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덕혜옹주 德惠翁主 | |
---|---|
옹주 | |
별명 | 복녕당 아기씨 |
배우자 | 소 다케유키 |
자녀 | 소 마사에 |
본명 | 이덕혜(李德惠) |
왕가 | 대한제국 황실 |
왕조 | 조선 왕조 |
부친 | 고종 |
모친 | 복녕당 귀인 양씨 |
친척 | 순종 (이복 오빠) 의민태자 (이복 오빠) |
출생 | 1912년 5월 25일(1912-05-25) 일제 강점기 조선 경성부 덕수궁 (現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덕수궁) |
사망 | 1989년 4월 21일 (76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창덕궁 수강재 |
사인 | 뇌졸중 |
능묘 | 부속림 덕혜옹주묘 대한민국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홍유릉로 352-1 |
매장지 | 대한민국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 |
거주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덕궁 수강재 |
국적 | 대한민국 |
덕혜옹주(德惠翁主, 1912년 5월 25일 ~ 1989년 4월 21일)는 조선의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였던 고종과 귀인 양씨 사이에서 태어난 고명딸이다. 황녀로서 덕혜라는 호를 하사받기 전까지 ‘복녕당 아기씨’로 불렸고, 1962년 ‘이덕혜’(李德惠)로 대한민국의 국적을 취득하였다.[1] 일제 강점기 경기도 경성부 덕수궁에서 태어나 경성일출공립심상소학교 재학 중에 일본의 강제적인 요구에 따라 유학을 명분으로 도쿄로 보내져 일본 황족들이 공부하는 학교인 여자 가쿠슈인에서 수학하였다. 1931년 옛 쓰시마 번주 가문의 당주이자 백작 소 다케유키와 정략 결혼을 하여 1932년 딸 소 마사에를 낳았다. 그러나 이즈음 조울증, 우울장애, 반복성 우울 장애와 더불어 정신장애인 조현병(정신분열증) 증세를 처음 보였으며, 결혼 이후 병세가 악화되었다. 1946년부터 마쓰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였고, 1955년 이혼하였다.
1962년 기자 김을한과 영친왕의 부인 이방자의 협조로 대한민국으로 영구 귀국하여 창덕궁 낙선재 내의 수강재에서 거주하시다가 1989년 뇌졸중으로 사망하였다.[2]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홍유릉 부속림에 안장되었다.
덕혜옹주는 1912년 5월 25일에 일제 강점기 경기도 경성부 덕수궁에서 고종과 귀인 양씨 사이의 딸로 태어났다.[3]:254 출산과 동시에 궁녀였던 양씨는 ‘복녕’(福寧)이라는 당호를 하사받아 귀인으로 봉해졌으며, 덕혜옹주도 ‘복녕당 아기씨’(阿只氏)라고 불리게 되었다.[3]:255[4] 같은 해 7월 13일에 고종은 덕혜옹주를 복녕당에서 자신의 거처인 함녕전으로 데려 왔다.[5] 고종은 총 9남 4녀의 자녀가 있었지만 3남 1녀만이 성년이 될 때까지 생존하여 덕혜옹주가 사실상 유일한 딸이 되었다.[6]
1916년 4월 1일에 고종 태황제는 덕혜옹주를 위하여 덕수궁 안에 유치원을 설치하도록 명하였고[3]:255, 쿄구치 사다코(京口貞子)와 장옥식(張玉植)을 보모로 촉탁하였다.[7] 유치원은 준명당에 설치되었으며, 덕혜옹주는 귀족의 딸들 중 또래 7~8명과 함께 교육을 받았다.[3]:255[8] 1917년 6월 왕공족의 신분을 정식으로 인정받았다.[9] 고종은 덕혜옹주가 영친왕 이은처럼 볼모로 일본에 보내지거나 일본인과 정략 결혼을 하게 될 것을 염려하여 시종 김황진(金璜鎭)의 조카 김장한(金章漢)과 비밀리에 약혼을 계획하였지만 일본의 방해로 실패하였다.[10] 1919년 고종이 승하한 후에도 덕수궁에 머물다가 고종의 혼전이 창덕궁으로 옮겨지자 1920년 3월 15일 모친인 양귀인과 함께 창덕궁 내 한 전각으로 거처를 옮겼다.[3]:255[11]
