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정씨 편
◇ 청주정씨 대종회장 정원용
오늘날 현존하는 정씨의 본관은 30여본 정도이다. 우리나라 정씨의 원조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하는 신라의 6촌중 하나인 진지촌(珍支村) 촌장인 지백호(智伯虎)이다.
정씨의 각 본관별 시조들은 모두 지백호의 원손(遠孫)들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이지만 그 혈연적 계보는 상고할 수 없다.
어쨌든 정씨는 일반적으로 같은 혈손으로 그중 경주정씨(慶州鄭氏)가 종통(宗統)이라는 데에는 별로 이론이 없는 것 같다.
다만 '서산정씨'와 '낭야정씨'가 중국계 귀화 성씨로써 동성이족(同姓異族)이다.
이같이 정씨는 신라 9성중의 하나로 역사적으로 명벌의 지위를 누려 왔으며, 특히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청주정씨(淸州鄭氏)를 비롯해 동래정씨(東萊鄭氏)·연일정씨(延日鄭氏)·온양정씨(溫陽鄭氏)·진주정씨(晋州鄭氏)·봉화정씨(奉化鄭氏)·하동정씨(河東鄭氏) 등이 상당한 세력을 떨쳤다.
◇ 청주정씨 재실(유형문화재 제315호)
청주정씨(淸州鄭氏) 본관(本貫)인 서원(西原)은 청주(淸州)의 신라때 옛 이름이고, 정씨(鄭氏)는 신라때부터 서원경(西原景)에 살고 있던 명망있던 씨족(氏族)이었다. 그러나 이를 고증할 정연한 근거는 고려중엽 이후로부터 처음 나타나 있음으로 이에 청주정씨(淸州鄭氏)는 고려 의종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정극경(鄭克卿)을 시조로 한다. 1)
5世 장경공(章敬公) '해'의 아들인 '책'이 고려 충숙왕 때 충주목사(忠州牧使)를 역임하고 통헌대부(通憲大夫)·판선공사(判繕工事)로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러 청하군(淸河君)에 봉해졌으며, '책'의 아들 '오' 역시 고려 공민왕때 1등공신에 오르고 첨의평리(僉議評理)로 서원군(西原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관향을 청주(淸州)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2)
고려조에 청주정문(淸州鄭門)의 대표적 인물로, 시조공의 손자인 3世 '의'가 서경(西京)의 최광수의 난을 평정하여 고종때 대장군(大將軍)을 지냈으며, 대장군의 손자 5世 '해'는 판삼사사(判三司事)를 거쳐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올라 지공거(知貢擧)가 되었으며 시호는 장경(章敬)이다. 3)
7세 설헌공(雪軒公) '오'는 공민왕때 공신(功臣)에 오르고 지밀직사사를 역임하였으며 첨의평리로 서원군(西原君)에 봉해졌으며 문극(文克)이라 시호받았다. 4)설헌공의 아우인 설곡공(雪谷公) '포'는 좌사간과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지내고 <설곡집(雪谷集)>등 저서도 남겼는데, 청주정씨는 이들 형제대에 이르러 가문이 더욱 번성하게
되었다. 5)
청주정씨는 조선조에서 상신(相臣) 2명, 청백리 4명, 공신 5명, 문과급제자 19명을 배출했다. 6)
설곡공(雪谷公)의 아들인 문간공(文簡公) 추(樞)는 우왕때 좌대언(左代言)을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고, 문간공(文簡公)의 아들인 익경공(翼景公) 정 탁(鄭 擢)은 호(號)가 춘곡(春谷)이며 조선개국일등공신(朝鮮開國一等功臣)으로 청성군(淸城君)에 봉해지고 세종때는 우의정을 지냈으며 태종 묘정(廟庭)에 배향되는 등 고려에서 명성을 날린 가문을 조선시대에 와서 더욱 빛냈다. 7)
◇ 정충사(약포유물관)
익경공(翼景公)의 맏형인 복재(復齋) 정 총(鄭 摠)도 고려때 문과에 장원하여 이조판서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조선개국일등공신으로 서원군(西原君)에 봉해졌으며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했으며 문민공(文愍公)이라 시호받았다. 8)약포(藥圃) 정 탁(鄭 琢)은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정이충(鄭以忠)의 아들이다.
