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동해남부선 그리운 정거장들
9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의 일부구간과 이 철길을 따라 늘어선 경주역(慶州驛)과 불국사역, 외동읍지역의 죽동역, 입실역, 모화역 등 경주시내의 10개역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지금의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이 경주시 외곽으로 이설(移設)되고 복선으로 전철화되기 때문이다.
현재의 노선을 이설하는 것은 세계문화유산인 경주 역사지구(歷史地區)를 동해남부선이 관통하고 있어 이전이 바람직하다는 '유네스코'의 권고에 따라 경주 도심구간을 피하기 위해서다. 새로운 동해남부선 복선전철 노선은 경부고속철도(京釜高速鐵道) 신경주역사(新慶州驛舍)가 들어설 건천읍 화천리 마을구간을 터널로 통과하고 모량리, 고란들 구간은 교량을 건설하며, 광명동 구간을 터널로 지나도록 계획되어 있다.
그리고 이 계획에 따라 기존의 정거장 중 외동읍 구간의 모화(毛火), 죽동역(竹東驛), 경주시내구간의 불국사(佛國寺), 동방(東方), 경주역(慶州驛)은 폐지되고 입실(入室), 부조, 나원, 안강역은 이전 신설된다. 중앙선 철도의 모량, 율동, 금장역도 폐지할 예정이다. 외동읍(外東邑) 구간 동해남부선의 경우 복선전철(複線電鐵)로 형태를 달리하여 남아 있게는 되나, 지금의 역사(驛舍)마다 수북하게 담겨있는 출향민(出鄕民)들의 애틋하고 정겨운 추억들은 그 역사(驛舍)들과 함께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다.
동해남부선 복선전철화공사 구간 (진한 노선이 신설구간이고, 연한 노선은 폐지노선이다. 입실역은 '애기봉'쪽으로 이전된다)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은 지난 1930년 당시의 부산진역(釜山鎭驛)에서 동해남부해안을 따라 포항역(浦項驛)까지 이어지는 길이 145.8km의 철도의 이름이다. 이름 그대로 동해남부(東海南部) 지역, 즉 부산진역에서 출발하여 해운대(海運臺), 기장, 좌천, 울산(蔚山), 경주(慶州), 안강(安康)을 거쳐 포항까지 이어지는 철로다. 동해남부선은 일제(日帝)가 울산을 군사적 요충지(要衝地)로 개발하기 위해 1921년 10월 25일 협궤선(挾軌線)으로 개통한 조선철도주식회사(朝鮮鐵道株式會社) 소유 사설철도였던 울산~경주간 41km의 경동선(慶東線)을 매입하여 1930년 10월 1일 지금의 광궤선(廣軌線)으로 교체하여 확장함으로써 태어났다.
협궤열차(경기도 수원-여주 운행했는데, '수려선'이라 했다)
여기에서 잠시 동해남부선이 탄생된 배경을 소개한다. 현재의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 철도는 1910년대에 개통된 '경편철도'(輕便鐵道 : 협궤철도)로서의 '경동선'에서 연유한다. 당시의 '경동선'은 대구(大邱)에서 경주(慶州)를 거쳐 울산(蔚山)을 왕래하는 철도였었다. 그리고 이때의 '경동선'은 경편철도, 즉 협궤철도(挾軌鐵道)로 나중의 표준궤도 또는 광궤(廣軌)라 불리던 폭 1.435미터의 선로보다는 훨씬 좁았다. 따라서 이 선로를 달리던 열차 역시 소형 협궤열차다.
동해남부선 광궤선을 달리던 그 시절 증기기차
‘경동선(慶東線)’은 처음 1912년 7월에 부산진(釜山津)과 동래(東萊) 간의 사설철도를 운영 중이던 조선가스전기주식회사가 동래에서 울산, 경주, 대구, 포항을 잇는 철도부설 허가신청에서 시작되었으나, 당시의 경제 불황에 따른 자금부족으로 1915년에 그 허가는 실효되고 말았다. 그러던 중 1916년 2월 1일에 조선중앙철도주식회사가 경부선(京釜線) 대구역(大邱驛)을 기점으로 동해안 학산역까지 연장하는 65.1km를 비롯하여 서악에서 불국사, 울산, 동래까지 그리고 울산에서 장생포간을 연결하는 총 연장 131.8km에 걸친 궤도 폭 2자6치인 증기기관차용 철도부설을 신청하여 2월 15일에 허가를 받았다.
