慶州李氏判書公諱仁臣景慕碑
판서공의 휘는 인신이요. 본관은 경주이다. 진한 표암봉에 강림하시어 사로 6촌의 알천양산촌장 휘 알평이시다. 기원전 57년 화백회의를 주도하시어 13세의 박혁거세를 신라 초대왕으로 추대하고 섭정 보필하신 개국원훈이시다. 실계지 원대손 중시조는 휘 거명이요. 관직은 소판이다. 신라관제에 진골수지라 하였으니 귀족만이 오를 수 있는 3품 벼슬이다. 이세 휘 금현 신라대아찬 병부령이요. 지후 구세 휘 총섬 중서문하시중에 오르고 려조 서기988년에 5조와 사직을 건립하고 국자감을 설립하여 과거시험제도를 시행하다. 15세 고려명신 휘 핵 호 열헌은 문하평리 증상서좌복야에 오르고 비정부인 김해김씨 슬하에 3자 9손자가 모두 성균시에 등과하여 관직에 오르니 세인들이 명벌이라 칭하다. 기의 계자 휘 세기 시 문희 호 송암은 충열왕조에 성균시장원급제하고 친시천장급제하여 왕이 황패를 하사하였으며 밀직부사 예문관대제학 동지춘추관사 검교정승에 오르다. 비 군부인 이천서씨 슬하에 4형제를 두었으니 셋째 아드님 휘 과 고려상서는 공의 6대조이다. 5대조 휘 원보 지인주부사요. 조선조에 자손의 귀현으로 이조참의에 추증되고 고조 휘 승 전농판관 증 이조참판이다. 증조 휘 연손 1435년 무과급제하고 원종일등공신이며 공조참판 증 영의정에 오르고 세조와 동서간이다. 조부 휘 숭수 첨지중추부사 증 이조판서요. 종조부 휘 철견 시양평은 문무과양시급제하고 형조판서 판중추부사 좌찬성에 오르다. 고 휘 성무 중직대부 안동대도호판관 증 이조판서요. 비증 정부인 창녕성씨 슬하에 5형제를 두었으니 공은 장남으로 1457년 1월 16일 출생하여 1484년 별시문과급제하고 1489년 승문원정자에 발탁되어 1492년 장락원주부 등 여러 관직을 거쳐 사헌부지평에 오르다. 1506년 형조좌랑에 특임되고 1508년 예조참의로 특승하다. 1510년 공조참판에 오르고 1512년 지의금부사지내다. 후 관직을 사임하고 파주로 낙향하여 학문과 자손훈도에 전심하다. 1518년 8월19일 향년 61세에 기세하여 이조판서에 추증하다. 오랜 세월에 비문은 퇴색되어 개수하였으며 2003년 정부시책 산업단지개발로 인하여 무덕마을 현좌원에 합폄으로 천묘하다. 배 정부인 광주반씨 슬하에 5형제를 두었으니 장남 몽린은 1523년 무과급제하고 전라수사 지돈녕부사 포도대장 한성판윤에 오르다. 향년67세에 기세하여 영의정에 추증하다. 차남 몽기는 통정대부에 오르고 3남 몽구는 가선대부 행병마절도사요 4남 몽서는 사헌부감찰 평시서령 고양군수에 오르고 내직 풍저창수로 전임하다 감사의 계청으로 청도군수에 특임되고 통훈대부에 제수하다 향년 62세에 기세하여 행장은 아계 이산해선생이 찬하다 5남 호천휴당 몽규는 10세에 대의를 통달하였으며 성균관에서 국학을 수학하였다 즉 관로의 꿈을 접고 보령으로 낙향하여 임석사이에 서실을 지어 천휴당이라 편액하고 소쇄속에 마음을 비우고 호연지기를 기르면서 학문과 수행을 평생하다 향년 54세에 기세하여 가선대부 사헌부대사헌 겸 성균관제주 찬선에 추증하다. 행장은 율곡 이이선생이 찬하고 화암서원에 배향하다. 손자 희응은 군수에 오르고 희복은 선교시랑 호조좌랑이요 호 노제 희삼은 별좌이다 1580년 알성문과급제하고 병조판서 양관대제학 대광보국숭록대부영의정에 오른 시 문충 호 백사 항복은 종손자이다. 