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님과 함께
예배 후 떠날 때 목사님과 기념사진 한장. 마주 비추는 햇볕이 강하여.
어깨의 땀수건을 뒤로 넘겨어야 했는데, 사진으로 보니 이상하다.
7층 권사님들의 쉼터에서 하룻밤 묵다.
전의 성결교회에서는 주일에도 새벽기도회를 하였다. 요즈음엔 주일새벽기도회를 모이지 않는 것이 추세인데. 목사님의 성향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새벽기도회 후, 배낭을 다 꾸려놓고 어제 밤에 준비한 빵, 사과, 우유로 아침을 대신하고, 교회 주변을 산책하였다.
전의성결교회
역대 목사님과 현재의 목사님 무엇보다도 교인들의 봉사와 헌신의 정도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참 난감하다.
날개를 다쳤는지 날지 못하고 주위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이름모를 새. 어떻게 해 주는 것이 옳은지 알 수 없어서 지나친 것이 꺼림직하였다
전의 향교 입구
大小人貟皆下馬碑(대소인원개하마비)
신분의 고하를 불문하고 여기서부터는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야한다는 뜻이겠다.
향교에서 기리는 성현들
중국의 오성4현과 우리나라의 18현에게 제사를 드리는 향교의 대성전(大成殿)과 예배당의 십자가가 묘한 대조를 이룬다.
공자를 비롯한 그의 제자들 5성(五聖)
공 자(孔子, 大成至聖 文宣王, BC551-BC478)
안 자(復聖公 顔子, BC521-BC490) 증 자(宗聖公 曾子, BC505-BC436)
자 사(術聖公 子思, BC483-BC402) 맹 자(亞聖公 孟子, BC372경-BC289경)
송나라의 4현(宋朝 四賢)
· 주돈이(道國公 周惇1017-1073) 정 호(豫國公 程顥, 1032-1085)
· 정 이(洛國公 程 , 1033-1107) 주 희(徽國公 朱熹, 1130-1200)
신라부터 조선시대까지의 18현(十八賢)
· 설 총(弘儒候 薛聰, 650-740경) 최치원(文昌候 崔致遠, 857-?)
· 안유(향)(文成公 安裕, 1243-1306) 정몽주(文忠公 鄭夢周, 1337-1392)
· 김굉필(文敬公 金宏弼, 1454-1504) 정여창(文獻公 鄭汝昌, 1450-1504)
조광조(文正公 趙光祖, 1482-1519) 이언적(文元公 李彦迪, 1491-1553)
· 이 황(文純公 李滉, 1501-1570) 김인후(文正公 金麟厚, 1510-1560)
· 이 이(文成公 李珥, 1536-1584) 성 혼(文簡公 成渾, 1535-1598)
· 김장생(文元公 金長生, 1548-1631) 조 헌(文烈公 趙憲, 1544-1592)
· 김 집(文敬公 金集, 1574-1656) 송시열(文正公 宋時烈, 1607-1689)
· 송준길(文正公 宋俊吉, 1606-1672) 박세채(文純公 朴世采, 1631-1695)
전의역 쪽에서 본 전의향교의 홍살문
전의 전통시장; 장날이 아니라 한산하였다.
운주산길; 거의 조치원까지 운주산길이 계속되다
높은 산은 아니데 넓고 산기슭이 길어서 그런것 같다.
운주산길-30번 국도, 원조1번국도다.
지역에 따라서 도로이름이 바뀐다.다니는 운행하는 차는 적으나 도심을 벗어나자 마자 인도가 없어진다. 차도로 걸어야 하는 단점이 있다.
돌아보는 것이 습관이 되어간다.
하루에도 몇번, 여러가지 사유로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게 된다. 뒤돌아보니 완만하지만 오르막 길을 계속 걸어 올라왔다. 좀 더 올라가면 틀림없이 완만한 내리막 길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70대인 나에게는 오르막 길보다는 내리막 길이 더 신경이 쓰인다.
그러나 자전거를 타고 오는 사람의 표정을 보면 매우 힘들어 보였다
개미허리 고개 마루턱에 있는 6.25 전쟁 당시 한미 전사자 유해 발국 기념 지역
갑자기 한국전선에 투입되어 전쟁 초기에 전사한 한미청년들과 그 가족을 생각해 본다. 1950년 무더운 7월의 그들을 생각해 본다.
6.25 격전지 개미고개
폐쇠된지 오래된 주유소
새로운 길을 내면 옛길은 삭막해진다.
이 지역 30번 도로(원조1번국도)는 계속 '운주산로"로 불리워 진다. 운주산이 생각 밖에 넓은 산인 것 같다. 길가에 가게도 없고 물어볼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손님이 없는 버스들이 생각밖에 빠른 속도로 달려올 때는 옆으로 바짝 피해 주었다.
아마도 버스 기사는 같은 길을 하루종일 걷고 있는 나를 몇번씩 보면서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무궁화호(?)가 바로 옆으로 지난간다. 승객들 얼굴도 보인다. 저 열차를 마지막으로 타 본 것이 언제였나? 무궁화는 달리는 소리가 순하고 은근하다
뒤옹박마을 입구
인터넷에서 보았던 "뒤옹박마을" 안내표가 보인다. 이 뙤약볕에 왕복 4km를 걸어야 한다는 것이 꺼려졌으나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오겠나하는 마음이 들어 발길을 돌렸다.생각보다 멀어 보인다
도로 보수작업 중. 덤프트럭과 먼지가 만만하지 않았다.
