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처사와 숙종대왕(명릉)
숙종대왕이
수원성 고개 아랫쪽 냇가(지금 수원천 부근)를
지날 무렵 허름한 시골 총각이 관 하나를 옆에
놔두고 슬피 울면서 땅을 파고 있는게 아닌가.
상을 당해 묘를 쓰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파는 족족 물이 스며 나오는 냇가에 묘자리를
파고 있는 더벅머리 총각의 처량한 모습에
"아무리 가난하고 땅이 없어도 유분수지 어찌
송장을 물속에 넣으려고 하는지 희한도 하다"
그래도 무슨 사연이 있겠지 하며 다가갔다.
"여보게 총각, 여기 관은 누구 것인고?"
"제 어머님 시신입니다"
"여기는 왜 파고 있는고?"
(짐짓 알면서 딴청으로 묻는다)
"묘를 쓰려고 합니다."
짐작은 했지만 어처구니가 없는 숙종이다.
"여보게, 이렇게 물이 솟아나고 있는데
어찌 어머니 묘를 쓰려고 하는가?"
"저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어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갈처사라는 노인이 찾아와
절더러 불쌍타 하면서 이리로 데려와
이 자리에 묘를 꼭 쓰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 분은 유명한 지관인데,
저기 저 언덕 오막살이에서 혼자 살고 있습니다."
총각은 옷소매로 연신 눈물을 훔치며
자신의 곤혹스런 처지를
처음 보는 양반나리에게 하소연하듯 아뢰었다.
숙종이 가만히 듣자하니
갈처사라는 지관이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궁리 끝에
지니고 다니던 지필묵을 꺼내어 몇 자 적었다.
"여기 일은 내가 보고 있을 터이니
이 서찰을 수원부로 가져가게.
수문장들이
성문을 가로 막거든 이 서찰을 보여주게."
총각은 또 한 번 황당했다.
아침에는 어머님이 돌아가셨지.
유명한 지관이 냇가에 묘를 쓰라고 했지.
이번에는 왼 선비가
갑자기 나타나 수원부에 서찰을 전하라 하지.
도무지
어느 장단에 발을 맞추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급한 발걸음으로 수원부로 가게 되었다.
서찰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어명!
수원부사는 이 사람에게
당장 쌀 삼백 가마를 하사하고, 좋은 터를 정해서
묘를 쓸 수 있도록 급히 조치하라.
수원부가 갑자기 발칵 뒤집혔다.
허름한 시골 총각에게 유명한 지관이 동행되지 않나,
창고의 쌀이 쏟아져 바리바리 실리지를 않나.
"아! 상감마마, 그 분이 상감마마였다니!"
총각은 하늘이 노래졌다.
다리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냇가에서 자기 어머니 시신을 지키고 서 있을
임금을 생각하니, 황송하옵기가 말할 수 없었다.
기쁨보다는 두려움과 놀라움에 몸 둘 바를 몰랐다.
한편 숙종은
총각이 수원부로 떠난 뒤 단단히 혼을 내 주려고
총각이 가르쳐 준 갈처사가 산다는 가파른 산마루를
향해 올라갔다.
단단히 벼르고 올라간 산마루 찌그러져가는
단칸 초막은 그야말로 볼품이 없었다.
"이리 오너라"
"..............."
"이리 오너라"
".............."
한참 뒤 안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게 뉘시오?"
방문을 열며 시큰둥하게 손님을 맞는 주인은
영락없는 꼬질꼬질한 촌 노인네 행색이다.
콧구멍만한 초라한 방이라 들어갈 자리도 없다.
숙종은 그대로 문밖에서 묻는다.
"나는 한양 사는 선비인데 그대가 갈처사 맞소?"
"그렇소만 무슨 연유로 예까지 나를 찾소?"
"오늘 아침 저 아래
상당한 총각더러 냇가에 묘를 쓰라했소?"
"그렇소"
"듣자니 당신이 자리를 좀 본다는데
물이 펑펑 솟아나는 냇가에
묘를 쓰라니 당치나 한 일이요?
골탕을 먹이는 것도 유분수지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이요? "
숙종의 참았던 감정에 어느새 격해저
목소리가 커졌다. 갈씨 또한 촌노이지만
낮선 손님이 찾아와
다짜고짜 목소리를 높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선비란 양반이 개 코도 모르면서 참견이야.
당신이
그 땅이 얼마나 좋은 명당터인 줄 알기나 해?"
버럭 소리를 지르는 통에 숙종은 기가 막혔다.
(속으로 이놈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어디
잠시 두고 보자 하고 감정을 억 누르며)
"저기가 어떻게 명당이란 말이요?"
"모르면 가만이나 있지,
이 양반아 저기는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쌀 3백가마를 받고 명당으로 들어가는 땅이 야.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발복을 받는 자리인데
물이 있으면 어떻고 불이 있으면 어때?
개코도 모르면 잠자코나 있으시오"
숙종의 얼굴은 그만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갈처사 말대로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총각은 쌀 3백가마를 받았으며
명당으로 옮겨 장사를 지낼 상황이 아닌가!
숙종은 갈처사의 대갈일성에 얼마나 놀랬던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공손해 진다.
"영감님이 그렇게 잘 알면 저 아래
고래등 같은 집에서 떵떵거리고 살지 않고
이런 산마루 오두막에서 산단 말이오?"
" 이 양반이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있을 것이지 귀찮게 떠들기만 하네"
"아니, 무슨 말씀인지"
숙종은 이제 주눅이 들어 있었다.
저 아래 것들은 남 속이고 도둑질이나 해 가지고
고래등 같은 기와집 가져봐야 아무 소용이 없어.
그래도 여기는 바로 임금이 찾아올 자리여.
지금 비록 초라하지만
나랏님이 찾아올 명당이란 말일세"
숙종은 그만 정신을 잃을 뻔 했다. 이런 신통한
사람을 일찍이 만나본 적이 없었다.
꿈속을 해메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왕이 언제 찾아옵니까?"
"거, 꽤나 귀찮게 물어 오시네.
잠시 기다려 보오.
내가 재작년에
이 집을 지을 때에 날 받아놓은 것이 있는데,
가만.... 어디에 있더라"
하면서 방 귀퉁이 보자기를 풀어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먼지를 털면서 들여다보더니......
그만 대경실색을 한다.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에 나가 큰 절을 올리는 것이었다.
종이에 적힌 시간이 바로 지금 이 시간이었다.
임금을 알아본 것이다.
"여보게.... 갈처사, 괜찮소이다.
대신 그 누구에게도 결코 말하지 마시오.
그리고
내가 죽은 뒤에 뭍힐 자리 하나 잡아주지 않겠오"
"대왕님의 덕이 높으신데 제가 신하로서
자리 잡아 드리는 것은 무한한 영광이옵니다.
어느 분의 하명이신데 거역하겠사옵니까?"
그리하여 갈처사가 잡아준 숙종의 왕릉이 지금
서울의 서북쪽의 서오릉에 자리한 "명릉"이다.
그 후 숙종대왕은 갈처사에게
3천냥을 하사하였으나, 노자로 30냥만 받아들고
홀연히 어디론가 떠나갔다는 이야기입니다
*
*
신묘 하도다 갈처사여
냇가에 묘를 쓰고 산마루 언덕에 초막을 지으니
음택 명당이 냇가에 있고
양택 명당은 산마루에도 있구나.
임금을 호통 치면서도 죄가 되지 않으니
풍수의 조화는 국법도 넘어가네.
볼품없는 초라한 몸이라도
가난한 이웃에게 적선하고
나랏님께 충성하노니
그 이름 역사에 길이길이 남으리라.
風水地理學(풍수지리학)의 뿌리는 동양의 우주론, 즉 陰陽五行說(음양오행설)이다. 대부분의 종교는 우주론과 생사관을 바탕으로 하고 그 위에 삶의 규범, 즉 윤리학을 덧입힌 것이다. 음양오행설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힘으로는 알 수 없는 개인과 가문의 운명에 대해, 민족과 국가의 미래에 대해, 권력의 부침에 대해 예측하고 설명하는 종합적인 학문 체계로 발전했다. 그리고 이를 천문지리와 연계하여 파악하는 것이 風水지리학이었다.
