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나를 인도해 주신다
정회순•김정임 가정
1. 통일교회 입교 2. 축복 3. 임지 동원 4. 일신석재 5. 자녀 교육 6. 어머니의 독신 축복 7. 천보가정 8. 다툼이 없는 행복한 부부로 사는 비법 9. 앞으로의 계획
주요 내용 : 원고 작성자 정회순, 어릴 적에 형제지매들 사이에서 힘들게 성장, 가정에서 교회개척 출발, 아내 자랑, 대원활동 및 자아 회복, 일신석재 추억, 자녀 양육 비법, 어머니를 독신축복가정으로 만들기 위한 협동 노력, 천보가정이 되기까지의 천우신조, 부부 다툼 방지 비법, 건강 유지, 천보활동 강화
1. 통일교회 입교
나는 1956년 4월 17일(음) 출생했다. 나의 아버지는 정동현, 어머니는 박복희이셨다. 나는 7남매 중 다섯째였고, 전남 곡성군 석곡면 석곡리에서 태어났다. 본래 10명의 자녀들이 태어났으나, 3명은 일찍 성화했고 남은 자녀들이 7남매였다.
내가 다섯째이다 보니, 위 아래로 걸리적거리는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형제자매들도 많으면 생존 경쟁이 치열하다. 그저 순하기만 한 나는 형제자매들에게 천덕꾸러기 같아보였다. 발에 차이는 돌멩이랄까… 나는 숫기가 거의 없이 방에 처박혀서 말없이 커나가는 존재였다. 활동이 왕성한 형제자매들에 비하여 나는 뒤졌다. 그래서 나는 어려움 속에서 성장했다. 이런 현상은 동물의 세계나 인간계에서나 비슷한가 보다.
내가 어릴 적에 아버지께서는 《원리 해설》, 《원리강론》을 탐독하시고, 교회에서 교회장과 원리 중심한 대화를 나누시는 것을 보았다. 상당히 진지해 보였다. 나는 “두 분이 뭔가 진지한 내용을 갖고서 대화를 나누시는구나. 그 내용이 무엇이지?”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통일교회를 알게 된 것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였다. 서너 살 때 개척 전도를 나오신 72가정 황인태 전도사가 우리 집으로 오게 되면서 내 인생은 새 진리를 향하여 방향 전환을 하게 되었다. 해바라기가 해를 따라서 방향을 바꾸듯이, 나는 참부모님을 향한 자세로 살기 시작했다. 나는 나 스스로를 ‘참부모바라기’로 이끌었다.
처음에는 옆 동네에서 전도활동을 시작하였는데, 그 집에서 쫓겨나셨다. 그래서 형님이 황전도사를 집으로 모셔왔고, 아래채에서 개척교회가 시작되었다. 그때 교회에 나오신 분 중에 777축복가정이 3명, 기성축복가정이 한 명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우리 집에서는 형님 두 분과 누님이 교회를 다니셨다. 형님과 누님이 777가정 축복을 받으셨다. 황인태 전도사께서 활동을 끝내고 떠나시면서 전도된 사람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때 찍은 사진이 역사를 증명해주고 있다. 지금도 어디서 황인태 교수를 만나서 우리 아버지 이야기를 하면, 60여 년이 지났지만, 깍듯이 어르신으로 부르신다. 통일가에서 유명하고, 세상에서도 유명한 강사이신 황교수께서 지금까지 아버지를 기억 해주신 것에 대해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
우리 집은 광주와 순천의 중간 지점에 있었다. 곡성 석곡이었다. 지금은 고속도로가 개통이 되어서 바로 다니지만, 그때에는 비포장도로였고, 광주에서 순천을 가려면 하루 종일 가야하는 먼 거리였다. 전도활동을 하러 온 대원들이 차에서 내려서 먼 길을 걸어서 집에 들어오면 어머니와 형수는 그들에게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해 주셨다. 많은 사람이 개척 전도를 나오게 되면서 그들 모두 우리 집을 거쳐서 인사를 하고 가는 시절이었다. 어릴 때 새로운 개척 전도 나오신 분들이 오시면 누님이 지시하는 대로 심부름을 해주었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이 있는데, 우리 집에 교회 대원들이 많이 들락날락거리다 보니 나도 자연히 그런 분위기에 끌려갔다. 자연스럽게 우리 집이 교회나 전도소 분위기가 되었고, 나는 찬송, 기도, 예배를 드리는 환경에 친숙해졌다. 새 진리의 씨앗, 심정의 뜨거움이 내 가슴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이미 통일교회 자녀가 되어 있었다. 청소년기에는 가정환경이 참 중요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나의 입교 동기는 777가정 형수께서 오셔서 나에게 입회원서를 써달라고 했다. “아니, 무엇을 하려고 쓰는 것입니까?”라고 질문했는데, 형수는 “그냥 써 달라.”고 하였다. 나는 이미 통일교회에 친숙한 입장이었고, “형수님이 나쁜 의도를 갖지는 않을 것이다.”고 판단하고 적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었고, 오늘날 나를 축복가정과 천보가정으로 만들어 놓은 계기가 되었다. 1975년 7월 30일이었다.
