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리와 말씀(제52호/2022.10)
A.I.(인공지능) 시대의 신인류(posthuman)는
그리스도교 인간학의 위기를 가져올 것인가?
송용민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목 차
I. 주제 설정
II. 제4차 산업혁명과 A.I.(인공지능) 시대의 도래
III. 인공지능(A.I.) 기술이 그리스도교 인간관에 던지는 물음들
3.1. 세계 개방성의 원리: 인간의 정신성과 사회성에 대한 도전
3.2. 하느님 모상성: 피조물로서의 인간 초월성의 위기
IV. 인공지능 시대의 신인류(posthuman)는 재앙인가? 기회인가?
V. 나가는 말: 인공지능 시대의 신앙과 신학의 미래
I. 주제 설정
인류는 증기 기관의 발명과 함께 공업화를 시작한 제1차 산업혁명과 전기의 개발로 컨베이어를 이용한 대량생산 시대를 연 제2차 산업혁명, 그리고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제3차 반도체 혁명을 넘어 21세기 이른바 빅데이터와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의 결합으로 시작된 제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맞고 있다. 이러한 산업 문명의 패러다임 전이는 컴퓨터 기술의 고도화와 고속 인터넷의 발명, 그리고 빅데이터로 불리는 방대한 정보교환의 혁명이 만들어낸 초연결사회를 이끌고 있다. 또한 이들 과학기술은 뇌과학과 생명과학, 유전자 과학 등의 신기술과 결합 되면서 인간의 한계로 여겨졌던 노화, 고통, 죽음이라는 문제를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21세기 인공지능과 로봇 공학의 결합은 인류의 삶의 질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이들 기술은 실생활에서 인간의 삶을 보조하는 역할을 넘어 인간 본성의 고유한 영역을 대체하는 놀라운 혁명으로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산업 현장에서 인공지능이 탑재된 로봇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대신해주며 높은 생산력 증대를 가져오고 있다. 그러나 그 결과 인간이 주도했던 고유한 일자리를 기계가 빠르게 대체하며 대량 실업의 위기 역시 가져오고 있다.
기술 과학의 발전은 산업 현장을 너머 인간의 본성의 개량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뇌과학의 발전은 인간의 지능을 모방한 인공지능 개발로 이어져 개량된 증강 인간(트랜스휴먼)이나 인간의 본성을 극복한 새로운 인간의 출현(포스트휴먼)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이런 점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여겨져온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인간관에 적지 않은 도전이 되고 있다.
‘인류의 미래’란 주제로 개최되었던 2017년 교황청 문화평의회 총회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되었다.
“새로운 기술의 급진적 변화가 전통적 경계를 허무는 것은 분명합니다. 생물학과 기술, 자연과 인공, 실제와 가상, 관리와 권리부여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뇌 기능을 포함한 신체가 기술의 대상이 되고 전산정보화가 되어 생물학적 한계가 극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생겨날 새롭게 변화되는 인간, 인간 이후의 인간, 혹은 초 인간에 대한 철학적 의문이 개진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인간 본성의 뿌리까지 급진적으로 변형시켜 인간을 인공작품으로 만들어 가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해야 합니다. 매우 방대하고 영향력이 있으며 아직 정의되지 않은 이 과학발전의 환경에서 우리가 어떻게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지켜나갈 수 있는지 물음을 던져야 합니다.”
과연 뇌과학과 신경과학의 발전에 따른 인공지능(A.I.)의 기술개발이 인간의 고유한 지성과 능력을 넘어 인간 본성의 개선과 증강에 이르게 된다면 현생 인류는 새 인류를 어떻게 맞이해야 할 것인가? 여기에는 몇 가지 숙고해야 할 신학적 물음들이 있다.
첫째는 인공지능 기술이 과연 인간의 복잡한 지성 작용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느냐는 회의론이 있다. 그리스도교는 역사적으로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는 표어 아래 인간의 지성을 신의 모상으로 바라보며 자연에 대한 착취와 지배를 정당하게 여겨왔다. 아무리 인공지능 기술이 발전한다 해도 인간의 뇌 기능을 넘어서는 기계가 나오리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입장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2016년 알파고의 등장과 함께 딥러닝(Deep Learning)이라는 신기술의 개발로 인공지능은 자기학습 능력을 갖추게 되었고, 많은 과학자들은 2045년이면 인류가 쌓아온 지식의 총합을 기계가 넘어서는 시점, 곧 ‘특이점’(singularity)이 도래할 것이라고 경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은 과연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인간관에 어떤 도전을 가져올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현대 산업사회에서 불러온 광범위한 생태계 파괴와 창조 질서에 대한 훼손이 인간 지성의 오만에 기인하며 이로써 현생 인류의 실질적 종말이라는 위기의식이 생겨났다는 비판도 거세다. 이 점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지켜온 인간의 품위가 생태계 파괴라는 윤리적 부도덕성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인간 이해에 커다란 도전이 되고 있다.
둘째는, 그리스도교가 지켜온 인간의 주체성, 곧 이성과 자의식과 자유의지를 지닌 정신적 존재인 인간의 행위를 최근 뇌과학자들이 단순히 뇌기능이나 뇌의 신경세포들의 작용으로 환원하려는 도전에 신학은 얼마나 설득력 있는 답변을 내놓을 수 있느냐는 점이다. 최근 뇌 연구의 발전은 인간의 모든 행동과 윤리적 판단, 심지어 자유의지까지 뇌 작용의 결과임을 밝혀내면서 전통적으로 인간의 초자연적 이성, 곧 하느님의 계시를 수용하는 인간의 초자연적 신앙 행위에 대한 과학주의의 반발이 커지고 있다. 심지어 인간이 신과 만나는 계시 체험이나 종교 체험의 본질이 뇌의 특정 부위에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밝혀내면서 초자연적 이성의 영역을 물질로 환원하려는 이른바 ‘창발론’(Emergentism)의 사유는 창조주 하느님의 피조물이자 영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그리스도교 인간학의 위기를 가져올 수 있다.
셋째는, 하느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신앙 행위에 기초를 둔 그리스도교 신학의 담론들이 4차 산업혁명으로 대두된 인공지능 기술과 뇌과학의 연구 성과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들과 대화할 것인가이다. 신학은 전통적인 계시 신앙에 대한 단순한 재해석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해 과학기술이 던지는 새로운 물음들에 맞서 하느님의 계시 사건과 인간의 신앙 행위의 정당성을 해명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본 고에서는 제4차 산업혁명의 중심인 인공지능기술에 대한 과학적 담론들의 방대한 주제들을 모두 다루지 않는다. 단지 인공지능 기술이 미래에 가져올 현실들 가운데 그리스도교 인간 이해의 핵심적인 쟁점이 될 수 있는 분야, 곧 개량된 증강인간(트랜스휴머니즘)과 호모 사피엔스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포스트휴먼(posthuman)의 등장과 관련하여 신학이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인간 이해에 대한 근원적 신뢰를 어떻게 정당하게 해명할 수 있는지 몇 가지 핵심적인 쟁점들을 소개하고 앞으로의 연구 방향을 제시하는 것으로 논점을 한정하고자 하다.
