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 예수님!!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제가 6월 5일부터 12일까지 독립운동 전적지 탐방 여행을 떠납니다.
그래서 그 동안 묵상을 올려드리지 못할 형편입니다.
여행 후에 뵙겠습니다.
제가 잘 다녀올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2024년 6월 5일 수요일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8-27
그때에 18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다.
19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만 두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0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21 그래서 둘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지만 후사를 두지 못한 채 죽었고, 셋째도 그러하였습니다.
22 이렇게 일곱이 모두 후사를 남기지 못하였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23 그러면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2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25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26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 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왜 강을 건너서 간다고 할까?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된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흔히 황천(黃泉)을 건넌다든가, 요르단 강을 건넌다느니 이와 유사한 말들을 타종교에서도 한 결 같이 말해서 흔히 사람이 죽으면 정말 강을 건너야 하는구나 하고 의례 짐작들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아마 특별한 그 무엇인가 필요할 것입니다. 지금은 다리를 잘 놓아서 강을 건너기가 쉽지만 예전에 사람들은 강을 건널 때는 늘 나룻배를 타야했습니다. 그래서 죽어서 강을 건너기 위해 배를 탈 때에 망인도 노잣돈이 있어야 사공에게 뱃삯을 낼 수 있다고 사람들은 관에 돈을 조금 넣어주기도 합니다. 황천을 건널 때 저승사자와 같이 잘 갈 수 있도록 집 대문 앞에 사자 밥이나 짚신 그리고 노잣돈도 놓아주는 관행이 아마 이런 이유에서 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죽으면 왜 강을 건넌다고들 하였을까요. 예전에는 강을 건너기 힘들었기 때문에 죽음은 건너뛰기 힘든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였고 강은 쉬지 않고 계속 흘러가기 때문에 현세와 저승 간에 놓여있는 모든 미련과 많은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깨끗하게 씻어 흘러갔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은 아니었을까요? 이 세상에서 잘못한 것을 저승에서 조상을 어떤 면목으로 대할 것인지도 크게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기 전에 선행을 쌓아서 선대(先代)를 대하여야 한다고 누구나 말합니다. 흔히 '기언야선'(其言也善)은 ‘임종에 이르면 그 말함이 착하다.’는 뜻으로 이는 임종 전에 하는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들은 아무리 악인이라도 착하고 선하게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도 오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명쾌하게 대답을 주십니다. 이미 모든 것을 성경을 통해서 명백하게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사람들은 심판을 받는 기준에 대하여도 가르쳐 주셨는데 용서할 것은 용서하고 잘못한 것은 뉘우치고 다시는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하느님과 약속하고 그 모든 것을 잘 지키라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영원히 죽지 않고 살게 되며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모습으로 살아있다는 말로 하느님께서 마련한 나라에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선인과 악인의 구별은 있을 수 있으나 하느님 앞에서 시집가거나 장가들고, 내 사람이고 네 사람이고의 구분이 없이 모두 하느님의 의향으로 하느님 나라의 자손으로 함께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사람들의 하느님'이라는 데에 큰 위안을 받습니다. 얼마 전 제가 참으로 사랑하던 형제가 주님 품으로 갑작스럽게 안겼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슬펐습니다. 그 형제는 열심히 최선을 다하여 봉사하였기에 그 분을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분은 죽은 것이 아니라 주님 품에 살아있는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주님 품에서 활동하면서 육신을 가지고 살아 있었고, 하늘나라에는 육신을 이 세상에 남겨놓고 주님 품으로 다시 돌아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살아있을 때에 하던 것과 똑 같이 천상의 교회에 있는 형제에게 우리들은 늘 함께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가신 분들이 주님 품에 안겨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가슴 가득히 행복한 느낌도 듭니다. 내가 항상 잊지 못하는 아버지와 장인어른, 어머니와 장모님, 그리고 친구들, 교회 안에서 우정을 나누었던 형제, 자매들 그리고 주님의 품에서 영원한 행복과 사랑으로 살아 있을 모든 돌아가신 분들을 지금 기억합니다. 슬퍼하는 마음이 아니라 기쁨으로 그분들의 부활을 진정으로 믿으며,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그렇게 주님과 함께 행복하실 것입니다. 이제는 두려움 없이 죽음도 맞이하고 후회 없이 진실로 봉사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에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2서 시작입니다. 1,1-3.6-12
1 하느님의 뜻에 따라, 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바오로가,
2 사랑하는 아들 티모테오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자비와 평화가 내리기를 빕니다.
3 나는 밤낮으로 기도할 때마다 끊임없이 그대를 생각하면서,
내가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깨끗한 양심으로 섬기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6 그러한 까닭에 나는 그대에게 상기시킵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7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8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9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 은총은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10 이제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환히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 주셨습니다.
