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부 겨울 수련회를 마치고
12월부터 무척 바빴다. 정말로 바빴다. 반딧불이 연말정산에 오병이어 그리고 교회학교 성탄 행사까지 정말이지 하루라도 그냥 누워서 잠만 자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새해가 되면 조금 달라지겠지, 아니 다르게 살고 싶었다. 여유도 갖고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도 관심을 갖으며 살고 싶었다. 책도 보고 산에도 오르고 무엇인가 충전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오죽 정신이 없었으면 차 안에 버려진 귤 껍질 과자 봉지와 같은 쓰레기들도 그냥 그대로 치우지 않고 다녔다. 치워야지 하는 생각은 굴뚝이었지만 좀처럼 짬이 나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정신없이 지내다보니 학생부 수련회가 코 앞으로 다가왔다. 임원들과 그리고 새롭게 교사가 된 강경희 집사님과 함께 저녁을 먹고 올 한해 학생부 방향과 수련회 계획을 이야기 했다. 프로그램도 아이들이 손수 짜고 각자 역할도 맡았다. 그런데 문제는 전혀 다른 곳에서 터졌다. 동생에게 미리 부탁해두었던 유성 우체국 콘도가 내부 사정에 의해서 예약이 취소가 된 모양이다. 수련회를 일주일도 채 남겨놓지 않고 동생에게 전화를 받은 나는 그야말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다. 안한신다고 하는 이광빈 목사님께 사정사정해서 강사도 섭외하였고 신학교 시절 은사였던 류장환 교수님에게도 아이들을 만날 시간을 약속해 놓았는데 이 모든 것이 무산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며칠 앞두고 인터넷을 통해 대전 인근에 있는 콘도나 펜션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모두가 예약이 된 상태였다. 대전에 있는 인맥을 총동원하였다. 심지어 근석선배에게 까지 전화를 했다. 그런데도 묵을 곳을 찾지 못했다. 이즘 되니 그야말로 똥줄이 탔다. 수련회 가기 하루 전, 아침 일찍 나는 안 사람과 집을 나섰다. 동학사 부근 민박집들을 돌아보기 위해서였다. 직접 발로 뛰면 괜찮은 숙소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어렴풋한 희망을 갖고 출발을 한 것이다. 그런데 근석선배와 통화를 하던 중 금산에 있는 대영 선배네 교회도 괜찮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곳으로 차를 돌렸다. 이왕이면 수련회를 하기에는 교회가 나을 것 같았다. 산 속에 위치한 금산평화교회는 정말 좋았다. 그런데 좁았다. 그리고 방이 하나였다. 남자와 여자가 한 방에서 잠을 자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름보일러를 돌리고 난로를 틀어야 하는 것도 부담이었다. 그렇다면 장소 사용료를 얼마나 드려야 하는 것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어려운 시골교회, 그것도 개척한지 1년도 되지 않는 교회로 수련회를 가서 그냥 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당장 내일이 수련회인데 정말이지 답이 없었다.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산에 계신 아버지와 어머니는 장사를 하시느라 집을 비워두고 가게에서 생활을 하신다. 집을 비운지 두 달 정도 되었다. 방이 세게고 거실이 있는 집이니까 그곳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나머지 프로그램은 이광필 목사님 교회와 목원대학교에 가서 하면 되겠다 싶었다.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장소는 해결이 되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아이들끼리 서로 누가 가면 안 간다는 것이다. 그 놈들이 가면 분위기도 망치고 수련회가 안 된다는 것이다. 안 간다는 무리가 꽤 많았다. 어렵게 장소까지 준비가 되었는데 아이들이 가지 않으면 무슨 소용일까? 그것도 가장 힘들 때 그리고 가장 중요할 때마다 항상 내 옆에서 나와 함께 있어주던 녀석들이 그랬다. 그래서 녀석들을 만나 설득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다른 녀석들이 와도 네가 가지 않으면 이번 수련회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 내 이야기였다. 그리고 네가 정말로 필요하다고 이야기를 했다. 진심이었다. 다른 녀석들이야 수련회에 와준다고 하니까 고마운 것이고 이 녀석들은 정말이지 무엇이라도 주고 싶은 녀석들인데 이놈들이 가지 않는다고 하니 나는 마음이 아팠다. 사실 많은 고민을 했다. 몇 명만 못 오게 하면 참 편하고 재미있는 수련회를 할 수도 있다. 그 녀석들은 교회에 잘 나오던 놈들도 아니고 큰 행사만 있으면 오는 녀석들이었다. 그래서 내겐 심각한 딜레마가 시작되었다. 다른 아이들을 위해서 이 아이들을 정리할 것인지 그래서 수련회를 안전하고 편하게 가져갈 것인지 아니면 그래도 이 녀석들을 품어 안고 수련회를 할 것인지 정말로 고민이었다. 그런데 내 결론은 오겠다는 놈들 막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함께 가서 이번 수련회를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녀석들이 조금이라도 감동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주님께서는 99마리의 양보다 잃어버린 어린 양 한 마리를 귀하게 여기신다. 는데 나도 그런 품성을 닮아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녀석들을 포기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이런 마음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을까?