II. 제4차 산업혁명과 A.I.(인공지능) 시대의 도래
4차 산업혁명이란 용어가 학계에 등장한 것은 2015년 다보스 포럼에서였다. 이는 21세기 컴퓨터 기술의 획기적인 발전과 초고속 인터넷과 빅데이터의 결합으로 발생한 정보통신 기술의 융합이자 초연결사회를 일컫는 말이다. 카이스트의 정재승 박사는 4차 산업혁명이란, “현실 세계에서 벌어진 현상들을 사물인터넷을 통해 데이터화해서 온라인의 가상 세계를 현실 세계와 똑같이 만들어 디지털 세계와 현실 세계가 일치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오늘날 세계는 생물학적 세계에서 인체의 정보를 디지털 세계에 접목하는 기술인 스마트 워치가 일상화되었고, 가상현실(VR)과 증강현실(AR)도 물리적 세계와 디지털 세계의 접목을 가져오는 신기술로 각광받고 있다. 이러한 기술이 로봇 공학과 나노 기술과 생명공학 등의 기술과 결합되면서 미래는 호모 사피엔스가 지금까지 겪어왔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과학기술의 혁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 적지 않다.
4차 산업혁명의 물결의 중심은 단연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t) 기술이다.초기 인공지능 연구는 ‘다트머스 회의’에서 존 메카시가 기계를 인간 행동의 지식에서와 같이 행동하게 만드는 것을 제안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인공지능에 관심이 획기적인 바뀌게 된 것은 인공지능의 한계로 지적된 모라벡의 역설과 상식의 저주을 넘어 2012년 슈퍼비전 이미지 인식 대회에서 인공지능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놀라운 결과를 이룬 사건이었고, 2016년 세계적 이목을 끌었던 알파고(Alphago)의 등장과 함께 알려진 딥러닝 기술의 개발이었다.그래픽을 처리하는 GPU 기술과 방대한 양의 빅데이터가 결합되어 오랫동안 인공지능의 한계로 알려진 모라벡의 역설을 극복한 것이 인공지능발전의 전환점이 된 것이다.
이러한 인공지능의 개발이 현실 세계에서 인간에게 유용한 도구로써 설계되어 활용되는 ‘약한 인공지능’의 발전은 인간 노동을 로봇이 빠르게 대체하여 대량생산을 가져오고 산업의 고도화를 통하여 인류가 자연을 극복하려는 ‘힘의 논리’를 증폭시킬 수 있다. 일각에서는 인터넷 연결기기와 인공지능이 결부된 기술 진보에 의한 자동화 기술이 전통적으로 인간이 지탱해온 수십억의 저숙련 공장 노동자의 일자리를 없애고 과학적 관리시스템의 도입으로 인해 다양한 직업들의 직무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예측한다.그 결과 기술 진보를 따라가지 못하는 사회적, 경제적 약자들은 자신들의 노동의 신성함 마저 잃고 쓸모없는 거대한 계급으로 전락할 위기를 낳을 수도 있다.
오늘날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의 결합은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발생시키고 인류가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집단 지성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곧 기계가 인간의 뇌를 대신하여 전 인류의 뇌로 진화되는 ‘강한 인공지능’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과학자들의 예측이 적지 않다.
인공지능의 기술은 인간의 삶의 질과 형태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최근 생명공학과 유전공학에 대한 연구 성과는 사이보그 기술과 나노과학 등과 결합되어 인간 강화(Human enhancement)를 통한 인간 한계를 극복하려는 트랜스 휴머니즘(transhumanism)의 시대를 열고 있다. 이미 성형수술이나 인공장기, 뉴럴링크 등을 통해 인체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다양한 기술들이 활용되고 있고, 인간의 의식활동 마저도 뇌활동의 기계적인 알고리즘으로 환원하여 연구하려는 흐름이 강해지고 있다. 심지어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의 한계인 노화와 고통을 극복하고, 지금까지 인류가 쌓은 모든 지식의 총합을 뛰어넘는 신인류, 곧 포스트휴먼(posthuman)이 탄생하리라는 예측도 적지 않다.
문제는 이러한 인공지능의 개발로 인한 인간 증강과 신인류의 출현이 ‘인간’을 규정하는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면서 생물학적으로 존재하는 현생 인류와는 대비되어 종(種) 간의 투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부정적 예측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현생 인류가 인간이 아닌 존재들과 상호의존하며 살아가면서 모든 형태의 생명체 및 과학 기술적 존재와 연결되어 교차하며 상호작용이 가능한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인간과 관계된 세계의 의미를 새롭게 형성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기대도 없지 않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는 인공지능의 기술개발로 인한 트랜스휴먼과 포스트휴먼에 대한 과학기술의 예측과 실현 가능성에 대하여 어떻게 바라볼 것이며, 하느님의 피조물로서의 인간에 대한 성서의 증언과 교의적 해석의 정당성을 어떻게 해명할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III. 인공지능(A.I.) 기술이 그리스도교 인간관에 던지는 물음들
모든 형태의 위기는 현재 상황에 대한 총체적 진단과 그 진단 결과에 따른 새로운 접근방법을 요청한다. 그리스도교가 전통적으로 규정해온 인간에 대한 본성을 해명하는 일도 이에 해당한다.
오늘날 철학적 인간학에서 인간이 동물과 비교하여 고유한 지위를 얻을 수 있게 해주는 원리는 ‘세계 개방성’과 ‘하느님의 모상성’이다.현대 과학은 인간을 우주의 질서라는 테두리 안에서 이해하려고 해왔지만, 그리스도교와 전통 형이상학은 인간을 불멸의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면에서 육체적 본능과 세계의 질서로부터 개방된 ‘정신적 존재’로서 자신의 고유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인간은 전체 우주의 질서 안에서 살지만 그 안에 종속되지 않고 벗어나 하느님 편에 서는 인간의 위대함과 존엄성을 ‘하느님의 모상성’에서 찾아왔다.
그렇다면 오늘날 뇌과학의 발전에 토대를 둔 인공지능 기술이 ‘세계 개방성’과 ‘하느님의 모상성’이라는 그리스도교 인간관의 두 가지 관점에 대하여 어떠한 도전과 위기를 가져오고 있는가?