약포(藥圃)는 퇴계 문인으로 명종때 문과에 올라 선조때 교리(校理)로 춘추관(春秋館) 기주관(記注官)을 겸직하면서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고 대사헌(大司憲)을 비롯한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우찬성(右贊成)으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외교적인 공적을 쌓았다. 박학다식하여 경서를 비롯하여 천문·지리·상수(象數)·병법(兵法)에 이르기까지 정통했으며 1604년(선조 37) 호종공신삼등(扈從功臣三等)으로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고 좌의정을 역임하였으며 봉조하(奉朝賀)에 이르렀다. 9)
약포(藥圃)는 임진왜관때 곽재우(郭再祐)·이순신(李舜臣)·김덕령(金德齡)등 명장을 발탁하여 국난을 구하게 했고, 특히 이순신이 누명을 쓰고 옥살이할 때 이를 구출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저서에는 <약포집(藥圃集)><용만견문록(龍灣見聞錄)>등이 있다.
예천의 도정서원에 제향되었고 '청주정씨 재실(유형문화재315호)'에서도 향사하고 있으며, '약포 사당(경북문화재자료142호)', '정충사(약포유물관)', '약포 영정(보물 487호)', '약포 유고 및 문서(보물 제494호)'가 있다.
백곡(栢谷) 정곤수는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선조 9년에 문과에 장원하고 참판과 대사간을 거쳐 임진왜란때는 왕을 의주에 호종하여 이항복(李恒福)과 함께 호종(扈從)의 원훈으로 녹훈되었고 판돈령부사·예조판서·좌찬성 등 거치지 않은 관직이 없었으며 영중추부사로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는 등 국난외교의 제1인자였다.
청백리에도 녹선되었으며 사후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고 성주의 유계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저서에 백곡집(栢谷集)이 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었다가 후에 충익(忠翼)으로 고쳐졌다. 10)
한강(寒岡) 정 구(鄭 逑)는 정곤수(鄭琨壽)의 아우인데 당대의 대표적인 석학이자 거유로 청주정문(淸州鄭門)을 더욱 빛낸 인물이다. 한강(寒岡)은 일찍이 조 식(曺 植)·이 황(李 湟)에게 성리학을 배웠고 창녕현감·사헌부지평·군수·우승지·부사·목사·관찰사·공조참판 등을 두루 역임하고 1608년(광해군 즉위)에 대사헌이 되었으나 광해군의 폭정과 임해군(臨海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 고향에서 많은 후진을 길렀다.
◇ 회연서원(유형문화재 제51호)
인조반정후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성주의 회연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한강집(寒岡集)>이 있으며 그 외 수많은 편서가 있다.
이외 선조때 이름난 학자였던 지헌(芝軒) 정사성(鄭士誠)은 일찍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대과 보기를 단념하고 학문에만 힘쓴 유학자이다. 1590년(선조23) 천거에 의해 태릉참봉(泰陵參奉)을 거쳐 현감(縣監)을 지냈지만 벼슬에서 물러나 후진양성에 진력하여 문하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11)
한편 송오(松塢) 정 전(鄭 佺)역시 1601년(선조34)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그후 광해군의 폭정으로 대과를 포기했으며 인조때 의금부도사에 천거되었으나 사퇴하고 학문에만 일생을 보냈으며 <송오문집(松塢文集)>을 남겼다.
