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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이끄신 하느님, 나의 신앙 여정(1)
<출생>
1943년 2월 5일, 43세의 엄마가 달수를 채우지 못하고 조산(早産)을 했다. 딸이었다. 입덧이 심하여 임신 기간 중에 제대로 음식 섭취를 못한 산모는 아기를 낳자마자 혼절을 했고, 한 손에 쥐어질 만큼 밖에 안 되는 작은 아기는 역시 죽은 듯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울음소리도 내지 못하였다. 지금 같은 세상이었으면 인큐베이터에 들어갔을 것이고, 몸무게도 달아봤을 것이고, 전문 의료진의 손에 맡겨졌을 아기였다.
아기는 감기에 걸리더니 폐렴이 되었다. 이 아기가 온전히 살아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매일 의사가 왕진했다. 그리고 간호사가 아기의 가느다란 팔뚝에 주사를 놨다.
얼마나 많이 주사를 맞았는지 아기의 팔뚝이 썩어들었다. 아버지는 움푹 들어간 아기 팔뚝을 소독하고 수시로 새로운 거즈를 집어넣었다. 지금까지도 팔뚝에는 그 때의 상처가 그 자리에 남아 있다.
아기를 낳았다고는 하나 엄마에게서는 젖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우유나 분유도 귀하기 어려운 때였다.
젖 한 모금 줄 수 없는 미안함 때문이었는지 어머니는 지극 정성으로 이유식을 만드셨다. 미음, 암죽을 받아먹으며 아기는 생명을 이어 갔다.
아이는 어른이 되어 태어난 날의 성인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음력 정월에 태어났다고, 아버지가 지어주신 정자(正子) 보다, 26세 때 내 손으로 고친 현진(玹鎭) 보다 37세 때 얻은 ‘아가다’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리며 살게 된다.
<부모님>
막내인 나는 우리 어머니가 언제부터 절에 다니셨는지는 잘 모른다. 내가 초등학생 때 불경을 종이에 써서 벽에 붙여놓고 매일 외우셨던 기억이 있는 것을 보면 아마 그 무렵이 아니었을까 싶다. 반야심경, 신경, 천수경을 내가 먼저 외워서 어머니께 가르쳐드렸다. ‘보월화’라는 법명도 있으셨다.
어머니는 음력 24일 관음재일이면 먹물들인 한복으로 차려입고 종로에 있는 조계사로 가셨다. 둘째 딸을 사고로, 넷째 딸을 병으로 잃으신 극한의 슬픔과 고통을 다스리기 위해서, 또한 폐결핵을 앓고 있는 작은 아들의 병이 낫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원으로 부처님께 의지하고 정성을 다하셨다.
아버지는 절에 규칙적으로 다니지는 않으셨지만 불교를 믿으셨다. 불교서적을 읽으셨고, 가끔 어머니와 함께 절에 가시어 청담스님과 월주스님을 만나 대화를 하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런 분위기에서 자랐기 때문에 개신교 대학교에 다니면서, 기독교 문학도 수강했고, 일주일에 세 번씩 대강에서 열리는 예배시간에 참석했음에도, 그리스도교에 대해 전혀 관심이 가지 않았다.
<작은 오빠>
내가 태어났을 때 작은 오빠는 18살이었다. 본래 병약하셨던 아버지는 작은 아들에게 “애비가 이 아이 클 때까지 살지 모르겠구나. 네가 이 아이를 맡아주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열여덟 어린 아들에게 갓 태어난 막내딸을 부탁하셨던 아버지는 병약하신 몸으로 여든다섯 살까지 사시면서 당신이 마흔 세 살에 얻은 막내딸이 세 아이의 어미가 될 때까지 지극한 사랑으로 의무와 책임을 다하셨지만, 오빠는 1978년, 53세로 아버지보다 7년 앞서 세상을 떠났다.
