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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외 답사 스크랩 구주령을 넘어 영주 부석사로
김창집 추천 0 조회 36 11.09.09 08:3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탐문회 강원남부 답사기(7)

 

 

♧ 구주령(九珠嶺)과 옥녀봉 장승제


  2월 24일 일요일 맑음. 어젯밤 백암온천에서 푹 쉬었던 일행은 아침 식사를 끝내고 구주령(九珠嶺) 고개로 들어섰다. 울진에서 영양을 거쳐 안동이나 영주로 넘어가려면 낙동정맥을 넘어야 한다. 그 옛날 울진의 염전에서 만든 소금을 안동과 영주를 비롯한 내륙지방으로 이동하기 위해서 이 구주령을 주로 이용했다. 소와 말에 싣거나 등짐지고 넘던 구불구불 소금길이 바로 이 길이었을 것이다.

 

 동해에서 잡은 고등어도 소금을 뒤집어쓰고 이곳을 넘었을 터. 구불거리며 올라가는 버스를 몰며 백암산의 아름다운 설경에 저절로 신이 난 박 기사는 “왼쪽 창가에 있는 분들 1만원씩 내요. 오른쪽에 타신 분들 1만원씩 내요.”를 거듭하길래, “차나 조심해서 몰라.”고 핀잔을 주면서 그 옛날 등짐을 지고 이곳을 걸어 넘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어느덧 정상에 이르러 차를 옆에 세우고 전망대로 들어간다.

 

 날이 갤 때면 바로 코앞에 동해 바다가 보인다지만, 지금은 눈보라와 안개 때문에 먼 곳은 볼 수 없다. 사진을 찍은 뒤 다시 차에 오른다. 내려가는 길은 주변 땅의 지대가 높기 때문에 길도 곧고 험하지 않다고 한다. 주변에 옥녀의 무덤이 있었다고 하나 무덤은 보이지 않고 장승이 섰다. 이곳이 영양 군민의 안녕과 화합을 기원하는 옥녀봉 장승제를 치르는 소공원인 것이다.

 

 

 옥녀의 전설에 대한 전설은 다음과 같다. 조선 중엽, 황씨 성을 가진 부사가 영해(領海)부사로 부임하기 위해 영양을 거쳐 구주령을 넘게 되었는데, 당시 이 고개를 중심으로 2~30리 이내엔 민가가 하나도 없었고, 산이 높고 길이 험하여 교통이 대단히 불편하였다. 부사가 나졸들을 거느리고 가족과 함께 이 고개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딸 옥녀(玉女)가 병이 나 구급약으로 치료하였으나 백약이 소용없이 병이 차도를 보이지 않는다.


 밤을 지새우며 치료하였으나 정성을 기울인 보람도 없이 죽고 말았다. 부사는 옥녀를 양지바른 곳에 묻고, 부임지에 도착한 후 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이 고개에 사당을 짓고 1년에 여러 차례 제사를 지냈다 한다. 그러나 말이 퍼지기는 옥녀가 아버지를 따라 울진으로 가다가 죽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 영해부사의 심부름으로 나졸을 데리고 수비에 문서를 전달하고 되돌아가다 죽었기 때문에 그 공을 기리기 위해 주민들이 무덤을 만들었다고 전해졌다. 

 

 그래서 주민들은 이 고개에 사당을 짓고 동제를 지내게 되었고, 언제부터인가 이곳을 벌초하면 득남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득남을 원하는 부인들의 정성스런 관리 덕택으로 잘 관리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1995년에 도로확장으로 무덤 터가 없어지면서 나머지 땅에 장승을 세운 뒤, 2000년부터 시작해 올해 9회를 맞은 옥녀봉 장승제는 매년 고추장승 및 송이장승 등을 제작해 군민들의 안녕을 빌면서 지역 특산물 홍보, 볼거리 제공 등 영양을 홍보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 무량수전(국보제18호)

 

♧ 올 때마다 새로운 부석사


 우리나라의 명산대찰을 찾을 때마다 일주문에서 절집에 이르는 길옆의 울창한 나무들과 시냇물 소리, 그 분위기에서 뿜어 나오는 서늘한 기운이 온몸을 씻어줘 세속의 모든 것을 털어버리곤 한다. 그러나 수많은 보물이 모여 있는 그야말로 보물 창고나 다름없는 이 절집은 밝은 시골길을 걸어 들어와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친근하게 느껴진다. 지금은 큰 도로가 나서 바로 앞에서 걷기 시작하지만 옛날에는 수륙천리 여러 산을 넘고 강을 건너야 다다를 수 있었던 곳이었다.  