이처럼 통일교회를 일찍 알았지만, 정작 교회가 너무 멀어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남들이 반대를 하거나 통일교를 나쁘게 이야기하면, 나는 좋게 이야기하는 정도였다. 교회에 왔다 갔다 귀동냥하는 정도의 초보적 신앙이었다. 그러다가 1977년부터 1980년까지 군대를 갔다 왔다. 다행히 하늘이 도와주셔서 신앙을 까먹지 않았다. 신앙의 불씨는 내 가슴에 남아 있었다.
2. 축복
축복은 가족 분위기에 휩싸여서 받았다. 아직 신앙생활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단지 형님들과 누님이 축복가정이고, 부모님이 초창기에 교회에 도움을 준 것이 기억에 남아서 나는 의심하거나 망설이지 않고 축복 서류를 준비하였다. 구리 중앙수련소에 모여서 약혼을 하게 되었다.
얼떨떨한 가운데 한 아가씨와 짝을 맺게 되었다. 이름은 김정임이고, 전북 순창 출신으로 중앙수련소 식당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대상은 신앙생활을 잘 해서 내가 만나는 사람마다 “대상이 참 좋은 분입니다.”고 칭찬하였다. 나는 지방에서 올라왔기에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대상은 구리에서 있었기 때문에 목회자나 모든 사람이 잘 알고 있었다. 나에 관해서는 이야기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대상 이야기뿐이다.
신앙생활을 모르는 사람이 축복을 받다가 보니 이런 좋은 환경이 오히려 부담이 되어서 신앙적으로 시련이 좀 있었다. 그러나 축복식이 끝났고, 양가 부모님에게 인사드렸다. 그러나 신혼의 생각을 하기도 전에 “남자들이 동원되어라.”는 지시가 있었다.
3. 임지 동원
장호원 수련소에서 교육을 받고 “동원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두고서 고민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나는 나 스스로를 정확한 통일교회 식구 및 축복가정으로 만들기 위해서 동원을 하기로 결심했다.
“동원을 해 보자. 하려면 명분을 뭐라고 세울 것인가? 뜻도 좋고 전도도 좋은데, 우선 나의 입장에서는 무엇 때문에 동원이 되는가? 내가 나를 전도하는 목표로 행동을 해보자. 그렇다면 3년 동안에 원리강론 10번 읽기, 성경 3번 읽기, 원리강론 한번 쓰기를 목표로 하자.”
나는 이와 같이 목표를 정했다. 협회와 참부모님의 지시를 목표로 삼아야 하지만, 신앙이 어린 나로서는 나 자신이 먼저 쇠뿔처럼 단단한 신앙인이 되어야 하였다. 그것이 급했다. 나를 살리기 위해 동원이 되었다. 그래야 동원 3년 후, 가정출발을 하게 되면 신앙이 좋다고 칭찬을 많이 받는 대상과 함께 잘 살 수 있을 것을 바랐다. 내가 원리와 신앙을 모르면 어떻게 축복가정다운 가정을 꾸릴 것인가? 부족한 나에게 동원은 절실히 필요했다. 나는 실제로 동원을 통하여 아내가 보기에 부족함이 없는 남편으로서 설 수 있었다.