3.1. 세계 개방성의 원리: 인간의 정신성과 사회성에 대한 도전
현대 물리학은 모든 사물의 원리를 진화와 물질로 환원하려는 ‘과학주의’를 이끌고 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와 철학적 인간학은 인간을 동물과는 달리 행위의 자기 통제 능력, 곧 “더 이상 본능이나 주위 세계에 예속되지 않고 주위 세계에 대하여 자유로운 존재”이며 모든 살아 있는 존재를 대면하며 살아가지만 무엇인가에로 환원될 수 없는 사물의 최종근거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정신적 존재임을 강조해왔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이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는 길에는 인간이 “진리와 아름다움을 향한 개방성, 윤리적 선에 대한 감각, 자유와 양심의 소리, 무한과 행복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곧 인간의 정신성과 초월성은 “하느님께서는 당신 선성(善性)과 지혜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고 당신 뜻의 신비를 기꺼이 알려 주시려 하셨으며, 이로써 사람들이 사람이 되신 말씀,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성부께 다가가고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할 수 있도록 자신을 계시하신 사건에 근거한다고 강조한다.
최근의 뇌과학과 신경과학은 인간의 정신 현상을 뇌기능의 물리적 현상으로 환원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본래 뇌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생존을 위해 에너지가 언제 얼마나 필요한지 예측함으로써 가치 있는 움직임을 효율적으로 해내도록 신체를 제어하는 것, 곧, 알로스타시스를 해내는 것”이기에 뇌의 작용과 구별되는 자아라는 의식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러나 신경계와 신경조직을 이루는 기본 단위인 뉴런(neuron)이 뇌 안에서 신경전달물질을 통해 신호를 전달하고 정보를 받아들이며 모든 의식 현상이 발생한다고 보는 뇌과학자들이 늘고 있다.달리 말하면 “뇌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뇌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하는 것”임을 논증하려는 시도가 일어나고 있다.
진화론을 바탕으로 한 오늘날의 인간 본성 모델이 정신과 영혼을 하나의 신경세포조직으로 축소되고 인간의 의식이 뇌기능으로 모두 환원될 수 있다면 인간의 ‘자아’라는 의식과 정신을 어떻게 해명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교는 전통적으로 정신 혹은 영혼이 뇌와 서로 다른 영역이라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뇌는 정신적이고 영성적인 행위를 실행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적 조건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동시에 인간은 다른 존재들과 달리 자신이 처한 상황과의 관련성을 벗어나 스스로 간격을 둘 수 있는 독특한 존재이다. 달리 말하면 인간은 자아의 개별성을 타자와의 차이를 통하여 인식하며 모든 대상과의 관계 맺음은 차이에 대한 인식, 곧 자신을 객관화하는 능력을 지닌다. 인간 의식은 과거와 미래를 포함한 현재에 대한 시간성에 바탕을 두고 스스로를 제3자로 만들어 타인에게 다가가는 능력, 곧 자기 초월의 요소를 지닌다. 여기서 자기 초월이란 행위는 세계 개방성이란 개념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인간은 자기를 인식하는 주체적 행위를 제자리를 지키려는 본능을 지닌 동물과는 달리 제자리를 떠나 세계로 개방되어 그 세계에 적응하는 과정을 거칠 때 발생한다. 내가 주체로서 자기 존재의 중심을 인식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기 스스로와 거리를 두고 타자와의 관계 안에서 스스로를 의식할 때 일어난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기 객관화 능력이 자아의 정신성과 뇌로부터의 독립성을 주장하는 것이라면, 인간의 세계 개방성은 인간의 사회적 관계 능력이 단순히 “하나의 신경망, 곧 네트워크”로서의 뇌기능의 결과가 아니라 인간의 상호주관적인 실재의식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뇌과학에서는 신경세포의 수상돌기와 축삭돌기, 시냅스의 상호 작용이 신경조절물질을 통하여 뇌의 네트워크 작용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고 밝힌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이라는 복잡한 의식 활동도 “엄청난 수의 각기 다른 신경 패턴들로 스스로를 구성해내는 뇌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이 능력은 우리 주변의 환경을 넘어서 전 세계, 심지어 우주공간까지 생각할 수 있게 해주고, 다른 동물이 할 수 없는 정도로 과거와 미래에 대해 신경쓸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뇌가 신경세포들이 정보를 교환하는 네트워크는 하나의 ‘패턴’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로써 기존의 패턴의 조각들을 조합해 다양한 패턴을 만들어내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황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효율적으로 몸을 운영할 수 있도록 뇌는 새로운 패턴들을 만들어내 적응한다고 강조한다.이렇게 인간의 세계 개방성의 의미를 뇌기능으로 환원하려는 시도는 뇌가 필요에 따라 매번 다른 신경세포 덩어리들의 조합을 통해 만들어낸 ‘기억’을 통하여 인간이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도록 도와주고,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창의적으로 활동하도록 돕는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사회적 관계성을 인간 뇌가 다른 뇌와도 연결될 수 있다는 연구결과로부터 해명하려고도 한다. 인간이 사회적 관계를 맺고 문명을 건설해낼 수 있는 것은 나의 행동이 상대의 뇌활동, 곧 신체예산을 조정할 수 있도록 상호 영향을 준다는 점이다. 이점은 호모 사피엔스 종이 지닌 독특한 언어 능력으로부터 나온다.언어는 ‘인체를 조절하는 도구’이며 인간의 ‘공감능력’의 바탕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뇌의 복잡성과 뇌기능의 연결성이 인간의 마음을 직접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비록 신경세포들이 시냅스로 연결되어 필요한 배선작용을 통해 환경에 적응하도록 돕기에 최근 인간의 뇌활동을 스캔하여 뇌기능의 특정부위를 밝혀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뇌의 활동의 일부를 물리적으로 밝혀낼 뿐이지 그 자체로 인간이 지닌 정신성으로 대체할 수는 없다. 더욱이 인간 상호관계성이 단순히 뇌의 활성화를 돕는 외적 행위들의 결과로만 보기에는 인간의 정신성의 복잡성을 너무 단순화화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과연 인간의 의지, 양심, 자유, 책임, 결정, 내적 외적 자극의 판단, 받아들이는 정보의 해석, 그리고 무엇보다 생각과 상징성, 종교와 예술의 기원,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라는 해석을 인간의 뇌-정신 구조 안에서 모두 해명해낼 수 있는 것일까?이러한 정신성과 사회성을 가능하게 만드는 뇌의 생물학적 특성이 해명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우리가 되게 만드는 자아를 자각하게 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어떤 영역도 뇌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뇌는 뇌 자신을 인식하지 못한다. 또한 뇌는 인간의 육체와 인간의 인격과 분리되지 않으며 “살아있는 유기체로서의 정체성”이자 “자기 자신을 느끼는 주체로서의 현상학적 정체성”의 양면성을 지닌 하나의 실체라는 점이 중요하다. 우리가 말하는 영혼과 정신은 뇌의 활동으로부터 나오지만 동시에 뇌의 활동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동시에 작용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3.2. 하느님 모상성: 피조물로서의 인간 초월성의 위기
인간의 세계 개방성은 인간 정신성과 사회성의 근간이지만, 동시에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완성할 수 없는 결핍된 존재라는 자의식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인간은 이성과 자유를 지니고 자기완성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헤르더(Herder)의 말대로 “인간은 이미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 되어가는 것”이며, 사회적 교류와 교육을 통하여, 곧 전통과 학습, 이성과 경험에 스스로 참여하여 협력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의미를 밝혀내는 존재이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행동의 목표와 종착점이 자신의 존재를 완성하도록 이끌어주는 절대 신비이자 존재의 근거인 하느님이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이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에로 자신이 무한히 개방되어 있다는 초월성의 체험이야말로 인간이 피조물로서의 현존재로 자신을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기초라고 해명해왔다.
