點描 몇 점 - 10회 이기흥(영주중 국어교사)

[서상호/25]

 

點描 몇 점

이기흥(李基興)*

1. 현재진행형의 모교

 마흔 여섯 해 전, 어린 우리는 볏짚으로 인 초가 교사(校舍)에서 중학생이 되어 설레는 사춘기를 시작했다. 우주가 한 번 회전하여 제자리로 돌아와 다시 운행을 시작한다는 회갑을 코앞에 둔 오늘도 그 때는 과거가 아니라 항상 현재진행형으로 입력되어 있다. 풍기 바람에 수염과 함께 휘날리던 두루막자락의 그 분이 아직도 눈에 생생하니, 그 시절 우리의 잔뼈 속에 든 하잘것없던 생각의 깊이를 이만큼이나 키우신 송지향 선생님께서는 그러께 저 세상으로 가셨어도 우리는 그 분을 보내지 않고 있는 셈이다.

 장터까지는 제법 먼 길이었으나, 자전거 한 대 구경하기조차 예사롭지 않던 시절, 우리는 십자거리 왕자표 고무신 가게에서 산 운동화 한 켤레로 타박타박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걸어서 등교하고 하교했어도 절망하는 법 없었으니, 금계중학교는 내 삶의 젖줄임에 틀림없다.    

2. 쇠바리 박샘

 용천동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한 쇠바리엔 그 때에도 몇 채의 집들이 이마를 마주하고 도란도란 정겹게 이웃하고 있었다. 상수도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던 그 때에, 향나무 한 그루 지키고 선 박샘은 이 마을 사람들에겐 없어선 안 될 식수원에다 허드렛물까지 제공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 박샘이 가난한 이 시절, 우리 금계중학교 학생들에게는 참으로 생명수였다.

 보릿고개, 이 낱말의 앞 두 음절의 부드러움에다 뒤 두 음절의 막힐 듯한  느낌을 겪어보지 않은 이는 이 글 읽기를 여기서 그치고 다른 페이지로 넘어가길 바란다. 하지만 우리의 배고픈 고통을 말하기엔 우리보다 더 아픈 고통을 기꺼이 견딘 선배님들께는 좀 미안한 노릇이긴 하나 용서해주리라 믿는다.

 한 학년이 한 반, 여든 명 안팎의 우리는 점심 도시락을 챙기지 못한 동무들이 대부분이었다. 어쩌랴, 초등학교만 졸업하고는 자그마한 제 한 입 풀칠하려고 서울로 부산으로 떠난 동무들에 비하면 그래도 우리는 행복했다, 중학생이었으니까. 하지만 가난한 우리는 점심시간이면 고픈 배를 움켜쥐고  박샘으로 달려가 꿀꺽꿀꺽 바가지 하나 가득 들이켜야 했다.

 그러나, 외롭지 않았다. 슬프지 않았다. 절망하지도 않았다. 떨어져 너덜너덜한 고무신을 끌고 학교에 다녔어도 외롭거나 슬프거나 절망하지 않았던 지난 여섯 해가 있기도 했지만, 우리 동무들은 한 마음으로 서로를 아끼고 사랑했으며 선생님께서는 늘 부드럽고 인자한 눈으로 우리를 보듬어 주셨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 박샘과 함께 한 동무들, 그리고 인자한 눈길 주시던 선생님들은 우리를 있게 한 탯줄인 셈이다.

3. 울밑에 선 봉숭아, 그리운 계삼정 교장 선생님

 비 오는 날이면 교장실에서 흘러나오는 나지막한 노래가 있었다. ‘울밑에 선 봉숭아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이제 망향의 한을 안으로 삭이며 우리의 계삼정 교장 선생님께서 창문 밖을 내다보시며 노래를 부르고 계신다, 나지막이.

 다 알다시피, 선생님께서는 화가이시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나는 그 분께서 이젤을 받치고 그림을 그리시는 모습을 뵌 적이 있다. 뒷창락 가는 길-아니다, 이제는 동양대학교 가는 길이라고 해야 알아듣는다, 하지만 그 시절 우리와 함께 한 동무들은 내가 선택한 낱말에 가슴이 따스해 올 것이다.-철길 못 미쳐, 과수원이 내려다보이는 길섶에 이젤을 받치고 먼 곳 도솔봉을 배경으로 하여 한 폭 풍경을 담던 모습을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어른이 되어 내가 몸담고 있던 교무실 동쪽 벽에 걸린 한 폭 풍경을 보고 눈이 둥그래진 적이 있다. 선생님의 그림이었다. 나는 곁에 있던 미술 교사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박 선생님, 저 그림 어때?”

 “아, 굉장합니다. 붓질에 힘이 넘칩니다. 대단한 분임에 틀림없습니다.”