하여튼 한 명 한 명 붙잡고 이야기를 했다. 나는 진심과 진실은 서로 통한다고 믿는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데도 최선을 다해서 내 진심을 이야기 했다. 그 순간만큼은 진실했다고 믿는다. 그리고 함께 이야기 했던 친구들도 수련회에 같이 가기로 하였다. 말은 안 했지만 얼마나 기쁘고 얼마나 감사하던지 나는 자칫 눈물을 보일 뻔 했다. 녀석들은 아마 모를 것이다. 내가 녀석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놈들이 나에겐 어떤 의미인지.
수련회 가는 날이다. 2시에 출발하기로 하였다. 아이들이 하나씩 하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20명이나 모였다. 차는 정원이 17명인데 큰일이다. 목사님과 상의해서 송악골 어린이집 15인승 봉고차로 교체를 하였다. 하여튼 참가하는 인원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나는 역시 무대포다. 준비도 그렇고 대책도 참!!
수련회 장소로 출발하는 내내 목사님은 심기가 불편하셨다. 뒤에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참을 수가 없다고 하셨다. 어른이 있건 없건 욕을 하고 차마 입에 담기 민망한 소리를 하는 통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놈들을 대리고 시작하는 2박 3일이 참으로 걱정이라고 하셨다.
우리 차는 정말이지 가관이었다. 운전석 창문을 톨게이트 비를 내게 위해서 내렸는데 다시 올라오지 않는 것이다. 톨게이트 바로 앞에 구제역 때문에 방역을 실시하는 곳을 통과해야 하는데 정말로 난감했다. 그냥 가자니 소독약이 차 안으로 전부 들어올 것 같았다. 아무리 해도 창문은 다시 올라오지 않고 어쩔까 하다가 소독을 하는 곳을 비껴서 지나갔다. 소독약은 간신히 피했는데 우리는 내내 찬바람을 맞으며 달려야 했다.
여는 예배를 드리고 짐 정리를 한 후 모둠을 나누고 저녁을 먹은 후 우리는 이 목사님 교회로 출발을 했다. 이 목사님은 여러 가지로 참 바쁘신 분이다. 그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부탁을 했다. 누구보다 그 시절을 어렵게 지냈던 목사님이기에 아마 아이들에게도 해줄 수 있는 말이 많을 것이고 또 목사님의 삶은 그 누구보다 아픔과 고난이 많았기 때문에 그만큼 깊이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거의 때를 쓰다시피 해서 섭외를 했다. 2시간 정도 이어지는 집회 시간동안 녀석들 그래도 평소보다는 잘 들었다. 말씀도 참 좋았다. 집회를 마칠 무렵 이봉윤 집사님과 강경희 집사님이 오셨다. 언제나 든든한 학생부장님과 우리 학생부 선생님. 집회가 끝이 나고 우리는 인도네시아로 돌아가는 라삐드 송별회를 하였다. 케이크에 불을 붙이고 찬양을 불러주고 아이들 하나하나가 라삐드와 포응을 하고 라삐드에게 작별인사를 하였다. 개중에는 라삐드와 함께 우는 아이들도 여럿 있었다. 녀석 다른 친구들이 ‘천사’라고 부르는 놈이다. 심성이 착하고 순한 라삐드는 언제나 거절을 못했고 늘 힘이 돼 주던 녀석이다. 라삐드가 고향에 가서도 언제나 다른 이들에게 ‘천사’가 될 수 있기를 나도 또한 두 손을 모았다. 수련회 가기 전날 밤이었다. 라삐드에게 전화가 왔다. 수련회를 정말로 가고 싶은데 금요일 오전에 반딧불이 선생님들과 라삐드네 가족이 마지막 이별여행을 가기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득이 하게 수련회 참석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데 혹시 첫째 날 나오는 차가 있다면 하루라도 참석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봉윤 집사님에게 전화를 하였다. 첫째날 혹시 오실 수 있냐고. 흔쾌히 허락을 하셨고 나 또한 반가운 마음에 라삐드에게 전화를 했다. 수련회에 참석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좋아하던지. 그리고 녀석 갑자리 말끝이 흐려지더니 우는 것이다.