1920년 4월 1일부터 궁 내에서 심상소학교 1학년 과정을 3인의 학우들과 같이 교육 받다가[12] 1921년 4월 1일 경성에 머문 일본인을 수용하기 위해 설립된 경성일출공립심상소학교 2학년으로 입학하였다.[3]:255[13][14]:69 일출심상소학교에서는 일본복식을 입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으므로 통학할 때에는 일본 복식을 갖추어 입었는데, 옹주는 주로 몬쓰키와 하카마를 착용하였다.[15] 학교의 수업은 일본어로 진행되었고, 그녀는 유학 이전에 이미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였다.[14]:70 1921년 5월 4일에 ‘덕혜’라는 호를 정식으로 하사받았으며,[16] 일본 궁내성에 상신을 거쳐 옹주의 존칭을 이때부터 사용하게 되었다.[17] 당시 함께 재학중이던 급우의 회고록에 따르면, 옹주는 왕족다운 기품을 갖추고, 키가 크고 얼굴이 희었으며, 머리는 한가운데를 반으로 나누어 뒤에서 양쪽으로 길게 땋아 얌전하게 늘이고, 일본 옷에 하카마를 입고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또한 상궁이 항상 마차를 같이 타고 와 수업 중 교실 뒤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고 한다.[3]:256 당시 옹주의 또다른 학우는 “옹주가 공부를 잘 하였으며, 특히 습자에 능하였다”고 회상하고 있다.[3]:260 옹주는 동요를 짓는데에도 능하였는데, 일출 심상소학교 재학 시절 지은 동요 한 편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3]:257
비행기 (한글 번역) | 飛行機 (현대 일본어) |
---|---|
남쪽 하늘에서 날아온 | 南の空から飛んできた |
1925년 정월에 이왕직 차관 고쿠분 쇼타로(國分象太郞)는 순종에게 덕혜옹주의 일본 유학이 결정되었음을 통고하였다.[18] 같은 해 3월 28일에 경성을 출발하여[19] 3월 30일 도쿄에 도착하였고,[20] 4월 14일에 여자 가쿠슈인(女子学習院) 중등과 2학년에 입학하였다.[15][21]
1926년 3월 3일 덕혜옹주는 영친왕 내외와 같이 귀국하여 순종을 알현하였다가[22] 3월 11일 도쿄로 돌아갔다.[23] 하지만 순종의 병세가 심각하다는 소식을 전달 받고 영친왕 내외와 4월 8일 다시 경성으로 돌아왔다.[24] 순종은 4월 25일 승하하였고, 덕혜옹주는 순종의 인산에 참석하지 못한 채 5월 10일 도쿄로 돌아갔다.[25]
1929년 5월 30일 모친 귀인 양씨가 사망하자[26] 6월 2일 귀국하지만 귀인 양씨가 《왕공가궤범》에 따라 귀족에 포함되지 않으므로 왕공족인 덕혜옹주가 복상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복상하지 못하였다.[27] 6월 9일 일본으로 돌아갔다.[28] 이후 옹주는 1930년 봄 무렵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여 등교를 거부하고, 심한 불면증 증세를 겪어 영친왕 저택과 별장에서 요양을 하였으나 결국 9월 정신장애인 조현병 진단을 받게 되었다.[3]:264[29] 1931년 증세는 호전되었고,[30] 같은 해 3월 27일 여자 가쿠슈인 본과를 졸업하였다.[31]
덕혜옹주의 결혼 전에 배우자가 일본 황족과 조선귀족 중에서 선택될 것이라는 혼약설이 있었지만[14]:79[32][33] 1930년 10월 소 다케유키(宗武志)와의 결혼이 결정되었다. 소 다케유키는 옛 쓰시마 번주 소 요시아키라(宗義達)의 양자로 들어가 백작의 지위를 계승한 화족으로 혼인이 결정될 무렵 도쿄 제국대학 영문과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34] 왕공족의 혼사는 칙허를 받아야 한다는 《왕공가궤범》 제119조에 따라 1931년 4월 14일 덕혜옹주의 결혼을 인정하는 쇼와 천황의 칙허가 내려졌고,[35] 같은 해 5월 8일 도쿄에서 결혼식이 순일본식으로 거행되었다.[36] 옹주의 혼인에 관한 유언비어가 돌고 그녀의 혼인이 확정되자 옹주의 신하와 옛 친척들은 많은 반대를 보였다.[14]:82 옹주는 결혼 당초부터 거의 완전한 실어증 증상을 보였으며, 그녀의 조현병은 상당히 진행되어 있었다. 당시의 모습을 본 이에 따르면, 전혀 말을 하지 않고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 계속 소리내어 실소하는 병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37]:34 이후 옹주는 1932년 8월 14일에는 딸 소 마사에(宗正惠)를 낳았다.[3]:264[38]
