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박씨(密陽朴氏) 규정공파
1> 시조 : 박언침[朴彦枕]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밀양(密陽)은 경남에 위치한 지명으로,
신라 법흥왕때 신라에 병합되어
추화군이 되었다가 757년 밀성군으로 개칭되었다.
고려때는 밀주로 하였고,그후 1895년 밀양군으로 개칭하였다.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신라 박혁거세의 29세손인 경명왕의 8대군중
박언침으로부터 세계가 이어져,
단일 본관으로서는 우리나라 최대의 벌족임을 자랑하여 왔다.
박씨중에서도 가장 뿌리가 굵은 밀양박씨는 중시조 언침이 밀성대군에
봉해진 연유로 해서 본관을 밀양으로 하게 되었으며,
8세손 언부
문하시중공파
8세손 언상
도평의사공파
8세손 언인
좌복야공파
8세손 언양
밀직부사공파
8세손 천익
판도공파
8세손 을재
좌윤공파
크게 6파로 나누어져 아랫대로 내려오면서 다시 여러 파로 분파되었고,
10세손 환(桓)이 영암박씨로 분적하는 등 10여개 본관으로 갈라졌다.
각 계통별로 인맥을 살펴보면, 종파인 8세손 언부가 문하시중과
도평의사를 거쳐 밀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후손에서 은산군 영균(永均)을 비롯한 13개 파가 형성되었다.
밀성부원군 언부의 차남 의신(義臣)의 후손에서는 맏아들 원(元)의
계통과 밀성군에 봉해졌던 척(陟)의 인맥이 두드러진다.
원(元)의 8세손 의중(宜中)은 고려 우왕때 대사성과 밀직제학을
거쳐 뒤에 공신에 올랐으며,
문종때 경흥부사 거겸(居兼)은 의중의 손자이며
경빈(景斌)의 아들로 성종때 밀산군에 봉해졌다.
조선 정종의 부마로 지돈령부사에 오른
갱의 7세손 정원(鼎元)이 평안도사를 역임했고,
그의 종손 신규(信圭)는 호조판서를 지낸 후
청백리에 녹선되어 글씨로 이름을 떨쳤다.
고려 공민왕때 사헌부규정을 역임했던
현(鉉)은 평장사 효신(孝臣)의 8세손으로 조선개국과
더불어 집현전 부제학에 등용되어
수원 부사를 거쳐 안변부사로 나가 임지에서 생을 마쳤다.
특히 그는 성리학 학자로 명망이 높았고
청백리로 칭송을 받았으며,
후대에서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어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현(鉉)의 손자 사경(思敬)은 고려조에서 전법판서 겸
상장군을 지내고 추성익위공신에 책록되었으며,
그의 아들 침이 공민왕 때
전의판사를 역임하고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71현(賢)과 함께 개성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절의를 지켰다.
강생(剛生)의 손자로 세조때 정난이등공신에 책록되어
응천군에 봉해진 중손(仲孫)은 공조를 비롯한
4조의 판서를 거쳐 밀산군에 개봉되었으며,
그의 맏아들 남이 부사를 지냈고,
차남 미(楣)는 대사간과 예조참의를 거쳐
여지승람을 편찬했으며 시문에 현달했고,
막내 건(楗)은 세조 때 좌익원종공신으로
5대의 왕조를 거치면서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밀산부원군에 진봉되었다.
찬성공 신생(信生)의 현손 영(英)은
양녕대군의 외손자로 주역(周易)·천문·지리·의술 등에 능통했으며,
무예에 뛰어나
용맹을 떨침으로서 중세의 명인으로 이름났다.
특히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옷자락이 잘린 두루마기
한벌을 유물로 물려받는 가통이 있었다.
어느날 저녁 무렵 화려한 옷차림에 준마를 타고 남소문을
지나는데,
골목 어귀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손짓하며 부르므로
그가 말에서 내려 따라가니 집이 깊숙한곳에 있었다.