이러한 생각과 결심을 하고 동원되었다. 3년 동안에 《원리강론》을 읽고 쓰기를 했다. 그런데 처음 읽을 때는 다 알 것 같은 원리가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수렁에 빠지는 것이었다. 한 번 두 번 읽을수록 더 잘 알아야 하는데, 점점 모르게 되니 그것은 지금도 미스터리로 기억에 남아 있다. 나름대로 다른 사람을 전도하지는 못 하더라도 나만의 목표 달성을 위해 도전하였다.
처음 임지 발령을 받은 곳이 서울 용산 원효로교회였다. 그런데 교회건물이 별도로 없고, 교회장 집에서 다 같이 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원효로 교회장과 같이 돌아다니면서 이사를 갈 교회도 알아보고 전도활동을 하였다. 새 교회를 얻어서 봉헌 예배를 드리고 교회 출발을 하였다. 새 성전에 참부모님과 하늘부모님을 모시고 힘차게 시작하였다. 사탄세력과의 치열한 영적 투쟁에서 승리를 해야 하는 성화의 용사들이었다. 소수이지만 정예로서 자부심을 가졌다. 그러나 정작 나는 신앙이 뭔지도 잘 모르고 그런 교회 분위기 수준에 어울리지 않는 대원이었다. “나 하나를 대원으로 받아놓은 교회장님과 식구들이 철없는 나를 바라보시면서 어떻게 생각을 하였을까?” 지금도 궁금하고, 또 미안하다.
교회마다 대원들이 1~2명이 있었다. 그러다가 5~6인 규모로 모여서 활동을 하게 되었다. 합쳐서 활동하면 더 큰 힘이 나고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 다음 간 곳은 마포교역이었다. 거기에서 두 달 정도 있다가 남아있는 대원들을 다시 모아서 전국 기동대를 조직했다. 나는 서울 제2기동대에 편성되었다.
한 달 30일 중, <10일 사업, 20일 전도>라는 계획으로 활동을 하였다, 여름에는 막노동하여 돈을 벌 수 있어서 그럭저럭 버티었다. 겨울이 문제였다. 그래서 떡 사업을 하였다. 대원들은 이리저리로 다니면서 떡 장사를 하였는데, 나는 숫기도 부족하고 신념도 부족해서 떡을 팔지 못했다. 한번 두번 나갈 때마다 하나도 못 팔았다. 남들은 다 파는데 나는 못 팔고 있으니까 미안해서 다시 나가자고 하면, “나는 떡을 못 파니까 안 간다.”고 하였다. 그러면 다른 대원들이 “팔지 못한다고 그냥 있으면 안 된다. 팔 물건이라도 들고 다녀라.”고 하며 나를 격려하고 동참시켰다. 나는 떡만 들고 따라다닌 적도 있었다.
나를 무시하지 않고 함께 협력 체제를 유지하려고 애를 섰던 동료 대원들이 너무나 감사하였다. 뜻을 공유하는 식구의 심정을 체험하였다. 어릴 적에 집안에서 외톨이가 된 경험이 심리적으로 늘 내 가슴 안에서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심리적으로 위축된 자세를 가졌고, 만물복귀에도 자신감이 부족했다. 나의 이 부족한 부분을 동료대원들이 메꾸어 주었다. 눈물이 나도록 고마운 혈육보다 진한 축복가정의 정을 느꼈다.
이정표 박는 일이 생겨서 사람을 모집한다는 광고가 있었다. 우리 대원들이 함께 지원을 하였다. 떡을 파는 것보다 쉬워 보였다. 6명이 한 조가 되어서 경기도 일원을 돌아다녔다. 우리가 5t 화물차에 이정표 자재를 가지고 나가면, 회사에서 직원이 나와서 자리를 정해준다. 그러면 우리가 이정표를 세웠다. 지정해준 자리에다가 이정표를 기둥을 심어 놓으면, 다음 팀원이 와서 간판을 부착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우왕좌왕하였는데, 하루 이틀 하다가 보니 자동적으로 분업이 되었다. 땅 파는 사람, 시멘트 비비는 사람, 물을 떠다 나르는 사람으로 조직적 분업이 되니까 일이 착착 잘 진행되었다. 사람마다 타고난 개성과 능력이 있어서 다 필요한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사람은 서로 돕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 팀은 손발이 잘 맞아서 모두 만족하였다.
