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절 길손을 악으로 대했던 소돔성 사람
"그들이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무론 노소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롯이 문 밖의 무리에게로 나가서 뒤로 문을 닫고 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치 말라"(<창 19:4>~7)고 권면하였으나 허사였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지나는 길손을 영접하고 대접하여 편히 쉬게 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 가정과 동네에 복을 주셨고, 반대로 지나가는 길손을 학대할 때에는 화를 내리셨다. 소돔성 사람들은 길손을 영접은 고사하고 길손을 학대하고 추악한 악을 행하려고 하였으니 하나님이 소돔성을 불로 심판하신 것이다.
1. 오늘도 이웃을 학대하고 성폭행함
"사사 말기에 지나는 길손을 비류들이 학대한 것이 원인이 되어 베냐민 지파가 전멸될 뻔한 사건이 있었는데 성경 말씀대로 말하면, "이미 저물매 한 노인이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오니 그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 산지 사람으로서 기브아에 우거하는 자요 그곳 사람들은 베냐민 사람이더라".
"노인이 눈을 들어 성읍 거리에 행객이 있는 것을 본지라 노인이 묻되 그대는 어디로 가며 어디서 왔느뇨 그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는 유다 베들레헴에서 에브라임 산지 구석으로 가나이다 나는 그곳 사람으로서 유다 베들레헴에 갔다가 이제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중인데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는 사람이 없나이다"(<삿 19:17>~18)라고 하였다.
"노인이 가로되 그대는 안심하라 그대의 모든 쓸 것은 나의 담책이니 거리에서는 자지 말라 하고 그를 데리고 자기 집에 들어가서 나귀에게 먹이니 그들이 발을 씻고 먹고 마시니라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비류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를 상관하리라"(<삿 19:19>~22).
"집 주인 그 사람이 그들에게로 나와서 이르되 아니라 내 형제들아 청하노니 악을 행치 말라 이 사람이 내 집에 들었으니 이런 망령된 일을 행치 말라"(<삿 19:23>)고 하였으나, 결국 그들을 끌어내어, 성으로 욕보이고, 밤새도록 성으로 학대하여 죽인 것이 화근이 되어 동족 상잔의 비극이 일어났다.
결국 베냐민 지파는 르우벤 지파를 중심으로 한 열한 지파와 싸워 완전히 진멸될 뻔했다. 이것은 몇 사람의 비류들이 성폭행하므로 인하여 그 가정은 물론이요, 그의 씨족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된 일례이다.
특별히 사사기 19장 27~30절의 내용을 다시 말하면, 27절에 그 주인이 일찍이 일어나 집 문을 열고 떠나고자 하더니, 28절에 이에 그 시체를 나귀에 싣고 행하여 자기 곳에 돌아가서, 29절에 첩의 시체를 붙들어 그 마디를 찍어 열두 덩이에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내였다.
30절에 그것을 보는 자가 다 가로되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이런 일은 행치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 이것이 종교국에서 일어난 사건이니 충격적이다. 기브아인의 천인 공로할 이중 삼중의 죄를 볼 수 있다.
나그네를 학대한 죄는 나그네를 후대한 노인의 집을 습격한 죄, 남의 아내를 성폭행하여 죽이는 데까지 이르게 한 죄는 소돔성 사람들의 행위나 다름없다. 이 죄 값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2만 5천 1백명이나 살해를 당하였다(<삿 20:35>).
이같이 기브아인의 소행도 악하지만 레위인의 악행도 용서할 수 없으니 첫째는 자기 생명을 위하여 첩을 악당들에게 무자비하게 내어준 일(25절)이다. 이 때에 여자의 지위가 얼마나 무시를 당하고 천하였는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창 12:10>~20, 26:6~11). 둘째는 시체에 대한 잔인한 행위이다.
물론 그가 이것을 기회 삼아 기브아인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선전의 방편을 삼으려 하는 것은 이해가 가나 그 방법에 대하여는 잔인 무도한 행동에 속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개인으로부터 시작하여 한 민족을 지나서 전국민의 성적인 타락과 암흑의 장면을 묘사한 사건일 것이다.
이러한 짓들이 소돔과 고모라성에도 일어나 하늘로부터 불이 비오듯 내려 멸망한 것처럼 역사의 종말에는 더 못된 짓들이 성행하다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필자는 큰소리로 외치고 싶다. 오늘의 때는 죄악이 극심하다. 멸망받은 원인이 되었던 죄악들이 오늘날에도 재연되고 있다. 홍수 때는 방주 안에 들어가야 사는 길이었으나, 소돔성에서는 떠나야 사는 길이었다.