선인들의 세상에서 風水지리학은 당당한 철학이었고, 지혜였으며 과학이었다. 서양의 종교와 학문이 들어온 이후 기존 전통사상·종교들과 마찬가지로 風水지리학은 「迷信(미신)」의 골짜기에 밀려나고 말았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風水는 과거 시험의 한 과목으로 당당하게 대접받았다.
우리나라에 風水가 본격 소개된 것은 신라末(말) 道詵 國師(도선 국사·827~898)에 의해서였다. 도선이 우리나라 風水지리학의 鼻祖(비조)라는 사실에 이견이 없다. 後三國(후삼국)의 혼란기에 등장한 도선은 국토 전체를 두루 살피고 명당을 찾아내어 적극 활용할 것을 제시했다. 그는 고려의 개국을 예견하면서 蒼生(창생) 구제를 도모했다. 그는 한두 사람이나 가문의 사사로운 발복을 위해 봉사한 사람이 아니었다. 風水의 본령을 개척하고 그 정신을 만들어 낸 사람이었다.
한국 불교사에서 도선의 위상은 매우 특이하다. 신라는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盛唐(성당) 때의 五家七宗(오가칠종)을 수용했다. 특히 불교의 정수인 禪(선)불교가 성행하여 「九山禪門(구산선문)」을 열었다. 이런 문화적 토양 위에서 도선이라는 인물이 태어난다.
靈巖(영암: 오늘날의 전남 영암군 군서면 구림리 月出山 자락)에서 태어난 도선은(속성은 金氏로 일설에는 신라 王孫이라고 한다) 15세에 出家(출가)하여 화엄사에서 경전공부를 시작했고, 20代 초반에는 구산선문의 하나인 곡성의 동리산 泰安寺(태안사)에서 「桐裏山門(동리산문)」을 연 惠哲(또는 慧徹·혜철)國師에게 師事(사사), 大悟(대오)했다. 이 인연으로 도선은 구산선문 동리산派(파)의 제2代祖(대조)가 된다.
여기까지 살펴보면 도선은 敎(교)와 禪(선)을 겸비한 禪僧(선승)의 면모에 어김없다. 그러나 도선의 무한한 發心(발심)은 禪의 경지를 스스로 확대한다.
山川이 곧 佛國土
海東風水의 비조 도선 국사.
密敎(밀교)의 영향을 받은 도선은 밀교의 중심사상인 「卽身成佛(즉신성불)」, 즉 내 몸이 곧 부처라는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는 이 사상을 바탕으로 중국 風水와는 다른 海東風水法(해동풍수법)을 창안, 山川(산천)이 곧 佛國土(불국토)라는 山川曼茶羅(산천만다라) 사상으로 발전시킨다. 山川裨補寺塔論(산천비보사탑론: 병든 산천을 사탑과 당간 등으로 치유하여 세상을 평온하게 한다는 주장)의 근거가 여기 있다. 도선의 風水는 佛國土를 이루기 위함이었고, 창생을 구제하는 佛法의 발현이었다.
도선이 중국에 건너가 밀교 승려 一行(일행)에게 배웠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일행은 唐나라 초기의 사람이고 도선은 唐나라 후기의 사람이니 연대가 맞지 않는다.
도선은 穿道寺(천도사)에서 具足戒(구족계)를 받고 太白山(태백산)과 雲峯山(운봉산)에서 토굴을 파고 정진한 후, 천하를 유력하며 산천을 살피다가 광양 백계산의 玉龍寺(옥룡사)에서 후학들을 지도했다. 이로 인하여 스스로 號(호)를 玉龍子(옥룡자)라 지었다.
도선은 「도선비기」, 「옥룡자비기」, 「송악명당기」, 「도선답산가」, 「삼각산명당기」, 「풍수도」(결록기) 등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이 책들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없으나 「고려사」 등의 역사서에 인용되거나, 민간에 秘傳(비전)되어 온 사본들이 있다.
도선은 王建(왕건)의 고려 건국을 예견하고 도왔다. 춘천의 申崇謙(신숭겸) 묘소는 도선이 王建의 身後地(신후지)로 점지했던 자리이고, 黃喜(황희) 정승의 祖父(조부) 묘소는 도선이 점지하고 懶翁禪師(나옹선사)가 이를 재확인한 천하 명당이다.
實學者들의 風水 검증
수백 년 앞을 내다보는 형안을 지녔던 「도참의 비조」 도선은, 자기 조상은 어떤 명당에 묻었을까?
이것은 단순한 호기심의 차원을 넘어 風水의 본질과 효용을 묻는 중요한 질문이 된다. 조선후기에 實學(실학)의 세례를 받은 선비들이 지방 郡縣(군현)의 首長(수장)이 되어 부임하면 惑世誣民(혹세무민)하는 미신을 뿌리 뽑는 일부터 착수했다. 風水가 그중의 하나였던 듯하다.
어느 실학자는 風水들이 「자손 번성할 대지」라고 점지한 묏자리의 후손들을 조사하여 과연 번성했는지를 실증적으로 따졌고, 「부자 낳을 자리」라고 점지한 명당의 후손들이 과연 부자인지 아닌지를 조사하여 「風水의 허황함」을 입증하려고 했다.
그중 하나가 「風水 자신들은 명당에 들었는가? 風水들은 자기 조상들을 명당에 묻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이를 입증하는 일이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유명·무명의 風水들이 자기 조상 무덤을 명당에 안장하지 못한 것은 물론, 자신의 身後地조차 명당에 잡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렇다면 風水는 믿을 수 없는 허황한 이야기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내놓으려는 것이 이번 호의 주제 중 하나이다.
먼저 도선국사의 경우이다. 스님들에게 있어 「부귀영화」는 중요한 삶의 목표가 아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身後를 안장케 하려는 욕망은 孝心이니 속인과 출가인을 가리지 않고 지니는 욕망일 것이다.
도선국사는 명당을 잡아 어머니의 身後를 모셨다. 그러나 3년 만에 天破(천파: 자연 재해로 묘지가 파손되는 일)가 일어나고 말았다. 여기서 도선은 「하늘의 뜻을 어찌 거역하리」 하고 탄식했다고 한다. 風水라 하더라도 하늘의 뜻을 거스르면서 자신과 자기 가문의 발복을 도모할 수는 없다는 깨달음이었다.
無學대사
한양 천도를 이끈 無學대사.
도선이 활동하던 때로부터 500년이 흐른 뒤 이 땅에는 도선을 그대로 빼어 닮은 승려가 한 사람 출현한다. 無學(무학)대사(1327~1405)가 그 사람이다.
무학대사의 俗名(속명)은 自超(자초), 俗姓(속성)은 朴씨이고, 號는 溪月軒(계월헌)이며 佛名은 無學이다. 몽골의 침입을 물리쳤던 박서 장군의 5대손으로 경상남도 합천군 三岐(現 합천군 삼가면)에서 태어났다.
그는 18세에 小止禪師(소지선사)를 은사로 출가하여 慧明(혜명)국사에게 佛法을 배우고 공민왕 2년(1353) 중국(元)에 유학하여 먼저 중국에 와 있던 고려승 惠勤(혜근)·指空(지공)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귀국 후에는 王師가 된 혜근의 法을 이어받았다.
風水지리와 역사 변천을 내다볼 줄 아는 혜안을 지녔던 그는 고려가 기울고 조선이 발흥하는 데 기여를 했다. 태조 李成桂(이성계)의 특별한 신임을 얻어 조선 건국 후 王師가 되어 大曹溪宗師(대조계종사)·禪敎都摠攝(선교도총섭)의 직위를 얻었으며, 妙嚴尊者(묘암존자)의 號를 받았다. 그는 태조를 수행하여 계룡산과 한양을 오가며 새 도읍지를 선정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무학과 관련해서는 많은 전설이 전해진다. 특히 이성계와의 일화들이 유명한데, 서까래 세 개를 등에 지었다는 이성계의 꿈을 「왕이 될 꿈」으로 해몽하여 이름 지었다는 釋王寺의 내력에서부터 「무학을 꾸짖은 농부(사실은 삼각산 산신령이었다고 한다)」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실로 화려하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는 나라를 열자마자 제일 먼저 수도 이전을 서둘렀다.