막내 동생인 나를 유난히도 사랑해 주었던 작은 오빠가 병을 앓기 시작한 것은 오빠 나이 23세 때부터였다. 서울 농대 수의학과를 졸업하고 안양에 있는 가축 위생연구소에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천성이 외곬이었던 오빠는 밤을 낮으로 삼아 연구에 골몰하였다. 과로가 신체의 저항력을 약화시켰고 결국은 결핵균의 침범을 받았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약을 복용하던 중 6.25 동란을 맞았다. 전쟁 통에 치료와 안정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고, 그러는 동안 병은 계속 진행되었다.
직장을 쉬고 서울로 올라오라는 부모님의 간곡한 청을 뿌리치고 기침 미열 각혈에 시달리며 홀로 외롭게 투병하던 중 오빠는 천주교에 귀의하였다 오빠 나이 33세 때였다.
그 당시 폐에는 크고 작은 동공이 여러 개 생겨 있었고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었던 폐 절제 수술도 신체 쇠약으로 할 수 없게 되었다. 오빠는 결국 고집을 꺾고, 웃으면서 그러나 깊은 절망을 안고 35세 때에 가족들에게로 돌아왔다.
<오빠의 긴 투병생활, 거룩한 여행>
모질게도 긴 병상의 삶이 시작된 것은 그 때부터였다. 한 번 자리에 눕자 두 평짜리 작은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 보지 못하고 지냈다. 안정을 해야 된다 하여 식사도 누워서 했고, 대소변도 받아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결핵환자는 꼭 그런 식으로 누워서 안정을 취하는 것이 최선의 치료방법이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섭생을 잘 하고 적당한 운동을 하는 것이 훨씬 더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어느 누구도 환자가 그렇게 오래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했기 때문에 당장에 필요한 것은 절대 안정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그 결과 한번 자리에 누운 오빠는 일어나서 앉아보지도 걸어보지도 못한 채로 18년을 살았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정신은 명료했다. 전염의 우려가 있다며 가족과도 격리되어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작은 집으로 오빠는 옮겨졌다. 늙으신 어머니가 그 모든 시중을 홀로 드셨다.
상경 후 얼마동안은 안양에서 함께 지내던 사람들의 문병이 이어졌다. 그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오빠는 그곳에서 존경과 사랑의 대상이었다. 박봉의 주머니를 털어 남에게 베풀며 살았다고 한다. 가난한 학생의 학비를 대주는 등 불우한 동료와 주민을 도왔다. 자신을 위해서는 쓸 돈이 없었는지 오빠가 늘 낡은 구두를 신고 양복을 입고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시간이 감에 따라 자연 오빠를 찾는 주위의 발길도 뜸 해졌다. 적막하고 단조로운 나날 속에 항상 누워만 있었지만 나름대로 철저하게 규칙적으로 살았고 대부분의 시간을 기도와 묵상으로 보냈다. 그렇게 오래 목숨이 이어지는 것이 기적이었고,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오빠가 보여주는 한결같은 평화였다. 그 오랜 세월동안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도 환자 특유의 짜증도 없었다. 어머니는 말씀하시곤 했다. “ 네 오라비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성불한 사람이다.”
한 달에 한 번씩 봉성체를 위해 신부님과 신자들의 방문이 있었다. 신부님을 모시고 온 구역식구들도 오빠를 보면서 감동을 받는다고 말하곤 했다. 워낙에는 예민하고 신경질 적인 사람이었는데 병상의 오빠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지, 예수님 성모님께서는 오빠에게 무슨 일을 하셨던 것인지 묻고 싶어진다.
이런 일이 한번 있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오빠의 신비체험이었는지 약물 부작용이었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오빠가 서울로 와서 아직 우리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을 때였다. 올케언니가 나를 부르더니 “작은 아씨, 삼촌이 이상하세요. 좀 올라가 보세요.”했다. 내가 얼른 오빠 방으로 가보니 항상 누워만 있던 오빠가 무슨 기운이 났는지 일어서서 성모상을 쓰다듬으며 엉엉 울고 있었다.