“목사님 힘들게 해서 죄송해요. 저희들 때문에 많이 힘드시죠? 죄송해요. 저희가 잘 해야 하는데 죄송해요.”
뭐가 힘들고 뭐가 죄송하다는 것인지 잘은 모르겠는데 눈물을 보이는 그 녀석이 한 없이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녀석은 내게도 ‘천사’였다. 절대로 지치지 말라고 그분께서 허락하신 천사임이 분명했다. 그 때 라삐드의 전화를 받고서는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늦은 밤 다음 날 가지고 갈 핸드북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던 나는 안사람을 붙잡고 한참을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한 이야기를 또 하고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일은 언제 할 거냐고 아내에게 지천을 먹었다.
하여튼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가 만들어 준 떡볶이를 먹고 우리는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하도 떠드는 소리가 들려서 남자 방에 들어가 보았더니 담배 냄새가 난다. 나는 녀석들을 앉혔다. 그리고 다 내놓으라고 했다. 그러자 담배 2갑을 내놓는 것이다. 그래서 5분 뒤에 다시 올 테니 양심껏 내놓으라고 하였다. 어쩌면 나는 녀석들에게 진심을 기대했는지 모른다. 최소한 녀석들과 그러고 싶었다. 수련회까지 와서 몰래 담배나 피우고 있다면 볼장 다 본 것이 아닌가? 5분 뒤에 들어갔더니 녀석들이 담배 2갑을 더 내놓았다. 그곳에 앉아 있던 놈들이 12명인데 고작 4갑이다. 그런데도 녀석들은 나와 약속을 하고 맹세까지 했다. 자라고 한 후 나왔는데 도저히 잠이 안 온다. 그래서 다시 나왔더니 한 놈이 밖에 나갔다가 담배냄새를 풍기고 들어오는 것이다. 다시 모였다. 왜 그랬냐고 했더니 마지막으로 하나씩만 나누어 가졌다는 것이다. 참!! 녀석들 이 말을 믿을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렇게 거짓말을 하고 있으니…….
그래도 녀석들 가방을 뒤지는 일은 하지 않기로 하였다. 한번 믿기로 한 것 끝까지 믿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녀석들 가방을 뒤지면 물론 담배야 더 나올 것이다. 그렇다면 녀석들 입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뒤로 녀석들의 마음도 막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이야기를 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을 했다. 내가 12명이나 되는 녀석들 일일이 쫓아다니며 담배를 뺏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중에 한 놈이라도 나와 맘이 통해서 진심과 진실을 나눌 수만 있다면 그런 계기가 만들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자리에 누워서 내내 그 생각을 하였다. 그러다 보니 날이 세는 것이 보였다.
둘째 날은 아침을 서둘러 먹었다. 목원대학교에 가기 위해서다. 류장환 교수님과 약속한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는 재촉해야 했다. 류장환 교수님은 학창시절 논문 지도교수였다. 단순히 지도교수가 아니라 대학원 시절 학비 걱정하는 나를 보고 다른 교수님들의 눈치를 무릅쓰고 자신의 전임조교로 나를 선택하였다. 틸리히를 통해 진학하는 재미와 학문하는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쉴라이에르마허부터 바르트와 불트만 그리고 몰트만과 틸리히까지 현대 신학을 제대로 공부할 수 있었다. 그것은 비단 학문으로만 그친 것이 아니라 부족하지만 내겐 내 신학과 신앙과 삶으로 그것이 채화되었다고 고백을 한다. 틸리히를 통해서는 깊이를, 바르트를 통해서는 절대적 높음을, 불트만을 통해서는 실존을, 또한 몰트만을 통해서는 희망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이 내게는 행복이었고 또한 자유였다.
교수님은 40분이 넘도록 아이들에게 열강을 해주셨다. 본인의 어린시절 이야기 목원대학교의 처음 이야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러므로 너희들도 꿈을 갖고 노력을 하면 이룰 수 있다는 강의였다. 그런데 대부분의 아이들은 학교 수업을 듣듯이 그렇게 딴 짓을 하거나 졸고 있었다. 어쩌면 내 로망이 너무 컸는지도 모르겠다.