그 외 판결사(判決事)를 지내고 예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매창집(梅窓集)>을 남긴 정사신(鄭士信),12)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 겸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지낸 사곡(沙谷) 정 장(鄭 樟), 13) 성리학을 비롯하여 예악·음양·율력 등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여 당시의 학자들을 감탄케 했으며 '초서'에 관한한 당대의 제1인자였으며 찰방으로 있었으나 광해군의 실정에 불만을 품고 사퇴하였고 통훈대부 좌의정(通訓大夫 左議政)에 증직되고 예천의 도정서원에 제향되어 있는 청풍자(淸風子) 정윤목(鄭允穆), 14) 좌승지·관찰사(觀察使)를 지내면서 청렴결백으로 백성의 존경을 받았던 우천(牛川) 정 옥(鄭 玉),15) 병조참판(兵曹參判)·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을 역임하고 <사헌집(思軒集)>을 남긴 정내성(鄭來成), 16) 홍경래의 난때 순국하였으며 이조판서·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추증되고 평안도 가산의 충렬사에 제향된 한강(寒岡)의 7대손 창파(蒼坡) 정 로(鄭 魯), 한강(寒岡)의 8대손으로 수륜면(갓말)에서 출생하여 평안도 가산군수로 재직시 홍경래의 난으로 순국하였으며 병조판서·지의금부사·오위도총관에 추증되어 정주의 표절사에 제향됨과 동시에 충열(忠烈)의 시호를 받은 백우(伯友) 정 시(鄭 蓍) 등이 청주정씨 가문의 자랑이다. 17)
현재 청주정씨는 전국 약 1만2천여가구 4만정도의 종인이 세거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대표적인 집성촌으로 경기도 장단군 진동, 충남 천안시 성환, 경북 예천군 호명·풍양·보문·고평, 전남 광양군 다압, 경북 안동시 풍산, 경북 경산시 고산, 경북 영주시 부석, 경북 문경시 호계, 경북 성주군 대가면(유촌)·수륜면(갓말) 등이다.
청주정씨의 계파는 수없이 많으며, 7世 설헌공(雪軒公)과 설곡공(雪谷公)형제때 이르러 비로소 2파로 나눠지고 그 이후 후손이 번성함에 따라 여러파로 분파된다.
"계해보(癸亥譜)"에 의하면,청주정씨는 상계(上系)가 살았던 곳을 짐작하기 어렵고,설헌공(雪軒公)의 아들인 8世 '침'이 정윤(正尹) 벼슬을 지내고 조선초에 안동에 터를 잡은 뒤에 자손들이 누대에 걸쳐 세거해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18)
설헌공(雪軒公)의 후손은 14世 언보(彦輔)의 후손이 북지파(北枝派)·영순파(永順派)·고성파(固城派)·연곡파(淵谷派)·고곡파(古谷派)·마암파(馬岩派)·도진파(道津派)·송정파(松亭派)·물한파(勿閒派)·죽전파(竹田派)·광평파(廣平派)·가야파(佳野派)로 나눠진다.
언보(彦輔)의 아우 언필(彦弼)의 후손은 안막파(安幕派)·두호파(斗湖派)로 분류되고, 언필(彦弼)의 아우 언좌(彦佐)의 후손은 죽실파(竹實派)로 단파(單派)이다.
◇ 사창서당(경북문화재자료 제200호)
설헌공(雪軒公)의 손자인 9世 의용(義龍)은 장군(將軍) 벼슬을 지냈는데 그 후손들을 장군공파(將軍公派)라고 하며, 장군공(將軍公)의 증손인 12世 인노(仁老)의 후손들은 안동에서 살다가 18世 기형(基衡)·기원(基元)의 대를 전후하여 일부가 문경·봉화·고성·창녕 등지로 옮겨갔고 이후 강원도 영월땅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인노(仁老)의 아우 훈노(勳老)의 후손들은 안동시 풍산에 많이 살고 있는데 녹사공파(錄事公派)라 불리운다.
훈노(勳老)의 아우 원노(元老)의 후손들은 그의 손자 이충(以忠)의 대(代) 이후에 예천·상주·영주 등지에 세거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 후손들은 모산파(茅山派)·다야파(多也派)·단호파(丹湖派)·노하파(鷺下派)·삼강파(三江派)·삼구파(三九派)·소천파(韶川派)·고평파(高坪派)·지산파(芝山派)·사상파(泗上派)·흥구파(興邱派)·재방파(再芳派)·간산파(艮山派)·참의공파(參議公派)로 나눠진다.
장군공(將軍公) 의용(義龍)의 아우인 9世 상(尙)의 후손은 원천파(元川派)로 일컫는다.