 

 부석사(浮石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의상대사가 신라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676년에 창건해 화엄종을 널리 전했다고 한다. ‘송고승전(宋高僧傳)’ 의상전(義湘傳)에는 의상과 선묘, 부석사 창건에 관한 설화가 자세히 적혀 있다. 고려시대에는 선달사(善達寺) 또는 흥교사(興敎寺)라 불렀는데 선달이란 선돌의 음역으로 부석의 향음(鄕音)으로 보기도 한다.

 

    * 부석(浮石)이라 새긴 바위

 

 의상을 부석존자(浮石尊者)라 하고 그가 창시한 화엄종을 부석종(浮石宗)이라 하는 것은 이 절의 명칭에서 유래된 것이다. 의상 이후 혜철(惠哲)을 비롯하여 신라 무열왕의 8대손인 무염(無染)과 징효(澄曉) 등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었다. 만년에 이곳에 머문 원융(圓融)은 대장경을 인쇄했는데 지금 부석사에 전하고 있는 화엄경판은 이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372년(공민왕 21) 원응(圓應)국사가 주지로 임명되어 가람을 크게 중창했다.


 경내에는 고려시대의 무량수전(국보제18호)과 조사당(국보제19호)을 비롯하여 원각전, 응진전, 안양루, 선묘각, 범종루, 자인당 등 조선시대의 건물들이 남아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무량수전앞석등(국보제17호), 소조불좌상(국보제45호), 조사당벽화(국보제46호), 3층석탑(보물제249호), 당간지주(보물제255호), 고려판각(보물제735호) 등이 있다. 이밖에도 이 절의 창건설화와 관련 있는 석룡, 대석단, 선묘정, 녹유전, 선비화 등이 전해지고 있다.


   * 무량수전 처마와 풍경

 

♧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서서’


 부석사에 갈 때마다 나는 이곳 답사가 몇 번째인지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정확히 따진다면 고작 네댓 번에 지나지 않겠지만, 어느 것 하나 눈에 익지 않은 게 없어 보인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면 아마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내다 과로로 숨진 미술사학자 혜곡(兮谷) 최순우(崔淳雨) 선생님의 영향 때문이 아닌가 한다. 선생님의 글 중 고등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한국의 미(美)’를 가르치면서 우리 것에 대해 어슴푸레 하게 눈이 뜨였고, 그의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통해 문화재 사랑을 배웠기 때문이다.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 ‘부석사 무량수전~’ 에서 -

 

   * 무량수전 앞 석등

 

 부석사 무량수전(無量壽殿)은 부석사 경내에 있는 고려시대 목조건물로 국보 제18호이다. 1916년에 해체 수리할 때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는 원융국사(964~1053)가 1376년에 중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연대상 서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주지로 있었던 원응국사를 잘못 쓴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기단의 동쪽 석면에 새겨진 명문에는 충원군의 석공이었던 김애선(金愛先)이 기단석을 정리했다고 되어 있다. 화강석의 높은 기단 위에 남쪽을 향해 서 있는데 정면 중앙의 3곳에 돌계단을 두었다.


 평면구조는 앞면 5칸, 옆면 3칸으로 팔작지붕이며 배흘림(엔타시스)이 뚜렷한 기둥이 받치고 있다. 정면에는 각 칸마다 살창을 달고, 측면은 벽으로 막았으며 뒷벽에는 가운데에 판문(板門)과 그 좌우로 붙박이 살창을 달았다. 공포는 기둥 위에 첨차와 살미[山彌]를 층층이 짜 올린 주심포(柱心包)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첨차 끝부분이 쌍S자형의 곡선으로 된 것이 특징이다. 건물 내부에는 높은기둥[高柱]을 배열하고 그 사이에 불단과 위쪽에는 화려한 닫집[唐家]을 만들었다.