먼저 떠오른 땅이 한양이었다. 한양은 백제 678년의 역사 가운데 475년간 송파를 중심으로 번성한 도읍지였다. 고려중기 이래 「松都(송도)의 地氣(지기)가 쇠하여 도읍지로서의 命이 다하였으며 한양이 명당길지」라는 도참설이 떠돌고 있었다.
1392년 7월17일 송도의 壽昌宮(수창궁)에서 즉위한 태조는 즉위 한 달 만인 그해 8월 都評議使司(도평의사사: 고려말 최고 정무기관, 조선 태종 때 議政府로 개편됨)에 한양으로 천도할 것을 명한다. 이에 따라 도평의사사는 즉시 한양의 고려 궁궐을 수리하는 등 遷都(천도)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趙浚(조준) 등이 천도를 서둘지 말 것과 천도 이전에 새 왕조의 이름부터 지어야 한다고 주청하는 바람에 한양 천도사업은 일단 보류되었다.
한양 천도를 둘러싼 名堂 논쟁
태조 2년 權仲和(권중화)가 새 도읍지의 후보로 계룡산 기슭의 신도안을 천거하자 태조는 직접 계룡산 일대의 지형을 살피고 수도를 계룡산 기슭으로 결정했다. 곧 계룡산 기슭에서는 권중화가 구상한 도면에 따라 새 수도의 건설작업이 시작됐다.
태조 2년 말에 河崙(하륜·1347~ 1416)이 『신도안의 형세가 명당이 아니므로 새 도읍지로 불가하다』는 의견을 내놓았고, 이에 따라 계룡산 기슭의 새 수도 건설작업은 중단됐다.
태조로부터 새 수도의 입지를 물색하라는 명을 받은 하륜은 『毋岳(무악)이 비록 협착하지만 명당』이라고 추천했다.
이에 대해 書雲觀(서운관)에서는 불가함을 주장하고 佛日寺(불일사)와 鐥店(선점)을 도읍지로 천거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도평의사사가 불일사 및 선점의 불가함을 주청하는 등 새 도읍지를 둘러싼 갑론을박이 계속됐다.
태조 3년, 태조는 재상들에게 새 도읍지를 천거해 보라고 일렀다. 성석린은 부소를 천거하고, 정총은 개성을 주장했으며, 하륜은 무악을 주장하고, 정도전은 무악을 반대하는 등 「백 사람이 백 가지 주장을 하는」 난맥상이 벌어졌다.
이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王師인 무학이었다. 무학은 처음 오늘날의 왕십리 부근을 도읍지로 점지했으나 그곳 땅속에서 도선이 묻어 두었다는 「往十里」(왕십리: 여기서 10리를 더 나가라) 팻말이 나오자 500년 후를 꿰뚫어본 도선의 혜안에 새삼 감탄했다고 한다.
무학의 주장에 따라 도읍지는 한양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한양에서 궁궐의 배치와 都城(도성)의 구상이 또 문제였다.
이 문제를 놓고 다시 신하들 간에 격론이 일어났다. 무학대사는 인왕산 아래를 주장했고, 정도전은 북악산 아래를 주장했는데 결국 정도전의 주장대로 경복궁이 건립됐다. 이 선택이 잘못됐다는 것은 그 이후의 조선왕조史가 잘 설명해 준다. 오늘날의 청와대도 이때의 잘못된 선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궁궐을 짓고 새 도시를 건설하면서 한양의 風水지리학적인 결함이 지적되었고, 그러한 결함을 보완하는 장치가 마련되었다. 한양 궁궐에서 남쪽으로 보이는 관악산이 火山이기 때문에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궁궐 앞에 해태 같은 물짐승을 앉혀 놓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처럼 명당자리를 활용하면서 땅이 지닌 나쁜 점을 보완하여 全국토를 불국토로 만들자는 것이 도선국사의 비보사탑론이고, 이를 이어받은 것이 裨補風水이다. 무학은 도선의 비보풍수를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河崙
한양 천도의 일등공신은 말할 것도 없이 무학대사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큰 역할을 한 사람은 河崙이었다. 하륜은 공사가 진행되고 있던 계룡산 신도 건설을 중단하게 하고 한수 이북의 무악을 천거함으로써 한양 천도의 가능성을 다시 열었다.
그는 태종 이방원의 책사로 이방원이 왕권을 쥐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나, 무엇보다 큰 치적은 이미 진행 중이던 계룡산 수도 건설을 중단시키고 논의를 원점으로 되돌린 일이었다.
오늘날 행정복합도시라는 이름의 新행정수도 世宗市(세종시) 건설의 문제점들을 이러쿵저러쿵 떠들면서도 정작 온몸으로 그것을 중단시킬 만한 강골의 선비나 관료가 보이지 않는 현실에 비춰볼 때 하륜의 공적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물론 하륜이 그 같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風水지리에 대해 깊은 조예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중기에 이르면 도선과 무학의 비보風水는 거의 자취를 감추고 대신 祈福(기복)도참의 전형인 發蔭 發福(발음 발복)을 목적으로 명당찾기에 몰두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이러한 풍조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風水지리학이 국가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대국적 지혜에서 사사로운 발복의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風水의 名人(명인)들이 무학 같은 高僧大德(고승대덕)이나 하륜 같은 巨儒(거유)에서 기교적인 전문가로 변화되는 징후의 전형을 보인 사람으로 조선 중기 明宗 때 활약했던 전설적인 名風水 南師古(남사고·1509~1571)를 들 수 있다.
남사고는 경상북도 울진(현재의 울진군 근남면 수곡리) 태생으로 易學(역학), 讖緯(참위), 天文(천문), 觀相(관상), 卜筮(복서)의 비결에 두루 뛰어났다. 특히 風水에 밝아 그에 얽힌 수많은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야사에 전한다. 본관은 영양이고 호는 格庵(격암)이다. 호를 딴 「格庵遺錄(격암유록)」과 「南師古秘訣(남사고비결)」, 「南格庵十勝地論(남격암십승지론)」 등 도참서의 내용이 「鄭鑑錄(정감록)」에 수록되어 전해져 오고 있다.
才勝薄德의 南師古
남사고는 어릴 때 佛影寺(불영사) 도승으로부터 비결을 전수해 이를 발전시키고, 退溪(퇴계)의 門人(문인)이기도 했으나, 才勝薄德(재승박덕)한 인물이었다.
그가 明宗(명종) 말년에 東西分黨(동서분당)을 예고하자 그대로 되었고, 다시 명종 19년 『내년에 반드시 태산을 봉하리라』 하였는데 바로 그해에 문정왕후가 죽어 태릉에 묻혔다. 그리고 『임진년에 왜적이 쳐들어올 터이니 부디 조심하라』고 일렀는데 과연 임진년에 왜적이 쳐들어왔다.
野史(야사)에서 전해 오는 이러한 행적의 진위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의 十勝地說(십승지설)은 조선후기 이래의 변혁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이 사실이다.
남에게 명당 찾아 주는 일에는 천하에 다툴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던 남사고인지라 자신의 어머니가 죽자 당연히 명당에 묻기 위해 온갖 재주를 다하고 노력을 아끼지 않았을 터이다.
그런데 어머니를 명당에 묻어 놓고 다음에 와보니 명당이 아닌지라 옮기기를 아홉 번이나 하였다. 마침내 열 번째 九龍爭珠地(구룡쟁주지)를 얻어 어머니의 유골을 이장하고 봉분을 짓는데 초립동이 하나가 지나가며 노래하기를 『남사고야, 남사고야. 九十葬 남사고야. 九龍爭珠穴인 줄 알겠지만 九蛇掛樹(구사괘수)가 아니냐』 하고 사라져 버렸다.