이 노선은 1917년 2월에 대구(大邱)에서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11월에 대구와 하양간, 다음해인 1918년 11월에는 하양-포항 간이 개통되었다. 이를 동해중부선(東海中部線)이라 했다. 이 노선의 개통 배경에 대해 ‘조선교통사(朝鮮交通史)’는 “이 철도는 경상북도 남부의 웅도 대구(大邱)의 경제력을 배경으로 하여 연선의 농업, 기타 산업의 개발에 영향을 미침과 동시에 동해안의 울산(蔚山), 포항(浦項)의 항만을 연결하여 해산물의 내륙수송 및 내륙물산의 일본, 조선 내 각 항(港)으로의 이출입에 활력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또 경주(慶州), 불국사(佛國寺)에 있는 신라 2천년의 고대유적을 세상에 알리는데 큰 편리를 제공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결국 이 노선(路線) 개설의 목적은 경주관광(慶州觀光)과 내외 물자수송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노선공사는 그리 쉽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즉, 국유철도(國有鐵道)가 아닌 사설철도(私設鐵道)이다 보니 언제나 자금부족으로 공사가 순조롭지 못했다.
불국사역으로 진입하는 그 시절 완행열차
당시 동아일보(東亞日報)의 다음 보도는 이런 추측을 뒷받침해 준다. 1920년 5월 17일자 동아일보는 ‘울산철도공사 기공확정’이라는 제목으로 “카시이(香椎) 부산상업회의소 회두(會頭)가 대구(大邱)를 방문해서 조선중앙철도회사의 타케(武), 사토(佐藤) 양 전무와 스즈키(鈴木) 지배인과 회견하고 서로 흉금을 털어놓고 격의 없이 협의한 결과 현지 측량까지 필하야 공사에 착수할 계획이 확립되었는데, 작금 경제가 어려워 자본에 여유가 없어서 공사가 진척되지 못하고 있지만 이 노선의 필요성을 잘 알기 때문에 그냥 간과하지 않고 부산(釜山) 및 조선가스에 대해 정식으로 교섭을 개시 할 것”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드디어 1921년 10월 25일에 조선중앙철도 울산-불국사 구간이 개통되었다. 동아일보(東亞日報)는 개통일자를 한 달 앞두고 ‘중철 울산선개통기’라는 제하에 “조선중앙철도의 불국사 울산간(18리 6분)신설 선로는 불원간 준공되겟슴으로 내 10월 25일부터 운수영업을 개시할 예정으로 목하 전혀 차의 준비 중이라더라”라고 보도하고 있다(1921. 9. 24).
이어서 개통일인 10월 25일자 동 신문에서는 ‘중앙철도 개업-불국사 울산간’이라는 제목으로 “예히 공사중이든 조선중앙철도선로 불국사 울산간 18리 6분, 조치원 청주간 14리 1분은 각기 준공되어 전자는 내 25일부터 후자는 11월1일부터 영업을 개시한다는대 경관국에서는 개통의 당일 각 신역에 대하야 연대수송을 행한다하며 대구로부터 울산에 지하는 각역의 이정운임은 좌와 여하다더라”라고 보도하고 있다.
이 보도에 따르면 불국사, 일실(一室), 모화, 노계(老溪), 울산이라는 역명이 보이고, 이 가운데 대구(大邱)에서 울산(蔚山)간의 철도운임은 거리 68.7리에 1등석이 4원83전, 2등석은 3원95전으로 되어 있다. ‘일실’과 ‘노계’는 ‘입실(入室)’과 ‘호계(虎溪)’의 오자(誤字)로 보인다.
1920년대 울산과 경주역을 운행하던 협궤 증기기관차
이 노선은 당초 부산(釜山)까지 연장할 계획(동아일보 1921년 10월 30일자)이었으나 실행되지 못하고 1935년 12월 16일에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이 개통될 때까지 미루어졌다. 필자의 향리 괘릉리(掛陵里)는 마을 가운데를 동해남부선이 관통(貫通)하고 있으나, 열차(列車)가 정거하는 정거장은 없다. 그래서 향리에 살 때는 매일같이 기차(汽車)와 기찻길은 접했지만 기차를 타 본 일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 구간 중에는 외동읍 괘릉리의 ‘웽고개(왼고개, 웬고개 또는 '원고개'라고도 한다)’가 가장 가파른 고개이기도 하다. 지금도 일본제 ‘미카’ 증기기관차가 20여량의 곱배(유게 또는 무게화차)를 달고, 죽동리(竹洞里)에서부터 불국사역(佛國寺驛)을 향해 숨을 헐떡이며 기어오르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떠오른다.