오늘날도 성도가 사는 길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떠나듯이 오늘의 죄악과 악업을 청산하고 정리하고 나오고 죄에서 떠나야 영육간에 사는 길이다(<사 1:16>~17, <렘 5:7>~9, <행 19:17>~18).
아직도 죄악에서 떠나지 못한 교인들이여 천사의 설교를 듣고 향락과 음란한 죄에서 떠나고 나오라고 하였다(<계 18:4>). 이는 필자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부리는 천사의 설교,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1) 길손을 학대한 소돔성 사람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사위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뿐이요 강포하여 피가 피를 뒤대임이라"(<호 4:1>~2)고 한대로 소돔과 고모라 성도 혼돈하며 공허했다(<렘 4:23>).
① "지나는 길손을 영접하지 아니한 소돔과 고모라성 사람들"(<창 19:4>~5)은 결국 지나는 길손을 학대하므로 멸망했다. 이같이 어느 시대든지 망한다.
② "지나는 길손을 학대한 소돔과 고모라성 사람들"(<창 19:9, ><말 3:5>)은 하나님께서 직접 불로 심판하셨다. 악이 관영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신다.
③ "지나는 길손에게 추악한 죄를 행한 소돔과 고모라성 사람들"(<창 19:7>)은 축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았다. 역사의 종말에도 길손에게 악행하면 망한다.
④ "지나는 길손에게 행패를 부린 소돔성 사람들"(<창 19:5>)은 하나님께서 직접 불로 심판하셨다. 이런 악들이 오늘에도 판을 치는 말세이다.
⑤ "지나는 길손에게 강도질을 행한 자들"(<눅 10:30>)은 일시는 잘 먹고 잘 사는 것 같으나 자신도 행한대로 망하고 보응을 받는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인은 이런 죄악에서 떠나야 영혼이 산다.
⑥ "지나는 길손과 이웃에게 폭력을 휘두른 자들"(<눅 10:30>)은 어느 시대든지 누구든지 망하는 것이다. 또한 잔인하게 남의 것을 탈취하는 자도 망한다.
⑦ "지나는 길손에게 성폭행을 행한 비류들"(<삿 19:22>~26)은 피해를 당한 자들의 의분을 일으켜 그들 역시 비참하게 죽었다. 이런 일들이 오늘날에도 일어난다. 집단 성폭행이 극심해 간다. 이런 죄악에서 교인들은 떠나라.
⑧ "말세가 될수록 불의, 불법이 성행하는 시대"(<마 24:12>)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지만 지나는 길손을 영접하여 대접한 자들은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나 축복을 받았으나 지나는 길손과 이웃을 학대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징벌하셨다(<수 2:8>~24).
심지어 예수님 당시 여리고성 사람들은 지나는 길손에게서 재물을 빼앗고 절반 가량 죽인 일도 일어났다. 이같은 소행은 역사의 종말이 되면서 더욱 더 극성을 부린다. 심지어 지나는 부녀자를 납치, 강간, 폭행, 살인, 암매장까지 하는 시대가 되어간다.
(2) 지나는 행인을 납치, 폭행하는 시대
오늘날 사람들은 누구나 한결같이 불안해 못 살겠다고 한다. 그 이유는 지나는 부녀자를 납치하지 않나 그것도 모자라 협박, 살인, 암매장까지 하는 등 이 사회가 불안하기만 하다. 여기에 대하여 신문 사설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를, 지금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지존파의 끔찍한 살인 행각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다시 부녀자를 여섯명이나 납치하고, 그 중 두명을 살해했다는 또 하나의 충격적 사건이 터졌다. 세금 도둑 사건은 끝도 없이 번지고 있고, 장교가 탈영하는 전대 미문의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국민을 불안하게 하고, 좌절감을 안겨주고, 건강한 의욕을 잃어버리게 하는 일들뿐이라고 한탄하는 자도 많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불안해서 못살겠다'는 소리는 높은데 이에 대한 효과적 대응 방법이 아무데서도 나오지 않고 있는 점이다. 지존파 사건이나 부녀자 납치 사건을 보면 더이상 경찰은 믿을만한 존재가 아니다. 세금 도둑 사건을 보면 공무원을 믿고 의지할 기분도 나지 않고 장교 탈영을 보면 군 기강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요즘 세상은 법도, 공권력도, 공직자도 믿을 수 없게 만들고 정부로부터 보호 받는다는 신뢰감을 갖기 어렵게 한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자기 안보는 자기가 취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딸 가진 부모나 새벽, 심야 출퇴근자들은 그야말로 "특단의 자기 안보"에 골몰하고 있다.