“어머니께서 이렇게 와 주실 줄 몰랐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평소의 모습과 너무나 달라진 오빠를 보고 놀란 나는 집에서 30분 거리에 살고 있던 큰 언니에게로 달려갔다. 언니를 보자 흑흑 느껴 울며 “오빠가! 오빠가!” 하며 말을 잇지 못하였다. 언니는 그런 나를 보고 “왜 그래? 왜 그래? 영진이가 죽었니?” 물었다. 나는 눈물을 삼키며 “아니, 오빠가 미쳤어!” 하였다. 허둥지둥 집으로 온 언니는 이상해진 오빠를 보며 대성통곡을 하였다.
아버지는 신경정신과 박사인 당신 조카를 오라고 하여 오빠의 이런 행동에 대해 상담을 하셨다. 이야기를 들은 사촌 오빠는 최근에 새로 들기 시작한 약물에 의한 환각 증세 같다고 말하였다. ‘싸이클로쎄린’이라는 신약이 원인이었을 거라는 결론이 나자 앞으로 이 약은 복용하지 않는 것으로 하고 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가족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몰라도 오빠의 흥분상태는 갈아 앉았고 그 이후로 오빠는 더 이상 어떤 정신과적인 문제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평온해 진 것 같았다.
오빠는 그날의 일에 대해 어느 누구에게도 말해 주지 않았다. 단지 성화가 그려져 있는 작은 접시를 내게 주며 잘 간직 하라는 말을 했을 뿐이다. 그날 성모상에서 빛이 나와 그리로 들어갔다는 이해 할 수 없는 말을 했다. 그 접시는 한 동안 내가 갖고 있다가 잘못해서 그만 깨뜨리게 되었고 미련 없이 나는 그것을 버렸다. 오빠가 한 말을 내가 전혀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혼해서 충신동에서 살고 있던 작은 언니는 오빠의 약 심부름을 주로 하였고, 나는 오빠 부탁으로 명동성당에 가서 경향잡지 등 교회서적들을 사다 주었다. 그 중 더러는 읽어보라고 오빠가 책을 내게 권하기도 했다. 그러나 들추어만 보다가 재미가 없어서 그만 두곤 했다. 오빠는 내게 경외의 대상이었지만 오빠의 신앙을 내 것으로 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결혼, 오빠 곁을 떠나다>
그러는 중에 나는 남편을 만나 시골 종갓집의 맏며느리가 되어 친정을 떠나게 된다. 세 아이가 태어나고, 하루가 멀다시피 닥쳐오는 집안 행사, 손에 물 한 번 담그지 않고 살았던 내가 눈만 뜨면 하루 종일 부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생활이 시작됐다. 쉴 새 없이 말씀하시고 쉴 새 없이 움직이시는 에너지 넘치는 시어머님,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정서가 다른 식구들과 부대끼며, 정신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나를 맡긴 채, 나는 내 의지도 생각도 없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약국을 차려 볼 생각으로 점포 달린 집을 장만했으나 그곳을 아버님과 친구들을 위한 경로당으로 쓰시도록 했다. 매일 아침이면 경로당 난로에 연탄불을 갈아 넣어드리고, 가끔 그분들에게 식사 대접도 해 드려야 했다. 약국을 하겠다는 마음을 접은 그 이후로 지금까지 나는 계속 전업주부로 살고 있다. 약국을 했으면 사는 동안 경제적으로 훨씬 여유롭기는 했을 것이다. 왜 그렇게 바보처럼 사느냐는 주위의 비난도 있었지만 지금까지도 후회의 마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삶의 전개도 내용도 조금씩 달라지겠지만 내가 선택해서 도달 한 ‘오늘’에 나는 감사하고 있고, 지나간 시간 모두가 소중하기 때문이다.
잠들었을 때를 빼곤 단 한 시간도 혼자 있을 수 없는 나날을 보내게 되니 친정부모와 오빠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문득문득 오빠 간병에 매달려 꼼짝 못하시는 불쌍한 엄마 생각에 가슴이 무거웠지만 설날이나 부모님 생신 때를 제외하고는 찾아뵙지도 못하고 오빠도 만나지 못하였다. 우리 아이들을 한 번 보고 싶다는 오빠의 청을, 바쁘다는 핑계로, 병이 옮을까 봐 보여주지 못하고 오빠를 떠나보낸 것이 두고두고 회한으로 남는다.