부산-포항간 동해남부선을 운행하던 그 시절 완행열차
당시에는 기관차(機關車)의 수가 적어 기관차마다 20여량의 화물열차(貨物列車)를 끌고 다녔는데, 군수물자(軍需物資)등을 과도하게 적재한 열차의 경우 '웽고개'에 이르면 거의 바퀴가 돌지 않다시피 하는 서행(徐行)이 이루어진다. 이 때문에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에 다니던 학생으로 괘릉리(掛陵里), 신계리(薪溪里), 방어리, 북토리, 제내리, 불국사 앞 진현동 등지에 살던 학우들과 경주중학교(慶州中學校) 등 읍내로 통학하던 당시의 영지국민학교 관내에 거주하던 통학생들은 수시로 '도둑차'를 타곤 했었다.
꽃길을 달리는 미카 증기열차
외동중학생들은 하교할 때 입실역(入室驛)에서 개구멍으로 몰래 열차(주로 유개화차로 '곱배'라고 했다)를 타고, '왼고개'에 이르러 열차가 서행하면 뛰어 내리고, 경주읍내 통학생들은 아침마다 등교할 때 잽싸게 뛰어 올라타곤 했었다. 외중생(外中生)의 경우 뛰어내리는 시기를 놓쳐 낭떠러지나 마찬가지인 언덕에 굴러 다치기도 하고, 무서워서 뛰어 내리지 못하고 불국사역(佛國寺驛)까지 그냥 실려 갔다가 역무원에게 잡혀 곤욕을 치르기도 했었다.
외동읍 괘릉리 '웽고개(왼고개, 웬고개)'에서 입실역 쪽으로 내려서는 무궁화열차
그런데 이제 그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이 자취를 감추려하고 있다. 수많은 외동읍 주민들과 출향인사들의 정겨운 추억도 함께 껴안고 영겁의 피안으로 사라지려는 것이다. 복선전철로 다시 태어나는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은 경주역(慶州驛)에서 모화역(毛火驛)까지 우리들 외동인(外東人)들의 애환과 꿈이 서린 정겨운 정거장들의 모습마저 흔적 없이 지워버리려 한다.
비지땀을 쏟으며 중앙선 '죽령'을 기어오르던 그 시절 증기기관차
포항(浦項)과 울산(蔚山)을 잇는 동해남부선 철도 복선전철화공사(複線電鐵化工事)는 지난 2009년 4월 23일 이미 착공되었다. 이 사업은 2014년까지 2조7000억원을 들여 현재 포항~울산간 단선(單線)을 폐쇄하고, 포항~경주~울산간 76.5㎞에 걸쳐 복선으로 연결하는 것으로 8개 공구로 나눠 단계별로 공사를 시행한다. 복선 노선은 KTX가 통과하는 신경주(新慶州)역사로 변경되어 기존 단선과 완전히 다르게 건설된다.
포항-울산 복선전철화공사 기공식(2009.4.23)
복선전철화공사가 완공되면 편도(便道) 기준 선로용량이 기존 하루 34회에서 132회로 늘어나고, 포항~울산간 열차운행시간(무궁화호 기준)도 기존 76분에서 59분으로 17분 단축된다. 또 수도권을 출발한 KTX의 승객은 신경주역에서 일반철도로 환승, 포항 등 동해안을 갈 수 있게 된다. 이 공사가 완공되면 부산, 울산 등 동남권과 포항 등 동해중부권(東海中部圈)과의 철도 연계체제가 크게 개선될 전망이다. 우리들에게서 떠나는 우리들의 또 다른 고향, '동해남부선 기찻길'의 왜소한 뒷모습을 마음의 손사래로 배웅하면서 김창근 시인의 ‘동해남부선’으로 석별의 정을 나누어 본다.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이 복선전철로 다시 태어나면 경주역(慶州驛)에서 모화역(毛火驛)까지 우리들 외동인(外東人)들의 애환과 꿈이 서린 정겨운 정거장들의 모습마저 흔적 없이 지워진다. 이하에서는 사라지는 동해남부선 역사(驛舍)들의 애틋한 내력들을 살펴보면서 역사의 한 모퉁이로 사라지는 그들을 못내 아쉬움으로 배웅한다.