잠재적 지존파, 안 들키고 있는 납치 행각등이 얼마나 많을까를 생각하면 누구나 모골이 송연한 세상이다. 치안, 법질서, 공직 기강 확립 등은 한 사회가 유지되는 최소한의 기본이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이런 최소한의 기본이 무너지려 하는 것이다. 뭔가 좀더 근본적인 방안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될 막바지까지 온 것 같다.
정부에 묻고 싶다. 경찰력이 부족한가? 그렇다면 필요한만큼 증원하자. 수사비 등 예산이 부족한가? 그렇다면 국민에게 실정을 호소하고 필요한만큼 더 거두든가 다른 예산을 전용하자. 정부가 이런 상황을 놓고도 아무 말이 없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불안하고, 어수선하고, 국민의 사기를 꺾는 이런 상황을 빨리 탈피하고 분위기를 쇄신할 방안을 내놓아야 한다.
우리가 보기에 정부 자체부터 기합이 빠져 있고 상황 대처에 중심을 잡지 못하는 것 같다. 대통령 주재로 침통한 고위 대책 회의라도 열어 치안 능력, 법질서 유지, 공직 기강 확립 방안등을 내놓아야 한다(중앙일보, 94년 9월 28일자). 이상과 같은 사실에 필자도 동감가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해결될 수 없고, 니느웨성 멸망 직전에 왕으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회개 운동이 일어난 것과 같이, 이 민족도 각기 악한 길과 자신들의 손으로 행한 모든 죄에서 회개하고 떠날 때 근본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2. 성도는 길손을 영접하라 하심
"눈을 들어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하며" 나그네를 접대하였다.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가로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에 들어가 사라에게 이르러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아브라함이 또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하여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아브라함이 뻐터와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의 앞에 진설하고 나무 아래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창 18:2>~8).
아브라함은 장막 문에서 달려가서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하며 간청하고는 제일 좋은 것으로 요리하여 길손을 대접한 것이 원인이 되어 독자 이삭을 낳는 축복을 받았다.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떡을 만들라, 짐승떼에 가서 제일 좋은 것으로 요리한 것을 지나는 길손이" 대접한 말씀을 대하여 박윤선 목사는 말하기를, 초자연적 실존들이 어떻게 음식을 먹을 수 있을까? 그들이 먹는 행동을 취한 것은 생리적 욕구에 의한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과 가까운 접촉을 가지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이니, 그것은 능력으로 한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후에 제자들과 함께 잡수신 일과 마찬가지이다(<눅 24:30, 43>). 그러므로 그들이 먹은 것은, 먹은 모양만 취한 것이 아니니 그들은 그 때에 아브라함과 필요한 접촉을 가지기 위하여 진정으로 음식을 섭취하였다.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그 때에 그들의 몸은 하나님께서 임시로 그들을 위하여 지어 주셨던 것이었다'라고 하였다. 어쨌든 이 때에 하나님께서 사람 모양으로 나타나신 것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을 예표한 것이다(박윤선 목사 주석 창 p.250).
이렇게 길손을 후히 대접하니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약속하였는데 축복의 내용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문에서 들었더라"(<창 18:10>).
그러나 사라가 인간 생각으로 믿지 못할 때에 지나는 길손이 하는 말이 "여호와께서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 18:14>)고 축복을 하셨다.
예수께서 양과 염소를 심판하실 때 오른편에 있는 양들은 구원을 받아 예비된 나라를 상속을 받았는데, 이러한 양들은 지나는 나그네를 대접한 자들이었다.
(1) 길손을 접대하면 축복하심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 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36). 이는 오른편에 속한 양들의 생활로 영생의 축복을 받았다.
① "아브라함은 지나는 길손을 영접하여 대접하다가 축복을 받았다"(<창 18:1>~5)고 하였으니,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도 지나는 길손을 영접하는 자가 되라.
② "롯도 지나는 길손을 영접하여 대접하다가 축복을 받았다"(<창 19:1>~3, <히 13:1>)고 하였으니, 예수를 믿는 성도는 왼편의 염소에 속하지 말고 오른편의 양에 속하여 나그네를 영접하라. 그리하면 예수께 복을 받을 것이다.
③ "수넴 여인도 지나는 길손인 엘리사를 대접하다가 아들 낳는 축복을 받았다"(<왕하 4:8>~16)고 하였으니,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선지자 이름으로 의인 이름으로 주를 영접하면 이 땅에서는 물론이요 하늘 나라에서도 상급이 있다.
④ "길손을 대접하다가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는 경우도 있다"(<히 13:1>~2)고 하였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마땅히 지나는 길손이나 어려움을 당하는 자를 찾아가 돕는 것이 주를 섬기는 것이다.
⑤ "길손에게 물 한 그릇 주는 것도 하늘에서 상급으로 동참했다"(<마 10:41>~42)고 하였으니,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이웃과 길손에게 자비를 베풀 때에 주 하나님께서는 행한대로 복을 주신다.