한 달간 이 작업을 하였다. 다른 현장으로 이동할 때에 화물차 뒤 칸에서 세 명이 누워 있으면 지나가는 차에서 쳐다보고 놀리기도 하였다. 이 일이 끝난 뒤에 결산하여 보니 꽤 흑자가 되었다. 전 대원들이 체육복 한 벌씩을 맞추어 입었고, 단체 살림 도구를 장만하여 우리가 돌아다니면서 스스로 식사를 해결하기도 하였다. 사업으로는 가을 김장용 비닐 장사도 하였고, 충청도 기동대 때에는 장마당을 돌아다니면서 고무줄을 팔았다. 사업이라는 것이 큰 소득은 없었지만 팔도강산을 돌아다니면서 구경도 하고, 어디 가서 손을 안 벌릴 정도로 자립심을 키웠다. 이것만 해도 큰 이익이었다.
문흥진님 승화식 때, 우리 기동대원이 맡은 일은 리틀엔젤스 회관에서 파주 원전으로 화환을 나르는 것이었다. 화물차에 화환을 싣고 원전에 도착하니 차와 사람이 인산인해였다. 관광버스만 해도 수십 대였고, 사람이 많아서 정신이 없었다.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니고, 자동적으로 우리 팀은 차량 정리를 담당하게 되었다. 비록 흥진님 원전에는 올라가지 못하였지만, 사람들을 인도하고 차량을 주차시키는 봉사를 한 것이 의미가 깊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추운 겨울에 동작 교역에 있으면서 아기자기한 추억이 있었다. 여럿이 이불속에 발을 넣고 귤을 사다 먹어가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따뜻한 마음이 통하니까 겨울의 추위도 사라졌다. 천일국백성들로서의 심정을 교류하였다. 그런 시간을 가지다 보니까 말을 안 해도 심정이 통하는 식구공동체가 되었다.
한일 승공운동 서명을 받으러 다닌 일이 있었다. 이때는 정말 내가 나인지도 모를 정도로 열심히 했다. 전력투구하였다. 관악 교역 지하 생활, 강동 교역 생활 등 많은 추억들이 내 가슴에 간직되어 있다. 다시 대원들을 모아서 새로 기동대를 편성했다. 나는 충청 기동대로서 임지가 배정되었다. 기동대원이라는 이름으로 아무 때나 사업을 왔다고 하면 늘 반겨주시던 대전 교구 식구님들의 모습이 그립다. 그들 모두 복을 많이 받고 천일국 안착에 크게 기여하는 중심식구로서 사명을 다하기를 기원한다.
3년 동안 부족한 나를 바라보고 돌봐주며 동고동락한 6000가정 형제들에게 이 지면을 빌어서 깊이 감사를 드린다. “만약 내가 동원이 안 되었다면 어떤 생활을 했을까? 또한 활동하면서 같이 생활한 대원들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나는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대원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참부모님과 하늘부모님께는 감사를 담은 큰 경배를 올린다.
4. 일신석재
막상 대원 동원 기간이 끝나가니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일신석재에서 다 받아준다.”고 하여 대원 출신들 대부분이 일신석재에 입사하였다. 돈이 없어 한 달 월급을 받고, 여기저기서 도움을 받아서 방 한 칸 얻어서 가정을 출발하였다. 쪼그마한 방 한 칸이라도 6000가정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살아갈 수 있어서, 우선은 좋았다.
1985년 12월부터 2009년 5월까지 일신석재에 근무했다. 입사 이후로 건축석 근무, 묘석팀 근무, 자재과 근무, 건재과 근무를 거쳤고, 마침내 일신석재를 은퇴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아내와 살림을 차리고 아들 3명을 낳았다. 모두 대학까지 교육시켰다. 일신석재는 나에게 있어서 참 좋은 자리였다.
그러나 일신석재 근무 중에 크고 작은 사건이 몇 건 있었다. 제일 잊지 못할 사건은 안전사고로 인해서 최병갑 형을 영계로 보낸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조금만 더 조심했더라면 불행이 없었을 텐데… 아무리 생각을 해도 마음 아픈 일이다.
5. 자녀 교육
자녀 교육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내가 우리 아들들에게 해주었던 몇 가지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내가 자랄 때,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보다 아버지께서 길렀다고 나는 생각해 왔다. 어머니보다 아버지께서 우리들을 자상하게 잘 보살피셨다. 7남매를 키우셨으니까 얼마나 잘 돌보셨을까?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우리 자녀, 즉 손자 손녀들도 잘 돌보아주셨다. 나도 아버지로부터 배운 것을 우리 자녀들한테 하였다. 그리고 남에게도 그대로 하니까 효과가 있었고, 다들 관심이 많았고 그 방법을 알고 싶어서 난리였다.