11 나는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스승으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12 그러한 까닭에 나는 이 고난을 겪고 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누구를 믿는지 잘 알고 있으며, 또 내가 맡은 것을 그분께서 그날까지 지켜 주실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축일6월 5일 성 보니파시오 (Boniface)
신분 : 대주교, 선교사, 순교자
활동 연도 : 675?-754년
같은 이름 : 보니파시우스, 보니파키오, 보니파키우스, 보니파티오, 보니파티우스, 보니페이스, 빈프리트, 윈프리드, 윈프리트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 또는 보니파시오)는 675년경 영국 웨식스(Wessex)의 크레디톤(Crediton)에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빈프리트(Winfrid, Wynfrith)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불과 7살의 나이에 잉글랜드 남서부 데번셔(Devonshire)의 엑서터(Exeter)에 있는 성 베네딕투스 수도원 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14살이 되던 해에는 햄프셔(Hampshire)의 너슬링(Nursling)에 있는 성 베네딕투스 수도원 학교에서 윈버트(Winbert) 수도원장의 지도하에 교육을 받았다. 그는 그곳에서 앵글로-색슨 수도원의 사상과 신학적인 지식 · 선교 활동 등에 필요한 교육을 받고 너슬링의 성 베네딕투스회에 입회하여 서른 살의 나이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 후 너슬링 수도원 학교의 교장이 되어 교수와 설교자로서 성공적인 활동을 했다. 그는 많은 시를 쓰고 영국에서 최초로 라틴어 문법서를 저술해 출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영국에서 명성을 얻는 것보다는 프리슬란트(Friesland) 지방의 선교사가 되기를 희망했다. 그래서 716년에 수도원장의 허락을 받고 프리슬란트로 갔으나 라드보트(Radbod) 공작의 방해로 선교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다시 너슬링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717년 너슬링 수도원의 원장이 선종한 후 후계자로 선출되었으나 성 빈프리트는 이를 사양하고 이듬해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Gregorius II)를 알현하기 위해 로마로 갔다. 몇 차례 교황을 알현한 그는 719년 5월 교황으로부터 라인강 동쪽에 사는 이교도들에게 선교하라는 사명을 받고 길을 떠났다. 이때 교황은 그에게 선교 활동에 대한 당부와 함께 빈프리트라는 이름 대신 로마의 순교자인 ‘보니파티우스’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었다.
이때부터 성 보니파티우스는 우선 튀링겐(Thuringen)에서 지식인들에 대한 설교를 시작했고, 라드보트 공작이 사망하자 프리슬란트로 가서 위트레흐트(Utrecht)의 성 빌리브로르두스(Willibrordus, 11월 7일) 주교를 도와 3년을 활동했다. 성 빌리브로르두스는 그를 후계자로 지명하고자 했으나 독립된 활동을 원한 성 보니파티우스는 722년 가장 이교도적 지역인 헤센(Hessen)으로 가서 아뫼네부르크(Amoneburg)에 최초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을 설립했다. 그가 이곳에서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주고 성공적인 선교 활동을 펼치자, 교황은 성 보니파티우스를 로마로 불러들여 주교로 서품하고 교회 법령집과 독일의 모든 수도자와 관리들에게 보내는 추천서를 써주었다. 이 서한은 그의 독일 선교 활동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특히 프랑크 왕국의 재상인 카를마르텔(Karl Martell)의 보호를 받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성 보니파티우스는 카를마르텔의 보호를 받으며 723년부터 725년까지 제2차 헤센 선교에 나섰다. 이때 그는 가이스마르(Geismar)에서 이교도들이 신성시하는 떡갈나무를 베어 경당을 짓는 데 사용했다. 그런데 이 사건을 계기로 개종자들이 확산하는 결과가 나타났다. 그 후 그는 교황의 명을 받고 튀링겐으로 가서 교리 지식이 부족한 사제들과 이교도적 관습에 빠진 이들을 위해 오르트루프(Ohrdruf)에 수도원을 세웠다. 그리고 영국의 수도자들을 독일 선교사로 파견받아 교육과 선교 활동을 돕도록 했다. 73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3세는 그를 명의 대주교로 승품하고 장차 설립될 독일 교회의 주교들을 서품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그는 독일 남동부 바이에른(Bayern) 지방에 잘츠부르크(Salzburg) 교구, 레겐스부르크(Regensburg) 교구, 프라이징(Freising) 교구들을 설립하고 여러 교구에 수도원도 세웠다. 하이덴하임(Heidenheim) 수도원에 이어 744년에는 성 스투르미우스(Sturmius, 12월 17일)와 함께 풀다(Fulda)에 수도원을 설립했다. 풀다 수도원은 몇 년 지나지 않아 독일 지역 내에서 종교적 · 지성적 생활의 중심지가 되었다. 동시에 성 보니파티우스의 지속적인 선교 활동과 영성적 쇄신을 위한 근거지가 되었다.
성 보니파티우스는 독일과 프랑크의 교황 특사로 임명되어 활동하면서 피핀 3세를 프랑크의 유일한 통치자로 세우는 대관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그는 쾰른에 자신의 대주교좌를 설립하고자 했으나 프랑크 주교들의 반대로 무산된 후 마인츠(Mainz)의 대주교가 되었다. 피핀 3세의 견제로 활동에 제약을 느낀 성 보니파티우스는 마인츠의 대주교직을 사임하고 성 빌리브로르두스가 선종한 후 다시 이교도적 관습에 떨어진 프리슬란트 지역을 재건하는 데 여생을 바쳤다. 그러던 중 754년 6월 5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도쿰(Dokkum) 근처 보르네(Borne) 강변에서 개종자들에게 견진성사를 주려고 준비하던 중 프리슬란트 이교도들의 급습을 받아 동료 52명과 함께 살해되어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그의 유해는 위트레흐트와 마인츠를 거쳐 그의 유언대로 풀다 수도원 성당에 안치되었다. 독일 지역 사람들의 개종에 헌신하고, 신설된 독일 교회가 로마 교회와 밀접하게 일치하도록 조직하고, 성직자의 개혁과 선교 활동을 위한 수도회 설립 등에 헌신한 성 보니파티우스는 ‘게르만족의 사도’ 또는 ‘독일의 사도’로 불리며 공경을 받고 있다. 그의 축일은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1874년부터 보편 교회력에서 기념하고 있다.
오늘 축일을 맞은 보니파시오 (Boniface)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