설곡공(雪谷公)의 후손은 설곡공(雪谷公)의 장손인 문민공(文愍公) 총(摠)의 아들로서 감사(監司)를 지낸 10世 효문(孝文)의 후손이 옹진파(甕津派)로서 해주를 거쳐서 황해도 일대에 살고 있으며, 효문(孝文)의 아우로 상호군을 지낸 효충(孝忠)의 후손들은 경기도 장단에 세거했으며 그중 일부가 16世 격(檄)의 대(代) 이후 충청도 천안 일대로 옮겨갔으며, 19) 효충(孝忠)의 현손인 사중(思中)·사온(思溫)의 대(代)부터 성주·경산·영주·영일·창녕·죽산 등지에도 후손들이 옮겨 살았으며 장단파(長湍派)·제주파(濟州派)·성주파(星州派)·지촌파(枝村派)·유촌파(柳村派)·함안파(咸安派)·경산파(慶山派)·죽산파(竹山派)·오산파(梧山派)로 나눠진다.
설곡공(雪谷公)의 증손으로 문민공(文愍公) 총(摠)의 아우인 익경공(翼景公) 탁(擢)의 후손이 춘곡파(春谷派)이며 경기도 파주·광주에 많이 살았고, 탁(擢)의 아우 섭(攝)의 후손들은 숙천파(肅川派)이다.
조선 개국공신으로 문민공(文愍公)의 시호를 받은 9世 복재(復齋) 정 총(鄭 摠)의 후손이 대대로 한양과 경기도에서 살았으나, 14世 판서공(判書公) 정사중(鄭思中)은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외손자(外孫子)인데 인덕(仁德)이 높았고 출사(出仕)를 꺼렸다. 학행으로 칭송되어 이조판서에 추서되었으며 외가(外家)인 현풍에서 거처하다가 성주의 이씨와 결혼하게 된 인연으로 성주군 대가면(유촌)에 정거(定居)하게 되었다.
정사중(鄭思中)은 삼형제를 두어 장남(長男)은 참찬공(參贊公) 괄(适)이고, 차남(次男)인 백곡공(栢谷公) 곤수(崑壽)는 종숙(從叔)인 대호군(大護軍) 승문(承門)에게 입양되어 후손은 경기도 장단과 충청도 천안에 살고 있다. 삼남(三男)은 문목공(文穆公) 한강(寒岡) 정 구(鄭 逑)이다. 20)
한강(寒岡) 정 구(鄭 逑)는 주세붕에 의해 백운동서원이 세워졌던 1543년(중종38) 성주군 대가면 칠봉1리(유촌)에서 출생했다. 한강(寒岡)의 조부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응상(應詳)은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문하에서 수학한후 한훤당의 사위가 되었으며, 이러한 연유로 부친인 판서공(判書公) 사중(思中)이 외가인 현풍에서 기거하다가 성주(星州)의 이씨가문과 혼인하여 성주에 정착한 입향조이다. 21)
따라서 동방5현(東方五賢)의 수현(首賢)인 한훤당(寒暄堂)은 한강(寒岡)의 외증조부(外曾祖父)가 되며 자연스럽게 한훤당(寒暄堂)의 학통과 유풍이 한강(寒岡)에게 이어졌다.
한강(寒岡)은 7歲에 이미 대학(大學)과 논어(論語)를 읽었으며 13歲때에는 남명(南冥) 조 식(曺 植)의 고제(高弟)임과 동시에 퇴계(退溪) 문하에도 출입한 당대 석학(碩學)이었던 덕계(德溪) 오 건(吳 健)을 스승으로 만났다. 22)
한강(寒岡)은 21歲때 퇴계(退溪) 이 황(李 滉)을 만나 인(仁)을 위주로 하는 학문을 전수받았고, 24歲때 남명(南冥) 조 식(曺 植)을 만나 의(義)를 위주로 하는 기상을 배웠다. 즉 한강(寒岡)의 학문자세와 인격수양 방법은 퇴계를 닮았으며 호방하고 원대한 기상은 남명을 닮았다고 한다.
한강(寒岡)은 영남좌도(嶺南左道)의 퇴계학과 영남우도(嶺南右道)의 남명 정신을 단순히 이어받은 것에 그치지 않고 두 학파를 통합하여 별파(別派)를 형성한다. 한강은 성리학과 예학에 뛰어났을뿐 아니라 역사·지리·의학 등 방대한 저술을 통해 응용구시(應用救時)의 측면에 크게 유의함으로써 후일 허 목을 통해 근기학파의 학자들에게 발전적으로 계승되어, 이익·안정복·정약용 등의 경세치용(經世致用) 사상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23)
◇ 중매댁(경북 민속자료 제86호)
한강(寒岡)은 수륜면 수성리(갓말) 뒷산인 창평산(蒼坪山)에 선영을 쓰고 3년간 여막살이를 하게 된 인연으로 이곳에 안착하였는데 이곳은 오늘날 대표적인 청주정씨의 집성촌이다.