경주역(慶州驛)
경주시 성동동 40번지에 소재하는 지금의 경주역(慶州驛)은 1918년 11월에 영업을 개시하였으며, 1일 평균 5,000여명이 이 역을 이용하고 있으며 그중 수학여행, 외국인관광객 및 일반관광객이 10%를 차지하는 경주시의 관문으로 관광, 교통, 숙박에 필요한 모든 안내 자료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1918년의 경주역
경주역(慶州驛)은 지난 1918년 11월 1일 보통역(普通驛)으로 영업을 개신한 이후 1936년 12월 1일 역사를 신축하였으며, 1947년 11월 2일에는 사무관역으로, 1973년 8월 1일에는 서기관역으로 승격하였다. 1974년 4월 1일부터는 서울-경주 간 새마을열차가 운행되었고, 1992년 12월 5일부터는 울산과 포항(浦項)까지 새마을호가 연장 운행되었다. 하루에 새마을열차 8회, 무궁화열차 22회 정차하고 통근열차가 운행되고 있다. 2003년 현재 하루 평균 2,162명이 승차하고, 2,215명이 하차하는 성시를 이루었다. 그러나 90여년 간 수백만 명의 여객을 태우고 내리던 이 역도 커다란 그림자만 남기고 역사의 뒤로 모습을 감추게 되어 있다. 앞으로는 경주시 건천읍에 신설되는 신경주역(新慶州驛)이 경주역의 역할을 승계하게 될 것이다.
아름다운 경주역의 마지막 모습
그러나 90여년 간 수백만 명의 여객을 태우고 내리던 이 역도 커다란 그림자만 남기고 역사의 뒤로 모습을 감추게 되어 있다. 앞으로는 경주시 건천읍에 신설되는 신경주역(新慶州驛)이 경주역의 역할을 승계하게 될 것이다. 경주시 건천읍 화천리 일대 9만 8,840평방m 부지위에 700여억원을 들여 건립하는 경주 신역사는 지상 2층 지하 1층으로 건립된다.
2010년 완공될 신경주역 역사 조감도
불국사역(佛國寺驛)
경주시 구정동 497번지에 소재하는 불국사역(佛國寺驛)은 동해남부선 부산진 기점 101.279km에 위치하는 역으로 1918년 11월 1일 대구와 불국사간에 협궤선이 개통되면서 영업을 개시하였다. 역에 인접한 불국사(佛國寺)의 명칭을 따서 불국사역이라 명명하였고, 지금의 역사(驛舍)는 1936년 12월 1일 울산과 경주(慶州)간의 광궤선이 개설되면서 준공되었다. 불국사역은 그래도 그 이름과 위치 덕분에 다른 간이역(簡易驛)에 비해 관광객의 발길이 꾸준한 편이다.
하루 평균 50~60명의 승객이 오가고 관광하기에 좋은 봄과 가을에는 100명 가까이도 드나든다. 2003년도의 경우 무궁화열차가 하루 여덟 번 정차하면서 평균 97명이 승차하고, 77명이 하차하였다. 간이역(簡易驛)에서는 대개 표를 팔지 않고 열차 내에서 승무원에게 사는 경우가 많지만 승객이 많은 불국사역에서는 상·하행 네 차례의 열차를 이용하는 손님에게 표를 팔고 있다.
목표 수입이 하루 19만원이라고 한다. 현재의 역사(驛舍)는 2003년 12월 5일 리모델링한 것이다. 기둥이나 지붕만 그대로 남겨놓고 내부 시설과 외관을 현대식으로 고쳤다. 역사(驛舍) 안으로 들어와 플랫폼으로 나가는 길에 죽 늘어선 가지런한 향나무가 승객을 반긴다. 하루에 상행 4회, 하행 4회 열차가 운행되고 있는 이 역도 이제는 그 자취를 영원히 감추게 될 것이다.
