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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원 시민향토사 강좌 4. 2014.04.15.
벚꽃 개나리 진달래가 다 졌다. 일교차가 커서 아침저녁으로는 춥고 한낮엔 햇살이 뜨겁다. 문화원 향토사 강좌가 있는 날. 오늘은 청마 생가 - 김용식 김용익 기념관 - 동문고개 - 김춘수 생가 - 남망산 코스다. 남망산 주차장에 차를 놓고 걸어서 향토역사관으로 간다. 평일임에도 오늘은 관광버스가 많다. 봄맞이 나들이를 많이 오신 모양이다. 지난 주 일본 나고야 성으로 역사탐구를 다녀온 향토사연구소 소장님과 회원들에게 잘 다녀왔느냐 안부를 묻는다. 고대부터 이어진 한일관계에 대한 탐구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부럽부럽)
향토역사관 입구의 통제영 옛 지도에서 오늘의 코스를 짚어보고 출발한다. 새로 만든 하마비 앞에 섰다. 벅수는 길을 보고 서 있는데 하마비는 길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길과 나란히 있다. 길 쪽으로 돌려놓아야 맞다 하신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전주 태조전의 하마비도, 죽림 향교 앞 하마비도 길을 보고 서 있다. 맞다.
옛 통제영 사거리에서 동문 쪽으로 나아간다. 마주보이는 충무데파트는 일제 때 경찰서 자리였다. 당시 거부였다는 김덕보 여사가 희사했다는 경찰서 터다. 그 경찰서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던 시민들의 사진을 보여주신다. 그토록 원하던 해방이 되었는데, 일반 백성들은 해방 소식을 알지 못했고, 해방 후 어떤 행동도 하지 못했다. 연합군 측에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미군이 들어올 때까지 일본 사람들에게 계속 행정을 맡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윤이상의 회고를 잠시 빌려보자.
(해방 후) 처음에는 일본인은 여전히 힘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이 경찰 본부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일본인 경찰이 있었어요. 일본인들은 아직 귀국 명령을 받지 않았고 그걸 기다리며 모여 있는 상태였습니다. 물론 일본인에게 협력해 왔던 조선인들은 벌써 다 달아나버렸지요. 그들은 무서웠던 거에요. 전반적으로 우리 한국인들은 이제는 우리의 행정, 우리의 시장 우리의 경찰서장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스스로 그만두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들은 결국 폭력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위단을 만들어 일본인을 무력으로 몰아냈습니다. 일본인들은 반격했고 그때 조선인 한 명이 사망했습니다. 그것은 대중봉기의 신호가 되었습니다. 민중들은 경찰 본부로 몰려가 점령했습니다.
해방이 되고 한 달 반이 지나도록 일본이 철수하지 않으니 통영 사람들은 속이 탔을 것이다. 이양조라는 분이 술이 취해 경찰서 앞을 지나며 그 속내를 비쳤단다. 경찰은 총으로 위협했고, 마침 집에 총이 있던 그는 집에서 총을 들고 와 경찰서 건너편 간창골 고랑에서 총알도 없는 총을 쏘았단다. 사람들의 불만이 한껏 무르익은 참이었다. 난데없는 총 소리에 봉래극장 기도를 하던 임정복이라는 사내가 경찰서 뒷문을 넘어 진입했다. 일본 경찰은 즉시 그를 죽였고, 그것이 단초가 되어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윤이상이 말한 자위대는 당시 귀환 동포들이 만든 ‘향병대’라는 조직이었다고 하신다. 그들은 분연히 일어나 일본 경찰들을 잡아 본원사(지금의 태평성당) 절에 가두어 두었다가 미군에게 인계했다고 한다. 자기 한 몸 희생하며 일본인들을 몰아내게 한 임정복이라는 사내를 통영 사람들은 5일장으로 장례를 치러주었다고 한다. 통영 최초의 시민장이다.
