 침입한 '이물질'을 밀어내는데 전력을 기울여야했다. 셋, 숨이 막혀왔다. 생명유지를 위해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동작시키기 위한 프로그램마저 깔끔하게 지워버린 키라의 뇌는 서서히 침묵의 나락에 빠져들었다.
"허억!"
허리가 완전히 꺾이려는 순간 키라는 정신이 되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전신은 식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고 사지는 힘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의식만은 지나칠 정도로 또렷했다. 여느 때와는 다른 느낌이 전신을 범하고 있었다. 강력한 전류가 온 몸을 휘감으며 희열의 달콤한 감각을 전하고 있었다.
"뭐... 였지?"
"키, 키라. 괜찮아? 안색도 안 좋고 비틀거리는데..."
밀리아리아가 걱정스럽다는 듯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키라의 머릿 속에서 스위치가 올라갔다. 심장의 고동소리가 들린다. 평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집중력이 생기고 있었다. 모든 사물을 꿰뚫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삽입된 것은 간단했다. 그 출처 불명의 정보에 대해 머리가 이성적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몸은 이미 그 정보의 진위를 확신한다는 듯 움직이고 있었다.
1초, 키라는 자신에게 다가온 밀리아리아를 끌어안고 몸을 날렸다.
1.5초, 무언가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키, 키라! 미리! 너희들 괜찮아?"
"젠장, 교수님이 저 전구가 위험하다고 하시더니... 결국 천수를 다하셨군."
전구는 바닥에 떨어져서 산산조각 나 있었다. 구석에 서 있던 아이도 놀라서 이쪽으로 달려오려다가 무사를 확인했는지 다시 벽에 기대었다. 밀리아리아는 키라에게 연신 고맙다고 하고 있었지만 키라의 정신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그 자신은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지만 자신은 분명 전구가 떨어질 사건을 예측했다. 단순한 감이나 행운이라 해야할까? 아니면...
헬리오폴리스로 들어선 '수상쩍은' 새하얗고 곡선 중심의 형태를 갖춘 우아한 함선은 비밀항구에 들어섰다. 그리고 수상쩍은 함선을 쫓던 다른 함선은 닭 쫓던 개 꼴로 헬리오폴리스의 외부에서 서성이기 시작했다.
"흐음, 놓치고 만건가?"
하얀 가면을 쓴 금발의 남자가 턱을 매만지며 하얀 함선이 들어간 헬리오폴리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라우 르 크루제. 자프트 군 소속의 전함, 베사리우스의 함장으로 지구군 사이에선 '하얀 사신'으로 통하는 남자였다.
"크루제 대장! 저 이상한 발 달린 놈을 그냥 쫓아가버리죠!"
약간 연보라색의 윤기를 지닌 은발의 소년이 기세좋게 소리쳤다. 그러자 옆에 있던 금발에 약간 갈색의 피부를 가진 소년이 '이런 이런'하며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은발의 소년은 이자크 쥴, 그리고 금발의 소년은 디아카 엘스먼. 둘 다 크루제 부대의 파일럿으로 '붉은 제복'의 자프트 병사였다. 붉은 제복이라는 것은 자프트 병사 중에서도 엘리트들만이 입을 수 있는, 적에게는 공포의 화신으로 통하며 동료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으로 통하는 것이었다. 이자크와 디아카는 17세의 어린 나이에 붉은 제복을 입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인 것이다.
"흠, 이자크. 자네는 다 좋은데 너무 혈기왕성한 것이 탈이군. 헬리오폴리스는 중립국의 위성이다."
"으, 하, 하지만 세계정세가 이 모양일 때 중립 운운하는 것도 웃기지 않습니까!"
"그래도 주권을 가진 독립국가인 만큼 그 정책은 존중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자크?"
검은 색에 근접하는 남색의 머리칼을 가진 붉은 제복의 소년이 브릿지에 들어서며 이자크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웃으며 '아, 다들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연두색 머리의, 역시 붉은 제복을 입은 소년이 있었다. 게다가 그 뒤에 들어오는 적갈색 머리의 소년 역시 붉은 제복, 적갈색 머리의 소년과 함게 들어온 연녹색이 가미된 금발의 소년만이 보통 제복을 입고 있었다.
이것이 크루제 부대가 공포의 대상인 두번째 이유였다. 하얀 사신 라우 르 크루제, 거기다가 다섯 명의 붉은 제복. 그 자체로서 다른 다섯 개의 부대에 맞먹는 가치를 지니는 부대가 바로 크루제 부대였다.
남색 머리의 소년은 아스란 자라. 다섯 명의 붉은 제복 중에서도 톱 클래스의 능력을 과시하는 크루제 부대의 에이스.
연두색 머리의 소년은 크루제 부대의 막내인 니콜 아말피. 피아노 연주를 좋아하는 예능 소년이었다.
적갈색 머리의 소년은 러스티 막켄지였다.
여섯 명의 소년 중 유일하게 붉은 제복을 입지 않은 소년은 미겔 아이만이라는 이름을 가진, 다섯 붉은 제복의 소년들과 막역한 사이였다.
"이 자식, 아스란! 네놈은 왜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거냐!"
"... 이자크, 못 잡아먹어서 날뛰는 녀석은 너 아니었냐?"
"시끄럽다!"
이자크와 디아카의 활극을 보며 골머리를 앓는 사람은 대장인 크루제가 아닌 아스란 쪽이었다. '저런 슈퍼급에 해당하는 열혈 소년을 통제할 인재는 진정 자프트 군 내에는 없단 말인가'라는 생각을 하며 크루제의 앞에 섰다.
"대장, 잠깐 이자크의 표현에 따라서 지구군의 신조함은 '발 달린 놈'으로 명명하겠습니다. 어쨌건 저 발 달린 놈은 천천히 접수해도 될 듯 하지만 그 다섯 개는 아닙니다."
"흠, 과연 그렇군. 아스란, 이자크, 디아카, 니콜, 러스티 이상의 다섯 명에게 '그' 다섯 화물의 탈취를 명한다."
"네!"
다섯 명이 동시에 경례를 하고는 브릿지에서 나갔다.
"그리고 미겔 등 다섯 명은 진을 타고 헬리오폴리스를 습격한다."
"대, 대장!"
"헬리오폴리스는 적의 전력을 의도적으로 숨겨준 '적'의 진지가 아니던가?"
"아, 알겠습니다..."
수많은 시신과 잔해의 언덕 위에, 마침내 요정왕은 오랜 잠에서 깨어난다.
검은 강철의 동굴에 갇혀있던 대천사는 날개를 펼치고 하늘로 날아오르는데...
그 앞을 막아서는 네 명의 강철의 거인!
과연 사투의 행방은...
다음 편, 파열 속의 요정왕
(...)
첫댓글 훗훗훗, 아직 어설프긴 하지만... 후후후후후후후.... 키라에게서 그 능력의 끼가 보이고 있습니다--V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