불국사역의 마지막 모습
해마다 추석 때가 되면 말만한 동네 처녀들을 꼬여 불국사역(佛國寺驛) 플랫폼에서 유랑극단(流浪劇團)의 공연을 구경하던 때가 아련하게 떠오른다. 당시 구정국민학교(九政國民學校)나 불국장(佛國場) 장터 등 장소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가끔씩 불국사역 플랫폼에서 유랑극단의 공연이 있었다. 유랑극단(流浪劇團)이 가는 곳마다 무대설비를 꾸미기 힘들어 기차 '무개화차(無蓋貨車;곱배)'위에 아예 고정으로 무대장치를 하여 끌고 다녔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당시에는 저녁때가 되면 아예 열차가 운행하지도 않았던 시절이라 플랫폼도 멋있는 공연장소가 되었고, 라디오나 TV는 물론 워낙 볼거리가 없어 어떤 장소가 되었든 극단공연이 있다면 십여리의 밤길을 걸어서라도 구경을 다니곤 했었다. 그때의 유랑극단과 '곱배'와 아름다웠던 동네처녀들과의 추억도, 그리고 그 플랫폼도 이제는 모두가 영겁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다.
동방역(東方驛)
동방역(東方驛)은 1918년 11월 1일 역원(驛員) 무배치 간이역(簡易驛)으로 개역(開驛)하여 1937년 5월 1일 역원배치간이역으로, 1951년 4월 11일 다시 보통역(普通驛)으로 승격하였다. 그러나 당시 동방역 소재지에 소재하던 경주군 내동면(內東面)사무소가 내동면의 경주시 편입으로 소멸되자 여객이 격감했고, 이로 인해 동방역(東方驛)은 1961년 8월 1일 역원배치 간이역으로, 1972년 7월 2일에는 다시 을종승차권 대매소로 격하되었다.
1977년 2월 28일부터는 다시 신호장으로 격하되었고, 1992년 6월 22일에는 경주역(慶州驛) 관리로 편입되어 지금은 철문을 굳게 잠근 폐사가 되었으며, 열차가 정거하지 않고 그냥 통과하고 있다.
폐쇄된 동방역의 마지막 모습
(철문은 굳게 잠겨져있고, 진입로에는 쓰레기가 흉하게 방치되어 있다)
입실역(入室驛)
경주시 외동읍 입실1리 962-2번지에 소재하는 입실역은 1920년 3월 10일 역사(驛舍)를 신축하고, 1921년 10월 25일 보통역(普通驛)으로 영업을 개시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경주시 외동지역은 남으로 경주의 관문이며 인구 100만의 울산(蔚山)공업도시의 인접 지역으로서 최적의 공장입지 조건으로 각광받고 있으며, 현재는 300여 업체가 입주하여 지역민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외동읍 지역은 울산(蔚山)공업도시의 전원 주거지역으로 선호되고 있어 향후 지역발전과 크게는 경주시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며 쾌적하고 살기 좋은 고장으로 변모되고 있는 활기찬 지역이다. 이러한 지역적 특성과 잠재적 발전요인은 입실역의 성장과 발전을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하루에 무궁화열차가 여덟 번 정차하는 이 역도 자신의 운명을 점치기라도 하는 듯 지난 2003년 현재 하루 평균 58명이 승차하고, 48명이 하차하는 초라한 기능에 급급하고 있다.
외동중학교 학생들과 1960년대 입실역
그렇지 않아도 이제는 앞서의 다른 역과 마찬가지로 역사의 뒤안길로 종적을 갖출 운명에 처해 있다. 측백나무 울타리를 뚫고 들어가 불국사역(佛國寺驛)까지 도둑차를 타던 외동중학교 시절의 아리디 아린 추억도 함께 싸들고 말이다. 물론 지금의 입실리(入室里) 서부지역에 새로이 신설되는 복선(複線) 전철역(電鐵驛)으로서의 입실역(入室驛)이 건립되면 지금의 입실역의 전통과 기능을 이어 받기는 하겠지만, 지난 90여년 간 수많은 외동인(外東人)들의 애환과 추억을 담아 온 또 하나의 고향은 영원히 자취를 감추게 되는 것이다.