청마 류치환 생가터 표석 앞에 선다. 옛날 호적을 보여주신다. 류치환 시인은 1908년생이다. 호적에는 1911년 신흥동에서 이거했다고 적혀 있다. 그렇다면 이곳은 생가가 아니다. 북문 너머 바다였던 곳을 매립하고 신흥동이라 불렀던 적이 있다. 그 때 둔덕에서 통영으로 들어온 가족의 첫 거주지가 북문 밖 신흥동이었고, 청마가 4살 되던 해에 당시에 동부동이라 부르던, 표석이 있는 이 집으로 이사 왔다. 그리고 17살 되던 해에 시장 안 류약국 집으로 이사 한다. 신흥동 집도, 표석을 만들어 둔 그 집도, 류약국 집도 청마를 기념할 만한 아무런 것도 남아 있지 않다. 뿐 아니라 길을 내면서 이리 저리 잘라 먹기도 했다. 지키지도 못하면서 없애는 데는 선수다. 컨텐츠가 많으면 뭘 하나, 지키지를 못하는데.
1930년대엔 생가 표석 옆 골목 안쪽에 권번이 있었다. 권번은 기생 조합으로, 일제가 만든 것이다. 통제영 당시에는 교방청과 기생청이 있어 영에서 관리를 하였으나, 폐영 이후 민가로 나온 기녀들의 행보를 관리할 기관이 없었던 것이다. 처음엔 선창골에 있던 것이 30년대에 이곳으로 옮겨온다. 통제영 당시의 기녀들은 민가로 나왔어도 기녀의 품위를 잃지 않았나보다. 통영의 만세 운동을 주도하고, 법정에서는 일본인 판사에게 일부종사의 예를 들며 당차게 쓴 소리를 했다고 한다. 그녀들은 단순히 술을 따르고 웃음을 팔던 여자들이 아님을 보여준다.
시장 안에 길을 내면서 반 토막이 난 류약국 집 옆 골목으로 들어선다. 동문새미 두 개 중에서 아래새미만 남아 있다. 웃새미는, 쌍새미였던 북문 새미 중 웃새미처럼 매몰되었다고. 우물은 사람이 살아가는 가장 기본이 되는 조건이다. 게다가 통영성 안에 있던 아홉 개의 우물은 문화재 관리 차원에서 보호되어야 하는 것임에도 물이 썩어갈 정도로 방치하고 있다. 다행히 이 우물은 두레박이 있는 것으로 보아 주민들이 사용하고 있는 듯하다.
골목을 나와 주전골로 향한다. 주전골은 통제영 당시 엽전을 만들던 곳이다. 예전에 이곳에 커다란 기와집이 몇 채 있었단다. 큰 고가는 평양관이라는 요정으로 사용되었을 정도라는데, 전쟁 중에는 피난민도 들어와 살았던 동네라고. 이룰 수 없는, 그래서 호부호형 할 수 없었던 사랑에 대한 기억도 있는 곳이다. 그 길에 통영 최초의 서양화가라는 김용주 생가가 있다. 생가가 산양읍이라는 말도 있다는데, 이곳이 생가가 맞다고 하신다. 한때 산양에도 들어가 살았고, 후엔 항남동에 살았었다. 일본 유학을 다녀와 잠시 학교 미술 교사를 했던 화가다.
생가 건너편엔 주전골 우물이 있는데, 통영성 안의 9정 중 하나이면서도 이 역시 매몰하려던 것을 근처 사시는 분의 제보로 김일룡 소장님이 오셔서 막으셨단다. 통영에 사는 사람들이 향토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다. 알아야 보이고, 보여야 지킬 수 있으니, 내 주변에 있는 것들을 지키는 일은, 내 주변에 있는 것들을 아는 것부터 시작한다.
‘주전골 막다른 골목 언덕바지 초가’가 집이었던 김용식 김용익 형제의 기념관으로 들어선다. 대문은 굳게 잠가두고 건너편에 쪽문을 열어두었다. 관람객들이 큰길로만 다닌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사람들의 통행은 대문을 통해야 하는 것 아닌가?