모델이 되어주다.
젊은 부부가 걸어 올라오는 나를 보고 어디서 오시는 길이냐고 물었다. 그래서 서울에서부터 걸어왔다고 하였더니 농담인 줄 알았는가 보다. 배낭에 붙은 글을 보고 진짜로 걸어서 왔느냐, 진짜 부산까지 걸어갈 것이냐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기념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묻는다.
그래서 모델이 되어 주었다. 그들의 격려를 받으니 또 새 힘이 솟았다.
대개 중년 이후의 남자들과 젊은 엄마들의 반응은 ! 혹은 !!!인데 비하여 중년 이후의 아주머니들과 할머니들의 반응은 ? 혹은 ???이었다. 사진을 찍어도 되겠느냐고 할 때는 좀 우쭐해 지는 기분이다.
오호라, 이곳을 세우게 된 배경에도 어머니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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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오르막 길이라 땀이 많이 나고 다리도 아파왔으나, 시간이 없어서 빨리빨리 걷고, 둘러보았다.
마을 입구
경부고속도로 밑을 지나서 운주산을 향하여 올라가니 뒤옹박 마을이 나왔다. 눈 앞에 두고도 한참 돌았다.
휴일이기 때문인지 생각밖에 많은 사람들이 가족단위로 찾아왔다. 관광버스도 몇대 보였다
전동면사무소; 화장실도 이용하고 세수도 하니 한 결 좋다.
곧 이어서 전동역을 지났다. 전동역은 폐쇠된 것 같았다.
충청북도에 들어왔다. 오송과 청주 이정표가 보였다.
충청북도로.
국도와 기차길과 고속도로가 나란히 달린다. 난 이런 지역이 좋다
달리는 기차를 자주 보았다. 이 며칠동안 본 기차가 평생 보았던 것보다 더 많았다. 왠지 고속기차는 정이 가지 않는다. 이 기찻길로 가는 저속 기차들이 좋다.
전면의 교각 길을 피해 보려고 좌우에 길을 찾아보았으나 없어서 올라갔다. 운행하는 차가 적어서 안전하게 건너가다.
다리 중앙에서 내려다 본 기차길 주변
2차선 국도에서 4차선 1번 국도로. 그래도 도심이 가까우면 인도가 있다.
홍익대학교세종캠퍼스 정문에 있는 상징물
홍익하면 중학교에 입학한 첫날 담임선생님이 급훈인 홍익인간 (弘益人間)의 뜻을 아는 사람 손 들라고 하셔서 "미국 인디안처럼 피부가 붉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대답했다가 야단 맞은 기억이 새롭다. 동네 형들과 개구멍으로 들어가서 서부영화를 많이 보았기에
가능한 대답이었다. 이 조형물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궁금하였다.
"영원한 미소"란다. 역시 홍대 답다. 내가 처음 느낀 것은 "남자들만의 대학교" 아니면 "저 높은 곳을 향하여"라는 주제가 생각났다.
나의 수준이 중1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모양이다.
고려대학교세종켐퍼스에는 서울 고려대에 대리석정문을 그대로 옮겼놓았다. 고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런데 그렇게 크게 느껴지던 그 돌문이 이렇게 작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조치원역으로 가지말고 봉산동의 향나무로 가야했다..
고려대 정문을 지나 조치원역에 도착하였더니 17시 30분이 되었다. 후배와 만기러 한 시각이 한 시간 정도 남았다. 인터넷에서 보았던 봉산동 향나무를 보기 위해 발걸음을 올겼다.그러나 길이 꼬이기 시작했다.
봉산동의 향나무를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물어물어 돌고돌아 도달할 즈음, 마중나온 제자와 만나게 되었다. 자기 부부도 이 부근으로 산책을 오는데 유명한 향나무가 있다는 것은 오늘 처음 알았다고 했다.
어렵사리 찾은 봉산동 향나무; 굉장한 나무였다.
당시의 스마트폰이 아주 저렴한 기기인데다가 나이도 2살이 넘고. 찍는 사람의 역량도 부족해서 풍경을 잘 잡아내지 못했다.
조치원과 오송의 경계가 되는 다리를 건너 오송에 있는 제자의 집으로 갔다. 샤워를 하고 나니 인근에 있는 세 명의 제자가 부부동반으로 찾아왔다. 오랜만의 만남과 그들의 성원과 격려가 큰 위로와 힘이 되었다. 바쁜데도 불구하고 찾아와 응원해 주니 고마웠다. 그래서 저녁은 내가 꼭 사고 싶었는데 결국 그럴 수가 없었다.
오늘도 여정을 무난하게 끝낼 수 있었다. 그래서 yery good day였다.
A grateful day였고 그래서 또 happy day 였다.
이 모든 사랑과 은혜를 어떻게 갚을까?
우선은 내일 하루종일 걸으면서 이름을 부르면 기도하는 길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