<오빠의 죽음>
1978년 7월 17일, 8순 노모의 애끓는 통곡 속에서 오빠는 괴로운 일생을 끝냈다. 임종하기 전 두 달간의 오빠가 겪었던 고통은 심한 호흡곤란과 요통으로 극에 달했다. 오빠의 인내는 초인적인 것이었다. 오랜 병상생활이었지만 침상에 침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정도로 정갈했고 용의주도했다. 임종을 지켜보던 아버지가 울면서 외치셨다. “영진이 얼굴 예쁜 것 좀 봐라!”
나이 53세, 병을 얻은 지 30년, 자리에 꼬박 누워서만 18년이었던 ‘유영진 안드레아’가 걸어온 지상에서의 거룩한 여행은 이렇게 끝을 맺었다. 그가 누워 있던 이부자리를 걷고 약 봉투와 머리맡의 휴지통을 치우니 고상과 성모상, 그리고 수십 권의 책만 남아 있었다. 결혼을 하지 않았으니 처자식도 없었고, 양복 한 벌 구두 한 켤레도 없었다. 한 사람의 일생이 끝낸 자리가 너무나 빨리 깔끔하게 정리됐다. “이렇게 살다 가는 인생도 있단 말인가!”
아현동 성당에서의 장례미사 때 젊으신 보좌신부님은 현세의 고통과 인내를 보상 받을 수 있는 내세의 영원한 삶에 대한 강론을 하셨다.
내세의 삶! 그 말씀이 나에게 강하게 꽂혔다.
아현 성당 묘지에 작은 오빠를 묻고 내려온 후 하루 이틀 날이 자날수록 며칠 전까지 있던 사람이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점점 이상하게 느껴졌다. 오빠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오빠의 몸은 차디차게 굳은 채로 땅 속에 누워 있지만 그의 고결했던 정신, 다정했던 마음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어느 누구 못지않게 옳고 선하게 살았음에도 그가 겪은 가난과 고독, 오랜 세월 동안의 병고에 대한 보상은 어디에서 누구한테 받아야 하나? 죽음으로서 모든 것은 끝나고 마는가? 아니면 그 너머 또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는가? 개신교 학교에서 성경말씀과 설교를 그렇게 들었으면서도 나는 죽었다가 살아온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야만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 루카 16,30)
<진리를 찾아 해매다>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나는 서점을 찾아갔다. 결혼 후 10 년 가까이 책이라곤 전혀 들여다보지 않고 살다가 모처럼만에 구입한 책이 심령과학서적들이었다. ‘죽었다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 ‘사후 세계’, ‘영계 여행’ 같은 것이었다. 꽤 재미있었다. 이런 종류의 책 읽기는 얼마가지 않아 중단 되었는데 그것은 두 사람 즉, 친정아버지와 동서의 충고 때문이었다.
“쯧쯧쯧 ! 어리석은 것.”
한번 읽어보시라고 갖다 드린 책을 펼쳐보시더니 아버지는 나를 나무라셨다. “죽음 이후의 문제는 쉽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혹 알고 있다 해도 설명 할 수 없는 것이다. 참선하는 스님 중에서도 무엇이 보인다고 하고, 영계를 오르락내리락 한다는 이들이 있는데 수도의 길에서 정도(正道 )를 벗어나는 것으로 심히 경계하는 것이다. 이런 책에 흥미 갖지 말거라.” 이렇게 말씀하셨다 .
북아현동에 신혼살림을 차린 시동생 집에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 갔었다. 무더운 날씨에 집안에 있기가 답답하여 서늘한 그늘을 찾아 동서와 함께 버스로 두 정거 거리에 있는 그녀의 모교이며 나의 모교이기도 한 학교로 산책을 갔다. 녹음이 우거진 캠퍼스는 마침 방학 중이라 조용하기 짝이 없었고, 매미, 쓰르라미 소리만 어지러이 들렸다. 그 날 나는 개신교 신자인 그녀에게 여러 가지 궁금했던 것을 많이 물어보았다. 그녀는 자기가 어떻게 해서 하느님을 만났고 그분이 자기를 어떻게 인도 하셨는지를 빛나는 얼굴로 말 해 주었다. 그녀의 눈은 내가 미처 보지 못하고 있는 훨씬 높고 훨씬 깊은 곳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나지막하고 조용한 음성으로 내게 말했다. “형님, 그런 책 보지 마세요. 이젠 성서를 읽으세요.”