이러한 점을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인간이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그러나 단순히 피조물로서의 하느님에게 종속된 존재라기보다는 ‘하느님의 모상, 곧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는 신의 본성인 자유를 내재적 원리로 지닌 존재로 설명한다: “하느님을 향한 갈망은 인간의 마음속 깊이 새겨져 있다. 인간은 하느님을 향하여, 하느님에게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늘 인간을 당신께로 이끌고 계시며, 인간이 끊임없이 추구하는 진리와 행복은 오직 하느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27항)
인간이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전통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오늘날 ’진화‘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갖는 과학주의 문명의 커다란 도전을 받고 있다. 현대 과학은 우주 탄생의 신비를 자연과학이 밝혀낼 수 있는 물리적 원리로부터 해명하고자 한다. 우주 탄생의 정설이 된 ‘빅뱅이론’도 아직은 논란의 중심에 있다. 창조의 첫 순간이 창세기의 ‘빛이 생겨라’(창세 1,3)는 성서적 증언과 맞닿아 있다는 의혹을 받으면서도 확인된 빅뱅이론에 맞서 오늘날 빅뱅 이전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었느냐는 물음에 대해 자연과학은 신의 창조가 아닌 물리적 원리에서 답을 찾으려고 시도한다. 가령 양자역학이나 우주의 급팽창 이론 등은 ‘다중 우주론’을 내세우며 물리학적 관점으로 신의 창조의 자리를 허락하지 않으려고 한다. 천체 물리학자 스티브 호킹은 우주 존재의 원리를 신의 창조가 아닌 물리적 원리로 해명하며 과학적 무신론을 주장하여 논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칼 라너는 그의 주저 ‘세계 내 정신’(Geist in Welt)에서 인간이 역사적 현존재로서 세계의 질서 안에서 살지만 인간 정신이 지닌 주체적 자의식은 본능적 질서에 종속되지 않고 세계를 ‘초월’하여 존재의 근원이자 원천에로 지향하는 선험적(a priori) 구조를 지니고 있음을 간파한 바 있다.인간의 초월성이란 단순히 존재의 근거에로 개방되어 있음을 뜻하지만 않는다. ”타인을 존중하는 새로운 방식의 사고, 행위, 생산 활동을 창출하기 위해 자신을 개방하고, 누군가가 제시한 최종 설명, 기획, 이론의 한계를 언제든 깨뜨릴 수 있는 주체로 인간 자신을 드러내면서 타인을 환대하고 온전한 타자, 전적인 타자에게 자신을 개방하는 것“이 인간 초월성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칼 라너의 ‘세계 내 정신’으로서 인간이 뜻하는 바는 자연 질서 속에서 인간이 동물과는 다른 정신적 존재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인간은 동물과 비교해서 ‘모자라는 존재’(아놀드 겔렌)로 태어나 언어와 문화를 통하여 상징적인 우주를 창출하고 본능의 관심에 제한받지 않으면서도 나름대로 고유한 삶을 행동으로 전개해나간다. 인간이 본성적으로 ‘문화적 존재’라는 말에는 인간의 자유, 곧 자신의 상황에 주어진 모든 조건들을 변화를 통하여 극복할 수 있는 인간 능력이 결핍을 채워가는, 그래서 “아직 인간이 아니라, 매일매일 인간이 되어”가는 자기완성에로의 지향성이 내재적으로 주어져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과 자유는 인간의 자기완성에 필수적인 요인이며 원천”이고, 인간의 이성과 경험이 동물적 본능 대신에 존재의 근거, 곧 참된 인간성의 완성과 존재의 근거인 신을 지향하는 성향을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의 모상성’으로 이해해왔다.
현대 진화론의 입장에서 볼 때 성경에서 증언하는 ‘하느님의 모상성’을 인류의 공통적인 원초상태, 곧 ‘하느님과의 실제적인 합일’로 받아들이기에는 어렵다. 오히려 인간이 하느님을 닮았다는 유사성은 인간 삶의 성취 과정에서 인간이 인간되어짐을 말하려는 윤리적 주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입장이 있다. 한마디로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인간에 대한 성서적 이해는 인간 창조의 원초적 상태를 회복하고 ‘자기 향상’을 통한 하느님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도덕적 행위의 목표 개념이라는 것이다.가톨릭 신학은 인간의 죄로 인하여 하느님의 모상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과의 현실적 관계를 위한 전제조건”이며 “인간 본성의 형식적인 구조의 특징”으로 받아들인다. 이 말은 ‘모상성’을 ‘유사성’과 동떨어진 개념으로 구분하는 프로테스탄트 신학과는 달리 가톨릭 신학은 모상성을 인간 창조의 성취도정에서 가능성을 지닌 유사성이란 역동적 개념과 결부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 운명을 실현하는 과정 중에 하느님 섭리의 영향력 안에 있다는 확신을 종교적 삶의 문제로 강조하기 위해 헤르더는 인간이 “신과 함께 공동체를 형성하도록 (...) 운명지어졌다. 종교를 통하여 인격적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이 실현되며 그래서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 된다.”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하느님의 모상성이 신화로 둔갑하지 않고 신학적 정당성을 지니려면 ”하느님의 창조 의도가 인간을 본성적 위치와 현존재의 조건을 모두 포함하는 전체성 안에서 운명짓고 그리하여 효력 있는 창조행위로 나타나게 하는 것“이라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한 마디로 하느님의 모상성은 인간 본성의 실현목표와 동시에 그 출발점으로 정립된 것이다.
자연과학이 물리적 원리의 관점에서 창조를 거부하는 것과는 달리 신학은 인간 존재가 유한한 사물 세계를 넘어서도록 이끌어주는 운명을 자기 세계와의 교섭에서 깨닫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곧 인간은 자기 행동의 대상인 동시에 바로 행동의 주체이기에 자기 운명의 극복은 자기 자신을 벗어나(extra se) 타자를 신뢰하고 지향하는 종교적 행위 안에서 비로소 가능하다.