증손 용근은 군자감정이요. 사원은 삭녕군수 첨지중추부사에 오르고 사달은 절충장군 행 통진도호부사하다. 육은 사축서사축이요. 비는 임진전몰의사이고 경은 군자감정이다. 현손 시완은 수직 가선대부요. 시봉은 이조좌랑하고 승유는 통정대부 장예원판부사하다. 5대손 호 란제 문제는 예조정랑 안악군수에 오르고 호옥제 문형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요. 문영은 사헌부감찰이고 문명은 사헌부지평 증 한성좌윤 겸 오위도총부도총관이다. 6대손 세현은 삼조좌랑 외포어천찰방하고 삼현사에 배향하다. 덕주는 절충장군이요. 세정은 증대사헌하고 세웅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이다. 7대손 재오는 통정대부지중추부사요. 홍욱은 호조좌랑이다. 후손들은 수백년 전부터 선조의 음덕으로 파주 보령 지역에서 번성하여 집성촌을 이루고 정치 사회 문화 각계에서 활동하다 금번 선조의 행적을 박구발현하고저 여러 사적을 축조정견하여 관적 전반을 간략하게 국한문으로 기록하였다. 우기하여 후생들에게 부언하노니 비유선조 아신갈생이요. 조상을 추모하는 덕풍을 가범삼아 묘소가 모선심의 성지로 수호되기를 바랍니다.
判書公의 諱는 仁臣이요. 本貫은 慶州이다. 辰韓 瓢巖峯에 降臨하시어 斯盧 六村의 閼川楊山村長 諱 알평(謁平)이시다. 紀元前 五十七年 和白會議를 主導하시어 十三歲의 朴赫居世를 新羅 初代王으로 推戴하고 攝政 輔弼하신 開國元勳이시다. 失系至 遠代孫 中始祖는 諱 居明이요. 官職은 蘇判이다. 新羅官制에 眞骨受之라 하였으니 貴族만이 오를 수 있는 三品벼슬이다. 二世 諱 金現 新羅大阿飡 兵部令이요. 之後 九世 諱 寵暹 中書門下侍中에 오르고 麗朝 西紀九八八年에 五朝와 社稷을 建立하고 國子監을 設立하여 科擧試驗制度를 施行하다. 十五世 高麗名臣 諱 翮 號 悅軒은 門下評理 贈尙書佐僕射에 오르고 妣貞夫人 金海金氏 膝下에 三子九孫子가 모두 成均試에 登科하여 官職에 오르니 世人들이 名閥이라 稱하다. 其의 季子 諱 世基 諡文僖 號松巖은 忠烈王朝에 成均試壯元及第하고 親試天場及第하여 王이 黃牌를 下賜하였으며 密直副使 藝文館大提學 同知春秋館事 檢校政丞에 오르다. 妣郡夫人 利川徐氏 膝下에 四兄弟를 두었으니 셋째 아드님 諱 簻 高麗尙書는 公의 六代祖이다. 五代祖 諱 元普 知仁州府使요. 朝鮮朝에 子孫의 貴顯으로 吏曹參議에 追贈되고 高祖 諱 昇 典農判官 贈吏曺參判이다. 曾祖 諱 延孫 一四三五年 武科及第하고 原從一等功臣이며 工曹參判 贈領議政에 오르고 世祖와 同壻間이다. 祖父 諱 崇秀 僉知中樞府事 贈吏曹判書요. 從祖父 諱 鐵堅 諡襄平은 文武科兩試及第하고 刑曹判書 判中樞府事 左贊成에 오르다. 考 諱 成茂 中直大夫 安東大都護判官 贈吏曹判書요. 妣贈貞夫人 昌寧成氏 膝下에 五兄弟를 두었으니 公은 長男으로 一四五七年 一月 十六日 出生하여 一四八四年 別試文科及第하고 一四八九年 承文院正字에 拔擢되어 一四九二年 掌樂院主簿 등 여러 官職을 거쳐 司憲府持平에 오르다. 一五0六年 刑曹佐郎에 特任되고 一五0八年 禮曹參議로 特陞하다. 一五일0年 工曹參判에 오르고 一五一二年 知義禁府事지내다. 