교수님과 인사를 나누고 막 나오는데 수련회를 함께 진행하고 있던 용완이가 녀석들 중 몇 명이 건물 옆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보았더니 그새를 못 참고 또 연기를 피우는 것이다. 그중에는 어제부터 내리 4번이나 걸린 녀석이 있었다. 사실 이 녀석은 성격도 쾌활하고 말귀도 알아듣는 것 같아서 참 곁에 두고 싶었던 놈이었다. 그런데 그런 녀석이 내 말을 귓등으로 듣고 계속해서 거짓말을 하며 담배를 피우는 것이다. 이놈에게는 진심이 통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내 진심이 약했던 것인지. 그 놈들 담배를 전부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런데 나를 경악시킨 일이 일어났다. 내가 담배를 버린 그 쓰레기통을 어떤 녀석이 뒤지더라는 것이다. 나는 머리카락이 쭈빗거렸다. 담배가 중독성이 강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장난끼가 발동한 탓일까? 그렇게 심각하게 이야기를 하고 담배를 버리는 나를 보고서도 쓰레기통을 뒤질 생각이 과연 나는 것일까?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나는 그 때부터 혼돈이 오기 시작했다. 아니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수련회를 두고 누군가 이야기 했다. 그 놈들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되는 놈들만 우선 놓고 수련회를 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이다. 사실 그놈들 때문에 수련회를 오지 않은 아이들이 몇 된다. 그리고 그 녀석들은 모두가 교인 자녀들이다. 그러니 그놈들 때문에 어쩌면 정작 중요한 아이들, 어려서부터 엄마 손을 잡고 교회에 오던 아이들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한 번도 그런 갈등을 해본 적이 없다. 지금껏 내 대답은 확실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경우는 달랐다. 쓰레기통을 장난삼아 뒤지던, 아니면 정말로 아까워서 뒤지던 그 담배를 다시 찾는 녀석들을 보면서 나는 정말로 후회가 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후에 다시 둘려 앉았다. 찬양을 부르고 롤링페이퍼와 인간관계 프로그램을 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녀석들 찬양을 하는 동안 장난을 치고 떠들고 찬양소리보다 떠드는 소리가 더욱 컸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아이들에게 큰소리를 냈다. 정말로 화가 났다기 보다는 지금 조금 잡아놓아야 저녁 집회 시간에 집중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저녁을 먹고 집회장소로 이동을 하는데 녀석들이 가방을 매고 차에 탔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슨 일일까 싶었다. 그랬더니 집회 시작 전에 집에 가겠다는 것이다. 대전에도 지하철이 있으니 그걸 타면 온양까지 갈 수 있지 않냐 는 것이다. 어이도 없었지만 글쎄 한쪽 가슴으로 찬바람이 들어오는데 걷잡을 수가 없었다.
사실 나는 신학생 시절 교육전도사 경험이 전혀 없다. 남들은 1학년 시절부터 다른 교회에 가서 여러 가지 사역을 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곧 경험이고 이력이 되었다. 그런데 나는 정말이지 그동안 뭘 했나 싶다. 그리고 나름대로 우월의식을 갖고 그렇게 편하게 교육전도사를 하며 사례비를 받고 다니는 친구들을 폄하하기도 하고 무시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것이 나의 한없는 교만이었음을 이번에 톡톡히 깨달았다. 그리고 어쩌면 그분께서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나이기 때문에 이런 일을 주시지 않았나 싶기도 했다.
대전에서 온양은 쉽게 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설명했다. 그리고 정말로 가고 싶으면 집회 끝나고 태워다 주겠다고 약속을 하고 집회를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집회는 정말이지 잡히질 않았다. 앞에서 이 목사님이 얼마나 애를 쓰는지 나는 정말로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그 좋은 말씀들 중에 하나라도 우리 아이들이 붙들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집회가 끝이 났다. 집회 도중에 마음이 바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녀석들은 집에 가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겠다는 놈 8명을 차에 태우고 나는 송악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말이 없었다. 아니 할 말이 없었다. 이때껏 참 많은 말을 했는데 지금은 할 말이 없었다. 녀석들도 말이 없었다. 한명씩 집 앞에까지 태워다 주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목사님에게 전화를 하였다. 자초지정을 설명했다. 이왕이면 다 마치고 같이 오는 것이 도리인 줄 알지만 어쩌면 내가 참을 수 없었는지 모른다. 내가 부족했고 내가 준비를 못한 부분이 많았기 때문인 줄도 모르겠다.
피곤했다. 여러 가지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목사님에게는 정말로 죄송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었다. 수련회를 무리하게 준비하는 내내 별 말씀 없이 무언으로 지지해주셨는데 결론이 이렇게 나왔으니 뭐라 꾸짖어도 할 말이 없을 것 같았다.