27歲가 되던 1569년에 부(父) 판서공(判書公)의 묘소를 배위(配位) 성주이씨(星州李氏)의 묘소가 있는 창평산(蒼坪山)으로 합장(合葬)하고 그 밑에 한강정사(寒岡精舍)를 지어 후학들을 가르쳤는데 그의 문하(門下)에는 당시 성리학적 학문세계의 최고봉을 유지하는 수많은 학자들이 운집하여 많은 국가동량의 인재를 배출하였다.
1573년(선조6)에 산야(山野)에 묻혀있는 조행지사(操行之士)를 천거하라는 선조의 명령에 의해 31歲때 조정에서 불렀지만 응하지 않다가 38歲때 비로소 창녕현감으로 벼슬을 시작하였고 부임 1년 6개월을 종사하여 선정으로 인해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졌다.
그 뒤 사헌부 지평으로 발령됨을 기화로 벼슬을 버리고 수륜면 신정리에 회연초당(檜淵草堂)을 지었고 앞뜰에 매화 100그루를 심어 그 유명한 백매원(百梅園)을 마련했다.
한강(寒岡)이 1591년 49歲때 백매원을 두고 읊은 시 <회원초당에 쓰다>를 소개한다.
"소소산전소소가(小小山前小小家), 만원매국축년가(滿園梅菊逐年加), 갱교운수장여화(更敎雲水粧如畵), 거세생애아최사(擧世生涯我最奢)" ; "낮고 낮은 산앞에 조그마한 초가집, 매화 국화는 해가 갈수록 뜰에 가득하네, 다시 구름과 물로써 그림같이 꾸며주니, 세상에서 나의 생애 가장 호사하여라".
이후 함안·통천군수를 거쳐 임진왜란중에는 강릉부사·성천부사·강원감사 등을 역임하였고, 격문(檄文)을 내어 의병을 일으키도록 주도했다. 임진왜란후 충주목사·안동대도호부사·승지·형조참판 등을 거쳐 광해군 초에 대사헌을 제수받았으나 굳이 사퇴했다. 24)
광해군이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죽이고 모후(母后)인 인목대비를 폐하는 등의 소동으로 여러차례 상소를 올린후 도성을 떠나 후학교육에만 전념했다.
한강(寒岡)이 61歲때인 1603년(선조36) 겨울, 고향 성주에 숙야재(夙夜齋)를 짓고 노래한 <숙야재에서 가야산을 바라보며>를 소개한다.
이때 흰구름이 산허리에 띠를 둘러 산 모습이 보이지 않고 한 꼭대기만 살짝 드러났다 한다.
"미출전신면(未出全身面), 미정일각기(微呈一角奇), 방지조화의(方知造化意), 불욕노천기(不欲露天機)" ; "전경은 보이지 않고,기이한 봉우리만 희미하게 드러나네, 알겠노라 조화의 뜻, 하늘의 뜻을 드러내지 않으려나보다!".
한강(寒岡)은 수많은 저서·편서와 시편을 남겼으며 초인적 노력으로 73歲에 <예기상례(禮記喪禮)>를 편차(編次)하였고 75歲에 <김학봉행장(金鶴峯行狀)>을 찬(撰)하였고 76歲에 <김동강행장(金東岡行狀)>을 지었으나 마무리하지 못하였고 향수 78歲로 卒하였으며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목(文穆)의 시호를 받았다.
사림(士林)들이 한강(寒岡)을 문묘(文廟) 종사(從祀)를 청하는 글에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회재 이언적·퇴계 이황에 이은 영남의 오현(五賢)으로 꼽았다.