출산 이후 조현병(정신병)이 더욱 악화되어 1946년부터 마쓰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3]:264[39] 입원이 장기간 지속되자 소 다케유키는 1955년 영친왕 부부와 협의 후에 덕혜옹주와 이혼하였고, 덕혜옹주는 호적에 어머니의 성씨인 양(梁)과 봉호(封號)인 덕혜를 조합한 ‘양덕혜’(梁德惠)로 일가를 창립하였다.[3]:264[40][41]:354 이혼 후에 소 다케유키는 혼례품 및 덕혜옹주와 딸 마사에의 한복과 생활용품을 돌려보냈고, 영친왕 부부는 1956년 이 물품을 일본 문화학원의 전신인 문화여자단기대학의 학장 도쿠가와 요시치카[42](徳川義親) 전후작에게 기증하였다.[41]:355[43] 1947년 10월 신적강하로 평민이 되면서 자금 지원은 중단되어 생계와 치료에 곤란을 겪게 되었으며 덕혜옹주의 입원비는 영친왕이 부담하였다.[39][44] 1956년 8월 26일 딸 마사에가 산에서 자살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실종되었다.[3]:264[41]:357
서울신문 도쿄 특파원 등으로 활동한 김을한기자는 덕혜옹주의 귀국을 추진하였고, 1961년 11월 12일 미국을 방문하던 도중 일본 도쿄에 들른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와 만나 영친왕과 덕혜옹주의 귀국에 대한 협조를 약속하였다.[39][41]:137 옹주는 입원한 1946년 이래 15년 가까이 마쓰자와 병원에서 지내다가 1962년 1월 26일 38년간의 일본 생활을 끝내고 대한민국으로 영구 귀국하였다.[3]:264 귀국 당일 김포공항에 유치원과 소학교 동창 민용아(閔龍兒)와 당시 72세의 유모 변복동(卞福童)이 마중을 나왔고, 창덕궁 낙선재에 들러 순정효황후 윤씨를 만난 후에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하였다.[45][46] 같은 해 2월 8일 ‘이덕혜’로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하였고,[1] 같은 해 3월 28일 최고회의 상임위원회는 덕혜옹주에게 생계비를 지급하기 위하여 〈구황실재산법〉 개정법률안을 통과시켰다.[47] 1967년 5월 4일 병세가 안정되어 병원에서 퇴원하였고, 이후 1968년 가을 창덕궁 낙선재 내의 수강재로 옮겨 기거하였다.[3]:264[48] 전 남편인 소 다케유키가 덕혜옹주를 만나기 위해 낙선재로 찾아왔지만 관계자들에 의해 면담이 거부되었다.[41]:360
1970년 10월 29일 자궁에 생긴 용종 제거 수술을 받기 위해서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하였고,[49] 1983년 5월 24일에 노환으로 한강성심병원에 입원하였다.[50] 1989년 4월 21일 오전 11시 40분경에 창덕궁 수강재에서 사망하였다.[51] 4월 25일에 수강재에서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주관으로 영결식이 엄수되었고,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홍유릉 부속림에 안장되었다.[52]