김용식은 우리나라 외교관이었으며 김용익은 단편 소설 [꽃신]으로 유명한 작가이다. 초가는 기와로, 다시 양옥으로 바뀌었다. 그들이 살던 곳을 유족들이 기부하여 기념관으로 꾸몄다. 주전골 옆은 대나무가 많아서 대몽지라 불리던 곳인데, 그곳엔 대나무를 이용한 공예품을 만드는 장인과 갖바치들이 살았단다. 통영 마지막 읍장을 지낸 아버지 밑에서 자란 김용익은 어린 시절 갖바치들이 깔신(가죽신) 만들던 모습을 보며 자랐을 것이고, 그 기억은 그의 작품 속에 살아 있다.
두 분의 아버지인 김채호 읍장은 새벽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안뒤산에 올랐다. 바위에 앉아 일출을 보면서 아버지는 아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했다지. 그 기도는 곧 약속이었다. 김용식의 자서전 <새벽의 약속>이 품고 있는 사랑과 감동의 이야기다. 김채호 읍장의 동생 김철호는 대학을 졸업하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서대문 형무소에 갇혔다 돌아가셨단다. 시청 건너편 선산에 묻혔다고. 김용익은 아버지가 광도면장을 지내셨던 때 태어나서 광도면 용호리가 생가이고 유택은 용남면 선산이다.
기념관을 나와 길 건너 골목으로 들어서면 동문으로 가는 길이다. 아파트가 들어서며 통영성을 갉아먹기 전에는 커다란 성벽이 남아 있었을 그 길엔 이제 초석만 몇 개 보인다. 동문에서 정량동으로 넘어가는 동문고개엔 독지가 김삼주의 집이 있었고, 통영청년단 회장을 지낸 임철규의 집이 있었다. 소장님이 들려주시는 설화 한 토막.
옛날옛날,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다. 아침에 고랑에서 빨래를 하던 여인이 문득 하늘이 시꺼매지길래 고개를 들었단다. 키가 하늘에 닿을 듯한 마고할미가 치마 가득 금은보화를 들고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걸 본 이 여인이 놀라서 서답 방망이를 들고 “저 할매봐라!” 했다지. 놀란 마고할미가 치맛자락을 놓쳐 금은보화를 떨어뜨린 채 안뒤산 쪽으로 도망가더라고. 그 때 떨어뜨린 금은보화가 남망산이 되고, 장좌섬이 되었단다. 그 동네 사람들이 부자가 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아래 금이 매장되어 있다는 걸 안 일본 놈들이 금광을 만들고 금을 다 캐내자 이 마을 부자들이 빈털터리가 되어 버렸다는, 신화에 근거한 최근 정황이다.
동문길 끝에 다다르니 땅이 평평하다. 통영 땅은 언덕 비탈 내려오면 바로 바다인 지형이었다. 그러니 이곳은 예전엔 바다였던 곳을 매립한 곳이다. 동피랑 아래쪽으로 큰 바위들이 보인다. 바닷가 바위들이 지금은 길가의 바위가 되어버렸다. 덤바우. 지금은 길을 낸다고 사라졌지만, 길모퉁이 이곳에 커다란 바위가 있었단다. 그 바위위에서 낚시도 했다던가. 오랜 세월 물살에 쓸려 아랫부분이 깎여서 물에 뜬 것처럼 보여 뜬 바위라 했다는데, 그걸 여기 사람들은 뜬바위> 뜸바우> 떰바구> 덤바우라 부르게 된다. 그 바위에 통제사 각암비가 있었다는데 지금의 도로를 만들면서 폭파해버렸다고. 예전 사람들은 무조건 없애는 병이라도 들었었나 보다.