추억어린 입실역의 마지막 모습
(영락없는 전원카페 모습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역이 없어진다니 너무나 아쉽다)
모화역(毛火驛)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 503번지에 소재하는 모화역(毛火驛)은 호계역관리 피제어역으로 하루 2명의 직원이 근무하며, 1993년 4월 15일부터 승차권발매중지 차내취급역으로 지정되어 현재는 일평균 80여명의 여객이 이용하고 있다. 모화역(毛火驛)은 1937년 5월 1일 역원배치 간이역으로 영업을 개시하여 1951년 4월 12일 보통역(普通驛)으로 승격하였다. 이후 1961년 8월 1일 다시 역원배치 간이역(簡易驛)으로 격하되었다가 1978년 9월 13일에는 다시 보통역(普通驛)으로 승격하였다. 이후 다시 이용승객이 줄어들자 1993년 4월 15일 역원배치 간이역, 2004년 12월 10일 역원무배치 간이역으로 격하되었다.
하루에 무궁화열차가 6회 정차하는 모화역(毛火驛)은 지난 2003년의 경우 하루평균 승차인원 2명, 하차인원 10명으로까지 축소되어 울산광역시의 호계역이 관리하는 간이역(簡易驛)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지금의 역사는 지난 1978년 9월 13일 준공된 건물이다.
모화역의 마지막 모습
죽동역(竹東驛)
외동읍 죽동리 동해남부선 외진 철길에 단출하게 벤치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고 비를 피할 수 있도록 지붕이 살짝 덮여 있는 죽동역(竹東驛)이 있다. 여느 버스 정류장의 모습과 다르지 않은 조그마한 간이역이다. 죽동역이라는 푯말만이 이곳이 기차역임을 알려줄 뿐 처음 오는 사람은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역이다. 죽동역(竹東驛)은 지난 1966년 6월 11일 ‘을종 승차권대매소’로 영업을 개시하고, 1967년 8월 27일 원두막 같은 지금의 역사(驛舍)를 신축하여 입실역이 관리하는 간이역 기능을 수행해 왔다.
하루에 무궁화열차가 여섯 번 정차하는 이 간이역(簡易驛)은 지난 2003년 현재 하루 평균 2명이 승차하고, 2명이 하차하는 초라한 시골역이다. 당초에는 불국사역(佛國寺驛)이 관리하다가 입실역이 관리를 승계하였으며, 지난 1990년 6월 1일부터는 역원(驛員) 무배치 간이역으로 운영되고 있다.
죽동역의 마지막 모습
(맞은편에 7번국도가 나란히 달리고 있다. 이제 호젓한 이 간이역도 철거될 것이다)
기차 레일 너머로 죽동리 마을이 보이고 간간이 할머니 할아버지의 발길이 머문다. 그래도 상·하행 하루 세 차례씩, 여섯 번이나 정차하는 간이역이다. 경제 논리로야 없어지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호젓한 이 간이역(竹東驛)이 사라지고 나면 동네 어르신의 발길도 그만큼 묶일 것이다. 열차가 지나가는 순간을 제외하면 누구 하나 말을 거는 사람조차 없는 고요한 간이역, 플랫폼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기차를 기다려 보는 것도 고즈넉한 즐거움이 될 텐데 말이다.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과 관련한 추억 한 가지를 추가한다. 동해남부선은 전체 구간 중 경주(慶州)~포항(浦項) 부분이 1918년 10월31일 먼저 개통됐고, 부산진에서 울산을 거쳐 경주에 이르는 나머지 구간은 1935년 12월12일 개통되었다.
동해남부선 중 부산진, 울산(蔚山), 경주(慶州) 구간이 완공된 1935년 3년 뒤인 1938년에 경주고등학교가 설립됐다. 그리고 당시 울산에는 1937년 개교한 울산농업학교(蔚山農業學校)가 있었지만, 설치 학과가 주로 농과계통이었기 때문에 인문계를 지망하는 상당수의 인재들은 경주고등학교(慶州高等學校)로 진학했다. 아직도 울산(蔚山)의 전·현직 정, 관, 학계인사 중 다수가 경주고등학교 출신인 것도 그런 영향 탓이다.