신뢰 행위는 ‘자기 제외성’에 근거하며 인간이 믿는 대상에 스스로를 종속시키는 원리가 된다. 따라서 인간은 의미의 무한한 지평 안에서만 개별 객체의 확실한 성격이 파악 가능하고 자신의 제한되고 유한한 존재를 초극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신적인 실재에 대해 자신이 타당치 못하다는 자의식 속에서 한편으로 자신의 삶이 현재의 불만족스러운 이러한 삶을 넘어서서 신적인 실재에 속하고 싶다는 의식의 피할 길 없는 이면이다. 영원성에의 참여라는 말은 자신의 삶이 자기 내면적인 모순을 깨닫고 신적인 영원성에 상치됨을 경험하는 것이다.”가브리엘 마르셀의 말처럼, 인간 존재의 신비는 문제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신비이며, 인간은 모든 생명체 가운데 자기 자신에 대해 물음을 던질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서, 바로 이 물음에 해소될 수 없는 신비가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인간만이 유일하게 하느님과 유사한 존재, 곧 인간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응답할 수 있으며 하느님과의 친교를 향해 부름을 받는 존재라는 점이 중요하다.
IV. 인공지능 시대의 신인류(posthuman)는 재앙인가? 기회인가?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은 그리스-로마적 견해에 따라 ‘영육이원론’과 유다-그리스도교의 ‘영육합일설’에 근거한 하느님의 모상성’의 관점에서 성찰되고 발전되어 왔다. 인간은 본성적인 결핍을 가지고 태어나서 숙명처럼 피할 수 없는 병과 노화,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모든 종교는 인간의 이 결핍의 숙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다양한 존재론적 해석과 실존적 당위성을 해명해주는 사회적 기능을 해왔다. 그리스도교 역시 죄와 죽음의 문제를 피조물로서의 인간이 자신의 존재 원천인 하느님을 향한 완전함에로의 갈망이라는 구원론의 관점에서 받아들여왔다.
오늘날 발전된 과학기술은 인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신경과학만능주의’는 인간을 매우 복잡한 인공물로 간주하면서 인간의 근본 선택이자 고유한 능력으로서의 자유의지는 물론 인간의 모든 행동, 사고, 실수, 움직임까지도 생화학적인 상호 작용으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신경과학적 일원론을 펼치고 있다. 이는 인간이 측정 가능하고 질량으로 평가할 수 있는 존재에 불과하며 그 귀결은 인간이라는 신비체가 지닌 비밀을 해체하려 하고, 심리적 행위를 대뇌에서 이루어진 정보처리로 여길 뿐, 영혼은 배제되며 모든 심리적인 삶은 물질로부터 생겨나는 것으로 이해하는 유물론적 입장이다.
이러한 과학적 유물론은 전통적인 창조론과는 대비된 ‘창발론(創發, Emergentism)’에 근거한다.이는 “생명은 비생명에서 창발되며 동물적인 생명은 식물적인 생명에서 창발되고 이성적 생명은 동물적 생명에서 창발”된다는 것이다. “사고, 감정, 윤리의 경험, 미적 경험, 종교적 경험은 모두 유기적 생명 안에 그 궁극의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그 결과 인간에게 영적 차원과 심령적 차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판단되어 인간 세계의 영적인 모든 것은 물질의 복합성에서 오는 우발적 현상으로 간주된다고 하여 이를 유물론적 일원론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최근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이 로봇응용과학과 결합하면서 인간을 새롭게 바라보는 견해들이 등장하고 있다. 곧 인간의 본성적 결핍을 개선하거나 궁극적으로 극복하여 호모 사피엔스와는 다른 형태의 신인류의 출현을 기대하는 움직임이다. 인간의 속성과 특성 중 몇 가지를 향상시키기 위해 생명공학적으로 인간의 신체 및 의식을 변경하려는 ‘트랜스휴머니즘’과 인간 종이 겪고 있는 병과 노화, 심지어 죽음의 존재론적 한계를 넘어 “생명공학적으로 완전히 변경되고 수정된 존재”,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새로운 개체”로서 포스트 휴머니즘’의 등장이다.
이 두 가지 신인류의 표상들은 본래 인간의 유전적 결함이나 병을 치료하려는 의료적 목적에서 시작된 신경 유전학의 발전에서 시작되었다. 신경 유전학의 연구는 본래 신체에서 병든 세포를 빼내 치료해서 다시 몸 안에 심어 뿌리를 내리고 발전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이 기술이 나노과학, 생명과학, 정보통신기술과 새로운 현대 유전학의 분야로 통합되면서 인간 본성 자체를 개선 혹은 증강하려는 실험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은 이러한 신인류의 탄생이 머지않았음을 알려준다. 현생 인류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포스트휴먼을 목표로 개발되고 있는 트랜스휴머니즘은 신체 향상 기술의 가치를 수용하고 이를 인간의 몸에 적용하는 기술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 가능성은 이미 현대 과학과 의학분야에서 성과를 나타내고 있다.이러한 신기술의 등장은 인간의 과거 도구를 존재적 결핍을 보조하는 역할을 넘어 신체와 결합하여 도구와 신체가 하나로 작동하는 ‘제2의 신체’를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본다. 기술적 요소를 인간 조직에 합성하려는 의도는 한 인격체의 지식이나 기억을 향상시키기 위해 칩을 삽입하는 형태로(사이보그) 혹은 인간의 뇌 정보를 디지털 조직에 내려받는 형태로, 뇌에 디지털 정보를 이식하는 형태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유발하라리는 그의 저서 『호모데우스』에서 호모 사피엔스가 ‘호모 데우스’가 될 것이라는 예견과 분석에서 인간이 지닌 탐욕이라는 본성이 현대 기술혁명과 자본주의 신화를 만나 “자연선택을 지적설계로 대체하고, 생명을 유기체에서 비유기적 영역으로 확장”해 나가려 할뿐만 아니라, 신 없는 극단적 인본주의에 내재된 결함을 넘어 인류 스스로 자신의 종(種)을 업그레이드할 것임을 예견한 바 있다.
이러한 신인류의 탄생이 그리스도교 인간학에 던지는 질문은 명확하다. 지금까지는 인간과 인간이 아닌 자연종 사이의 경계를 인간학의 주제로 다루었다면 앞으로 나노기술과 인공지능로봇, 사이보그의 출현이 인간과 동물, 인간과 자연종의 경계가 아니라 인간과 인공종(기계) 사이의 종차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사이버네틱(cybernetics)의 출현은 인간과 기계 사이의 근본적인 분리를 거부하고 그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이 동물과 다른 존재적 가치는 도덕적 자각력을 지녔다는 점이다. 그런데 인간이 기계와 결합되어 인간의 주체적 행위를 ‘의식 없는 지능’이라고 불리는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거나 신체를 증강 혹은 개량할 경우 이러한 ‘탈인간성’의 인간종을 과연 자연종 인간과 동일한 인격체로 볼 수 있겠느냐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이 점은 교황청 문화평의회의 총회(2017년)의 개막연설에서도 명확하게 제기된 바 있다.