   * 부석사 소조불좌상(국보 제45호)

 

♧ 선묘와 부석사의 유래


 무량수전을 보며 왼쪽 편으로 가보면 ‘浮石(부석)’이라고 새긴 넓적한 바위가 있다. 이 바위가 바로 절 이름을 상징하는 바위인데 ‘삼국유사’에 ‘송고승전(宋高僧傳)’ 중 의상전(義湘傳)에는 의상과 선묘, 부석사 창건에 관한 설화가 자세히 적혀 있다. 의상이 당나라 유학시절에 그를 흠모하는 여인이 있었는데, 그 여인이 바로 선묘(善妙)이다.

   

 그러나 스님의 신분으로 그녀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의상이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신라로 돌아오려는데, 이를 마중하려 했던 선묘가 배를 놓치고 용이 되어 의상의 배가 신라 땅에 안전하게 도착할 때까지 호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의상은 오로지 자신의 목표인 당나라의 화엄사상을 익혀 신라로 귀국하는 일만이 임무를 완수하는 길이라 여겼을 것이다.

 

    * 부석사 천왕문

 귀국 후 의상이 문무왕의 명을 받아 이 부석사를 지을 때 이 자리에는 도적들이 차지하고 있어 애를 태웠는데, 선묘가 돌을 세 번이나 띄우는 영험을 보여 도둑들을 몰아냈다는 선묘화룡(善妙化龍)의 전설이 전해진다. 이를 뒷받침하듯이 아직도 무량수전 오른쪽 뒤편에 선묘각이 있고, 선묘각 안에 선묘의 초상화가 있으며, 조사당 내에도  선묘의 초상화가 있다. 


 또 하나 의상대사에 대한 전설로 ‘선비화(禪扉花) 전설’이 있다. 조사당 건물 앞에 '선비화'라는 나무가 있는데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가 지팡이를 꽂아놓은 것이 살아나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이다. ‘골담초’라는 나무인데, 이 나무의 잎을 달여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어 나무를 보호하려고 유리와 철망으로 막아 비를 맞지도 않는데 살아 있는 것이다.


  * 부석사 3층석탑(보물제249호)

 

♧ 부석사의 보물들


 앞서 무량수전은 소개되었지만 부석사에는 그것 말고도 수많은 보물이 있다. ‘부석사3층석탑’은 무량수전 동쪽 언덕 위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탑으로 보물 제249호이다. 높이 526cm로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이 놓여 있는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형식이다. 하층기단은 8매의 돌로 구성되었는데 중석 각 면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를 표현했다.


 ‘부석사석등’은 무량수전 앞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등으로 국보 제17호이다. 높이 297cm로 방형의 지대석 위에 기대받침이 있으며, 기대석의 각 면에는 안상(眼象)이 2구씩 장식되었고 윗면에는 8각의 연화 하대석이 있다. 연화 하대석에는 귀꽃이 뚜렷한 8개의 복련(覆蓮)이 돌아가며 조각되었고 복련 가운데에는 간주석(竿柱石)을 받치는 3단 받침이 있다.


   * 조사당 앞에서 선비화를 보고 있는 사람들

 

 ‘부석사 소조불 좌상’은 부석사 무량수전에 봉안되어 있는 고려시대 소조불 좌상으로 국보 제45호이다. 불상 높이는 278cm인데, 무량수전불상개금기문(無量壽殿佛像改金記文)에 따르면 1723년(경종 3)에 정상주를 비롯한 신도 94명에 의해 개금되었으며, 1975년에 또 1차례 개금되었다고 한다. 불상이 동쪽을 향해 앉아 있다는 점에서 아미타불로 볼 수 있으나 손 모양이 석가불을 상징하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부석사 조사당’은 무량수전의 동북쪽 산기슭에 위치한 고려시대의 목조건물로 국보 제19호이다. 묵서명에는 1377년(우왕 3)에 창건되었다고 나오며, 중창기에는 1490년(성종 21)에 중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평면구조는 앞면 3칸, 옆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전반적으로 규모가 작고 세부표현이 간결한 모습이다. 정면 가운데에는 살문을, 그 좌우 옆칸에는 붙박이 살창을 달았다.


 ‘부석사 조사당 벽화’는 조사당 벽면에 그려졌던 고려시대의 벽화로 국보 제46호이다. 각 면 길이 약 205cm, 너비 약 75cm. 보살 2구와 사천왕 등 모두 6폭으로 화면의 손상이 심한 편이며, 현재 새로 지은 보호각에 진열되어 있다. 원래는 조사당 안쪽 입구에서부터 사천왕상, 보살상의 순으로 돌아가며 배치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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