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형식과 리듬 2 / 이종수 (시인) 시는 무엇보다 읽어주는 것이다. 눈으로 읽는 것보다 독자를 앞에 두고 읽어주는 것이 훨씬 내용이며 감동이 잘 전달된다. 독자가 앞에 없더라도 자신의 시를 직접 읽어보면 자기마저 독자가 된 듯 시의 문맥이 느껴지고 어디가 잘 읽히지 않는지 알 수 있다. 분명 그 부분이 잘못 되어 시 전체가 틀어지거나 답답한 경우가 많다. 시의 리듬이 바로 시의 분위기를 만들고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인상을 남기기 때문이다. 좋은 시는 그림을 그리듯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 속에는 치밀하게 재구성한 리드미컬한 구성이 돋보인다. 비가 오고 눈이 오는 들판에 오래도록 서서 절정의 순간을 찍은 김영갑 작가의 파노라마 사진에서 느껴지는 제주만의 풍경 또한 흔들리면서도 번개 치듯 전달되는 삽시간의 황홀처럼, 원초적인 리듬이 있는 것이다.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 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 껑,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 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애처럼 화들짝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 방울 흘리며 맞은편 골짜기로 정신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다 멧돼지 무리는 어제 그제 달밤에 뒹굴던 삼밭이 생각나, 외딴 콩밭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치는 산비알 가을이었다 내년이면 이 콩밭도 묵정밭이 된다고 하였다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은 이제 산등성이 동그란 백도라지 무덤이 더 좋다 하였다 그리고 올 소출이 황두 두 말 가웃은 된다고 빙그레 웃었다 그나저나 아직 볕이 좋아 여직 도리깨를 맞지 않은 꼬투리들이 따닥따닥 제 깎지를 열어 콩알 몇 낱을 있는 힘껏 멀리 쏘아 보내는 가을이었다 콩새야, 니 여태 거기서 머 하고 있노 어여 콩알 주워가지 않구, 다래 넝쿨 위에 앉아 있던 콩새는 자신을 들킨 것이 부끄러워 꼭 콩새만 한 가슴만 두근거리는 가을이었다 - 송찬호, <가을> 시인은 화가가 그렇듯 자신만의 눈으로 그려낸 가을 서정을 몇 번이고 읽어내고 읽어내다가 비로소 입에 달싹 붙는, 그래서 독자의 가슴에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부딪히는 콩알과 콩꼬투리 사이의 부산하면서도 절절한 긴장을 리드미컬하게 잘 그려내고 있다. 일찍이 백석의 시에서 볼 수 있었던 시적 구조를 바탕으로 하여 탄탄한 서술 구조가 돋보인다. 옛날엔 통제사(統制使)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港口)의 처녀들에겐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千姬)라는 이름이 많았다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질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천희의 하나를 나는 어느 오랜 객주집의 생선 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붉으레한 마당에 김냄새 나는 비가 내렸다 - 백석, <통영(統營)> 앞서 나온 송찬호 시인의 “~자, ~다”처럼 기본 서술구조 속에 담담하면서도 아련하게 다가오는 과거 어느 시점이기도 하고,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감물처럼 남기는 느낌을 주고 있다.