“유전자 변형으로 탄생한 새로운 인격체가 호모사피엔스 범주에 포함될 수 있는가? 어떤 사회-문화적 접점에서 ‘일반’ 인간과 유전자 변형으로 강해진 인격체와의 차이를 갖게 하는가? 그리고 ‘새로운’ 개체를 위한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새로운 정체성의 토대를 마련해야 하는가?”(...) 이 새로 탄생되는 개체들이 인류의 삶에서 공존할 수 있는가? 그리고 더 나아가, 창조주의 대리자 혹은 관리자 혹은 ‘모상’처럼 인간의 성서적 표상과 부합할 수 있는가? 또는 이러한 흐름이 창세기 3장에서 심판받은 아담의 교만, 곧 하느님과 같은 존재가 되고 싶은 근본적-원초적 죄로 분류되는 것은 아닌가?“
인공지능의 발전이 인류에게 주는 새로운 문명의 흐름이 인류의 생존과 번영에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정반대로 인간의 뇌기능을 포함한 신체가 기술의 대상이 되고 전산정보화되어 생물학적 한계가 극복되면서 생겨날 새롭게 변화된 인간, 인간 이후의 인간, 초인간에 대한 철학적 문제는 과연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는 물론 인간의 실존적 의미 체험을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지에 대한 물음은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신인류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 자아의 고유성은 뉴런의 상호 작용을 통한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인 알고리즘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 되고, 윤리적 판단의 중심이 되는 인간의 ‘자유의지’마저도 물리적, 화학적 법칙의 지배를 받는 유전자, 호르몬, 뉴런 때문이라는 점이 강조된다.그 결과 인간의 자의식과 자아는 존재하지 않으며, 빅데이터로 무장된 외부 알고리즘에 의해 인간의 자유의지가 지배되고, 인간이 컴퓨터 과학과 생물학을 기반으로 생성된 단일 네트워크에 종속된 개체가 되어 인간의 경험이 신성화된 만물인터넷에 종속되어 데이터 패턴으로 전락하는 ‘데이터교’의 신도들이 될 것이는 예측도 있다.
그렇다면 인공지능 기술에 입각한 신인류의 출현은 그리스도교에서 ‘하느님의 모상’으로 지켜온 인간의 품위에 혼란을 주는 재앙일까, 아니면 우리가 잃었던 인간 본성을 재발견하는 기회가 될까?
철학자 모리스 블롱델은 “과학은 우리를 위해 충분한 것이 되지 못한다. 과학 자체가 스스로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오늘날 신인류의 미래를 예고하는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간 기술에 대한 무한한 신뢰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세상을 창조하고 세상의 중심에 서려는 욕망의 표현이며 존재의 근거를 현실 극복과 욕망의 성취에 두고 있다는 반증이다. 인간의 한계와 결핍, 곧 노화와 병듦, 죽음은 과학만능주의에서 볼 때 “해결할 수 있고 해결해야만 하는 기술적 문제”이다. 종교의 가장 중요한 기능인 ‘죽음을 넘어 영생에 대한 희망’은 더 이상 인간 존재 “의미가 폭발하는 신성한 형이상학적 경험”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의 존재와 인간의 소명은 창조된 세계와 사회와 역사의 경계를 초월한다. 인간은 진화 속에서 다른 종들과 다른 독특한 능력을 지닌 존재이다. 앞서 언급한 ‘세계 내 개방성’과 ‘하느님의 모상성’은 미래의 신인류가 도래하더라도 호모 사피엔스가 지닌 인간성의 품위와 고유한 가치를 드러내는 가장 강력한 표징들이다.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는 인간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우리의 삶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영구히 머무르기를 바라는 그런 것이 아니다. 삶은 자연히 지금의 실존 양식의 종결을 지향하는 것이다. 만일 시간이라는 것이 종결되지 않는다면 시간은 미쳐 버릴 것이다. 만일 영구히 존속한다면 그것은 의미 없는 지옥일 것이다. 만일 모든 것을 나중 기회로 연기할 수 있다면 어떠한 현시점도 소중하지 않게 될 것이다. 어떤 일도 진지하게 다루어지는 일이 없어질 것이다. 어떤 일도 전혀 중요성을 지니지 못한 허무에 빠질 것이다.”
신인류가 인공지능과 기계기술의 도움으로 결핍을 채워갈 수 있는 인간종으로 개량된다 하더라도 어떤 형태의 인간이든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역사의 우연성(contingency)과 실존적 불안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인간이 지닌 주체적인 의미기획은 불완전성 속에서 영원의 얼굴을 만날 수 있게 해주는 인간 고유의 능력이기 때문이다.라너는 영원이란 “시간 속에 시간 자체가 익어서 열매를 맺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인간은 본성상 자신이 시간을 지배하는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철저하게 시간이라는 지평에로 자신을 내맡기는 일 없이는 그 완성을 기대할 수 없는 존재임을 말해준다. 따라서 한 인간이 죽음을 넘어선 영원을 체험한다는 말은 죽음 이후에나 발생하는 시간적인 표현이 아니다. 영원은 시간 안에서 자신의 생을 긍정하고 죽음까지도 긍정하면서도 동시에 시간 이후에 나타날 어떠한 댓가도 기대하지 않는 자유로운 결단 속에서 체험될 수 있는 그 무엇이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에릭 프롬은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참된 존재의 삶은 ‘자유’이지만, 이 자유는 “...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로의” 자유로 발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소유가 아닌 존재 방식의 삶이야말로 그리스도교가 예수의 복음으로부터 배운 가치이며, 소유의 삶이 아닌 존재의 삶이야말로 “독립, 자유, 비판적 이성”을 갖게 하며, 능동적으로 ”자신을 새롭게 하는 것, 성장 시키는 것, 흘러 넘치게 하는 것, 사랑하는 것“이자, “주려는 의지, 공유하려는 의지, 희생하려는 의지”를 드러내는 삶의 방식임을 옳게 지적했다.
그리스도교는 기술 지배적 패러다임에 근거한 신인류의 등장을 현생 인류에 대한 도전으로 여길 필요는 없다. 어차피 인간의 자아는 인공지능의 알고리즘이나 기계기술의 도움으로 증강된 인간 현실을 넘어서는 존재론적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비록 결함이 있지만, 하느님의 신성을 닮은 이성의 능력과 인간 상호 간의 효율적 네트워킹을 넘어서는 소통과 공감의 존재론적 본성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성서적 표상으로 표현하더라도 그 말이 뜻하는 철학적 의미는 인간의 궁극적인 원천이자 목표가 하느님이심을 명시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의 자아의 고유성은 진정한 예술적, 과학적 독창성과 신중한 판단과 의지를 갖고 결단을 내리는 능력, 인격 상호 간의 만남을 통해, 다양한 문화 안에서의 영적 체험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만난다. 인간만이 자기를 포기하고 희생하며 용서할 줄 알며 자신보다 못한 인간을 배려하는 놀라운 본능도 갖고 있다.