통제영 당시 이곳 네 개의 마을에 큰 불이 났단다. 당시 송정(송징이), 해송정(해송징이), 항북, 와동(애골)이라 부르던 네 마을은 전소했고 추위에 떠는 백성들을 위해 당시 김영 통제사는 금송구역의 소나무를 베어 집을 짓도록 했다. 조선시대 소나무는 관아를 짓거나 배를 만드는 용도로 쓰기 위해 함부로 베어내지 못하도록 국법으로 금했고, 지엄한 국법을 어긴 이는 벌을 받아야 했다. 국법을 모를 리 없는 통제사는 헐벗은 백성들을 위해 나무를 베도록 선정을 베풀었다. 그 다음해 파직되어 돌아가는 통제사를 기리는 마음으로 백성들이 덤바위에 그 선정을 기록했다한다. 근처에 바위에 새긴 각암비가 하나 더 있다. 이응서 통제사 불망비. 그 앞에 집을 지어 비록 가려졌으나 없애지 않고 놔둔 것은 참 고마운 일이지 않은가. 길을 낸다고 폭파해 버리는 행정의 무심과 무지에 비한다면 말이다.
매립 전 해안도로를 따라 걸어 나온다.
매립하기 전엔 이 길을 따라 50여 미터 좌우가 바다였단다. 남망산으로 가는 옛 길은 동문고개에서 나오는 길과 이어진다. 그 길 안에 예전에 수산학교가 있었고, 통영 고등학교가 있었고, 둔덕으로 가는 배 선창이 있었단다. 둔덕은 거제다. 통영에서 뱃길로 가는 둔덕은 육로로 가야하는 고성보다 훨씬 가까웠을 것이다. 왕래도 많았겠지. 둔덕에서 통영으로 학교를 다닌 사람도 있다 들었다. 청마의 본가가 있는 곳도 둔덕이다. 그 길게 이어진 길 이쪽 마을이 항북이다. 항이라 함은 목을 말하고, 그 목의 북쪽이라 항북이다. 지금은 매립으로 목이 사라지면서 지명 또한 사라졌다. 그 목 가운데쯤에 방앗간이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는데 그곳이 바로 김춘수 시인의 생가다.
<꽃을 위한 서시>로 그는 한국현대시 100주년에 뽑은 10대 시인이 되었다. 지금은 방앗간 자리를 도로에 내어주고 세 채나 되던 집도 한 채만 남고 사라졌으나 그나마도 서울 집주인이 높은 가격에 내놓아 시에서 사들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기억할, 기념할 아무것도 없이 이름만 생가로 남은 곳은 통영 곳곳에 있다. 김춘수 생가가 그러하고, 박경리 생가, 청마 생가, 김용주 생가, 김상옥 생가, 수많은 무형문화재 장인들의 생가가 그러하다. 너무 많아서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곳이 통영이다.
비탄은 접어 두자. 길가 호떡집에서 호떡을 잔뜩 사들고 김춘수 시비 앞 정자에서 잠시 쉬어간다. 마침 충주에서 오신 관광객 몇 분이 먼저 자리 잡고 먹을거리를 펼치고 있다. 충주에서 싸온 족발과 바로 옆 중앙시장에서 산 멍게를 술과 함께 즐기는 곳에 우리도 앉아 말을 섞고 서로의 음식을 나눈다.
정자 옆에 있는 김춘수 시비는 <꽃> 시로 만든 단순한 디자인이다. 시인이 생전에 써 놓았던 것일까? 두인은 시 첫 줄보다 높게 찍혔다. 보통 두인은 시보다 낮게 찍어야 한다고 하신다. 낙관까지 찍은 이 시는 액자 형태로 시비 상단에 놓여 있다. 통영 곳곳에 김일룡 소장님 눈에 거슬리는 것 천지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인데, 통영을 속속들이 아는 소장님이니 그냥 넘어갈 수도 없고, 일일이 말하자니 속만 상한다. [자문]이란 제도는 괜히 있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소통의 부재. 하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소통이기도 하다.
남망산 조각공원으로 오른다. 봄을 맞은 운하가 반짝인다. 매립이전엔 더 반짝였을 것이다. 은빛 물결로 찬란히 찰랑였을 운하의 모습은 소장님 연배의 추억 속에나 존재할 것이다. 탱자나무 가득 핀 하얀 꽃이 향기롭다.
