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Harper Lee)의 마지막 소설『앵무새 죽이기(To kill a mockingbird)』(김욱동 역, 문예출판사, 2010)는 1991년 미국 도서관협회가 선정한 가장 영향력있는 도서 순위에서 성경 다음의 위치를 차지할 정도로, 미국 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많이 출판된 책이라고 한다.
소설은 주인공 스카웃이 화자로 등장하여 자기가 사는 앨라배머 주의 조그만 소읍에서 겪는 이야기를 내용으로 하는데, 기껏 2년 남짓한 기간 동안에 일어난 일들을 대상으로 하니 성장소설이라 하긴 뭐 쫌 그렇고... 미국의 남부지역이라는 지리적 배경과 1930년대 대공황 직후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뭐 이 소설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으리란 건 쉽사리 미루어 짐작할 만하리라.
이 글을 쓰는 내가 어렸을 때인 1960년대 킹(Martin Luther King)이 앨라배머 주의 교회 목사로 재직하면서 흑인 차별에 대한 항의로 '버스 승차 거부' 시위를 이끄는 등 인권운동을 하다 피살된 사건으로 온 세계가 떠들썩했던 곳도 바로 소설의 배경이 된 미국의 남부지역이다. 하긴 뭐 소설의 배경보다 20년이나 지난 1950년대 미시시피 주에서 열 네 살의 흑인 소년이 백인들에게 피살된 실화를 영화화한 데드와일러(Danielle Deadwyler) 주연의「Till」에서도 흑인들이 겪는 끔찍한 억압과 불평등의 사례들이 일상적이었다 하니 여기서 굳이 소설의 배경에 대하여 부연 설명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소설의 전편을 아우르는 주제는 한 마디로 '편견'이란 단어로 요약할 수 있고, 편견은 또한 두 개의 큰 줄기로 나뉘어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이웃들과 별 소통 없이 외톨이로 살아가는 부 리들리에 대한 아이들의 편견이고, 다른 하나는 백인 소녀에 대한 강간 혐의로 기소 당한 흑인 톰 로빈슨에 대한 어른들의 편견이다.
마을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사건들을 일으키는 범인으로 부 리들리는 단골 손님으로 등장하고 때로 아이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따뜻한 감정에 이웃을 돕는 모습을 보임에 따라 아이들은 점차 그를 이해하고 신뢰하게 되지만...
강간 혐의로 기소된 흑인 톰 로빈슨에 대하여 주민들은 그의 죄의 유무에 대한 관심은 없고 단지 흑인이기 때문에 벌을 받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판사의 지명으로 로빈슨의 변호를 맡게 된 스카웃의 아버지 애티커스는 그의 무죄를 주장하며 열심히 변론에 나선다. 하지만 톰 로빈슨이 유죄 평결을 받길 원하는 지역주민들은 그의 무죄를 위해 변론하는 애티커스를 적대시하기까지 하는 지경에 이른다.
스카웃이 아버지에게 승소할 가능성이 극히 낮은 톰 로빈슨의 재판에 왜 열심히 변론에 나서는지 묻자 애티커스는 말한다. "수 백년 동안 졌다고 해서 시작도 해 보지 않고, 이기려는 노력조차 포기해 버릴 이유는 없어." 라고 하면서 덧붙인다. "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할 것을 알지만 그래도 새로 시작하고 끝까지 해 내는 게 바로 용기라고 하는 거다. 승리란 드물지만 어쩌다 승리할 때도 있는 거란다."
우리나라의 사법체제에서도 국선 변호인란 게 있어서 별로 이름 없는 개인 변호사가 국가에서 지급하는 수당을 받고 재판에서 피고를 변호하는 활동을 한다. 그런 변호사에게 성공보수는 커녕 많은 금액의 수당조차 주어지지 않으니 뭐 필경 설렁설렁 형식적으로 재판에 참여하는 게 다반사라 한다지만...스카웃의 아버지는 이런 국선 변호인보다는 일견 훨씬 직업관이 투철한 듯 하지만 딸에게 말하는 용기란 의미는 느슨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야말로 '대충 철저히!'란 구호가 딱 이런 게 아닌가...
애티커스의 이러한 생각과 처신은 오랜 세월 인종적 편견이 고착화된 지역에서 살면서 체화된(embodied) 철학이자 생활관일 것이다. 느슨한 용기는 모나지 않게 주변인들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필부필부(匹夫匹婦)에게는 더없이 좋은 전략이겠지만, 확실한 증거도 없이 흑인이라는 이유로 사형이라는 유죄 평결을 받은 톰 로빈슨의 운명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지...총을 갖게 된 아들에게 어치새는 총으로 쏴 죽여도 되고 앵무새는 죽이면 안 된다는 아버지 에티커스의 말을 모디 아줌마가 친절하게 부연 설명해 주는 이유 역시 느슨한 용기의 또 다른 표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