1627년(인조5) 각처의 사림(士林)들이 한강(寒岡)의 학덕을 추모하여 옛 회연초당 자리에 한강(寒岡)을 주향(主享)으로 회연서원(檜淵書院)이 세워졌다. 25) 또한 창원의 회원서원·성천의 용천서원·창녕의 관산서원·목천의 죽림서원·충주의 운곡서원·옥천의 삼양서원·현풍의 도동서원·칠곡의 사양서원 등에도 제향되었다.
한강(寒岡)은 의학·역사·천문·풍수·지리 등 모든 학문을 통하여 28종의 책을 저술함으로써 조선 500년사에 최다의 저서를 남겼으며, 342명의 문인을 배출하였다.
청주정씨 대종회 회장은 현재 대구경북 담수회 회장을 맡고 있는 정원용씨이다. 성주군에는 약 70가구 200여명의 종인이 세거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한강(寒岡)의 후손들이 성주군 수륜면(갓말)과 대가면(유촌)에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고 있으며, 성주읍 삼산리에도 후예들이 일부 거주하고 있다.
※ 엮은이 : 이 재 필
※ 교 정 : 청주정씨 대종회
1) 청주는 충청북도 중앙에 위치하는 도청소재지로서, 원래는 마한(馬韓)의 땅이었는데, 백제가 상당현(上黨縣)이라 하였고 일명 낭비성(娘譬城) 또는 낭자곡(娘子谷)으로 불리우다가, 685년(통일신라 신문왕)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었으며 경덕왕때 서원경(西原景)으로 승격하였다. 고려 태조조에 청주로 고치고 그 후 여러차례 변천을 거듭한 후 1895년 청주군이 되었으며 1949년 청주시가 되었다. / 중랑장은 고려때 2군6위의 정5품으로 영관급
2) 목사는 정3품으로 관리관급 이상 / 통헌대부는 고려때는 종2품이었으며 조선때는 주로 왕의 사위들에게 주는 정2품 둘째 등급으로 장·차관 품계 / 판선공사는 고려때 토목 및 건축을 주관하던 관청인 선공시의 우두머리로 정3품직이지만 현대의 차관급 정도이다. / 삼중대광은 정1품 총리급 / 청하는 청주의 옛이름이다. / 첨의평리는 고려때 중서문하성과 상서도성을 합쳐 만든 관청인 첨의부의 종2품 차관급으로 첨의참리 라고도 했다.
3) 서경은 현재의 평양이다. 대장군은 고려때 2군6위의 종3품직으로 장군의 위이고 상장군의 바로 아래였으며 현대의 소장~중장급 정도 / 판삼사사는 고려때 삼사의 종1품직으로 부총리급 이상 / 도첨의찬성사는 첨의부의 정2품직 장관으로 첨의시랑찬성사 라고도 불렀다. / 지공거란 고려시대 과거의 시험관(주임관)을 말한다. 광종때 과거제도를 신설하면서 문관1명으로 지공거를 삼았다가 후에 동지공거를 더 두어 보좌관으로 삼았다. 지공거란 학문이 높아야 했고 정치적으로도 영향력있는 사람이야만 했기에 그 당시 귀족·관료 사이에서도 가장 명예스럽게 생각했고 자손대대로 자랑으로 삼던 벼슬이었다.
4) 지밀직사사는 고려때 궁궐호위 및 군사관계의 기무를 맡은 관청인 밀직사(중추원)의 종2품 차관급
5) 좌사간은 중서문하성의 정6품직으로 현대의 서기관급 / 좌사의대부는 중서문하성의 정4품으로 부이사관급 이상
6) 청주정씨는 상신(정승)으로 세종조의 탁(擢)과 선조조의 탁(琢), 공신은 태조조의 총(摠)·태조 및 정종조의 탁(擢)·선조조의 곤수(崑壽)·선조조의 희번(熙藩)·선조조의 탁(琢), 문형(대제학)은 선조조의 곤수(崑壽)와 광해군조의 구(逑), 호당은 추(樞)·한기(漢璣)·곤수(崑壽)·구(逑)·탁(琢), 청백리는 한기(漢璣)·탁(琢)·곤수(崑壽)·구(逑) 등이다.