내가 죽음 저 너머 영원한 삶이 있다는 것을 믿게 된 것은 심령과학 서적을 읽어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누리지 못했던 복이 저 세상에서는 오빠의 것이기를 바라는 염원 때문이었다. 나는 오빠가 거주 했던 아현동 집으로 가서 오빠가 남겨 둔 책들을 싸가지고 왔다. 책들을 싸면서 왜 오빠가 살아 있을 때 오빠의 신앙을 이해 해 보려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저려왔다. 지나간 학생시절에도 오빠의 권유로 한두 권의 서적을 읽어 본 적이 있었다. 오빠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참 좋았다고 말하기는 했으나 솔직한 심정으로는 재미가 없었다. 그 때로부터 15년도 더 지난 날, 대 가족 큰 살림살이에 파묻혀 미장원에 비치된 월간 여성잡지를 펼쳐 본 것을 제외하고는 독서와 담을 쌓고 지내던 내가 그 옛 날 팽개쳐 버렸던 책들을 다시 손에 잡은 것이다.
오빠의 책장에는 ‘종교의 근본 문제’, '동서의 피안', ‘억만 인의 신앙’, ‘교부들의 신앙’, ‘무엇하는 사람들인가?’ 등 다수의 책이 있었다. 한번 책을 잡기 시작하자 잠시도 앉아 볼 틈도 없는 바쁜 나날이었지만 밤을 새다시피 하여 독서에 몰입했다. 그 딱딱하고 두꺼운 책들을 짧은 시일에 다 읽었다. 초보자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영혼의 성’ ‘완덕의 길’ ‘갈멜의 산길’ 같은 책도 읽었다. 오빠의 책 외에도 명동에 있는 성바오로 서원에 수시로 가서 책들을 사드렸다. 나만 읽은 것이 아니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읽어보라고 책을 선물했다. 성서는 4복음서를 소설책 읽듯 읽어 내려갔다.
이러는 동안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정신이 몽롱해졌다. 자면서도 각성상태가 유지되어 전 날 읽은 책들이 머리에서 맴돌았다. 어떤 신비한 힘이 나를 사로잡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결혼을 하여 육아와 가사에 파묻혀 사고도 무뎌지고 정서도 메말라 있던 내 마음 속에서 불꽃 하나가 살아나더니 삽시간에 걷잡을 수 없게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나는 갑자기 말이 많아졌고 감정이 고양되어갔다. 가족들도 내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 모습에 놀라고 있었다.
이러한 상태에서도 성당을 나가지는 못 하고 있었다. 종갓집 맏며느리로서 민속신앙에 젖어계신 시부모님께 교회에 나가야겠다고 말씀 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오빠의 죽음 후 내 안에서 일어난 영혼의 변화를 설명 드릴 재간은 더더욱 없었다.
그러나 정신없이 맴돌고 있는 일상의 쳇바퀴, 그 원심력보다 더 강한 어떤 힘이 작용하여 나를 밖으로 튕겨나가게 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어느 주일날, 나는 큰 용기를 내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서 성당을 찾아 갔다. 미사 중이었는데 수녀님께 인사하고 오늘 처음 온 사람이라고 말씀 드렸다.
