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1/25 곤지암성당『2006년 성탄영세자 모임』 -『영세 2주년 기념』성 김도리 헨리코 신부를 기리는 《손골성지》[전담 윤민구 도미니코 신부]순례(안내)
곤지암성당『2006년 성탄영세자 모임』(회장 남광선南光善 안드레아)은『영세 2주년 기념』으로 다음과 같이 성지순례를 하기로 하였으니 모두 함께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다 음
○ 일 시: 2009년 1월 25일(넷째 주일) 교중미사 후
○ 순례지: 손골 성지http://cafe.daum.net/Sonkol(전담 윤민구 도미니코 신부, ☎031-263-1242,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 734번지)
○ 준비물: 미사책, 미사보, 성경, 묵주, 간편복
○ 대 상: 곤지암성당『2006년 성탄영세자 모임』전회원
- ①남광선 안드레아 님 ②유경화 요세피나 님 ③이우람 루도비코 님 ④정호영 요한 님 ⑤김지연 플로라 님 ⑥정운우 아론 님 ⑦김귀순 마리아 님 ⑧윤문수 다윗 님 ⑨김경애 유스티나 님 ⑩윤지혁 바오로 님 ⑪길홍진 요셉 님 ⑫박정환 미카엘 님 ⑬김귀애 요세피나 님 ⑭성기화 요셉 님
※ 당일 11:30까지 곤지암성당 만남의 방에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 다음은 2008년 12월 14일(대림 제3주일, 자선주일) 김귀애 요세피나 님 등의 '손골성지' 순례 모습입니다.
08/12/14『손골蓀谷성지』[전담 윤민구 도미니코 신부]순례 (곤지암성당 김귀애 요세피나 님 등 3명) - 성 김도리 헨리코 신부를 기리며...
12월 14일(대림 제3주일, 자선주일) 오후 곤지암성당 김귀애 요세피나 님 등 3인은 분당서울대병원(경기 성남 분당구 구미동 300)을 출발, 동천성바오로성당(☎031-263-4013, 경기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 349)을 거쳐 광교산光橋山(해발 582m) 동쪽 자락에 위치한『손골蓀谷성지』http://cafe.daum.net/Sonkol(☎031-263-1242,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 734)를 순례하였습니다.
동천성바오로성당에서 4km 남짓 되는 거리에 있는 '손골'성지는 성 김도리 헨리코 신부님의 '향기'가 배어있는 작지만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08/12/14 성 김도리 헨리코 신부님의 '향기'가 배어있는『손골蓀谷성지』[전담 윤민구 도미니코 신부]- 성가 연습
========================================================================================================= 다음은 2006년 12월 25일 곤지암성당 영세식[세례식] 모습입니다.
2006년 12월 25일 '성탄 영세식'
2006년 12월 25일 세례를 받은 분들 중 12명은, 그 모임을 『2006년 성탄영세자 모임』으로 명명하고, 매월 넷째 주일 성지순례 등 정기적 회합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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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초가 무성했던 곳으로 '향기로운 골짜기'라는 뜻을 지닌 손곡(蓀谷)의 형성시기는 알 수 없으나, 사방 이 산으로 둘러쌓여 있어 1839년 기해박해를 피해 숨어든 신자들이 이룩한 교우촌으로 병인박해(1866) 때에는 10여호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손골은 주민들 사이에서 신자들의 부락 '성교촌'이라 불리어 오는데 특히 이요한, 그의 아들 베드로, 손자 프란치스코 삼대가 손골에서 살던 중 병인박해시 피신하여 신미년(1871년 3월 16일)에 순교하였다 한다(치명일기). 손골은 프랑스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전교 유적지로서 특별히 성 도리 헨리꼬 신부님께서 조선에 입국하여(1865) 선교하시다가 포졸들에게 직접 체포되신(1866) 곳이다. 이곳은 1857년 페롱 신부, 1861년 조안노 칼레 신부, 1863년 오 오매트로 신부 등이 입국하여 활동하던 곳이고, 조선 제4대 교구장인 장 베르뇌 시므온 주교도 방문(1861, 1863)했던 곳으로 신앙의 전통이 계속 이어져 내려오는 유서 깊은 성지이다.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 734. 성 김도리 헨리코 신부를 기리는 손골성지는 주차장에 차를 대고 밑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 성지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순교비가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사무실과 경당 그리고 하얗게 예수상이 있는 부분과 한 단계 높게 자연석을 쌓아올린 곳이 묘소가 있는 부분이다. 성지 입구로 들어서면 성 도리 신부의 입상이 서 있고 잘 자란 잔디사이로 돌을 깐 길이 정갈하다. 그 길을 따라 자연석으로 담을 치듯 쌓아올린 사이사이에 자리한 십자가의 길, 올망졸망 서 있는 40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14처도 특이하다. 단아한 묘소 옆에 자연석을 윤이 나게 깎은 제대를 놓았고, 십자고상이 그 뒤에 서 있다. 이들을 소나무 숲이 감싼다. 더 무엇을 덧붙이랴 싶은 아름다움이 거기에 담긴다. 묘소를 내려와 ‘성 도리 헨리코 김 신부 순교비’ 앞에 섰다. 그 표면에 약력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조선입국 1865년 5월 27일(내포) 손골에서 선교활동. 1866년 2월 27일 손골에서 체포되심. 순교 1866년 3월 7일 새남터 군문효수형. 시복 1968년 10월 6일 로마 교황 바오로 6세. 시성 1984년 5월 6일 여의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인축일 9월 20일.” 성지의 적막과 정갈함이 경쾌한 시냇물 소리에 감싸여 행복하기까지 하다. 1866) 신부의 생애를 그의 이름처럼 여러 자료들을 취합해 보면, 그는 1839년 9월 23일 프랑스의 작은 어촌에서 8남매 중 여섯 번째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가난했지만 신앙 깊은 분들이었다. 동안 수학하던 중, 1862년 8월 23일 파리외방전교회의 신학교에 입학했다. 1864년 5월 21일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 조선 전교의 사명을 받고 7월에 프랑스를 떠나 홍콩에 도착, 다시 조선 입국을 대기하기 위해 요동으로 떠났다. 위앵 신부만 내포에 남고 나머지 3명의 신부는 서울로 올라와, 베르뇌 주교의 지시로 교우집이 10여 채 있는 손골 마을에서 조선어 공부를 시작하였다. 도리 신부는 어학 공부에서는 다른 선교사들보다 뒤졌지만 조선의 풍습에는 가장 잘 적응하여 신자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1866년 2월 28일 도리 신부는 볼리외 신부와 함께 각각 들것에 실려 죄인 압송의 관습인, 양손을 홍사(紅絲)로 가슴 위에 묶이고 중죄인이 쓰는 갓으로 얼굴이 가려진 채 포도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도리 신부는 본국 송환보다는 순교하기를 분명히 밝혔다. 1866년 3월 7일 군문효수형으로 새남터에서 처형된 네 순교자 중에서 도리 신부는 마지막으로 머리가 잘렸다. 그의 머리는 두 번째 휘두른 칼에 떨어졌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새남터의 형장에서 그는 눈을 감고 묵상하는 것 같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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