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후 넷째 주일 / 주일 예배 설교문
2024년 06월 16일(주일)
이사야 2:1-5
“한반도에 참 평화가 오게 하자!”
성서(聖書)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 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서는 말 그대로 ‘거룩한 책’입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해 놓은 책이지요.
여기서 ‘영감’(靈感)이란 말이 흥미롭습니다.
영감이란 말은 한 저자가 역사 속의 사건들과 인물들을 극적인 효과와 감동으로 써 내려가기 위한 일종의 번뜩이는 생각, 깨달음, 환호, 감흥이랄 수 있어요. 이를테면 선악과 이야기가 그런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자기 욕망에 빠져 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죄는 히브리어로 '하타(חֲטָאָה)', 헬라어로는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입니다. 두 단어는 공통적으로 과녁에서 '빗나가다'는 뜻이에요. 하마르티아는 다른 게 아녜요. 하나님을 멀리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떠나는 거지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거지요.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서 인간은 자기 실존 속에 모든 게 가능합니다. 하지만 탐욕과 자기 우상에 빠지게 되면 자기 속에 하나님의 이미지를 일그러지게 만드는 인간이 될 수밖에 없지요. 결국 죄에 무너지는 인간이 되는 거지요.
그렇다면 그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그것은 회개입니다.
회개란 뜻의 히브리어는 ‘슈브’입니다. 그 뜻은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다’, ‘방향을 전환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삶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진 상태를 의미하지요.
그래서 죄인이 잘못된 길을 돌이켜 삶의 방향을 전환할 때 우리는 그가 회개했다고 말합니다. 그가 깨달은 거예요. 사람이 사람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고 새 삶을 살아야겠다는 뼈아픈 고백이지요.
이를테면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고문하고 감옥에 가두었던 바울이 다메석 길 위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뒤로부터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깨닫고 믿게 된 거예요. 더욱 놀랄만한 일은 그가 박해했던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사람들에게 전파했던 거예요.
그러니까 성서란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신앙고백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을 쓴 저자의 고백이면서 하나님의 말씀인 거예요. 하여 성서의 가치는 삶이 바뀌고 인생이 변화되는 데 있습니다. 성서를 읽고 인생을 바꾼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삶에서 예수를 드러내는 복음적인 삶을 산다는 거예요. 그는 죽어가는 생명을 살립니다. 불의에 저항하고 정의를 세워갑니다.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심습니다. 가난한 자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돌봅니다. 차별과 혐오와 억압을 없애는 데 앞장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운동을 통해 이 땅에 생명 평화 정의를 회복시켰지요.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요 1:1)이 된 거예요. 그분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요 1:14) 우리도 이 말씀을 따라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꿈꾸던 예수 운동에 동참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따지고 보면, 이스라엘 민족과 공동체만을 위한 말씀이 아녜요. 그것은 이스라엘을 통해 주어진 모든 나라, 곧 온 세상을 향한 말씀이지요.
본문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하나님이 예루살렘(시온) 성전으로부터 온 누리에 평화를 이루실 미래를 펼쳐 보여요. 이 평화는 이스라엘이 온 세상을 지배함으로써 이룬 게 아녜요. 그것은 예언자가 전해 준 여호와의 말씀을 통해 이루는 거예요. 이 평화는 다툼과 분쟁을 조정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루지요.
예언자는 그 평화를 더욱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어요.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민족들은 칼을 들고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전쟁 연습도 하지 아니하리라,”(사 2:4/공동번역)
‘칼을 쳐서 보습을’, ‘창을 쳐서 낫을’을 만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렇습니다. 더 이상 분쟁하거나 전쟁해야 할 상황이 사라졌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나라마다 서로 공격하거나 전쟁 연습할 이유가 사라진 거예요. 하여 마침내 이 땅에 평화가 찾아온 거지요. 이것이 바로 예언자가 바라본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완전한 평화예요.
현재 윤석열 정권은 전쟁 연습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오는 8월 19일부터 22일까지 4일간 한국과 미국은 북한의 핵 공격에 대비하여 을지 연습인 ‘을지 자유의 방패(UFS)’를 실시할 예정이에요.
한미는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은 후 70년 만에 처음으로 북한의 핵무기 사용을 상정한 핵 작전 시나리오 훈련을 하게 됩니다. 이건 힘에 의한 평화를 유지하겠다는 현 정권과 미국 바이든 정권의 전쟁 연습인 거지요. 그러니까 한반도는 언제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전쟁 위기에 놓여 있는 거지요.-(“북핵 맞설 ‘핵우산 운용’ 문서화...한미, 8월 을지연습 때 첫 훈련”, 조선일보, 2024. 6. 11. 양지호 기자)
최근(24. 5. 28)에 북한은 남한에 오물 풍선을 살포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북한의 행위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탈북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입니다. 대남 오물 풍선 살포는 남쪽에 살고 있는 탈북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 때문입니다. 작년 헌재에서 탈북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 금지는 표현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위헌결정을 내린 적이 있습니다. 이에 현 정부는 표현의 자유만 강조할 뿐 탈북민의 대북 전단 살포에 대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어요.