깜짝 놀란 남사고가 묘를 다시 파려고 했으나 문득 생각해 보니 여기서 더 이장하면 천벌을 받을 것이 분명하므로 자신의 적덕하지 못함을 한탄하고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名堂에 묻히지 못한 南師古
남사고는 이처럼 어머니를 명당에 묻는 것은 실패했으나 자신의 身後地만은 전날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그는 병들어 죽게 되자 여섯 아들을 불러 놓고 일렀다.
『나는 적덕하지 못하여 조상을 凶地(흉지)에 묻었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 그러나 내 자리는 웬만한 자리를 잡아 놓았으니 어기지 말고 꼭 그 자리에 묻도록 하여라』
남사고가 죽자 아들들은 장례 전날 아버지가 생전에 점지해 둔 자리에 광을 파고 그 위에 배석을 덮어 두었다. 그날 밤 梅花里 尹씨네에 시집간 남사고의 딸이 몰래 壙中(광중)에 물을 부어 놓았다.
다음날 광중에 물이 고인 것을 본 남사고의 아들들이 아무리 아비의 유언이라 하나 물구덩이에 장사 지낼 수는 없으므로 오늘날의 수곡리 초등학교 뒷산에 새로 자리를 정하여 묻었다.
전설적인 風水 남사고의 무덤은 명당과는 거리가 멀다. 묘는 을씨년스럽고 그가 태어난 집터는 성황당이 돼버렸다.
남사고가 원래 점지해 둔 자리에는 훗날 尹씨가 묻혔다. 그 때문에 尹씨는 번창하고 南씨는 상대적으로 쇠락했다. 南씨와 尹씨 간에 곱지 않은 감정의 앙금이 생긴 것도 이때부터였다고 한다. 수곡리에는 개천을 건너는 다리조차 南哥다리 따로 있고 尹哥다리 따로 있을 정도로 두 집안은 소원한 사이가 된 것이다.
조선중기 이후의 風水가 모두 기복의 명당찾기 기교로만 흘렀던 것은 아니다. 風水 전문가가 아닌 학자 奇人(기인) 중에 도참에 안목을 갖춘 인물들이 가끔 나와 천문지리를 꿰뚫으며 이를 창생구제에 활용한 경우가 있었다.
토정 이지함
충남 보령시에 있는 토정 이지함의 묘.
土亭 李之函(토정 이지함·1517~1578)은 「土亭秘訣(토정비결)」의 저자로서 요즘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진 학자 奇人이다. 본관은 韓山(한산), 호는 水山(수산) 또는 土亭(토정)이며 고려말 巨儒(거유) 牧隱 李穡(목은 이색)의 6代孫으로 현령 李穉(이서)의 아들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맏형 李之蕃(이지번)에게 글을 배우다가 徐敬德(서경덕)의 문하에 들어갔는데 數理(수리)·醫學(의학)·陰陽(음양)·卜筮(복서)·術書(술서) 등에 두루 능통한 것은 서경덕의 영향이었다고 한다.
1573년 조정에 천거되어 淸河(청하: 지금의 포천) 현감이 되었다. 포천현감으로 재직 중 임진강의 범람을 미리 알아 많은 생명을 구했다.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으나 이번에는 아산현감으로 등용되었다. 벼슬살이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일단 현감으로 부임하자 그는 즉각 걸인청을 만들어 노약자와 걸인들의 구제에 나섰다. 奇人이 아니라 가장 정상적인 목민관이었던 셈인데, 당시의 관료들의 행태와 너무 달랐기 때문에 奇人으로 불린 것뿐이었다.
토정은 생애의 대부분을 마포 강변에 흙담 움막을 짓고 살았다. 토정이라는 호는 여기서 비롯된 것이었다. 토정이 의학과 복서에 밝다는 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신수를 묻기 위해 몰려왔다. 이에 복서의 대중화를 위해, 즉 가난한 서민들을 위해 지어 낸 것이 「토정비결」이었다.
토정은 전국 산천을 두루 다니며 명당길지를 점지했는데 그 목적은 「사람을 살리기 위함」이었다. 즉 창생구제가 風水의 목적이었다. 그 때문에 분당 중앙공원 내에 있는 한산李氏 묘소를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토정이 점지한 자리가 여럿 있다. 그러나 토정 자신의 묘는 명당과 거리가 있었다.
충남 보령시 주포면 고정리 국수봉 기슭, 보령화력발전소 부근 서해를 내려다보는 산기슭에 토정의 가족묘지 10여 基(기)가 모여 있다. 토정의 부모와 형제들, 그리고 후손들이 모여 있다.
어떤 이들은 토정 가족묘를 두고 『左靑龍 右白虎(좌청룡 우백호)가 뚜렷하고 바다 건너 삼태봉 가운데 중심봉의 안산이 수려하여 흠잡을 데 없는 명당』이라고 한다.
그러나 필자가 본 토정 묘는 명당과 거리가 있었다. 보령 앞바다의 지형은 인위적 변화가 심하여 현재 보이는 형상만으로 안산이 수려하느니 할 형편이 아니었다. 게다가 10여 基의 묘지들은 眞穴(진혈)에 든 것이 없었다. 위로부터 3열의 오른쪽 무덤 하나가 생기를 발하고 있어 유일하게 정혈에 든 경우였다. 토정 이지함의 무덤 바로 앞 상석 아래쪽도 강한 생기가 솟아나는 정혈이었으나 아깝게도 토정은 정혈을 비껴나 있었다.
토정의 가족묘가 자리한 국수봉 기슭의 형기론적 국세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자리라는 데는 필자도 동의한다. 그 때문에 무덤군의 뒤편과 위로부터 3열 우측, 그리고 토정묘 상석 아래, 마지막으로 산비탈에서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잘룩한 부분에 정혈이 있었다. 천하의 토정 이지함은 내룡의 형세를 보는 안목은 탁월했으나 그 좋은 국세 속에서 정혈을 찾는 데는 실패했다는 증거다.
海溢을 물리친 許穆
허목
강원도 삼척시에는 조선 현종 때 삼척부사를 지낸 眉? 許穆(미수 허목·1595~1682) 선생의 「陟州東海碑(척주동해비)」가 있다. 烏石(오석)에 篆書體(전서체)의 대가였던 미수 자신이 大篆體(대전체)로 쓴 비석이다.
비석이 만들어진 사연과 그 내용은 더욱 기이하다. 삼척부사로 부임한 미수 선생은 해마다 해일이 바닷가 마을을 덮쳐 주민들이 재산과 목숨을 보전하지 못하는 딱한 실정을 보고, 동해를 예찬하는 글을 지어 스스로 전서체의 비문을 쓰고 비석을 세웠다. 그러자 그 이후부터 무서운 해일이 삼척 부근을 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조수를 물리치는 신비한 힘을 지닌 비석이라 하여 일명 「退潮碑(퇴조비)」라고 한다. 토정이 포천현감 시절 임진강의 범람을 미리 예고하여 재앙을 막은 것과 결과는 비슷하나 방법은 판이하다.
許穆의 본관은 양천, 字는 文甫(문보) 또는 和甫(화보)이고 호는 眉?(미수)였다. 許積(허적)과 함께 南人(남인)을 이끌고 西人(서인)의 영수인 宋時烈(송시열)과 禮論(예론)에 대해 첨예한 논쟁을 주도한 인물이다. 풍모가 손오공을 연상케 할 정도로 특이했고, 천문지리와 복서에 밝았다.
비석 하나가 해일을 막을 수 있는가?
대답은 『그렇다』이다. 위로 천문에 통하고 아래로 온전히 땅을 안다면 바다라고 해서 통하지 못할 법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허목이 삼척부사 시절에 쓴 척주동해비.
독립기념관 터에 묏자리 잡았던 박문수
박문수
탐관오리들을 징치하고 정의를 세워 일반 백성들의 속을 시원하게 해줬던 전설적인 암행어사 朴文秀(박문수·1691~1756)도 風水의 대가였다. 충남 천안시 북면 은지리, 은석산 정상 부근에 있는 박문수의 묘소에는 그의 생전 행적 못지않게 얽힌 이야기가 많다.