 “내 중학교 때 은사님이셔, 저 그림 그린 분이.”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 여러 번 선에 든 박선생님이 대가로 알아보는 것도 기분이 좋았지만, 내가 누군가, 바로 저 분의 제자가 아닌가, 그래서 더욱 우쭐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1학년 때였다. 선생님께서는 앞자리에 앉아 있는 여학생의 얼굴을 칠판에 분필로 그리신 적이 있다. 그 짧은 시간에 불과 몇 개의 선으로 이룩한 그 여학생의 모습을 보며 나는, ‘아’, 하고 감탄사를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칠판에 그린 그림이라 지우개로 지워야 한다는 사실이 어린 나이에도 그렇게 안타까울 수 없었다.

 하마 여러 해 전에 선생님께서도 이 세상을 떠나셨다. 한결같이 예뻤던 선생님의 따님들의 모습과 함께 겹쳐 떠오르는 선생님께서는 아직도 우리 동무들 가슴에 살아 계신다. 현재진행형으로. 아, 그립다.

4. 초가 교사(校舍)

 우리가 공부하던 교사는 볏짚으로 이엉을 덮은 초가였다. 칠십 년대를 지나며 온 마을을 단잠에서 깨우던 새벽종이 새마을 만든답시고 동네의 정겨운 돌담을 시멘트 브럭 담장으로 바꾸면서 초가도 사라졌다. 그러니 요즘 아이들은 초가 구경하러 안동 하회 마을로, 아니면 일부러 꾸며 만든 민속촌으로 체험 학습을 떠나지만, 우리는 학교도 초가였으니 얼마나 신나는 일이었겠는가!

 나는 그 시절을 희화화하기 위하여 이런 표현을 하는 게 아니다. 생각해 보라, 시멘트로 포장한 논두렁길이 낫겠는가, 아니면 토끼풀 흰 꽃 핀 논두렁길이 낫겠는가. 자동차로 편하게 달릴 일 생각하면 전자가 낫겠지만 휘파람 나직이 불며 소백산 쳐다보며 걷기엔 후자가 낫지 않겠는가. 빨리 가는 삶 좋다 달리는 이에겐 에쿠스가 좋겠지만 느리게 살고 싶은 이에게는 천천히 걷는 두 발이 더 좋은 법이다.

 우리를 가르치던 선생님도 걸어서 출근했고, 배우는 우리 학생도 걸어서 등교했던 시절, 그 시절엔 초가에서 공부했다는 사실에 부끄럽지 않았다. 우리는 당당한 중학생이었던 것이다. 학교 사랑도 만만치 않아 이웃 P중학 동무들에 뒤지지 않으려 했다. 그러다 보니 그들과 육박전도 마다하지 않았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운동장에서 조례가 있는 날이면, 우리는 그 때 새로 만들어진 악대(樂隊)를 앞세우고 교가를 부르며 교실로 힘차게 발을 옮겼다. ‘자립, 신의, 협조’는 그 때, 우리 금계중학교의 교훈이었으며 교가의 노랫말에도 이 교훈을 지키며 이 세상 살겠노라 했다. 그 때 심벌즈를 치던 우리 동무 L은 신문 기자로, 누름쇠도 없는 나팔을 잘 불던 J는 대기업 이사로 일하고 있다. 그러나 큰북을 치던 H는 이 세상을 달리 하고 말았다.

 한 장의 흑백 사진으로 헤어진 동무들이 이제는 그립다. 졸업사진첩조차 장만할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나는 이 한 장의 사진을 보며 한 없이 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의자 한 줄, 책상 한 줄 늘어놓고 몇 줄 나란히 서서 사진기의 렌즈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동무들이 내가 손을 내밀면 빙긋 웃으며 내 손을 마주 잡는다.

 그러나 기차 객실 한 칸 보다 더 길었던 초가지붕 우리들의 교실은 이 사진 속에서는 기와로 바뀌어 있다. 전교생이 장터에서 손으로 날라 온 한 장 한 장의 기와가 지붕을 바꾼 것이다. 내 손으로, 아니 우리 손으로 교실 지붕을 바꾸었으니, 정말 자랑스러운 일 아닌가?

 그 때, 우리의 꿈은 ‘일초’처럼 빨리 삶의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일초’는 소백산 아래 첫 번째 마을 삼가동에 사는 젊은이였는데, 닷새에 한 번씩 열리는 풍기장날 번개처럼 왔다가 번개처럼 사라지곤 하여 그 빠른 걸음에 감탄하며 우리들이 붙인 별호이다. 지금 생각해도 어린 우리가 생각해낸 별호치곤 제법 창의적이다.