<김약국의 딸들> 영화 비를 찾았다. 63년에 통영에서 찍은 흑백영화다.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라서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저기가 어딘지 아무리 비교해도 모르겠던데, 통영에서 나고 자란 이들은 그 영화를 보며 저기가 어릴 때 빨래판을 타고 헤엄치던 곳이라고 말할 정도로 영화 전반의 지형이 친숙하다. 영화비가 서 있는 곳에 예전에 남송정이라는 사정이 있었단다. <김약국의 딸들>에서 용란과의 염문으로 쫓겨났던 한돌이 돌아와 용란과 ‘뒹굴었던’ 활터가 이곳이다. 청마 시비를 지나 초정시비를 찾았다. 소장님은 너무 외지다고 하는데, 나는 오히려 길에서 비켜 있는 아늑한 느낌이 좋다. 열무정을 지난다. 閱武. 군대사열을 뜻한다. 길가에 세운 돌에 새긴 글은 착량묘에 있는 한산대첩비를 쓴 이순필 선생의 글씨라고 하신다. 열무정 사정의 현판 글씨는 관음사 보광전 현판을 쓴 차우 김찬균의 글씨라는데 거기까지 들어가지는 않았다.
수향정을 뒤로하고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 섰다. 구국의 영웅 이순신은 중국의 갑옷을 입고 한산도 앞바다를 바라본다. 그 앞에 서서 묵념한 우리는 장군의 복식보다 장군의 얼을 기리는 것이니 한국전쟁 참혹한 역사 앞에서 그 전 일본에게서 우리를 구한 장군을 기억한 사람들에게 또한 감사할 일이다. 통영군청 앞 농협 창고 자리에서 동상을 제작했다고 하신다. 두 개를 만들어 하나는 부산의 용두산 공원으로 보냈다고. 당시 일곱 살이셨다는데 별 걸 다 기억하신다. 우리 모두 소장님이 통영의 향토사를 연구하실 운명이셨다는 결론을 내린다.
수향정으로 다시 내려온다. 水鄕은 중국에서 강가에 있는 작은 마을을 뜻한다. 그러니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통영과는 격이 맞지 않는다고. 수향을 바닷가 마을로 풀이한 이들의 일천한 지식 탓이리라. 동상 아래쪽에 자리한 <한산도가> 앞에 섰다. 초정 선생이 이십 대 때 쓴 글이라 하신다. 휘갈겨 쓴 글이 멋스럽다. 시를 지은 분이나 시를 옮겨 적으신 분이나 통영을 빛내고 있음이다.
마지막 코스다. 김용주 화비. 지금 화비가 있는 자리는 한때 류치진 극작가의 흉상이 있던 자리란다. 친일 시비가 붙으며 흉상을 내린 자리에 후배인 김용주의 화비를 들였다. 소장님의 목소리가 다시 커진다. 남자들에게 선배와 후배는 그런가보다. 감히 선배가 있던 자리에 후배가 들어오는 것은 선배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이라는. 초정 선생의 생가 앞에 꽃 시비를 세웠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결국 남망산 공원 아래로 옮겨오지 않았던가. 하긴 학교 다닐 때 보면 여자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같은 학번이면 그냥 이름을 불렀던 반면 남자들은 동 학년이라도, 그것이 1년 차 선후배라도 깍듯하게 형님 동생이었었다. 그래 그런가보다.
완연한 봄이다. 공원 곳곳에 화사한 꽃들이 지천이다. 다음 주 향토사 수업은 통영성이다. 도시락 지참이라니 봄 소풍 가는 기분이 들 것이다. 향토사 선후배 어울려 소풍 삼아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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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파란하늘님 덕분에 통영을 더 알아가고 사랑하게 될것 같아요.
함께하진 못하지만 올려주신 자료로나마 통영을 알아가게되니 감사한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