묘터를 잡은 내력은 이러하다. 박문수가 은퇴 후 낙향하여 國風(국풍)과 함께 身後地를 물색할 때 흑성산 아래 터를 정하고 봉분을 만들려고 하니 한 노인이 나타나 『대감 저는 김일수올시다. 30년 전 은혜를 갚고자 왔습니다. 이곳은 200년 후 나라에서 사용할 자립니다. 대감의 만년신후지는 은석산의 장군대좌형입니다』 하고 사라졌다.
이렇게 하여 박문수는 은석산의 장군대좌형에 묻히게 되었다. 그가 원래 터를 잡았던 흑성산 자락은 노인의 말 그대로 200년이 지난 후 독립기념관이 들어섰다. 독립기념관은 명당이다. 박문수가 이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은석산 정상 부근으로 밀려난 것 또한 天理(천리)가 아니겠는가.
은석산의 장군대좌형은 장군만 앉아 있을 뿐 병졸은 없는 자리였다. 박문수는 생전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묘터 아래 마을에 시장(3·1운동 때 유관순이 만세를 불렀던 아우내 장터)을 만들었다. 시장에 사람들이 와글거리면 그것이 곧 병졸과 같은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해서였다. 이 시장은 日帝 때 없어졌는데 고령朴氏 문중에서는 시장의 병졸들이 박문수의 시야에서 사라지면 집안이 번성하지 못할 것이라 하여 시장 철폐를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은석산 박문수의 묘소는 시장이 있고 없는 게 문제가 아니라 형국부터 명당의 요건을 갖추지 못했고, 무덤 또한 진혈에 들지 못했다. 토정 선생과 마찬가지로 어사 박문수는 자신의 무덤을 명당에 앉히는 데 실패한 것이다.
광해군 때 국풍 李懿信(이의신)이 있었다. 해남 맹진 태생으로 孤山 尹善道(고산 윤선도)의 당고숙이었다. 交河(교하)로 천도할 것을 주장한 사람이다. 이의신이 자신의 부친을 장사 지낼 때 해남의 海蝦弄珠形(해하농주형) 大地를 잡아 광을 팔 때 일하는 인부의 실수로 반석을 뚫는 바람에 氣를 잃고 破穴(파혈)하여 명당의 꿈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선조 때 국풍이던 朴相宜(박상의)도 장성의 명당에 묻히고자 하였으나 태교혈이 아니어서 와우형 小穴에 들고 말았다.
충남 천안시에 있는 박문수의 묘.
陸英修 여사 묏자리를 둘러싼 논란
國風(국풍), 즉 나라 안에 제일가는 風水들이 이러니 나머지 이름 없는 風水들이야 오죽하겠는가. 복덕방 영감들이 좋은 집에 사는 것이 아닌 것처럼 風水들이 명당을 다 차지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나쁜 자리에 누운 경우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참으로 오묘한 이치가 아닐 수 없다.
광복 후 池昌龍(지창룡)·張龍得(장용득)씨 등 수많은 風水의 대가들이 명멸해 갔으나 여기서는 일일이 거론하기가 번거로우므로 삼가고, 다만 최근까지 명성이 자자했던 현대판 風水의 전설 六觀道師 孫錫佑(육관도사 손석우)에 대해 필자가 직접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하기로 한다.
육관은 風水지리학에 대한 현대인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인물이다. 그는 金日成(김일성) 사망 예언, 외국 원수들 묘터를 「직접」 점지했다는 자기광고, 대통령 후보의 先塋(선영) 移葬(이장), 자미원이라는 「지상 최고 명당」의 암시 등으로 세간의 관심을 끌어들였다. 덕분에 그는 대중적 인기를 얻었지만, 이 대중적 인기는 곧장 부메랑이 되어 風水의 진지함을 沮喪(저상)케 하고 상업화하는 폐단을 낳았다.
1991년 3월5일, 風水 H씨는 여성잡지 Y지의 발행인 K씨와 前 청와대 비서관 L씨 등과 함께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박지만이 히로뽕으로 구속되고, 근혜와 근영이 자매가 불화하는 소리가 세상에 알려질 정도로 朴正熙(박정희) 대통령 가문의 비극이 끝나지 않는 것은 陸英修(육영수) 여사의 묏자리 때문이 아닌가 한다. 陸여사의 묏자리가 물구덩이라는 것은 風水界의 공공연한 비밀인데 이 자리에 점지해 준 風水가 육관과 지창룡이다. 이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것 아닌가』
여성지 발행인 K씨는 그 자리에서 즉각 『유능한 기자들을 붙여 취재해 보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은 지체 없이 이행되었다.
그해 4월호 Y지에는 당시 한국역학지리학회 회장인 지창룡과, 한국족보학회 회장 등 무려 30여 개 단체의 「회장」 직함을 지니고 있던 육관을 인터뷰한 기사가 실렸다. 陸여사 묘소와 관련된 중요한 대목을 추리면 다음과 같다.
<지창룡 『전날 청와대로부터 연락을 받았는데, (당일) 좀 늦게 국립묘지에 도착했어요. 그랬더니 이미 당시 지관으로 이름이 나 있던 남노인과 손노인이 먼저 와서 보고 있었어요. 金鍾泌(김종필)씨와 陸寅修(육인수)씨도 같이 있었는데, 벌써 자리를 정해 놨더라고요』
손석우 『지창룡씨와 함께 묏자리를 잡으려고 다니다가 李박사 묘 아래쪽과 위쪽을 점찍었으나 지씨가 계속 우겨서 나는 손을 털고 빠져나왔어요』>
이 우스운 책임공방은 법정 고소사건으로 비화됐는데, 사실 여부를 떠나 이런 모습이 風水에 대한 世人들의 믿음을 크게 손상시켰다.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있는 朴正熙 前 대통령과 陸英修 여사의 묘.
金日成 사망을 예언한 육관도사 손석우
육관이 유명해진 데는 몇 가지 대한민국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과 연관지어 언론이 「만들어 낸」 측면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金大中(김대중) 前 대통령 선친 묘소 이장과 관련된 부분이다.
金大中 前 대통령이 아직 야당 지도자로 있을 때 그 부모와 전처 車씨 묘소를 용인으로 이장하는 일을 육관이 맡았다. 세간에는 이로 인하여 金大中씨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 소문은 아직도 진실인 것처럼 떠돌고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필자가 보기에 金大中 前 대통령 선친 묘소와 車씨 묘소는 모두 失穴(실혈)하여 명당이 아닌 평범한 「무덤」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런 무덤의 자손이 어떻게 대통령이 될 운을 타고났다는 말인가? 필자가 더 자세하게 확인할 길이 없으나 金大中씨 부모 묘소 말고 그 이전 선영을 샅샅이 살펴보면 아마 틀림없이 대단한 명당(군왕지)이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육관을 결정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사건은 「金日成 사망」이었다. 이 「사건」을 예고한 대한민국의 무속인·風水 등이 육관 말고 몇 사람 더 있었으나 언론을 타고 독보적으로 유명세를 탄 것은 육관이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TV 화면에 등장한 육관은 『나는 땅속이 훤히 보인다』고 장담했고, 이에 자극받은 모 방송사의 PD가 『그렇다면 시험해 보자』고 미리 땅속에 뭔가를 묻어 놓고 육관의 예지력을 시험해 보기로 했으나 그 자리에 육관은 나타나지 않았다.
육관은 또 「자미원」이라는 이름의 「지상 최고의 吉地」가 충청남도 어딘가에 존재하며 전 세계 인구가 78억이 될 때 대한민국에서 세계를 이끌 지도자가 등장하는데 자미원에 묘를 쓴 사람의 가문에서 나온다고 예언했다.
육관이 他界(타계)했을 때 사람들은 자미원과 관련하여 육관이 자신의 身後地를 어디에 잡아 두었는지 지켜보았다. 과연 육관은 충청도 가야산 국립공원 내에 身後地를 잡았으나 필자가 보기에 이곳은 지상 최고의 길지와 거리가 멀었다.
張龍得(장용득)도 훌륭한 風水였다. 장용득에 대해서는 朴正熙와 金載圭(김재규)의 엇갈린 운명을 얘기할 때 김재규 선친의 무덤 조성과 관련하여 한 번 등장시킨 일이 있었다.