인공지능의 개발 역사에서 ‘지능을 가진 기계’(1948년)를 구상한 앨런 튜링의 제안을 수용할 수 없었던 이유는 단순히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기계가 인간의 능력에 맞서는 것을 용납할 수 없거나 인간이 지능을 창조한다는 것은 종교적 신념에 위배된다는 과거의 논쟁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신이 지켜온 성역이 있으며, 이 성역이 침해당했을 때 불쾌감을 갖는다. 인류 역사에서 인간은 이미 지동설에 의해 우주의 중심에서 밀려났고, 진화론에 의해 신의 영토에서도 추방당했으며, 이제 AI에 의해 마지막 자존심 인간다움 마저 위협당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유발 하라리는 인류가 지성을 통하여 지식의 증폭이라는 문명 발전의 힘은 역설적으로 인간이 세계에 대해 아는 세상이 아니라, 더 알 수 없는 세상이 되는 위기를 가져올 수도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그러나 인간이 미지의 세계에 대해 알 수 없는 것은 인간능력의 한계가 아니라 인간 본성의 재발견이 될 수도 있다. 과학의 연구성과들을 존중하면서도 과학을 기술 공포증적, 반과학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그리스도교 인간학이 순전히 과학적 근거와 가정만으로, 가장 위험할 수도 있는 과학자에 의해 전적으로 정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 체험은 로봇 생산과 로봇 기능의 본질적인 요소인 계산적 알고리즘에 기초할 수 없으며 분석적이고 순수 객관적인 방법론으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이다.
V. 나가는 말: 인공지능 시대의 신앙과 신학의 미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에서는 “개인적 집단적 인간 활동, 곧 인간이 여러 세기를 거쳐 자신의 생활 조건을 개선하려는 저 거대한 노력 그 자체가 하느님의 계획에 부합하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은 믿는 이들에게는 분명한 일이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은 땅과 그 안에 담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세상을 정의와 성덕으로 다스리며, 하느님을 만물의 창조주로 알고 자기 자신과 모든 사물을 하느님께 다시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간은 만물을 다스려 하느님의 이름이 온 땅에 빛나게 하여야 한다.”라고 말한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인간이 자기 재능과 힘으로 만들어 낸 작품들을 하느님의 권능에 배치된다거나 이성적 피조물을 창조주의 경쟁자로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인류의 승리는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는 징표이며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계획의 결실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인간의 능력이 커질수록 개인이든 공동체이든 인간의 책임도 더욱 확대된다.”가톨릭교회가 과학기술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을 보인 점은 그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과학과 기술은 우리에게 놀라운 가능성을 제공해 주었고 우리 모두 감사히 그 혜택을 입고 있으므로 그것들을 하느님께서 주신 인간의 놀라운 창조적 능력의 산물”로 여긴다. 따라서 “당신께서 만드신 자연을 ‘훌륭하다’고 보신 하느님을 믿는 백성인 우리는 인간이 그 지성을 사용하여 이룩해 온 기술적 경제적 진보에 기뻐한다.”
기술은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들, 특히 기아나 질병과 같은 문제들을 더욱 향상되고 성장력 높은 품종의 식물들이나 유익한 약품의 생산을 통하여 해결하는 데에 대단히 귀중한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올바른 적용의 개념을 되풀이 하여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한 잠재력은 중립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인간의 발전에 이용될 수도 있고 인간의 타락에 이용될 수도 있다. 따라서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고, 여러 행태로 적용되냐 기술의 성격과 목적, 수단을 면밀히 조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연구 기술을 진정으로 인류를 위하여 사용하여야 하며 인간의 존엄을 존중하고 충만히 실현하는 도덕 원칙과 가치들에 그 기술을 종속시킬 수 있어야 한다.
가톨릭 사회교리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인간은 자연을 변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고유한 생명을 지닌 자연의 발전, 곧 하느님께서 의도하신 창조물의 발전을 촉진하고자 개입하는 것이다. 명백히 신중할 필요가 있는 이러한 분야에서 일하는 연구가는 하느님의 계획을 고수하여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창조물의 왕이 되기를 바라셨다.”
‘하느님의 모상’이자 ‘세계 개방성’이 인간의 정신성과 사회성, 초월성과 종교의 원리가 된다는 점은 앞서서 밝혔다. 오늘날 인공지능을 토대로 발전되고 있는 신인류를 향한 기술과학은 경험과학의 영역이고, 이는 인간의 모든 면을 물질로 환원하거나 신경세포들의 기능으로 되돌릴 수 없는 깊은 내면의 또 다른 인지과학의 영역들, 곧 체험적 신비주의, 영성 체험 등과 같은 인간 내면의 요소들에 의존되어 있다. 이 말은 “객관적 지식이 새로 생겨나서 맨 처음부터 그것이 과학적 지식으로 정착되도록 허용하는 주관적이고 상호주관적인 구조에 그 과학적 조작을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과학은 순수한 의미에서 자연에 대한 연구와 현실 세계에 대한 경험적 분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의 주관적 관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경험주의에는 체험 일반이 아닌 단지 감각적 체험만을 인정하는 극도로 편협한 의미”를 강조해왔고, 과학자들의 성찰에서 그들이 바라보는 풍부한 의식 흐름은 단순히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오직 내면을 향한 마음의 눈에 의해서만 보여지는, 오히려 온 우주 자체 내에 각인되어 있는 내면세계의 심오한 패턴“들로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서술한 인공지능 기술의 기반인 신경과학만능주의 혹은 신경중심주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생존 의지와 번식 의지로 환원하려는 형이상학적 비관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독일 철학자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비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는 저서 ”인간은 뇌가 아니다.“에서 인간은 무언가에 조종되는 꼭두각시가 아니며, 비단 뇌뿐 아니라 신, 우주, 자연, 사회가 우리의 등 뒤에서 우리를 자유롭지 않게 만든다는 통념에 맞서 인간이 철두철미하게 자유로운 존재임을 논증하고자 했다. 그는 오늘날 과학적 유물론이 주장하는 환원주의적 접근으로 사물의 세계가 온전히 설명될 수 없으며 인간의 목적 지향의 행위에서도 인간 정신은 신체 내에서의 기계적이고 물리적인 과정에 종속되지 않고 자신의 행위에 대해 반성하고 심지어 뒤집는 역전의 현상 등이 발견된다는 점을 역설한 바 있다.
그리스도교는 전통 형이상학의 입장에서 하느님의 창조행위와 계시 사건에 대한 정당성을 신학적으로 해명해왔다. 그리고 인간이 세계의 질서에 종속되어 있으면서도 정신이 지닌 초월성을 영혼이 지닌 불멸성이자 하느님을 향한 자신의 모상성의 회복을 향한 구원의 도정임을 밝히고자 하였다.
