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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생활 3년 만에 그것도 불확실한 사업에 뛰어들었다. 무슨 배짱이었나?
"화학자로서의 생활에는 자극이 없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생계를 위해 과일이든 빵이든 뭔가를 팔아야 했다. 비즈니스가 무엇인지 배우기 쉬웠고 크면 무엇이든 내 사업을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당시 글락소는 수처리에 꽤 많은 돈을 투자해 폐수를 산업용수로 재활용하고 있었다.
돈이 없는 아시아에선 엄두도 못내던 일이다. 모두가 물을 오염시키고 있었지만,
아무도 깨끗하게는 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수처리와 관련한 특별한 기술이라도 갖고 있었나?
"전혀, 오직 꿈만 있었다. 하지만 시장 조사를 통해 잠재력을 봤다.
이 길로 나를 이끈 건 두 가지였다.
하나는 시장이 매우 크다는 것이고,
둘째는 '고귀한(noble) 사업'이라는 점이다."
―열악한 상태에서 어떻게 회사를 키웠나?
"첫 사업은 각종 제조기업들을 상대로 폐수를 화학처리해 산업용수로 재활용할 수 있게 해주는 일이었다. 그런데 싱가포르 기업들은 큰 회사만 상대하려고 했다.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말레이시아로 갔다.
오토바이를 직접 몰고 보이는 곳마다 찾아갔다. 문을 두드리면 열어주지 않거나 열었다가도 쾅 닫아버리는 일이 허다했다.
10번 두드리면 1번 열어줬다.
1번이라도 문을 열어주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고객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초기엔 공짜로 시범 서비스를 해주기도 했다. 그러면 이 고객이 다른 고객을 소개시켜줬다.
고객의 전화가 오면 무조건 4시간 이내에 달려가서 서비스를 완료했다. 최고의 광고는 입소문이다.
입소문 덕에 거래가 늘었고, 2년 뒤에는 싱가포르 기업들도 우리 회사를 인정해주고 받아줬다."
◇"넓은 시장으로 일찍 가라"
―회사가 가장 큰 도약을 하게 된 계기는?
"중요한 이정표가 두 개 있었다.
첫 번째는 1994년 중국 진출이다.
나에게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시장은 너무 비좁았다. 처음엔 어려웠다.
당시 중국은 수처리 산업에 관심이 없었다. 나이 어린 여자라는 것도 약점이어서 60대 남자 직원을 고용하기도 했다.
첫 3년간은 거래가 거의 없어 부도날 뻔했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끈기와 인내, 꾸준한 헌신을 좋은 덕목으로 생각한다.
포기하지 않고 고객과의 관계를 꾸준히 쌓았고 정부 관계자들과 인맥도 구축했다.
결국 그것이 2003년 중국 최대 담수화 공장 수주로 이어졌다.
초기부터 현지에 중국팀을 만들어 현재 중국인 직원이 1000명에 달한다.
이 중 60%가 기술직, 40%는 사무직이다."
―두 번째 이정표는?
"창업한 지 8년 만인 1997년 물 부족 국가인 싱가포르가 물 자급자족 달성을 목표로 물 산업 육성을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정부가 첫 10년간 많은 돈을 투자했고, 관련 기업에 인센티브도 줬다. 중국까지 활동 반경을 넓힌 하이플럭스는 정부 투자를 받기 쉬웠다. 정부 지원으로 연구개발(R&D) 투자를 늘릴 수 있었고, 2003년 싱가포르 최대 담수화 공장인 싱스프링도 수주할 수 있었다."
―하이플럭스가 보유한 담수화 핵심 기술은 어떻게 개발됐나?
"R&D 투자의 결실이다. 10년 전부터 우리는 매년 순이익의 최소 10% 이상을 무조건 R&D에 투자한다. R&D는 연구 효율성도 중요하다. 우리는 개별 연구원들이 시장 가치가 없는 연구 분야에 매몰되지 않도록 물산업 시장 전문가들을 연구에 투입한다. 연구원들에게 시장이 필요하는 상품이 무엇인지 교육시키고 분야 간 소통을 원활하게 해 통합적 사고를 하도록 한다."