사실 탈북민 대북 전단 살포는 남북 합의를 위반한 거예요. 따지고 보면 남북한 역대 정부에서는 상대를 비방하는 전단 살포를 중단하기로 합의했었지요. 가까운 예로 문재인 정부 시절,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합의한 <4.27 판문점 선언>에서도 전단 살포 중단을 강조했습니다. 그 까닭은 남북 사이 우발적 충돌 방지와 군사적 긴장 완화를 위한 남북한 역대 정부가 추진한 정책이자 남북 합의였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윤석열 정부는 탈북민 대북 전단 살포에 방관한 채 표현의 자유만 강조했어요. 탈북민 대북 전단 살포에 북한이 대남오물 풍선으로 맞서자 윤석열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9.19 군사합의서’의 효력을 정지한 데 이어 대북 확성기 방송을 다시 시작했지요. 여기서 9.19 군사합의서는 한마디로 군사분계선 지역에서, 서해와 동해 그리고 상공에서 무력 충돌하지 말자는 거지요. 이는 남북 사이 군사적 긴장 완화와 신뢰를 구축하고 평화를 공고히 하는 데 인식을 같이했어요.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로 가기 위한 판문점 선언의 군사적 실천에 합의한 거예요.
이에 윤석열 정부는 북한의 오물 풍선 살포에 대해 ‘압도적 힘’만을 강조하며 강 대 강을 주장하고 있지요.-(“대북전단과 오물 풍선, 우리가 잊고 있는 것들”, 경향신문, 이종석 칼럼, 2024. 6. 11. 이종석 전 통일부장관)
그렇습니다. 힘에 의한 평화는 곧 강 대 강의 무력 충돌만 빚을 뿐입니다. 아무리 재래식 무기라도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남북한은 공멸(共滅)하고 맙니다. 남북한 모두 회생 불가능한 상태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지금으로부터 약2,500여 년 전의 이사야 예언자가 바라본 완전한 평화는 일촉즉발(一觸卽發) 전쟁 위기에 내몰린 한반도 정세에 큰 울림이 됩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바라본 완전한 평화는 이렇습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어 더 이상 다툼과 분쟁과 전쟁이 없는 세상”입니다.
한반도에서 우리가 이런 평화를 이루어 내야 하지 않을까요? 이 평화를 이루어 내야 할 과제가 지금 한반도에 몸을 담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바라본 평화는 이스라엘 민족과 공동체를 향한 평화뿐만 아니라 전쟁 위기에 놓인 오늘날 우리 한반도를 향한 평화이기도 합니다.
그래요. 현재 윤석열 정부는 강 대 강으로, 압도적인 힘에 의한 평화를 강조하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평화를 사랑했던 우리 민족이 사는 길은 한반도에 평화를 심고 지켜내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이사야 예언자의 의도와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겠습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할 새로운 미래가 무엇인지 말하고 있습니다(1절). 결론부터 말하면 그것은 ‘칼을 쳐서 보습을, 창을 쳐서 칼을’(4절) 곧 완전한 평화가 이 땅에 시작된다는 거지요.
2절 첫 구절에, ‘말일에’란 표현이 나옵니다.
언뜻 보기에는 ‘마지막 날에’란 표현이 마치 종말론적 표현 같지만, 문맥상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말일에’로 옮긴 히브리어 ‘베아하리트 하야밈(בְּאַחֲרִ֣ית הַיָּמִ֗ים)은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되는 때이자 이스라엘이 온전히 회복되는 때, 곧 완전히 평화가 시작되는 때이지요. 그러니까 ’말일에‘란 표현은 의미상 다가올 ’훗날‘을 가리킵니다. 훗날은 현재와 단절된 시간이 아니라 현재와 연결된 시간을 뜻하지요.-(『이사야 특강』, 김근주 지음, Ivp, P.154)
하여 ’말일에‘란 말씀은 가까운 미래의 사건을 가리키는 거예요. 그런 맥락에서 보면 구약에서 말하는 ’말일‘, ’말세‘, ’마지막 날‘은 자칫 종말의 시대로 멀리 밀어내는 느낌을 줍니다. 그래서 이 말은 그 시대에 사람들이 가슴에 품었던 다가올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단지 끝장나는 날로 치부해 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은 다가올 미래에 대한 변화를 기대하는 거예요. 현재 교회가 안고 있는 하나의 모순은 미래(천국=하나님 나라)를 단지 죽은 뒤의 세상쯤으로 여기는 거예요. 또 현재 부귀영화와 축복을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만 제한해 버린다는 점입니다.