<신림동 성당에서 세례를 받다>
불타는 마음으로 보냈던 예비자 시절은 내 신앙생활 통 털어서 가장 뜨거웠던 시기였다. 성당을 오고 가며 나는 “하느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의 빛을 반사하는 거울이 되게 해 주십시오.” 라는 말을 신들린 사람처럼 중얼거리고 골목길을 걸었다. 드디어 79년 6월2일에 신림동 성당(현 서원동 성당)에서 ‘김득권 굴리엘모’ 신부님으로부터 ‘아가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내가 성당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남편도 내가 읽은 책들을 읽어봤으면 했으나 먹혀들지 않았다. 나도 과거에 그랬었기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그래도 박도식 신부님의 ‘무엇 하는 사람들인가?’는 초보자라도 이해하기 쉬울 것 같아서 책을 건네 보았지만 역시 반응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바오로 서원에서 카세트 테이프로 된 것을 구입하여 어느 날 둘이 있을 때 틀어 놓았다. 남편이 조용히 듣고 있기에 “끌까요?” 하고 넌지시 물어 보니 의외로 “아니, 끄지 마.” 하는 것이었다.
이 때 마음이 열린 남편은 1년 후인 80년 6월 15일에 ‘스테파노’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나는 수 십 권의 책을 읽은 후에야 성당을 찾았는데 남편은 카세트 테이프 한 번 듣고 결심한 것이었다. 박도식 신부님의 테이프 덕도 보았겠지만, 환경이 다른 집으로 와서 고생하면서도 말없이 살아준 것을 늘 미안 해 하던 남편이 아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을 것이다.
그리고 시부모님은 아들이 며느리를 따라 성당에 갔으니 그들이 믿는 신과 당신이 섬기는 신이 서로 싸우면 집안에 화가 미칠 것이 두려워 2년 후에 세례를 받으셨다. 그 후로 시어머님은 교리와 성서말씀도 잘 모르셨지만 칠성님을 섬기시던 그 정성으로 새벽마다 성모상에 촛불을 밝히시고 묵주 알을 굴리며 자식들을 위한 기도를 거르지 않으셨다. 시누이 둘도 부모님의 뒤를 이어 가톨릭 신자가 됐고, 하나는 교우 신랑을 만나 결혼 했다. 우리 아이들 세 남매가 성당에 가서 영세하고 주일학교에 다닌 것은 물론이었다.
그때쯤에는 친정에서도 큰오빠 내외와 조카들, 큰 언니와 작은 언니 모두가 동시다발 적으로 성당에 나갔다. 친정 부모님은 가장 늦게 세례를 받으셨다. 작은 오빠가 세상을 뜬 후 3, 4년 안에 있었던 일이었다.
오빠는 18년 동안 병인(病人)으로 살면서 단 한 번도 식구들에게 성당에 나가란 말을 하지 않았었다. 한자리에서 정물(靜物)처럼 누워만 있다 간 오빠가 이 엄청난 일을 해낸 것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 틀림없이 오빠는 살아 있던 그 긴 세월을 하느님께 희생으로 바쳤을 것이고, 죽어서는 천상에서 기도로써 우리를 돕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밖에는 우리 집안에 일어난 이 기적 같은 일을 설명할 수가 없다.
포콜라레 운동의 창시자 ‘끼아라 루빅’은 당신을 따르는 회원들에게 이런 묵상의 글을 남겨주셨다.
<예수님의, 우리의 미사>
너 만일 고통 중에 있다면
네 고통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라면
미사를 기억하라.
미사에서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그 당시처럼
일하지 않으시고 설교하지 않으신다.
오직 사랑으로 자신을 희생하실 뿐이다.
한평생 우리는,
많은 말도, 많은 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고통의 소리는,
사랑으로 바쳐진 고통의 소리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고 알려지지 않을 지라도
가장 강력한 말로서
하늘을 꿰뚫는다.
너 만일 고통 중에 있다면
예수님의 고통에 너의 고통을 담아
너의 미사를 봉헌하라.
설령 세상이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평화를 잃지 마라.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
성인들이 너를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그분들과 더불어 살고
예수님처럼 인류의 유익을 위해
네 피가 흐르도록 하라.
미사!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위대한 것!
예수님의, 우리의 미사.
-‘땅 위에 당신의 불을’ 벽난로 출판사-
여기까지 나를 이끄신 하느님(1)이었습니다.
이어서
2)성당에서의 활동
3)라자로 신부님과의 만남
4)포콜라레 운동으로의 부르심
5)토평동으로 오다
6)어머님 보내드리다
7)코로나19
8)대건회 등의 순서로 써 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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