창생구제하는 風水의 등장 기대
그때 김재규 선친의 무덤 자리를 봐주며 『이곳은 君王地(군왕지)』라고 말한 사람이 육관이었다. 군왕이 될 운명을 타고났다고 자기 암시의 덫에 걸린 김재규가 朴正熙를 시해한 후 장용득은 엉뚱한 오해를 받아 수사기관에 쫓기는 신세가 됐다. 風水의 한마디 말이 이처럼 엉뚱한 일을 촉발하는 단서가 되기도 하므로 조심할 일이다.
오늘날 風水지리학은 전환점에 섰다. 신비주의의 옷을 걸치고 전설 같은 이야기로 대중의 관심을 모으며 대중매체의 부추김을 받아 상업주의 시대에 영합할 것인가? 현대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인간의 삶과 역사 발전의 원리를 천착하여 창생을 구제하는 데 보탬이 될 것인가. 개인의 발복이 아니라 창생의 편안한 삶에 도움을 주는 위대한 風水가 나오기를, 이 시대는 갈망하고 있다.●
경주최부자댁 이야기 12대 만석꾼 '경주 최 부자댁' 이야기
'부불 삼세(富不三世)' 라고 하지요. 부자는 삼대를 못 간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12대, 300년에 걸쳐 만석꾼(1년 쌀 수확량이 만석인 대단한 부자)을 지낸 집안이 있습니다. 바로 '경주 최 부자댁' 입니다.
첨성대 주변에 계림 숲이라고 있는데, 그 계림 숲 뒤편에 바로 최 부잣집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최고의 부자였던 경주 최 부잣집은 1600년대 초반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만석꾼의 부를 유지했습니다. 이떻게 관리를 했기에 자그마치 300년 동안이나 만석꾼 소리를 들으면서도 사람들의 존경과 신망을 한 몸에 받으면서 살았을까요? 바로 최씨 집안에는 대대로 철칙으로 지켜져 내려오는 여섯 가지 가훈이 있습니다.
첫째 -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은 하지 말것' 조선시대에 진사 시험합격은 양반 신분증의 획득과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최 부잣집에서는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 철칙이었습니다. 벼슬을 하면 욕심이 끝이 없어 권력에 맛을 들이게 되고, 결국에는 권력 다툼에 휘말리게 되어 온 가족이 화를 입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래서 최 부잣집은 돈만 잡고 권력은 처음부터 포기를 했습니다. 이른바 '정경분리(政經分離)'를 실천한 것입니다.
둘째 -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부자일수록 재물에 더 탐낸다' 고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최 부잣집은 적당한 선에서 멈출 줄을 알았습니다. 1년 소작료 수입은 만석을 넘기지 않았습니다. 그 이상은 내 돈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과감하게 브레이크를 밟은 것이지요. 만석이상의 재산은 소작료 할인 방식으로 사회에 환원을 했습니다. 다른 부잣집들이 소작료를 수확량의 70% 정도 받았다면 최 부자는 40%에서 멈추었고, 소작료가 저렴하니까 경주 일대의 소작농들은 최 부잣집 농사를 짓기 위해서 앞 다퉈 줄을 섰습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팠지만 최 부자가 논을 사면 박수를 쳤다고 합니다.
셋째 - '흉년기에는 땅을 늘이지 말 것' 조선시대에는 흉년이 들면 수천 명씩 굶어 죽는 시대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당장 굶어 죽지 않기 위해 가지고 있는 논과 밭을 그야말로 헐값으로 내다 팔았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 이었으니까요. 너무 굶주려 '흰죽 한 그릇 얻어먹고' 내놓는 논과 밭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흉년이야 말로 없는 사람에게는 지옥이었지만 있는 사람에게는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최 부잣집은 이런 논과 밭을 결코 사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는 가진 사람이 취할 도리가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었죠.
넷째 -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최 부잣집을 찾는 어떤 사람이라도 극진히 대접하고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최 부잣집 사랑채는 100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였고, 1년에 약 1천 석의 쌀을 과객들의 식사 대접에 사용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과객들이 묵고 가는 사랑채에는 별도의 뒤주를 둬 누구든지 쌀을 가져가 다음 목적지까지 노자로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를 했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최 부잣집의 인심은 널리 알려졌으며, 민란 등 사회적 혼란기에도 폭도들이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다섯째 -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최 부잣집에서 1년에 소비하는 쌀의 양은 대략 3천 석 정도였습니다. 그 가운데 1천 석은 식구들 양식으로 사용하고, 그 다음 1천 석은 과객들의 식사 대접에, 나머지 1천 석은 경주를 중심으로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보릿고개가 닥치면 한 달에 100석의 쌀을 무료로 나눠 줬습니다. 주변이 굶어 죽는데 나 혼자 만석꾼으로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부자 양반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여섯째 - '시집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집안 살림을 담당하는 여자들은 절약 정신을 무엇보다 중시했습니다. 보릿고개 때는 집안 식구들도 쌀밥을 먹지 못하게 했고, 은수저도 사용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시집오면 3년간 무명옷을 입게 함으로써 절약 정신을 강조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빌 게이츠를 가진 자의 의무를 다하는 사람으로 비유합니다만, 우리나라에도 경주 최 부자와 같은 참다운 부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노블리즈 오블리지(noblesse oblige)' 입니다. '가진 자의 의무' 이지요. 요즈음 '나눔 문화'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습니다. 돈 많이 버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부자는 바로 '나눌 줄 아는 부자'가 아닐까요?
동래정씨 명당이야기 동래정씨 동래 정씨는 신라 고려때부터 본래 대단한 가문으로 이조 500년사이에 왕족인 전주 이씨와 세도정치로 유명한 안동김씨 다음으로 재상을 17분이나 배출한 가문이며 특히 왕비 간택되는 것을 꺼려 외척을 만들지 않았던 가문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가문의 가풍이 풍수를 선호한 흔적이 뚜렷하여 전국의 명당에 동래 정씨의 묘가 많이 있다. 또한 명당 전설도 많이 전해지고 있어 가문의 풍수지법을 엿볼 수 있다.
1. 동래 정씨 2세조 정문도 공의 묘 정문도 공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즉 큰 아들인 穆과 둘째인 先祚가 그들인데 큰 아들인 穆은 풍수지법에 대해 해박하였으나 그 장지를 정하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죽었을 때 맏아들 목(穆)은 장지(葬地) 문제로 고심하다 마침내 동래부사(東萊府使)를 지내던 고익호(高益鎬)에게 자문을 구했다. 동래부사는 그에게 화지산을 권했고, 과연 그가 본 즉 대단한 명당터였다.그는 기뻐하며 동래부사가 일러준 화지산에 장례를 치루었다. 아버지를 편안하게 모셨다는 생각으로 매우 흡족해 했다. 그러나 장례를 치룬 다음날 기쁜 마음으로 다시 그곳에 가 보니 누군가가 무덤을 파헤쳐 놓은 것이 아닌가. 너무 놀라고 황당하여 급히 복원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누구의 짓인지 모를 일이었다. 특별히 아버님이 남들에게 척진일도 없었다. 날이 새면 범인을 찾기로 하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부사를 동행하고 현장에 갔을 때 그는 다시 아연경색해야 했다. 다시 누군가 묘를 파헤친 것이었다. 그러기를 서너번. 어차피 자리를 옮겨야 할 일이나 범인을 잡아 요절을 낼 참이었다. 분통을 새기며 그곳에서 밤을 밤을 새워가며 숨어지켜 보기로 하였는데, 밤이 어지간히 깊었을 때 누군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는 긴장하며 기다려보니 사람이 아닌 도깨비들이었다. 도깨비들은 우루루 몰려와 무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 중 한 도깨비가 식식거리며 투덜댔다. " 여기가 어딘데 건드려, 이곳은 금관을 묻어둘 곳인데 사람을 묻다니 " 하면서 기어히 시체를 파헤치고 있었다. 穆은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사람이 아닌 도깨비의 짓인데 이를 어쩌나, 낮에는 봉분을 만들고 밤에는 도깨비가 파헤치기를 끝나지 않을 테니 또 어디로 옮길 것인가, 불효로다, 불효야, 하며 걱정을 태산 같이 하며 넋을 놓고 있었다.