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질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대목만 보아도 변사가 읊어주는 것처럼 비장미를 더하다가 누구나 가슴에 묻어둔 첫사랑과도 같은 아련함을 주는 ‘천희’를 되뇌어보게 하는 리듬감을 잘 살려내고 있다. 김냄새 나는 빗소리가 도대체 어떤 것인지 잘 몰라도 괜히 그 분위기에 사로잡혀 내 가슴이 고동치면서 저절로 발걸음을 옮기게 할 것 같은 묘미가 있는 것이다. 좋은 시란 독자들을 많이 갖는 것이듯, 많은 독자 앞에서 담담한 자신만의 어조로 들려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인이 불러세우면 세월이 그렇게 흘러가고 인생이 그렇게 흘러간 것처럼 보이고, 함께 호흡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가져다준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 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이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 정지용, <고향> 우리에게는 정지용, 김영랑, 박목월 등 정형시에 가까우면서도 단순하면서도 담백하고 정감있는 표현을 잘 보여주었던 시인들이 있다. 그 가운데 정지용의 ‘고향’은 3음보를 중심으로 맨 앞 연과 맨 뒷 연, 앞의 세 연과 뒤의 세 연이 대구를 이루면서 정형시의 멋과 자유시의 멋을 함께 살리고 있다. 단지 시조 양식만을 살려 자신의 심사를 적어놓은 것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절제와 깊이 있는 서사가 느껴진다. 솔잎들 나란히 쉬고 있다, 줄 맞추어 바람길 틔어주며 서로 붙잡아 떨고 있는 풀 잎 옆 기다란 무늬 파도치는 내 마음 모였다 흩어지고 비뚤어진 행간처럼 물기 없이 가벼운 먼지 되어 흩어지고 삼월에 마지막 밤에 마무리도 못한 시 - 강봉정, <마무리 못한 시> 함박눈 소복소복 털실 짜는 소리 들려 민영이 새끈 새끈 고른 숨 소리 들려 내 삶의 한땀 한땀이 오늘 밤 만 같았으면 진회색 색상을 골라 십년 만에 잡아본 바늘 낯선 듯 낯익은 듯 손바닥을 간지럽히는 우리 집 둘째아이의 목도리를 짜는 밤 실타래 온기 담아 내 마음 전하고픈 빙그레 웃음 짓는 둘째아이 눈망울 오늘도 행복지수가 차곡차곡 쌓이네. - 변선옥, <뜨개질> 두 시조를 보면 시와 시조 모두가 쓰는 이의 개인사를 보여주는 영역인 건 마찬가지이지만 어쩐지 시인만의 도구가 되어버린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형식에 매여 있기만 한 것처럼 보인다. 잘 배치된 리듬감 있는 언어들 사이에 함축되어 있는 여운을 느낄 수 없다. 쌀 떨어진 딸네 집 양식 물어다 주고 쉬엄쉬엄 돌아가는 길인가 우리 할머니 부엌 창문 콕콕 두드리다 알은체해주니 오히려 날아간다 찔레덤불 속인지 외딴 절인지 간 곳은 알 수 없어도 까마종이 두 알 글썽한 눈매 남기고 가셨다 - 심호택, <할미새> 할미새와 할머니를 함께 부르는 듯한 이 시에서 ‘글썽한 눈매’는 분명 새와 할머니의 눈매를 그려내는 것이지만 ‘글썽한’이 시각과 청각을 함께 상기시키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공감을 준다. 