後 官職을 辭任하고 坡州로 落鄕하여 學文과 子孫訓導에 專心하다. 一五一八年 八月十九日 享年 六十一歲에 棄世하여 吏曹判書에 追贈하다. 오랜 세월에 碑文은 退色되어 改竪하였으며 二00三年 政府施策 産業團地開發로 因하여 茂德마을 亥坐原에 合窆으로 遷墓하다. 配 貞夫人 光州潘氏 膝下에 五兄弟를 두었으니 長男 夢鱗은 一五二三年 武科及第하고 全羅水使 知敦寧府事 捕盜大將 漢城判尹에 오르다. 享年六十七歲에 棄世하여 領議政에 追贈하다. 次男 夢麒는 通政大夫에 오르고 三男 夢龜는 嘉善大夫 行兵馬節度使요 四男 夢犀는 司憲府監察 平市署令 高陽郡守에 오르고 內職 豐儲倉守로 轉任하다 監司의 啓請으로 淸道郡守에 特任되고 通訓大夫에 除授하다 享年 六十二歲에 棄世하여 行狀은 鵝溪 李山海先生이 撰하다 五男 號天休堂 夢奎는 十歲에 大儀를 通達하였으며 成均館에서 國學을 修學하였다 卽 官路의 꿈을 접고 保寧으로 落鄕하여 林石사이에 書室을 지어 天休堂이라 扁額하고 瀟灑속에 마음을 비우고 浩然之氣를 기르면서 學文과 修行을 平生하다 享年 五十四歲에 棄世하여 嘉善大夫 司憲府大司憲 兼 成均館祭酒 贊善에 追贈하다 行狀은 栗谷 李珥先生이 撰하고 花巖書院에 配享하다 孫子 希膺은 郡守에 오르고 希福은 宣敎侍郞戶曹佐郎이요 號魯齊 希參은 別坐이다 一五八0年 謁聖文科及第하고 兵曹判書 兩館大提學 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에 오른 諡文忠 號白沙 恒福은 從孫子이다 曾孫 庸謹은 軍資監正이요 思遠은 朔寧郡守 僉知中樞府事에 오르고 思達은 折衝將軍 行通津都護府使하다 堉은 司畜署司畜이요 碑는 壬辰戰歿義士이고 坰은 軍資監正이댜 玄孫 時完은 壽職嘉善大夫요 時鳳은 吏曹佐郎하고 承裕는 通政大夫 掌隸院判府事하다 五代孫 號蘭齊 文在는 禮曹正郎 安岳郡守에 오르고 號玉齊 文彬은 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요 文永은 司憲府監察이고 文命은 司憲府持平 贈漢城左尹 兼 五衛都摠府都摠管이다. 六代孫 世賢은 三曹佐郞 外浦魚川察訪하고 三賢祠에 配享하다 德柱는 折衝將軍이요 世挺은 贈大司憲하고 世雄은 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이다 七代孫 載五는 通政大夫知中樞府事요 弘煜은 戶曹佐郎이다 後孫들은 數百年 前부터 先祖의 蔭德으로 坡州 保寧 地域에서 繁盛하여 集姓村을 이루고 政治 社會 文化 各界에서 活動하다 今般 先祖의 行蹟을 博究發現하고저 여러 史籍을 逐條精覺하여 官籍 全般을 簡略하게 國漢文으로 記錄하였다 右記하여 後生들에게 附言하노니 非有先祖 我身葛生이요 祖上을 追慕하는 德風을 家範삼아 墓所가 慕先心의 聖地로 守護되기를 바랍니다
名에 쓰노니
慶州에 빛나는 李氏
根源이 깊어 흐름 길으니
뿌리도 깊고 가지 茂盛하네
判書公이 德을 쌓아 베품이 있으니
陰德이 오래오래 두텁도다.
忠孝와 文章이며 높은 벼슬 끊임이 없네.
빗돌에 새겨 놓으니 百世토록 證憑되리로다.
西紀二0一七年 七月 慶州李氏尙書公派坡州宗中 謹立
예손 범우 근술 裔孫 範雨 謹述
첫댓글 증 판서공 할아버님의 경모비문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