새벽 1시가 다 되어서 다시 수련회 장소로 돌아왔다. 화목 보일러 앞에서 감자를 굽던 영석이와 성근이가 나를 보더니 집에 대고 외쳤다. 목사님 지금 오셨다는 것이다. 집 안으로 들어갔더니 녀석들 안자고 기다리고 있었다. 가뜩이나 잘 졸고 졸음운전 잘 하는 내가 혹시나 사고라도 날까봐 자신들끼리 걱정을 많이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밑에 내려가 주무시는 사모님을 깨워서 전화라도 해보고 싶었는데 차마 내려가지는 못하고 자신들끼리 모여서 나를 기다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보자마자 하는 말이 “왜 이렇게 늦게 와요.” 였다. 구운 감자를 내놓고 자신들이 남겨둔 간식을 내놓고 내 주변으로 모여 앉았다. 8명이 가고 12명이 남았다. 녀석들은 피곤하신데 얼른 주무시라고 말로는 하면서 당최 나를 재우지 않는다. 잘라고 누우면 말을 걸고 장난을 치고 그래서 아예 녀석들과 둘러앉아서 여러 가지 게임을 하면서 새벽 5시를 넘겼다. 이렇게 된 김에 녀석들에게 일장 설교라도 멋지게 할까? 하는 생각이 중간 중간 들었다. 그러나 그만두었다. 무엇보다 생각이 있는 녀석들인데 자신들도 이런 일을 겪으면서 다 생각이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들의 목사를 걱정해 주는 녀석들, 목사를 기다릴 줄 아는 녀석들에게 더 무엇을 바랄까?
정말로 역설적이지만 나는 조금 전 까지는 초상을 치루고 온 것 같았는데 이 녀석들과 앉아서 수다를 떨고 게임을 하고 있으려니 배꼽이 빠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다들 너무 재미있어하고 행복해보였다. 그리고 나는 녀석들이 더없이 고맙고 소중했다. 언제나 중요할 때 그리고 어려울 때 나와 함께 해주던 녀석들이 대부분 그 자리에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수련회를 다녀온 지 한참이 지났다. 수련회에 관한 평가나 정리가 필요한 지는 알고 있지만 그러나 쉽게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어쩌면 아직도 나는 정리가 덜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은 있는데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지 고민이다. 여전히 내게는 숙제처럼 풀어야 할 것들이 있다. 잘 나오다가 나오지 않고 있는 아이들. 학생회를 기피하고 있는 아이들. 그리고 이번 수련회 때 도중에 간 그 아이들.
전에 학교를 다닐 때 참 거창했다. 농촌이니 도시의 어두운 곳이니 그런 곳을 밝게 하고 맑게 하고 그렇게 큰일에 목숨을 걸고 싶었다. 김진홍 목사님이니 조화순 목사님이니 아니 상록수에 나오는 채용신이니 그런 분들을 닮고 싶었다. 그런데 정말로 내가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 있다.
정말로 그런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자리에 있는 그 한 사람을 정말로 소중하게 품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로 그 한 영혼을 사랑해봐야 다른 영혼들도 귀하게 여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것을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가난한 영혼을 구한다는 둥, 아픔과 고난에 함께 하겠다는 둥, 그런 말을 쉽게 할 수 있을까?
어쩌면 나는 이제사 정말 영혼 구원이라는 말을 곱씹게 된지 모르겠다. 한 영혼을 위해서 그 집나간 둘 째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아파할 줄 알아야 된다는 그 진실을 이번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지 모르겠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엎드려야 겠다. 그리고 돌아보고 들여다보아야겠다. 내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수련회가 끝이 났다. 집에 와서 막 짐을 정리하고 있을 때 한 녀석에게 문자가 왔다. 수련회 기간 동안 정말로 고생하셨고 마음이 많이 아프실 텐데 힘내시라는 것이다. 녀석의 마음이 내게도 전해지는 것 같아서 얼마나 고맙던지. 한참을 생각하다가 나도 문자를 보냈다.
“네가 있어서 정말로 많은 힘이 되었다. 그리고 정말로 예수를 품고 살아가는 우리가 되자.”
어쩌면 말로만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척 폼만 잡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멋있는 척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이번 수련회 주제가 ‘그리스도 예수를 품자’였다. 그런데 나는 과연 아이들에게 예수의 흔적을 보여주었던가? 아니 내 스스로 예수처럼 살려고, 예수의 마음을 품으려고 그렇게 바보처럼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쏟아서 사랑하려고 하였던가?
예수를 품으라고 명령하기 이전에 어쩌면 내가 먼저 예수를 품자고 예수를 품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두 손을 모아야 하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