◇"위기는 최고의 인재를 영입할 기회, 나는 위기를 기다렸다"
―하이플럭스에게 위기는 없었나?
"많은 도전이 있었다. 펀딩에 어려움을 겪었고 인재 부족, 경기 불황 같은 대외 환경 위기도 있었다.
하지만 기업하는 사람들은 어떤 위기든지 대비가 돼있어야 한다. 비즈니스는 기나긴 여행이다.
위기는 늘 기회로 반전된다.
경기가 좋을 땐 핵심 비즈니스에 집중해야 하고, 어려운 시기엔 다른 부분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나는 위기 때 훌륭한 인재를 뽑는 데 집중했다. 위기는 우리처럼 작은 회사들이 인재를 데려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렇게 영입한 인재들이 회사를 성장으로 이끌었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위기를 기다렸다."
―어떤 인재를 어떻게 영입했나?
"기본적으로 핵심 기술에서 최상위급 실력을 가진 사람들을 적극 영입했다.
인재들은 고급 헬스장과 식당이 딸린 멋진 사무실에서 근무하기를 바라지만,
나는 그들에게 회사의 비전을 얘기했다. 그리고 그들이 회사의 성장과 함께 돋보이는 경력을 쌓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어떤 인재는 설득하는 데 몇년이 걸렸다.
나는 또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에너지를 가진 사람을 뽑는다.
비관적인 사람들에게는 관대하지 않다. 그들의 부정적인 에너지는 비즈니스에 도움이 안 된다."
―2001년 IT 버블이 꺼지면서 주식시장이 폭락할 때 상장(上場)했는데.
"당시 대다수 기업들이 IPO(주식 상장)를 꺼렸다. 우리에게도 연기하라는 주변의 만류가 있었다.
하지만 우리 회사는 IT와는 좀 다른 분야다. 미래 성장 잠재력이 충분한 기업이고
싱가포르 거래소에 첫 상장되는 수처리업체로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상장 3주도 안돼 주가가 2배 뛰었다."
―당신의 리더십은 어떤 스타일인가?
"나는 처음 바닥부터 회사를 일궜기 때문에 많은 일을 내 손으로 직접 챙기는 '살림형' 스타일이다.
직원들과 최대한 대화를 많이 하고 현장을 자주 찾는다.
비즈니스는 몸과 같다. 눈보다 귀가 더 중요하다거나 입이 손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없다.
인사·재무·전략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다.
중국 속담에 '집의 꼭대기가 튼튼하지 않으면 아래도 부실하다'는 말이 있다.
리더가 단단히 비즈니스를 쥐고 있지 않으면, 조직이 느슨해진다."
―여성 기업인이라 어려움이 더 많았을 것 같다.
"비즈니스는 여자든 남자든 누구에게나 똑같이 어렵다.
성공한 여성 기업인이 드문 것은, 애초에 사업을 하려는 여성들이 적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선택의 문제다. 여성이 일과 가정에서 동시에 성공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완전히 다른 두 방향을 수시로 바꿔가며 전진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이 두 가지를 다 잘하는 여성도 있다. 그들은 진정한 '수퍼 우먼'이다."
―젊은 세대에게 조언한다면.
"어떤 꿈이든지 꿈을 가져라. 꿈을 갖고 노력하다 보면 기회가 찾아온다.
기회는 당신이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회를 잡아라.
꿈이 없으면 당신의 모든 것이 끝난다. 꿈꾸는 것을 멈추지 마라."
올리비아 럼(Olivia Lum·林愛蓮) CEO는
경력: 1986~1989년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 연구원,
1989년 수처리업체 하이드로켐(하이플럭스의 전신) 설립
수상: ‘아시아 파워 비즈니스우먼 50인’(2012년 포브스),
‘올해의 세계 최우수 기업가’(2011년 언스트앤영)
대외활동: 싱가포르 물 협회(SWA) 회장,
싱가포르증권거래소 비상임 이사, 싱가포르 국회의원(지명직·2002~2005년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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