7) 좌대언은 고려때 밀직사(승정원)의 정3품직으로 조선때에는 좌승지라고 하였다. / 춘곡(春谷) 정 탁은 고려 공민왕때 신돈을 탄핵했다가 목은 이색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한 문간공 추(樞)의 아들이다. / 조선 전기에 가문의 성쇠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는 <신증 동국여지승람>의 "청주목 인물조"에는 청주정씨 인물이 6명 올라 있다.
8) 정도전은 호는 삼봉(三峯)이며 본관은 '봉화'이다. / 정당문학원은 고려때는 종2품이고 조선때는 정2품으로 장·차관급
9) 교리는 조선때 홍문관·승문원의 5품직 서기관급 / 춘추관 기주관은 정사에 대한 기록을 맡은 관청의 5품직 서기관급 / 대사헌은 현대의 검찰총장 또는 감사원장급 / 우찬성과 좌찬성은 의정부의 종1품으로 부총리급 이상이며 그밑에 정2품직인 좌참찬·우참찬이 있었다. / 봉조하란 당상관 이상의 벼슬아치가 연로해서 스스로 벼슬을 그만둔 뒤에 그를 우대하기 위해 임명하는 벼슬을 말하는데 죽을때까지 녹봉을 받으며 평상시에는 근무하지 않고 오직 나라의 행사때에만 참가한다.
10) 호성공신이란 임진왜란시 선조를 의주(義州)까지 호송하는데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주는 녹훈이다. 1604년(선조 37)에 1등으로 이항복과 정곤수, 2등에는 유성룡 등 31명, 3등에는 정 탁 등 53명에게 주어졌다. / 참판은 현대의 장·차관급 / 대사간은 왕의 처사에 대한 충고와 사회도덕적 문제에 대해 논의·건의하던 관청인 사간원의 우두머리로 정3품직이지만 장·차관급 / 판돈령부사는 조선때 돈령부의 종1품직으로 주로 왕의 장인들에게 주는 벼슬이었다. / 영중추부사는 중추부의 우두머리로 정1품직의 총리급이지만 주로 일정한 직무가 없는 당상관을 우대하기 위해 설치했다.
11) 태릉참봉은 조선조 능이나 원에 종사하던 하위 공무원 / 현감은 지방고을의 수령인 종6품직으로 현대의 성주읍장급
12) 판결사는 노비문서와 노비문제 소송 등을 맡은 장례원의 정3품직으로 현대의 법원지원장 또는 지법원장급
13) 전라도도사는 전라도관찰사를 보좌하는 5품직으로 현대의 부군수~군수급 정도
14) 찰방은 지금의 왜관역장급 / 통훈대부는 문관에게 수여하던 정3품 당하관 품계로 현대의 이사관~관리관급
15) 좌승지는 도승지를 포함한 6명의 승지들중의 하나로 정3품직이지만 현대의 청와대 수석비서관급 / 관찰사는 현대의 도지사급
16) 병조참판은 현대의 국방부 장·차관급 / 한성부 좌윤은 종2품직으로 관찰사급이다. 한성부(서울)을 관리하던 총책임자인 판윤 다음의 부책임자로 부윤을 두었으며 그뒤에 부윤을 좌윤과 우윤으로 나누었다.
17) 동지의금부사는 왕의 명령으로 죄인을 심문하던 의금부의 종2품직으로 현대의 검사장급에 비유된다. / 오위도총부의 최고책임자인 도총관은 정2품직으로 현대의 대장급이며 부총관은 중장급 정도 / 지의금부사는 조선조 의금부의 정2품 우두머리로 현대의 대법관 또는 경찰청장에 비유된다.
18) 정윤은 고려때 종친과 훈신에게 내리던 정3품 봉작이다.
19) 감사(監司)는 관찰사 라고도 한다. / 상호군은 조선조 오위의 정3품직 무관으로 위에서 둘째가는 벼슬이었으며 처음에는 총9인이었으나 후에 8인이 되었다. 현대의 군단장급에 비유된다.
20) 한강(寒岡)은 11년 연하인 여헌 장현광과도 교류하였으며, 여헌은 한강(寒岡)의 백씨인 괄(适)의 딸과 혼인하였다. / 대호군은 상호군 바로 아래인 종3품직으로 현대의 사단장급에 비유된다.