 삶의 목표라는 것이 쉽게 달성되는 것도 아니며, 한 차례 세운 목표가 달성되어도 만족하기란 더욱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된 지금이다. 일초처럼 재빠른 걸음보다 더 빠른 자동차가 내 차가 되어 빠르게 움직여도 배고팠던 그 시절보다 더 행복하지 않은 것은 왜일까?

 춥고 배고팠던 시절이었지만 등 뜨시고 배부른 지금보다 초가지붕의 우리 금계중학교가 그리운 것은, 아, 우리의 꿈은 푸르렀기 때문이다.

5. 사은회와 송지향 선생님

 이러구러 세 해가 금세 흘렀다. 졸업을 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사은회를 열었다. 사은회장이라야 우리들이 공부하던 교실에 우리들이 쓰던 책상을 두 줄씩 마주 붙이고 그 위에 몇 가지 음식을 놓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니다. 선생님을 모신 책상 위에는 자그마한 선물도 있었다. 나는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우리가 선생님을 위하여 사은에 보답한답시고 마련한 예물은 밥그릇이었다. ‘스텡그릇’, 스텐리스를 우리는 그 때 스텡이라 불렀다. 놋그릇을 밀어내고 스텐리스 그릇이 막 유행할 때였다.

 누구의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그 그릇 안에 선생님께서 대답하시기에 곤란할 듯한 질문을 한 가지씩 종이에 써서 넣어 두었다. 무슨 질문을 했는지 기억에 남는 건 하나뿐이다.

 ‘송지향 선생님, 왜 수염을 기르셨나요?’

 선생님께서는 난감할 때면 선생님도 모르는 버릇이 하나 있었다.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수염 끝을 매만지시는 버릇. 그 때도 그러셨다. 침묵이 꽤 길었다. 우리들은 숨도 죽인 채 선생님께서 하실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쟁 중에 밤이면 공습 때문에 등불을 못 켜게 했어요. 우리 집 젖먹이가 밤중에 엄마 젖 찾으며 더듬다가 수염 만져지면 내 가슴 파고들지 않게 하려고……”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소백산 능선처럼 느린 곡선이셨다. 우리는 선생님께서 수염을 기르신 진짜 까닭을 몰라도 이 말씀에 행복했다.

 오늘, 죽령 옛길에 선생님께서 쓰신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소백산 연봉들이 만든 능선처럼 느리고 긴 호흡의 문체로 엮여진 안내문을 읽으면서, 나는 지금부터 마흔 몇 해 전 선생님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선생님께서는 이 시대의 참 선비셨다. 그리고 그 분은 우리 선생님이시다. 그 때, 금계중학교를 나온 이들은 그런 의미에서 행운아이다. 좀체 만나기 어려운 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가르침을 받았으니 말이다.

 지금도 비로봉 가는 길 금계동 지날 때가 있다. 두루마기 자락에 긴 수염 휘날리던 선생님께서 아직도 거기 계시다.

6. 영원한 모교

 학교 세워진 지 반 세기가 넘었다. 한국 전쟁의 절망 속에서도 무릎 꿇지 않고 희망의 싹을 가꾸며 스물 두 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한 지 쉰 세 해, 일만 명에 육박하는 우리 금계인도 이제 곳곳에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우리 금계인들이 지닌 특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옳은 뜻 허물지 않는 굳은 의지, 동무들에 대한 믿음과 사랑, 그리고 서로 돕는 정신은 특히 두드러진 특징이다. 자립, 신의, 협조는 선생님들께서 우리들에게 늘 일깨우던 으뜸이 되는 덕목이었으며, 우리 금계인은 이런 덕목들을 가슴에 담아 키우며 살고 있다.

 동문들이 만나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국적은 바꾸어도 모교는 못 바꾼다.”

 그래서 모교는 영원하다. 모교가 있어 우리는 그 때의 푸른 꿈을 훈장처럼 소중히 간직할 수 있다.

 금계중학교여, 영원히 빛나라! 그대 있어 금계인은 영원히 빛나리라!

 *10회, 영주중학교 교사

[팬더곰]

반가워요,미처 내가 떠올리지못한 생각들을 잘도 기억해줘서,그래도 기흥님께선 악대라도 조직된 상황에서 학습을 하였다는 사실 만으로도 우리보단 더 개선된 환경이 었으니...故桂선생님은 훌륭한 화가이셨고 음악도 즐겨부르시는

[팬더곰]

때를 잘못 만난 훌륭한 분 이셨다는 겄을 동감 합니다

[팬더곰]

참다운 예술가 셨는데 시대를 잘못만난 애석한 분이라고 생각 합니다

[팬더곰]

宋지향 선생님도 桂선생님에 못지않는특이한 분이었고 지역에 한분 뿐이었던 향토사학자 였는데두분다 아까운 분이었지.....옛생각이 자꾸 떠올라서...짧은 문장 살력으론 다표현 할수가 없는 그런 시대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