하루는 퇴근하여 귀가를 했는데 아들 3명이 엄마에게 파업을 하고 있었다. “앞으로 엄마 말을 안 들을 거야. 아빠는 해준다면 약속을 지키고 해주셨는데, 엄마는 순전히 거짓말만 해”라고 하면서 엄마와 대립하고 있었다. 즉 심부름을 시키면서 갔다 오면 “돈 얼마 줄게.” 했는데 전부 다 공수표를 띄운 것이었다. 즉 약속을 안 지켰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엄마에게 집단 항의를 한 것이었다.
나는 아내를 한쪽으로 불러서 물어보았다. 대화를 나누었다. “어찌 된 것이요?”, “그냥 심부름을 시키면 말을 안 들을까봐 그랬어요.” “약속한 돈을 안 주려면 돈 준다는 약속을 하지 말고 그냥 심부름만 시키세요.” “그럼 심부름을 안 할 것인데”, “아니 그냥 심부름을 시켜도 애들이 잘 할 거에요.”
그 다음부터는 그냥 심부름을 시켰다. 그러면서 자녀들한테 일주일에 얼마씩 용돈을 주기로 했다. 그런데 자녀들은 용돈을 받은 그 날에 몽땅 간식을 사 먹었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학교 수업에 필요한 준비물 구입을 위해 돈을 달라고 하였다.
나는 애들을 불러다 교육을 하였다. “용돈은 받은 그 날 다 사 먹고, 준비물 값을 따로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해요?” “용돈은 너희들 준비물 사고 학교 교통비 하는 것이다.” “그런 것이 어디 있어요? 이 돈으로 학교 다니고 준비물도 사라고요?”
그러자 애들이 자기가 받은 용돈을 아끼고 저희 엄마보고 보태달라고 하였다. 하루는 애들이 나를 문방구로 데리고 갔다. 애들이 사고 싶은 장난감을 어디서 파는지, 그리고 가격을 미리 알아보고는 “아빠가 돈을 주세요.”라고 하면서 의기양양하게 장난감을 들고 나갔다. 이런 방식이 몇 차례 있었다.
하루는 자녀들을 불러놓고, “앞으로 엄마 아빠라고 부르지 말라.” “그럼 뭐라고 불러요?” 애들로서는 황당한 일이었을 것이다. 엄마 아빠가 엄마 아빠라고 부르지 말라고 하니 말이다 “엄마 아빠 대신에 어머니 아버지라고 불러라.”고 했다. 애들은 2~3일간을 어떻게 할지를 두고서 좀 혼란스러워했다. 그러더니 차츰 ‘어머니, 아버지’로 부르게 되었다. 엄마 아빠라고 부를 때에는 존칭어를 안 썼는데, 아버지 어머니로 호칭하면서 자동적으로 존칭어를 쓰게 되었다.
하루는 막내가 학교에서 효행상을 받는다고 한다. “그래? 네가 뭘 했다고 효행상을 받니?” 선생님이 “집에서 부모님을 부를 때에 ‘엄마 아빠’로 안 부르고 ‘어머니 아버지’라고 부르는 학생이 있니?”라고 물었다. 친구들이 “현우가 그렇게 해요.”라고 해서 효행상을 받는다고 한다. “부모님께 존칭어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효도를 한다.”고 선생님이 인정했다.
큰아들이 자전거를 사달라고 하였다. 사주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네가 자전거를 탈 줄 알아야 사준다.”고 했더니, 이틀 만에 자전거를 배워서 사달라고 하였다. 나의 경우는 십대 후반에 친구들 권유로 마지못해 한 달간 타고 다니면서 힘들게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웠는데, 우리 애들은 참 빨랐다. 속으로는 기분이 좋았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내년 봄에 꼭 사줄게. 아버지가 지금 집을 수리하느라고 돈이 없거든.” 그때 집수리를 하던 중이었다.