⑥ "길손을 영접한 기생 라합은 멸망 중에서 구원을 받았다"(<수 2:8>~21)고 하였다. 이는 하나님이 보낸 종을 영접했기 때문이요 또한 그의 지시대로 붉은 줄이 집에 매여 있었기 때문에 멸망 중에 구원 받았다.
⑦ "길손을 학대한 자는 떠날 때에 먼지를 떨어버리라"(<마 10:14>)고 한 것은 이웃과 길손을 영접할 때에 복이요, 학대할 때에는 화요, 저주라는 교훈이다.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 10:42>)고 하시며 또한 지나는 길손을 대접하다가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다고 하시면서 나그네를 대접하라고 권면하였다.
(2) 버려진 자를 접대한 다윗의 신앙
아말렉 사람들은 테러 집단을 조직하여 시글락을 침범하고 나서 다윗과 같이 그를 따르는 자의 부녀자를 납치해 간 적이 있었다(<삼상 30:1>~6). 이렇게 피해를 당한 부녀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다윗을 중심으로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그 뒤를 추격하다가 들에서 죽어가는 애굽사람을 만났다.
"애굽 사람 하나를 만나 다윗에게로 데려다가 떡을 주어 먹게 하며 물을 마시우고 무화과 뭉치에서 뗀 덩이 하나와 건포도 두 송이를 주었으니 그가 낮 사흘 밤 사흘을 떡도 먹지 못하였고 물도 마시지 못하였음이라…그가 그우리가 그렛 사람의 남방과 유다에 속한 지방과 갈멜 남방을 침로하고 시글락을 불살랐나이다(<삼상 30:11>~15)고 삼우엘은 말하였다.
이렇게 피해를 당한 소년을 살려준 것이 동기가 되어 그가 길인도자가 되어 야밤에 습격하여 납치 당한 부녀자들을 구출한 사건이 있다. 이는 신앙의 사람 다윗만이 할 수 있는 선행이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의 심령 속에 성령이 충만할 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다윗처럼 할 수가 있다.
여기에 대하여 바클레이는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그의 동족 이스라엘 자손들을 어쩔 수 없이 공격하게 된 데에서 구원해 주셨다. 그리고 그의 시글락에로의 귀환은 아주 적절한 때에 도와 준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만일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애굽인을 만나게 되고 그가 그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알려주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면(11~15절) 그들은 아말렉 약탈자들이 인적이 드문 네겝 지방(반(半)광야 지역)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거의 찾아내기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우리는 이 모든 사실이 단순히 우연한 기회였다는 뜻으로 우리에게 제시되지는 않는다. 다윗이 제사장 아비아달과 의논하였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분명한 안내를 받았다는 것이 강조된다(7, 8절). 그러므로 사울에게는 거부되었던 안내가 다윗에게는 주어졌던 것이다.
본장은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변하기 쉬운가를 설명해 준다. 다윗의 군사들은 자기들의 전가족을 잃어버리는 커다란 곤경에 처하게 되자 다윗을 그 자리에서 살해하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다음에 그들의 아내들과 자녀들이 무사히 구출되고 그들의 모든 재산을 회복하게 되자 기쁨의 안도감에 젖어서 그들은 모든 전리품을 다윗에게 거져 넘겨 주었다.
짧은 순간에 참으로 놀라운 태도의 변화이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종려 주일에는 예수에게로 몰려들어 그를 환영하였으나 며칠 후에는 남자들과 여자들이, 무리 가운데서 순간의 감정의 노예들이 되어버리는 전혀 다른 놀라운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모습은 지도력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인간은 그가 행할 만큼 허용된 정도로 지도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지도력은 승낙에 의하여, 최소한 우두머리 되는 사람을 지원하겠다는 충분한 수효의 사람들의 승인에 의해서만 성립될 수 있다고 하였다.
지도자들은 흔히 설득력 행사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 다윗은 단순한 설득에 의하여 재난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강력하고 효과적인 행동이 요청되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그 같은 행동을 성취시킬 수 있다. 아말렉 자손들에 대한 승리의 정벌 전쟁에는 두 가지 중요한 결과들이 나타난다(바클레이 주석 삼상 pp.186~187).
이렇게 버림받고 병들어 죽어가는 목숨을 경시하지 않고 살려준 일로 다윗이 하나님께 순탄한 길을 인도 받아 적진 속에 들어가 생포된 처자식을 구출하게 되었다.
성도들이여 불행한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해 보라. 그리하면 우리도 순탄한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실천 없는 말은 실탄 없는 공포탄에 불과하다. 자비를 베푸는 생활이란, 하나님의 오른편에 속한 양의 생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