오늘날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류에 끼치는 막대한 영향력은 단순히 세계의 물리적 질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인간의 정신이 육신성을 떠날 수 없다는 점에서 인간 영혼의 구원은 세상의 물리적 질서의 온전한 회복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스도교가 궁극적 구원의 완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발생한 파스카 신비로부터 찾고 있다는 점은 인간의 삶이 현세 질서의 모순과 결핍, 욕망과 죄악의 십자가를 너머 부활의 영원한 희망 속에 있음을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이 신인류를 이끌 것이라는 과학자들의 예측과 연구 성과들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가설이다. 트랜스휴머니즘에서 말하는 인간 증강의 기술은 현재 진행형이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자의식과 정신을 인공지능이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예측 역시 과학적 가설일 뿐이다. 인류의 지식 총합을 기계가 뛰어 넘는 ‘특이점’이 올 것이라는 가설 역시 그 시기와 가능성이 예측될 뿐 그러한 시대가 도래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윤리적 문제들도 현재 논쟁 중이다.
중요한 점은 피조물로서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이 지닌 품위는 다른 어떤 형태의 새로운 종으로 대체될 수 없는 고귀한 품위를 지닌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성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향후 기술과학의 도전으로 예기되는 다양한 철학적, 윤리적, 사회적 문제들을 대면하기 위한 새로운 언어를 찾아야 한다. 그것이 인공지능 연구의 방향성을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 자유 등과 양립할 수 있고, 인공지능 연구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에 대응하고 인류 공동의 이익을 지키는 과학자들의 윤리적 지침을 제시해주는 종교의 고유한 역할로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강한 인공지능이 인류에 위기를 가져올 것이라는 공상과학 영화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이 가질 두려움은 인간의 정신이 지닌 위대함을 축소하려는 과학적 유물론에 불과하다. 엘런케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공지능이 개발되면 인간이 열등감을 느낄 것이라고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온전한 정신을 가진 인간이라면 꽃 한 송이를 쳐다봐도 이미 열등감을 느낄 것이다.
독일 신학자 발터 카스퍼는 1978년 그의 저서 ‘현재와 미래를 위한 신앙’에서 현대 사회에서 교회가 겪고 있는 세속주의와 다원주의의 위기는 결단 상황이라고 말한 바 있다. 곧 “위기는 괴멸로 이끌 수도 있고 호기(kairos)가 될 수도 있다”고 말이다. 창조론이 진화론의 거센 도전을 받고 있는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하느님의 창조행위를 우리가 보지 못하는 작고 보잘것 없는 세상에서 발견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DNA 염기서열을 밝히기 위한 국제적 프로젝트인 인간게놈프로젝트를 이끈 세계적인 유전학자이자 과학자인 프랜시스 콜린스(Francis S. Collins)는 이 연구 성과를 발표하면서 남긴 말로을 결론으로 대신하고 싶다. “오늘은 전 세계에 경사스러운 날입니다. 지금까지 오직 하느님만이 알고 있던 우리 몸의 설계도를 처음으로 우리가 직접 들여다보았다는 사실에 저는 겸허함과 경외감을 느낍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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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재단: 재단법인 KAOS(Knowledge Awakening On Stage, 무대 위에서 깨어난 지식)는 과학, 지식, 나눔을 모토로 설립된 공익재단으로서 기초과학을 위하여 개설된 유튜브 채널이다. 난해한 과학과 수학의 지식을 쉽고 재미있게 대중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재단 설립의 취지를 담아 과학자들의 전문 강좌와 이를 대중적으로 풀어낸 다양한 유튜브 영상을 통해 기초과학과 과학적 사고방식의 중요성을 전하고자 하는 채널로 알려져 있다.
국문요약
21세기는 빅데이터와 인공지능(A.I.)으로 결합으로 시작된 제4차 산업혁명의 시대이다. 이러한 산업 문명의 패러다임 전이는 컴퓨터 기술의 고도화와 고속 인터넷의 발명, 그리고 빅데이터로 불리는 방대한 정보교환의 혁명이 만들어낸 초연결사회를 이끌고 있다. 오늘날 인공지능과 로봇 공학의 결합을 통하여 인간 삶의 질이 획기적으로 변화되고 있으며 이들 기술이 실생활에서 인간의 삶을 보조하는 역할을 넘어 인간 본성의 고유한 영역을 대체하는 놀라운 기술혁명으로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 동시에 뇌과학의 발전은 인간의 지능을 모방한 인공지능 개발로 이어져 개량된 증강 인간(트랜스휴먼)이나 인간의 본성을 극복한 새로운 인간의 출현(포스트휴먼)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이런 점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여겨져온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인간관에 적지 않은 도전이 되고 있다.
과연 뇌과학과 신경과학의 발전에 따른 인공지능(A.I.(인공지능)의 기술개발이 인간의 고유한 지성과 능력을 넘어서게 된다면 인류는 새 인류를 어떻게 맞이해야 할 것인가? 여기에는 몇 가지 숙고해야 할 신학적 물음들이 있다.
첫째는 인공지능 기술이 과연 인간의 복잡한 지성 작용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느냐는 회의론이 있다. 둘째는, 발전된 뇌과학 연구의 성과들이 그리스도교가 전통적으로 지켜온 인간의 주체성, 곧 이성과 자의식과 자유의지를 지닌 정신적 존재인 인간의 행위를 뇌기능이나 뇌의 신경세포들의 작용으로 환원하려는 과학의 도전에 얼마나 설득력 있는 답변을 내놓을 수 있느냐는 점이다. 셋째는 하느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신앙 행위에 기초를 둔 그리스도교 인간학의 담론들이 4차 산업혁명으로 대두된 인공지능 기술과 뇌과학의 연구 성과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들과 대화할 것인가이다.
이런 점에서 4차 산업혁명의 중심인 인공지능기술이 미래에 가져올 현실들 가운데 그리스도교 인간 이해의 핵심적인 쟁점이 될 수 있는 분야, 곧 개량된 증강인간(트랜스휴머니즘)과 호모 사피엔스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포스트휴먼(posthuman)의 등장과 관련하여 신학이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인간 이해에 대한 근원적 신뢰를 어떻게 정당하게 해명할 수 있는지를 인간 존재의 본성이 지향하는 ‘세계 개방성’과 ‘하느님의 모상성’ 안에서 해명하고자 한다.
주제어
인공지능, 4차 산업혁명, 세계 개방성, 하느님의 모상, 그리스도교 인간학
Aritifical Intelligence, Fourth Industrial Revolutio, Cosmopolitanism, Imago Dei, Christian Anthropology
첫댓글 사목자이시자 신학자이신 한국 천주교회의 자랑스러운 위대한 사제이신 우리 송사도요한 신부님♡
논문도 신부님의 따뜻한 성품처럼 인간적인 기운(?)이 느껴지는 글들로 쓰셨군요!
앞으로도 세상을 들었다 놨다 하는 훌륭한 논문들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시리라 생각됩니다.
송용민 사도요한 신부님의 말과 글은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 퍼져나가 세상을 아름답게 해주고 계심에 깊은 감사드립니다!
지금도 충분히 훌륭하고 위대한 사제이시니 무엇보다도 영육간에 건강하세요! ^0^
4차 산업혁명이 사목활동에도 영향을 미치는 줄 몰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