그런데 한 노인이 나타나 " 아니 뭘 그리 걱정하시오. 아무일도 아니구만. 도깨비들은 눈이 나쁘니 황금 빛 나는 보리짚으로 관을 싸서 묻으면 도깨비들이 속을 것이오."하는 것이었다. 穆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노인은 사라지고 없었다. 다음날 그는 노인이 시키는 대로 집으로 관을 싸서 묻었다. 과연 그 후부터는 도깨비의 장난이 그치고 온전히 그의 터가 되어 무사했을 뿐아니라 그 발복이 끝이 없었다 한다.
2. 동래 정씨 중시조묘 내력 동래 정씨의 중시조가 되는 분의 집은 본래부터 대대로 매우 부자로 살았다. 집안이 화목하고, 자손이 번창하였으나 한가지 흠이라면 자손 중에 벼슬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남부러울 것이 없었고, 재산도 남부럽지 않았고, 그를 대하는 대우 또한 여느 벼슬아치보다 나았지만 모임이나 술자리에서 친구들의 자손이 벼슬길에 나간다는 얘기만 하면 기를 죽곤 했다. 그런던 중 어느 친구가 묘를 잘 보는 스님이 있는 데 백장백발이라 그를 귀히 여긴다 했다. 그말에 여러번 그 스님에 대하여 알아보고 그 증험을 알아본 즉 과연 그러하더라 하였다. 풍수라는 것이 사람의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다는 증험을 토대로 어느날 그 스님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사는 곳은 있으나 머무는 곳이 없고, 흔적은 있으나 잡을 수는 없던 차에 매우 어렵게 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찾게된 연유를 자세히 설명하고 터잡기를 부탁했다. 그 스님은 한참 생각하더니 이렇게 간절히 부탁하니 들어주긴 들어주겠는 데 한가지 약조를 해주면 그렇게 하겠노라고 했다. 그가 그러마 하자 스님이 말하길 " 쌀 삼백섬을 만들어 곳간을 지어 보관하되 내가 열라고 할 때까지 열지 마시오. 그러면 내가 벼슬을 할 수 있는 터를 가르켜 드리리다." 그는 어짜피 시작한 일, 끝까지 가보자고 다짐하며 스님과 약속을 하고 그날부터 쌀을 모아 창고에 쌓기 시작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해부터 가뭄이 아니면 장마로 쌀을 생산할 수 없기를 삼년이 계속 되었다. 그는 점점 집안이 쇠락해갔고, 급기야는 집안에 먹을 거 조차 없었게 되었다. 그래도 꿋꿋이 스님과의 약속을 지켰는데, 그가 굶어 죽을 정도까지 되었을 때 스님이 나타났다. "자, 이제 때가 되었오, 창고에 있는 쌀을 풀어 배고푼 백성들에게 나눠 주시오." 하는 것이었다. 그가 창고를 털어 백성들에게 다 나눠주자 스님이 매우 흡족해하며 이렇게 말했다. " 이제 약속을 지켰으니 나도 약속을 지키리다. 당신이 찾고 있는 자리는 바로 저 윗동네 참판댁 뒷뜰이 바로 천하 명당으로 벼슬이 끊이질 않을 것이오" 그리고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는 난감했다. 이제는 가지고 있는 돈이나 전답도 없고, 잘못하다가는 맞아죽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달리 뾰죽한 방도가 없었다. 어짜피 죽는 것인 데 말이나 하고 죽자는 심사로 참판댁을 찾아갔다. 간신히 참판을 만나 뒷뜰을 주기를 간청했다. 그런데 참판이 노하지 아니하고 한참 그를 뜯어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 당신이 바로 이 흉년 기근에 쌀을 풀어 백성을 규휼했다는 사람아니오. 참 장하시오,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당신의 가상한 마음때문에 내 기꺼이 뒤뜰이 아니라 이집을 드리리다." 그래서 동래 정씨는 이집을 얻었고, 그 뒷들에 조상의 산소를 쓴 후 벼슬은 물론 정승이 이어졌다 한다.
격암유록(格庵遺 錄)2 - 東西古今 최고의 예언서 - 한민족의 역사 신기루 그것을 알고싶다. - 남사고(南思古) 선생의 비밀. - 격암유록(格庵遺錄)을 해부 한다. - 성인은 누구이며,언제 오는가? - 민족의 미래는 어떻게,,,,?? - 우리는 왜 성인을 만나야 하는가? - 우리민족만의 비결이 여기에 모두! - 격암유록(格菴遺錄)? - 천부경(天符經) - 격암유록을 이해하는데 일부 어려운 용어는 용어록을 참고하세요.
세론시(世論視) 세상에서 왈가왈부하는 논리는 神(신)의 진리로 보건대 헛되고 가소롭다는 뜻이다. 橫二爲柱 左右雙三(횡이위주 좌우쌍삼) ☞ 가로로 된 이(二)를 기등으로 하면 ? 가 되고,좌우로 三을 똑같이 하면 비(非)가 되니 말세에 비진리(非眞理), 비행(非行), 비도덕(非道德)을 경계하고 조심하라는 뜻이다.
彎山工字之出 兩山之間(만산공자지출 양산지간) ☞ 만산(彎山)은 굽었고 이는 휘어진 산(山)이며 양산(兩山)의 사이( )에서 공자(工字)가 나오니 십자진리(十字眞理)의 공부도 되고 천공(天工) : 하늘의 하는 일)도 된다.
白木雙絲門月寸土(백목쌍사문월촌토) ☞ 백(白)은 서방(西方)이며 기독교사상이고 목(木)은 동방(東方)이며 천부경 사상에다 한적(閑寂)한 산사(山寺)에서 수도(修道)하는 스님과 도인(道人) 까지 전부 통합함을 뜻한다. 문(門)과 월(月)을 합치면 閒(한)이고 寸土(촌토)는 寺(사)이며 쌍사(雙絲) 는 묶는다, 즉 통합한 다는 의미이다.
復何在洲江兩合白一如亡一人日匕 (부하재주강량합백일여망일인일비)
☞ 다시 어느 곳에 있는가?(부하재;復何在)하면,주강(洲江)은 온세상 오대양 (五大洋)과 육대주(六大洲)의 문명의 발상지를 뜻하고 양(兩)이라면 크게 동양과 서양을 뜻하는데 이것이 합쳐져서 백십승(白十勝)을 이루는데 일(一)이 팽망(亡)한 것같이(如) 쓰러져 있고 일(一)이 흥(興)하여 이러서면( )합쳐 十(白十勝)이 되는날 (日)이 세상의 모든 것을 순화(純化) 교화(敎化)하는 곳이라는 뜻이다(人= 과 匕).
徐曺呂金 非運愛國(서조여김 비운애국) ☞ 서재필(徐載弼), 조만식(曺晩植), 여운형(呂運亨), 김구(金九)같은 분들이 나라의 비운(非運)일 때 애국했다는 뜻이다. 「격암유록」에서는 姓(성)은 있으나 이름은 없다. 우리 민족이 비운이고, 광복 전후일 때 유명한 사람으로 생각되는 姓氏(성씨)는 누구라고해야 되겠는가?
二十九日走者之人(이십구일주자지인) ☞ 二十九日은 음력으로는 小月이고 이것을 달리는 사람의 走(주)와 힙치면 趙(조)가 되니 이는 趙炳玉(조병옥) 선생을 말한다. 자유당 이승만 대통령 집권시 張(장면), 趙(조병옥)가 부통령과 대통령으로 출마하여 자중지란을 일으킬 것을 「격암유록」에서는 적고 있고,지나간 사실을 되돌아볼 때 조병옥 씨 말고는 누구이겠는가?
頭尾出田亂世英雄 不免項事 天運奈何 (두미출전난세영웅 불면항사 천운내하) ☞ 머리와 꼬리가 나온 전(田)은 신(申)이니 신익희(申翼熙),조병옥(趙炳玉)같은 난세의 영웅도 죽음을 면할수 없었든 것은 천운(天運)인데,어찌 하겠는가? 목과 관련된 일(項事)은 생사(生死)곧 죽음이다.