덕혜옹주의 불행한 삶이 알려지면서 1996년 MBC 광복절 특집 드라마 《마지막 황녀 덕혜》 등에서 남편 소 다케유키는 꼽추나 포악한 인물로 묘사되거나[53] 지참금을 노리고 결혼했다는 낭설이 유포되기도 하였다.[54] 하지만 소 다케유키가 쓴 시집 중 옹주를 대상으로 쓴 작품 등에서는 그녀를 '사랑하는 아내'로 묘사하고 있고, 그의 저금액 등을 살펴 보아도 생활에 곤궁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실제로는 아내를 고귀한 존재로 살피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또한 한국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그의 생애동안 한국에 대한 비판이나 나쁜 말은 남기지 않았다.[37]:35
옹주가 사용했던 유물은 한국과 일본에도 그리 많은 양은 남아있지 않으나, 유물이 소재한 몇몇의 위치를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도쿄문화학원에는 조선 왕가로부터 기증 받은 옹주의 유물이 남아있는데, 그녀가 입었던 당의나 그녀의 딸 마사에가 사용한 유아복과 나막신 등이 소장되어 있다.[55]:53 이중 복식 7점(당의, 홍색 스란치마, 치마, 송화색 숙고사 반회장저고리, 진분홍 저고리, 풍차바지, 단속곳)이 초전섬유퀼트박물관 관장의 오랜 설득 끝에 2015년 6월 24일 대한민국에 반환되어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었다.[56] 큐슈국립박물관에는 옹주의 남편이었던 소 다케유키의 집안인 쓰시마 종가 집안에서 기증받은 유물이 남아있는데, 옹주가 사용한 식기, 옷감, 회화 등이 전시되어 있다.[55]:54
가와시마 요시코 川島 芳子 | |
---|---|
![]() | |
청 제국 황족(淸 帝國 皇族) | |
별명 | 중국 한족식 이름은 진 비후이(金 璧輝) 자(字)는 둥전(東珍) |
본명 | 아이신줴뤄 셴위 愛新覺羅 顯玗 |
부모 | 가와시마 나니와(양부) 숙충친왕 아이신줴뤄 산치(생부) |
출생 | 1907년 5월 24일(1907-05-24)![]() |
사망 | 1948년 3월 25일 (40세)![]() |
사인 | 총살[1] |
국적 | ![]() ![]() |
직업 | 청 제국 출신의 여성 첩보원 |
가와시마 요시코(일본어: 川島 芳子, 1907년 5월 24일 ~ 1948년 3월 25일)는 청나라 황족인 숙친왕(肅親王) 아이신기오로 산치(愛新覚羅 善耆)의 14번째 딸로서, 청조부흥을 위해 일본에게 협력하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스파이 혐의로 처형된 인물이다. 만주어 이름은 아이신기오로 셴위(愛新覺羅顯玗)이고 자는 둥전(東珍) 중국 이름은 진비후이(金璧輝)이다. 일본인의 양녀로 들어가 일본식 교육을 받았고, 가와시마 요시코라는 이름으로 통용되며, 당시 '동양의 마타 하리'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청나라가 멸망을 하게 되자 숙친왕도 폐지가 되었고, 숙친왕은 청나라의 왕권을 부활시키기 위해서는 일본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게 된다. 그 이유로 14번째 딸이었던 금벽휘를 자신의 지인이었던 가와시마 나니와에게 금벽휘에게 일본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게 하는 조건 하에 입양을 보내게 된다. 그녀가 18세가 되던 해에, 숙친왕이 사망한 이후 학교를 관두고 남장을 하기 시작하여 그 이후로 평생 남자의 모습으로 살게 되었다. 그런데 그녀가 남장을 하게 된 계기가 양아버지였던 가와시마 나니와가 그녀를 성추행 했고, 이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겨 여성의 모습을 포기하게 되었다는 가설이 있다.
그녀가 관동군의 첩보원이 된 것은 1930년 상하이에서 우연히 어느 무관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관동군 참모소속 정보장교였다. 그는 그녀의 스파이로서의 기질을 알아차렸고, 그 때부터 관동군의 스파이가 되었다. 1932년 상하이에서 한 일본인 승려가 중국인에 의해서 사망했고, 이를 빌미로 전쟁을 일으켜 중국이 패배한 일이 있었는데, 이의 배후가 바로 금벽휘였다고 한다.