날은 이미 어두웠는데, 그 여인은 그를 대하자 홀연히 눈물을 흘렸다.
그 까닭을 물으니 귓속말로 "
공의 풍채를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닌데
나로 인하여 비명에 죽겠소" 하였다.
무슨 뜻인가를 따져 물으니 미녀는
"도적의 무리가 나를 미끼로
사람들을 유인하여 죽이고,
입은 옷과 타고온 말과 안장을 나누어 갖고
살아온지가 해포가 되었습니다.
항상 탈출할 것을 생각해 왔으나 도둑의 일당이 많으므로
두려워 탈출을 못하고 있었는데,
공이 나를 살릴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는 칼을 빼어 들고서 잠을 자지않고 있었는데,
밤중이 되자 방의 윗쪽 다락으로부터 여인을
부르는 소리가 나면서 큰 밧줄이 내려왔다.
그는 몸을 솟구쳐 벽을 차 무너뜨리고 급히 여자를
업고 몇겹의 담을 뛰어넘어 나와서는 여인이 붙잡는
옷자락을 잘라 버리고 달려 나왔다.
그 이튿날 벼슬을 사직하고 선산(善山)으로 돌아와
무인의 노릇을 버리고 학문에만 진력했고,
옷자락이 잘린 옷을 보이면서 항상 손자들에게 경계하였다고 한다.
그는 낙동강변에서 두문불출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고 한다.
밀성군 광영의 손자인 낙촌공 충원(忠元)은 명종때 단종의
원령으로 잇따라 7명이 죽어가는
영월 군수를 자청하여 부임해 가기도 했으며
그뒤 중종실록과 인종실록편찬에 참여했고, 156
선조때 우찬성·이조판서를 역임한 후
지중추부사로 밀원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이 세도가인 윤원형이 사위를 삼고자 청하는데
면전에서 거절한 계현(啓賢)이며,
계현의 손자가 영의정에 오른 승종(承宗)이다.
광해군의 폭정 속에서 영상에 올랐던 승종은 항상 오리알만한
큰비상을 차고다니며 말하기를
"불행한 시대를 만나 조석으로 죽기를 기다리는데
이물건이 없어서 되겠는가"하며
광해군의 비리적 행동에 진정하지 못하고 흐느끼며,
폭주로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인조반정이 일어나던 날 그는 아들 자흥(自興)을 불러
마음속에 있는바를
써놓고 아들과 함께 목매어 자결했다.
복야공파 언인(彦仁)의 후손에서는 우리나라 [삼대악성]으로
손꼽히는 연(堧)이 뛰어났다.
삼사좌윤 천석(天錫)의 맏아들로 태어나
태종초에 문과에 급제한 연은
당시 불완전한 악기의 조율정리와 악보찬집의 필요성을 상소하여
편경(編磬) 12매를 제작, 자작한 12율관(律管)에
의거한 정확한 음률로 연주케 했고, 조정의 조회때
사용하던 향악을 폐하고 아악(雅樂)의
사용을 건의하여 실행케하는 등
궁정 음악을 전반적으로 개혁했다
조선 실학의 태두 제가(齊家)는 19세때
박지원의 문하에서 실학을 연구,
이덕무, 류득공, 이서구 등과 더불어 [시문4대가]로 일컬어졌으며,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사상을 토대로 한
북학의(北學議)를 작성하여 기구와 시설의 개편,
불합리한 제도의 모순점을 지적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밀양박씨(密陽朴氏)는
남한에 총 641,821가구, 2,704,61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집성촌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 오금리
경북 군위군 우보면 모산동
경기도 개풍군 상도면 상도리
경북 청도군 금천면 신지동, 이서면 일원
경기도 옹진군 용연면 오산리
경북 문경군 가은읍 수예리
전남 진도군 의신면 칠전리
충북 청원군 강외면 연제리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조상님방
밀양 박씨(密陽朴氏) 규정공파
박경식
추천 0
조회 31
05.12.19 11:47
댓글 0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