다음 해 4월쯤 아들이 “아버지 봄이 언제와요” “왜?” “봄이 되면 아버지께서 자전거를 사준다고 했잖아요.” 나는 잊어버렸는데, 아들은 꼭꼭 기억하고 있다가 봄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당장 아들을 데리고 가서 자전거를 사 주었다.
언젠가 설날이 다가 올 때였다. 중3인 큰아들에게 “네 동생 데리고 외가집과 큰집에 다녀오라.”고 시켰다 “어떻게 갔다가 와요?” “야 이놈아 너희 아버지가 언제까지 데리고 다녀야 해. 네가 데리고 다녀봐.” 그 다음날 낮에 회사로 장남의 전화가 와서 받았다. “아버지, 동생 데리고 이천 터미널에 왔는데,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전남 광주행 버스를 찾아서 학생 차표로 사서 가라. 그러면 할인이 된다.”고 시켰다. 또 전화가 와서 받아보니 “전남 광주에 도착했는데 어떻게 해야 외삼촌 집에 갈 수 있어요?” 외삼촌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면서 “거기로 전화를 하라.”고 했다. 무사하게 자녀들이 큰집과 외가집에 잘 다녀왔다. 귀가를 안전하게 했다.
큰아들이 하는 말이 작은 외숙모가 “너희 아버지나 되니까 너희들만을 이렇게 덜렁 겁 없이 밖으로 내보내지, 다른 사람 같으면 생각도 못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어서 큰 형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번 설은 설답게 셀 것 같다.”고 했다. “마을 회관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집에 오는데 골목에서 동생 아들(조카) 같은 놈들이 뛰어놀고 있어서 이상하다고 가까이 쳐다보니까 분명히 세 놈이 멀리서 찾아와서 뛰어놀고 있었다. 부모는 안 오고 애들만 보낸 것을 보고 내가 깜짝 놀랐다.”고 했다.
봄방학 때의 일이다. 애들이 용인 애버렌드를 간다고 했다. 그때는 삼성에서 보너스 대신 물건으로 선물을 줄 때였다. 애들이 자유이용권을 검색해 보고서 이미 얼마에 사놓고서는 “교통비 점심 간식값으로 돈을 주세요.”라고 했다. 애들이 요구한 돈을 주었다. 그래서 “그 돈을 주고 어떻게 가냐? 용인 터미널에 가서 에버랜드 가는 차를 타라.”고 하고 보냈다.
저녁 9시에 퇴근을 해서 보니 아직 애들이 안 왔다. 그 당시는 휴대폰이 없는 때라서 소통이 쉽지 않았다. 걱정이 돼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리니 10시쯤 들어왔다. 다들 흥분하여 붕 떠 있었다. 에버랜드에 아침 문을 열자마자 들어가서 오후 늦게 나가라고 할 때까지 놀았다고 했다. 놀이시설을 이용한 얘기를 하면서 좋아서 난리였다. 봄방학이니까 사람이 별로 없는데다가 자유이용권이니까 타고 싶은 대로 모두 탔고, 선물도 받았다.
그런데 내가 오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을 깜빡 잊었다. 애들은 낯선 어른들에게 물었다. “이천을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수원터미널까지 가서 거기서 이천가는 버스를 타고 가라.”고 가르쳐줘서 수원 터미널에서 이천까지 왔다는 것이다. 대견스러웠다. 어느덧 훌쩍 큰 아들들을 힘껏 안아주었다. 나보다 훨씬 똑똑하고 정서적으로 안정감이 있게 잘 자라기를 속으로 기도하였다. 참부모님과 하늘부모님께서 우리 애들을 잘 양육해 주실 것을 나는 늘 믿었고, 또 기도를 했다. 그런 기도의 응답으로 자녀들은 자립심이 강하게 잘 성장했다. 애들을 보면서 내 어릴 적 상처가 치유되었다. 하늘 앞에 감사를 연발했다.
큰 아들놈이 고등학교 졸업을 했다. 기념으로 “너 돈 한번 원 없이 써보라.”고 꽤 많은 돈을 주었다. 아내는 속상해서 입이 한발이나 나왔다. “애들한테 그렇게 큰돈을 주면 어떡해요.” “이것도 자녀들을 강하게 키우는 방법이니까 가만히 있어요.”라고 했다. 작은아들이 “우리 아버지가 아무래도 어디가 어떻게 된 것이 아니냐? 이렇게 큰 돈을 주실 분이 아닌데 참 이상하다.”고 하였다.