만일 우리의 신앙을 이렇게 이해해 버린다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요?
교회가 현실에 나타나는 불의, 억압, 폭력 앞에 침묵해 버리게 되지요. 침묵뿐만 아니라 침묵을 정당화하고 더 나아가 교인이 불의한 현실을 수용하고 그 해결을 내세로 미루고 맙니다.
그러고 보면 성서를 제대로 알고 이해한다면 현실의 불의와 억압과 폭력에 맞서 저항하는 거지요. 저항은 곧 보다 나은 내일을 보장하기 때문이지요.
다가올 새로운 미래에 대한 기대가 바로 그리스도인이 품어야 할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러니까 ’말일‘이란 표현은 어떤 시간의 끝 날이 아닌 하나님이 행하시고 일으키실 변화, 곧 가장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하지요. 이것은 오늘 이사야 예언자의 의도이기도 해요.-(위의 책, P.155)
이제 이사야는 그날에 여호와의 집이 서 있는 산이 모든 산의 으뜸가는 산이 될 것이라고 말해요. 그리고 온 이방 나라 백성이 여호와 집이 있는 산으로 물 흐르듯 흘러간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이사야는 모든 민족을 동사 히브리어 나하르(נָהַר), 곧 흘러가는 강물에 비유해요.
그런데 이사야는 모든 나라 백성이 ’여호와의 산‘ 곧 시온을 향해(אל/towards) 모여드는 것과 시온에서부터 모든 나라 백성을 향해 나오는(מִן/from) 율법을 서로 대조하고 있어요. 이렇게 대조한 까닭은 율법과 말씀이 예루살렘(시온)에서 나오기 때문이에요.
2절에서 모든 나라 백성이 도착한 곳에서 무엇을 듣게 될까요?
그렇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산(2절), 곧 야곱의 하나님께서 계신 집(3절)에서 율법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지요.
그런데 모든 나라 백성이 여호와의 산이 있는 예루살렘(시온)으로 향하는 까닭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여호와의 율법, 여호와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지요(3절). 그러니까 시온(예루살렘)이 세상의 으뜸이 된 것은 여호와의 율법과 말씀에 기반을 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온을 향해 흘러드는 모든 이방 나라 백성은 여호와가 가르칠 “그의 길”을 기대하며, “그 길로” 걸어갈 것을 다짐합니다. 여기서 “그의 길”은 하나님의 가르침과 계명을 뜻하지요.
그러면 율법과 여호와의 말씀이 시온에서부터 나온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요? 또 시온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뜻일까요?
4절이 이를 알려줍니다. 4절 초반부에 하나님이 모든 나라를 판단하시고 판결(미슈파트/מִשְׁפָּט)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나라의 재판장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곧 여호와가 온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의미이지요. 그래서 4절은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와 그 결과에 의한 모든 이방 나라의 응답입니다.
그러니까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모든 나라는 시온에 와서 하나님의 뜻을 구한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나라를 재판하시는 거지요.
하여 이제 모든 나라는 하나님의 판결대로, 곧 여호와의 율법과 말씀대로 행하면 되는 거지요.
그래서 4절은 모든 나라가 여호와의 판결에 대한 응답으로 나타난 결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나라 사이에 다툼과 분쟁을 조정하시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4절)
그렇습니다. 예루살렘에 모여든 모든 나라가 더 이상 전쟁을 할 이유가 없겠지요. 더 이상 칼과 창이 필요 없겠지요.
’보습과 낫‘의 쓸모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논과 밭을 일구는 농기구입니다. 전쟁은 농기구를 전쟁 무기로 만들고 무고한 청년들을 희생제물로 삼지요. 전쟁은 하면 할수록 잔인해지고 인간을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습니다.
힘에 의한 평화, 그것은 전쟁을 불러올 수밖에 없어요. 전쟁 연습은 하면 할수록 평화와 멀어질 수밖에 없지요. 이게 전쟁이 주는 비극입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의 재판 결과 어떤 변화가 생겼습니까?
모든 나라 사이에 칼과 창이 필요 없는 세상, 곧 완전한 평화의 세상이 된 거예요. 하나님이 판단하고 판결한 근거는 시온에서부터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이 사라진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나를 지키기 위해서,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무력을 사용하게 됩니다. 바로 칼과 창이지요. 요즘 말로 표현하면 인류를 공멸할 수 있는 최첨단 무기인 핵무기이지요.