할미새의 몸집답게 ‘쉬엄쉬엄’도 살리고 ‘콕콕’ 도 살리면서 부재와 여운을 절묘하게 전달하고 있다. 병어보고 대구한테 시집가라 했더니 마냥 좋으면서도 아-쫑 해서 입이 조그맣고 대구는 좋아서 에헤헤 해갖구 입이 커졌단다 가랑잎 구르는 소리에도 까르르 웃어제끼던 어머니 처녀 때 들었다는 펄펄 뛰는 바다에서 막 뭍에 나온 대구병어 이야기 지금에 와서 들어도 귀밑머리 고운 어머니의 어머니 무릎 베고 듣는 듯한 귀에도 부신 대구병어 시집 장가 가는 이야기 - 이종수, <대구병어 이야기 -바다사랑 44>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를 받아 적은 시에는 ‘쇠귀에 경 읽듯’이나 ‘그때는 고곻고롬 돼 있제’ ‘에이 짠한 사람, 내가 나보고 그라요’ 처럼 입에 감칠나게 들러붙는 이야기 자체의 재미와 멋이 있다. 다시 이승에 오면 모두들 꽃이고 나는 이 꽃 저 꽃 우체부 같은거나 하면서 살면 어떨까 타박거리는 발소리 멈춰 하얀 산국山菊 두어 송이에 눈길 주는데 세상은 머언 그림처럼 잠시 멎는 듯 노루 한 마리 지나가는 한나절 산길을 노승老僧도 홀로 걸어간다 골짜기 물소리 꿈결 같고 떡갈잎에 머무는 한숨 기울어진 가을 햇살 여한 다 삭여낸 초승달 언저리 낮별이 보일 듯 고요한 하늘 - 이인해, <가을, 이 고요한 가을> 일찍이 말갛게 비워낸 몸으로 다시 이승에 와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따뜻하게 훑고 있는 듯한 시에는 세속의 무게와 시를 잘 써야겠다는 욕심이 보이지 않는다. 천연의 재료로 만들어낸 음식처럼 부담이 없다. 읽어주는 이의 소명을 다 하면서 책장을 덮는 여운이 그대로 느껴진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거리는 이미 나의 내장이다. 군중과 복잡함에 불안해진 굶주린 거리가 아니라, 달동네의 이 빠진 거리들, 일상인들에게는 거의 보이지 않는 어둠과 석양에 물든 다소곳함. 그리고 좀 더 밖으로 나가면, 은혜스럽게 큰 나무도 없고 엄숙한 저택들도 감히 발을 디뎌놓지 못하는, 불멸의 간격과 거리 속에 가물거린다 하늘과 평원, 그 깊은 풍경 속에 길을 잃어버린 거리들. 거리들은 고독한 산보객들에겐 하나의 약속이다 낯선 수많은 영혼들이 거기 가득하기에, 하느님 앞에, 세월 속에 유일한 영혼들, 하나같이 귀한 사람들. 서쪽 북쪽 그리고 남쪽으로 길들은 --나의 조국과 같이 --- 펼쳐나갔다: 내가 쓰는 이 시구들에도 그 길들이, 그 깃발이 있기를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거리> 시인의 조국이자 시인의 내장과 같은 거리, 착한 사람들의 거리를 사랑하는 시인의 염원이 그대로 드러난 시다. 시인과 같이 고독한 산보객들에게 하나의 약속이자 착하고 귀안 영혼들에게로 귀의하고자 하는 거리의 상징을 보여주고 있다. 거리를 샅샅이 쏘다니면서 길거리에서 써낸 현장의 시인 것이다. 고적한 거리여, 너는 내게 낯선 불멸을 주리라. 너는 이미 내 인생의 어두운 그림자, 너는 나의 밤들을 정확히 직선으로 가로지르는 칼자국처럼 놓여 있다. 죽음 ---어두움 부동의 폭풍 ----은 나의 시간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하리라. 누군가 나의 발자국을 줍겠지, 너의 하늘에 똑같은 열망을 드리우겠지 오늘 나의 전부인 이 마음과 똑같은 열망을. 나는 다시 솟아나리라, 다가오는 존재의 경이 속에서, 내 속에 다시 하나의 상처처럼 열려 있는 너, 거리여. - 보르헤스, <어느 서부 거리를 위하여> 죽음으로 열려진 거리에서 공포와 고뇌에 찬 시인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시에는 차분하면서도 깊은 성찰이 묻어난다. ‘하나의 상처처럼 열려 있는 너’를 외면하지 않는 시인의 정신이 거울 속의 자신에게 부르짖고 있는 것처럼 강렬하게 느껴진다. 