이들이 경주(慶州)에서 자취, 하숙을 하다가 주말에 울산(蔚山)으로 귀향 할 때 이용했던 기차가 동해남부선이었다. 하루에 두 차례 울산까지 운행되던 당시의 증기 기관차는 속도가 너무 느려 경주~울산(蔚山) 간에 무려 2시간 이상이 걸렸다. 지난 60, 70년대 기차통학이 본격화 되면서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과 대구선(大邱線)이 교차되는 경주역에는 세 그룹의 ‘단체’가 형성됐다. 소위 ‘울통(蔚通), 포통(浦通), 대통(大通)’이 그것이다. 경주에서 울산(蔚山) 방면 쪽으로 기차를 타고 오가던 통학생을 ‘울통’이라 했고 대구(大邱) 방향 통학생들을 ‘대통’, 포항(浦項) 쪽 학생들을 ‘포통’이라 일컬었다.
‘울통’들이 아침, 저녁 거치던 동해남부선과 폐지된 병영역
경주역(慶州驛) 구내에서 각 방향으로 가는 통학기차를 기다리던 통학생들은 가끔 ‘젊은 혈기’를 발산하기도 했었다. 그 당시 통학생들은 ‘패쓰’란 월별 통학승차증을 가지고 다녔는데 일단 개찰구를 통과한 ‘악동’들이 교묘하게 그 승차증을 다시 밖에 있는 친구들에게 건네주는 묘기를 부리기도 했다.
그러나 울산(蔚山), 포항(浦項)이 공업화되면서 도시가 비대해지고 각 지에 명문교들이 들어서면서 동해남부선은 침체의 길로 들어섰다. 기차 좌석을 먼저 차지하려고 창문으로 기어오르는 통학생, 통근자의 모습이 사라지면서 동해남부선을 달리던 증기 기관차도 3량 정도만 달고 다니는 전동차(電動車)로 교체됐다. 승객도 중간 역을 오가는 노약자, 서민들로 변했고 이 전동차마저도 장 나들이에 다녀오는 서민의 발로 변했다.
90년대 들어 각 가정에 승용차가 보급되면서 동해남부선은 더욱 위축되기 시작했다. 기차가 자가용에 대중교통수단 자리를 내 주면서 그 동안 누적된 적자를 이기지 못한 동해남부선은 2000년대 초반에 ‘일반에 매각’ 운운하는 수모도 겪었다.
영욕의 세월을 거쳐 온 동해남부선이 이제 경주(慶州)를 통과해 울산(蔚山)을 경유하는 KTX 고속철도가 기공되면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나 걱정했는데 부산(釜山), 울산(蔚山), 경주(慶州) 구간이 복선 전철화 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외동읍 구간은 노선의 경유지도 바뀌고, 그리운 그 시절 추억어린 역사(驛舍)들도 모두 역사(歷史)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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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 동기 중에 치에서 뛰어 내리고 올라 타는데 귀신이 있었어요. 한데 어느날 차에 오르고 보니 그날이 입실 장날이라 찻간에 냄새도 나고 사람이 많아서 내려서 다음 칸에 탈려고 달리는 차에서 내리다가 포인트에 다리가 걸려 다리를 절단했지요. 운동도 못하는 것이 없는 친구였는데....
모화에서 경주까지 기차통학하던 시절이 아련합니다. 그것이 없어진다니 아쉽기가 짝이 없네요. 모화역 전기불 밑에서 공부하던 때가 생각납니다. 정말 소중한 자료이고...귀중한 사진이고...향수어린 명품입니다.....정말 대단하신 작품입니다.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 우리 향우들의 가슴에 길이길이 남을 것입니다.
너무나 아쉽네요! 대성에서 죽동역까지 많이 다녔는데~~~~
선배님 귀한 자료 잘보고 감회가 새롭네요,열차통학 하면서 깐지다는 소리 많이 들었는데,..내친구 박용생 이는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 내리다가 다리를 하나 잘리고 말았지요,지금은 의족을 하고 다니는데,...모두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 지네요,...
박용생 형은 바로 우리 앞집애 살았는데....나하고도 참 친하게 지냈고.공부도 많이 같이 하고....공부도 제법 잘 했지요..그때 그렇게 기차사고로 다리를 잃고 진학도 못하고...동네 사진관을 했는데...요사이는 뭐하고 사는지 소식이 끊어진지 오래되어..ㅉㅉ....참 좋은 인재였는데...그런 사고로 인해서 모든 것이 좌절된 것 같기도 하여...안타깝기 그지 없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