21) 사헌부 감찰은 현대의 검찰청이나 감사원의 사무관급 이상이다. / 한강(寒岡)은 광주이씨(光州李氏) 봉사공(奉事公) 수(樹)의 딸과 혼인하여 1남3녀를 두었다. 아들인 장(樟)은 전라도도사를 지냈고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22) 덕계 오건(1521~1574)은 남명의 고제(高弟)이자 퇴계의 문인이었던 유명한 도학정치가로 본관은 '함양'이다. 정언?좌랑 등을 거친후 사직하고 고향인 산청으로 내려가 독서와 집필에 몰두했다. <덕계문집><정묘일기>등의 저서를 남겼다. 수제자였던 한강 정구 등이 그의 학덕 추모를 위해 창건한 산청의 서계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23) 조선초 김종직(金宗直)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영남학파는 당대 사림(士林)을 대표한 학파로서 정계·학계·문단 등 여러 분야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그들이 추구한 도학정신은 이후의 학자에게 이어져, 한 갈래는 정암 조광조를 통해 기호지방으로, 다른 한갈래는 회재 이언적을 거쳐 이황·조식에게 전승되었다. 조선중기에 이황과 조식은 각각 영남좌도와 우도에서 영남학파의 영수로 추앙되며 많은 문도를 거느리면서 저명한 학자를 배출하였다. 이후 조식학파는 점차 그 학맥이 쇠잔해지고 퇴계학파는 학맥이 성해지면서 좌우도의 구별이 사라지고 마침내 퇴계학파가 영남학파의 대명사가 되었다. 영남학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정 구(鄭 逑), 조 목(趙穆), 김성일(金誠一), 장현광(張顯光), 곽종석(郭鍾錫) 등이 있다.
24) 부사는 대도호부사와 도호부사를 총칭하는 것이며, 도호부사는 종3품직 이사관급이며, 대도호부사는 영변·안변·강릉·안동의 4곳에 두었다가 후에 영변·안변·강릉·안동·창원의 5곳에 두었던 비교적 큰 고을의 정3품 우두머리로 현대의 관리관~차관보급이다.
25) 강문삼노(岡門三老)가 있다. 한강(寒岡)의 제자로서 '회연서원을 건립'하고 한강(寒岡)의 '신도비'를 세웠으며 <한강문집>을 간행하는데 앞장선, 동호(東湖) 이 서 (光州人)·백천
(白川) 이천봉 (京山人)·등암(藤庵) 배상룡 (星山人)을 일컫는다.
첫댓글 좋은 내용 잘 보았습니다..저는 한강선조의 첫 스승이시신 덕계선생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아울러동호(東湖) 이 서 (光州人)·백천 (白川) 이천봉 (京山人)·등암(藤庵) 배상룡 (星山人) 선생분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표합니다.
덕계선생은 한강선조의 인척이기도 하지요. 제가 알기로는 이모부라 알고 있는데 맞는지요? 종종 시간나면 제가 가지고 있는 자료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해심 정진호님 안녕하세요^^ 성주자치신문-별고을 문중을 찾아서에 실린 "청주정씨의 유래와 인물편" 자료 고맙게 잘보았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성주에서 이사를 나와 가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잡고 직장에서 인동 장씨문중(화수회)의 일을 보시는 상사를 만나 문중에 대한 질의를 받고 아는 것이 없음에 심하게 훈계를 듣게 되었습니다. 아하~ 양반의 후손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구나란 깨우침에 도서관으로 퇴계연구소로, 남명연구소로, 이리저리 닥치는대로 자료 수집을 하고 읽고(재미도 없고 한자도 모르면서.. 그래서 더 재미도 없었음) 또 읽고 하기를 7년 30대 후반에 어느 정도 조선의 유학사와 명신이나 명현의 문중을 나름으로 깨우치게 되었으며, 어디가서도 이야기는 통하게 되었지요. 참 재미없는 공부를,
돈 안되는 공부를 오랜 동안 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돌이켜 보니 그런 정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한강 후손으로서 자랑스럽기도 하고, 또 큰 인물을 만들어야겠다는 꿈도 가지게 되고...차세대 젊은 후손들이 청주 정문을 빛내주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청주정씨를 제대로 알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글을 올렸습니다. 가슴에 새겨 정문의 자손으로 자부심을 가지기 바라며 큰 그릇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