1948년에 총살집행 되어 죽은 가와시마 요시코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논란이 있었다. 처형된 직후부터 다른 사람이 대신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졌다는 소문이 끊임 없이 나돌었는데, 최근에 카와시마 요시코는 실제로 30년이나 더 생존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도쿄신문과 지지(時事) 통신, 산케이 신문 등 일본 언론은 중국 신문화보(新文化報)를 인용해 가와시마가 중국 지린(吉林)성 창춘(長春)에서 지난 1978년까지 살았다는 증언과 연구 결과가 나왔다고 전했다.[2]
이 두 인물의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둘 다 황족으로서 유년시절을 남부럽지 않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두 왕실
다 특유의 대처능력 부족과 약소함으로 국민의 거센 비난을 받았으며 외세의 위협과 붕괴로의 유도등으로 인해
심한 굴곡을 겪었습니다. 물론 덕혜옹주가 살았던 조선왕실은 국민이 직접 봉기하여 정권을 붕괴시키지는 않았지만
입헌군주제의 유리성을 가지고있는 일제가 봉건적 전제군주제를 가진 조선정치의 취약점을 부각시켜 끊임없이
조선민중들을 유혹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스크림 녹듯이 조선황실이 무너져갔고 결과적으로 민중이 아
무런 행동도 취하지 안했어도 일제가 대신 나서서 조선왕실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지배자로 나서게 됩니다. 물론
일본의 입장에서 고종이 외국의 수장이었기에 일본지도부와 유신세력은 고종을 필수 제거대상으로 노렸습니다. 그러나
원래 외교라는게 그렇듯이 공식석상에서 상대지도자를 비난하거나 위협할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가
국가원수라는점을 감안해서 접견현장에서는 깍듯이 예의를 대하고 요구사항도 대도록 우회적으로 전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에는 일제는 고종을 암살하였지만 그 자리에서 바로 고종을 퇴위시켰거나 입에 담기도 힘든
모욕적 언사를 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나이가 어린 덕혜옹주 역시도 일본귀족들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이유였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일본덴노가는 덕혜옹주를 유학명목으로 일본에서 양육되게 하였고
여기에서 일본첩자들이 번번이 덕혜옹주에게 위협을 가하여 정신병원 감금이나 제거등을 기도하였지만 말년에
덕혜옹주는 다행히도 귀국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아이센줴뤄 셴위의 경우 청황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덕
혜옹주의 케이스와는 달리 청황실은 대륙민중들의 아주 세찬 공격을 받았고 결국 청황실 자체가 그러한 일에 대해
직접 책임을 져 멸망을 선언합니다. 물론 당시 외세와 서구의 위협이 없었더라면 아이센줴뤄 셴위가 대륙민중들의
뜨거운 총애와 선망을 받으며 영화롭게 전생을 누릴수 있었을것이나 난세에 태어났기 때문에 셴위는 일본군에게 입
양되어 사회로부터 비난받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입니다. 우선 중국민중들이 셴위를 질타하는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바로 일본의 첩자노릇을 하며 1.26사건을 기획한 친일혐의와 민중들을 탄압하고 착취하면서 외세에게
는 무기력하게 당하기만한 청황실의 직계였다는 점에서 셴위는 민중의 비판을 받을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리
고 입양된이후 이름도 가와시마 요시코로 바뀌게 되지요. 요시코는 첩보원으로 활동하면서 중일전쟁기에 수많은 일본
군장교들과 교제하였는데 그 중에는 요시코의 변덕과 성깔에 못 이겨 요시코에게 진저리를 낸 남자들도 많았습니다.
물론 대륙평민들에게는 매국노개년 그 자체였겠지요. 아무튼 셴위의 인생은 중일전쟁이 종료되고 중공이 신해혁명
이전의 모든 영토를 수복하면서 마감합니다. 아마 셴위의 이웃들이나 그와 함께 있었던 이들역시 셴위에게 질렸기
때문에 그가 공개선상에 섰을 때 아무도 그녀를 변호해주지 않았습니다. 결국에 그녀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요.
푸이역시도 민중의 비난을 받는 입장이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셴위와 달리 일본군에의해 강제적으로 위성수장이
되었고 거의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이끌려 다녔기 때문에 중공은 그를 처벌하지 않고 사면시켜 정원사로 살게
해줍니다. 덕혜옹주, 셴위,푸이 세 인물다 아무런 물정도 모르고 세상에 태어나 험악하기 짝이없는 사회변동의
물결에 던져져 거의 매장되다시피 살았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그러나 셴위는 역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지 못하고
조상들의 실수를 반복하며 대중들의 비판을 받는 작태를 계속 보여왔기에 끝도 안좋게 보내버립니다. 이들이 실패
하고 국민들위에서 전횡한 독재적 인물의 후손이라는 점과 또한 사회에대해 오점으로 가득한 행위를 했다는 요소
에서 비난을 살만하지만 때로는 과연 그들은 그러한 숙명에 처하는게 비극이었는지 돌아볼 필요도 현재 우리세대에게
필요한게 아닐까 싶습니다.
친일매국노 생존 여부 및 친일매국노 후손 및 뉴라이트출신을 연구,탐문하는 작업은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에 우리 민처협이 유일합니다.
진실을 알리는데 노력하겠습니다!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민족반역자에게 안식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