無量肉眼俗離之世(무량육안속리지세) ☞ 육안으로 헤아릴 수 없는 속리(俗離)인데 이는 충청도 속리산이 아니고 곧 진십자(眞十字)속이다.
遇者何辨入於俗離 於智異 山鷄龍遇哉 (우자하변입어속리심어지리심산계룡우재) ☞ 어리석은 자가 충청도 계룡산이나 속리산을 찾아 든다는 뜻이다.
深量白轉必死(심량백전필사) ☞ 입산(入山)하거나 산에서 수도(修道)를 하면 반드시 죽으니 깊이 헤아리라는 뜻인데,백전(白轉:白(백)이 몸을 돌리면 入山또는 人山처럼 보이는 글자가 되어서 필사(必死)하니 계룡산, 지리산, 속리산 등의 지리상의 십처(十處) 를 찾지 말고 일심전심(一心眞心)하여 마음의 십승지(十勝地)를 찾으라는 뜻이다.
二人橫三十二月綠(이인횡삼십이월록) ☞ 二人( )은 仁(인)이고, 옆으로 된 三(삼)은 川(천)이니 결국은 仁川(인천) 이된다. 十二月을 합치면 靑(청)이 되고 木(목)이며 綠(녹)은 「주역(周易)」의 구성법(九星法)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사록목(四綠木)이라 하고 이것은 巽(손 동남방)을 뜻한다. 실제의 지명인 仁川(인천)과 富川市(부천시)의 範朴洞(범박동)을 이용해서 혼란시키기 위한 방법이고,그 속에서 聖人(靑(청)의 木(목)과 綠(녹)의 木(목)은 林(임))이 나온다는 식으로 주의를 엉뚱한 곳으로 쏠리게 했다.
辰巳聖人(진사성인) ☞ 진사(辰巳)가 매우 많이 나오는데 四(巳)월천(月天)에 오는 성군춘래 하초진사지성덕 사월천중말세성군 손계진룡(聖君春來 夏初辰巳之堅德 四月天中末世聖君 巽鷄震龍)이 상혼(相婚)하여 탄생청림 정일도사야 (誕生靑林 正一道士也) 등등은 모두가 동방(한국)의 성인,진인 (聖人眞人)을 가리킨 글귀이다.
래패예언육십재(來貝予言六十才) 來貝予言六十才(래패여언육십재)
☞ 天上天下의 好運이 南朝鮮에 돌아오고 아울러 영생불멸(永生不滅)緖(서) 하는 진리를 가지고 하느님이신 성인이 오시는데 그분은 아주 먼 옛날부터 배달민족을 축복했구 그래서 많을 보물을 갖고 오시며 '나는 반드시 「천부경」의 진리로 조선이 고대의 중심국이 된 것처럼,다시 열방제국을 다스리는 나라로 만들 것을 예언으로 말했노라 하는 뜻이다. 來를 보면 큰 나무(성인)가두 사람(배달민족과 외국민족 즉, 전인류)을 옆구리에 끼고 안고 있는 모습이다. 하느님은 인류를 친자식처럼 사랑하고 아끼기 때문에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조개는 보물이나 재물에 관계되는 글자이고 성인이 오시면 많은 보배를 주신다는 뜻이다. 滿(만)으로 60세는 환갑(還甲) 또는 회갑(回甲)인데 六十甲子가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才(재)는 三才이고,「천부경」진리로 우리나라로 되돌아 오셔서(回還;회환) 땅(口)에서 중심국(口 나라 국)인 모습이 回(회)이고 甲은「주역」에서 거목 (巨木) 즉 성인이다. 내(하느님, 성인)가 한 말은 미리했으니 예언이고 또 축복이었느니라고 풀이된다. 予(여;나)는 豫(예)의 약자로도 쓸 수 있으니 이리 한나 저리 해도 豫言(예언) 으로 우리 민족은 축복받은 한(極;극)민족이다.
列邦之中高立鮮 列邦蝴蝶歌舞來 (열방지중고립선 열방호접가무래) ☞ 여러 나라 가운데서 높이 우뚝 선 곳이 조선(한국)이며,세계 각국에서 나비가 꽂을 찾아오듯이 많은 사람들이 노래하고 춤추며 온다.
六大九月海運開(육대구월해운개) ☞ 六은 작고(小) 九는 크며(大), 九大六小 가 융합(統一;통일)할 수 있는 숫자는 최소공배수인 十八인데, 합친 十八木은 성인(聖人), 진인(眞人)이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작아도 세계만방(世界萬邦)을 통일할 수 있는 성인을 배출 하고 』月이 있으면 日이 당연히 있는 법이라서 九와 日을 합쳐 旭(빛날, 아침해 욱)처럼 욱일승천(旭日昇天)하는 천하대운(天下大運)이 와서 해운국 으로서의 위력을 전개한다는 뜻이다. 또한 「주역(周易)」에서 양(陽 凸)은 강건하고 적극적이며,진취적이라 양수 (陽數)의 一,三,五,七,九 중에서 九를 陽(양)의 대표로 삼고,음(陰 凹)은 소극적이고 유순하여 二,四,六,八,十 중에서 가운데에 해당하는 六을 陰의 대표로 삼는다. 그래서 陰陽(음양)이 화합하는 모양인 六九(육구)는 방정(方正)하고 陰上陽下 (음상양하)인 것을 지천태괘(地天泰卦)라 하여 이는 온세상이 태평함을 뜻하고, 귀신(鬼神)이라 하여 마귀가 먼저 세상에 나와서 방정을 떨지만 신이 나중에 출현하여 삼라만상(森羅萬象)을 方正맞게하는 때에 우리나라는 해운이 크게 열리고 세계를 제패하고 주도한다는 뜻이다. 陰陽合日三十定(음양합일삼십정) ☞ 일(一)은 양(陽)이고 천(天)이며 이(二)는 음(陰)이고 지(地)인데, 천지조화 (天地造化)에서 一과 二를 합친 수 삼(三) 즉 인(人)이 생겼다. 十(십)은 궁궁배궁(弓弓背弓)의 시공(時空)을 초월한 낙원, 천당, 극락, 선경(仙境)이니 천지의 음양이 화합(和合)하고 통합하는 날 천지인일체 (天地人一體) (三) 「천부경」의 진십자(眞十字) 진리로 삼라만상이 평정 (平定)되고 안정되는 것을 말한다.
仲婚(중혼) ☞ 성인(聖人)이 배우자(配偶者)를 잃고 재혼(再婚)하는 것을 말한다.
木人飛去後待人 山鳥飛來後待人 (목인비거후대인 산조비래후대인) ☞ 목인(木人)은 박(朴)을 말하고,이는 박정희 대통령을 뜻하며,조(鳥)는 새추()와 같은 뜻이니, 산(山) 합치면 최(崔)가 되는데. 최규하 대통령을 말함이다.
계룡론(鷄龍論) 계룡은 성인이란 뜻이고 이는 진리이며 똑바르고 정중(鄭)하여 삼라만상을 바로 비추어 볼 수 있는 진리의 거울(鑑)인데 남한에 출현할 것임을 논했다.
天下列邦回運 槿花朝鮮鷄龍地 (천하열방회운 근화조선계룡지) ☞ 세계 만방의 좋은 운(運)이 한국 땅의 성인(聖人)이 출생한 곳으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好事多魔不免獄(호사다마불면옥) ☞ 성인(聖人)이 진리(眞理)를 펴고 주장하시는 좋은 일이 있는 반면에 나쁜 일, 옥살이를 면할 수 없다는 뜻이다.
南渡蛇龍今安在(남도사룡금안재) ☞ 남쪽에서 건너온 종교 중에는 뱀과 같이 衆生(중생)을 잘못 인도하는 것과 용과 같이 하느님의 참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말세(末世)인 지금 둘다 편안하게 한국땅에 있다는 뜻이다.
枾木(시목) ☞ 나무(木)와 관련된 것 즉,枾(감시),橄(감람나무 감),松柏(송백):소나무와 잣나무) 등은 전부 성인과 진인(眞人)을 말한다. (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