미국은 핵우산 정책으로 북한의 핵 공격으로부터 남한을 보호한다고 하지요. 여기서 핵우산(nuclear umbrella)이란 핵보유국이 자신의 핵무기로 비핵 보유 동맹국을 보호해주는 일종의 핵 방위 공약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핵무기를 갖지 않은 동맹국이 적으로부터 핵 공격을 당하면 핵을 가진 동맹국이 보복 공격을 해주겠다는 약속이지요.
하지만 여기에 바로 미국의 꼼수가 있지요. 바로 세계 패권국가로서 당위성을 유지하기 위한 명분이지요.-(“확장억제∙전략자산∙핵우산... 풀어서 쓴 알쏭달쏭 ’한-미 안보 용어‘”, 권혁철의 안 보이는 안보, 한겨레, 2022. 5. 23)
그렇습니다. 미국의 핵 전술과 핵우산 정책은 세계 평화를 위해서 칼을 든다는 말과 다를 바 없어요.
하지만 오늘 이사야 예언자가 바라본 평화는 결코 무력에서, 곧 칼과 창에서 오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한반도는 미국의 확장억제와 핵 동맹 정책의 논리로 전쟁 연습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에서 미군이 존재하는 한 완전한 평화는 오지 않을 거예요.
그래요. 한반도의 평화는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이 온전히 선포될 때야 비로소 오게 될 것입니다. 곧 그때는 칼과 창이 쓸모없게 될 거예요.
그러니까 이사야 예언자는 하나님의 율법에 근거해서 현재 유다와 예루살렘을 보고 있고 다가올 새로운 미래를 바라본 거예요. 하여 모든 이방 나라가 시온으로 온다는 것은 그곳에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이 있고, 또한 거기에서 여호와의 재판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가 유다뿐만 아니라 세상 전체에 미친다는 뜻이에요.
오늘 이사야 예언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바로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까닭은 예루살렘에서 여호와의 율법이 선포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가 보습과 낫으로 이루는 나라가 되는 거예요. 말하자면 완전한 평화가 오는 거지요.
그래서 이사야 예언자는 “야곱 집아! 오너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걸어가자!”(5절/직역 성경) 권면합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는 것은 여호와의 말씀과 율법에 따라 살아가자는 거예요. 그러니까 새로운 미래를 기대하면서 현재에 충실히 살자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언젠가는 모든 이방 나라가 시온으로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보습과 낫으로 이루는 나라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현재 이 말씀을 듣는 이스라엘 청중은 미래를 기대하며 지금 여호와의 빛 가운데로 걸어갈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사야 예언자의 의도는 미래가 미래를 향해 가도록 ’현재‘를 이끌고 있습니다.
하여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은 미래를 살기 위한 현재를 향한 권면인 거지요. 여호와의 빛, 다시 말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미 4:5)을 의지하며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이 땅에 완전한 평화를 위해 일하는 거지요.
오늘 이사야 예언자의 의도는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예루살렘을 통해 온 세상에 임한다는 겁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는 날에 비로소 완전한 평화가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의도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 나라에도 임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말씀은 교회 공동체뿐만 아니라 교회를 통해 세상 모든 이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통치를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통치, 곧 완전한 평화는 부름을 받은 나로부터, 말하자면 교회 공동체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사야 예언자의 의도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완전한 평화를 누릴까 물음보다는 부름을 받은 내가 먼저 하나님의 통치를 보여주고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날마다 여호와의 빛 가운데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곧 여호와의 말씀과 율법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작은 예로, 우리가 평통사의 회원이 되어 후원하는 일입니다. 평통사의 중창단으로 활동하는 일입니다. 한반도에 자주평화 통일이 왜 필요한지를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고 설득하는 일입니다. 바로 그런 삶이 곧 하나님의 통치를 보여주고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면 지금 내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을 묻게 됩니다.
누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살라고 권면하지 않아도 날마다 묵상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 땅의 평화를 위해 살아야 할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완전한 평화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선관 시인의 <남남북녀>란 시가 있습니다.
여보야 / 우리 만나 얘기 좀 하자 / 우리가 얘기하기에는 / 힘이 있다는 4개 국가의 / 영어가 필요 없고 러시아가 필요 없고 / 중국어가 필요 없고 일본어가 필요 없는 / 그 모든 국가의 말도 몰라도 된단다 / 그러니깐 / 여보야 / 우리 얘기 좀 하자꾸나 / 우리가 얘기하기엔 통역이 필요 없잖니 / 여보야
기도 / 이 땅에 완전한 평화를 원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에 따라 살며 하나님의 통치를 먼저 맛보게 하옵소서. 부름을 받은 나로부터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살게 하옵소서. 전쟁 위기에 내몰린 이 땅 한반도에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참 평화가 어서 속히 오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