모두들 죽었다. 안또니아 아줌마도 죽었다, 시골 마을에서 제일 싼 빵을 만들던, 늘 목이 쉬어 있던 여자. 산띠아고 신부도 죽었다, 우리 젊은이나 처녀들이 인사하는 것을 제일 좋아하시던. 인사할 때마다 한결같이 답을 해주시곤 하셨지; “호세, 안녕! 마리아도 안녕!” 그 금발머리 아가씨 까를로따도 죽었다, 몇 달 안 된 갓난아기 하나를 남겨두고. 아이도 엄마 죽은 지 여드레 만에 결국 죽고 말았다. 나의 아줌마 알비나도 죽었다, 전래 동요와 풍습과 세월을 노래하곤 하시던 아줌마. 토방마루에서 집안 하녀인 곱디곱던 여인 이시도라를 위해 바느질을 하시다가 돌아가셨다. 한 외눈박이 노인도 죽었다. 그 이름은 생각이 안 난다. 하지만 동네 어귀의 함석장이 집 문앞에서 노상 주저앉아 아침 햇살을 받고 졸곤 하셨다. 라요도 죽었다. 내 키만큼 큰 개 한 마리. 누군가 길 가는 사람의 총을 맞고 죽었다. 루까스도 죽었다. 허리 가득 평화를 안고 다니던 나의 외삼촌. 비가 오면 나는 외삼촌이 생각난다. 그러나 내 경험 속에는 아무도 없다. 나의 권총 속에서 나의 어머니는 죽었다. 나의 주먹 속에서 나의 누이는 죽었다. 나의 피투성이 허벅지 속에서 나의 동생도 죽었다. 계속되는 세월의 8월달에 모두 죽었다. 슬픔의 슬픈 핏줄로 이어진 이 세 사람. 악사 멘데스도 죽었다. 키가 크고 술이 항상 곤드레만드레가 되어 있던. 나팔로 옛날 슬픈 곡조를 따라랑거리면 그 처량한 음악소리에 우리 마을 암탉들이 해도 지기 전에 잠들곤 했던. 나의 영원은 죽었다. 그리고 나는 그 죽음을 보고 있다. - 세사르 바예호, <시간의 횡포> 페루의 시인 세사르 바예호의 산문시에는 역사의 한 대목이기도 한 죽음의 8월에서 불러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다. 계속 “~죽었다”로 시작하는 대목들은 정연한 리듬감이 있어 마치 죽음의 실록을 느끼게 한다. 그러면서도 처음으로 돌아가 송찬호 시인과 백석 시인의 아련한 듯 담담하게 읽어내고 있는 자아를 느끼게 해준다. “나의 권총 속에서 나의 어머니가 죽었다”는 대목은 잘못 해석하면 시인이 자기 어머니를 죽인 것처럼 보이지만 무수한 권력과 전쟁의 잔혹함이 거두어간 목숨들에게 바치는 인간성 바로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영원은 죽었”고, “나는 그 죽음을 보고 있는” 것이다. 내가 권총을 들고 주먹을 들고, 피투성이가 되는 순간 “슬픔의 슬픈 핏줄로 이어진” 내 어머니와 누이와 동생은 죽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민용태 교수는 바예호의 시를 설명하면서, “사람의 삶을 시로 쓰는데 다른 리듬이 따로 필요 있을까? 세상 사람들의 전기를 다 모아놓아도 ‘태어났고 살았고 사랑했고 괴로워했고 죽었다’라는 것은 모두 한가지다. 사실 산다는 것은 누구의 삶이어도 모아놓으면 산문시” 라고 했고, “리듬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바예호의 시 속에서는 모든 거지, 개, 암탉, 들까지 우주의 이불 안에 따스함으로 머물러, “나의 영원은 죽었다”를 더욱 더 사무치게 만든다고 평했다. “간단한 반어법, 영원과 죽음의 합주가 뼛속 깊이 통곡으로 자리한다. 바라보아야 할 하늘, 눈감고 그리워해야 할 어느 고향도 가슴도 이제는 없다. 살아간다는 것은 죽은 인간애, 순수, 사랑을 발끝으로 차며 가는 행진이다. 낙엽을 보듯 내가 밟고 가는 발자취를 보며” 가는 길이라고 했던 것도 현대시의 개척자였던 시인들에게 바치는 헌사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