세 아들에게 다 주고서 어떻게 돈을 쓰는지를 살펴보았다. 큰돈을 잘 쓰는 아들, 적은 돈은 잘 쓰는데 큰돈을 쓸 줄 모르는 아들, 각양각색이다. 자녀들도 이제 클 만큼 컸다. 나름대로 삶을 사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여기서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다.
자녀를 가르치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는데, 소를 키우는 방법과 비교해 볼 수 있다. 첫째, 외양간이나 사육장에 꽉 가두어 놓고 먹을 것만 주고 활동을 잘 안 시키는 것이다. 전적으로 타율적이다. 둘째, 밖으로 데리고 나가되 끈을 묶어서 늘 감시한다. 소나 사람이나 피곤하다. 스트레스가 많다. 셋째, 방목형이다. 이는 큰 울타리만 쳐 주고 소들이 알아서 풀을 뜯어먹게 하는 것이다. 소와 인간이 함께 자유롭고 만족스럽다.
나는 마지막 방법을 적용했다. 최대한 자녀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나의 방법에 놀라고 동의를 하지 않던 아내도 차츰 나의 취지를 공감했다. “당신이 하는 방법이 맞네요. 남들 이야기 들어보니까, 이것저것 찔끔 찔끔씩 사 주는 것이 결국 돈을 더 많이 쓰게 되었다는 거에요. 한꺼번에 목돈을 주어서 알아서 계획을 세워서 돈을 쓰게 하는 것이 너 낫네요.”
자녀들에게 한번 해준다고 약속한 것은 꼭 지키는 부모가 되고 싶었다. 나의 기대에 호응하듯이 자녀들은 든든하게 잘 자랐다. 이제 걸리는 게 자녀 축복이다. 막내아들만 축복을 받아서 손녀를 2명을 두게 되었다. 첫째와 둘째는 아직 장가를 안 가려고 한다. 아내와 나는 간절히 기도를 하면서 축복문제도 잘 해결되기를 기원한다.
6. 어머니의 독신 축복
바로 위의 형님이 성화하시게 되었다. 어머니로서는 4번째 자식이었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고 하지만, 크고 작은 손가락은 있다. 어머니한테는 그냥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아들이었다. 이 아들이 뭐라 하시면 어머니는 금방 죽는시늉이라도 해서라도 어떻게든 해결을 하셨다.
그런 아들이 아파서 누워 있으니 기가 막혔을 것이다. 어머니는 아들을 살려 보려고 별의별 짓을 다 하셨다. 이천에 와서 돌나물, 케일, 그 외 각종 채소 등을 머리에 이고, 가방에 지고 가지고 가서 형님한테 먹고 마시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끝내 형은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완전히 식음을 전폐하셨다. 그리고 얼마 안 있다가 이모께서 또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바로 아래 여동생이었다. 어머니는 아들과 친동생을 연달아 하늘나라로 보내고 나서는 정신이 없었다. 그저 멍하니 정신이 없으신 상태에서 또 죽음 사건이 생겼다. 설상가상(雪上加霜), 엎친 데 덮친다는 말이 있다. 이모의 딸, 즉 어머니의 조카가 사망하였다. 너무나 일시에 연달아 들이닥친 세 명이 성화하는 큰 슬픔을 견디다 못해 어머니는 자리에 누우셨다.
이때 “36만쌍 축복이 있고 독신축복이 있으니 준비하라.”는 공문이 왔다. 협회 가정국에 알아보니 독신축복이라고 식장에 동참해야 축복가정이 된다는 것이었다. “사진 축복은 안 됩니까?”고 물어보니, “안 된다.”는 응답이었다. 믿음의 부모이고 777가정 형수한테 가서 상담하였다. “독신축복을 받아야 하는데, 축복비는 만들테니까 형수께서 미안하지만, 축복식 날까지 어머님을 모시고 계셔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형수께서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약속을 해놓았는데 어머니께서 며칠 안 계시더니 고향으로 가시겠다고 했다. “고향에서 죽을 것이니 나를 고향으로 데려가다오.”라고 강하게 주장하셨다. 그래서 형님이 고향으로 모시고 갔다.
청평에서 1박 2일 수련이 있어서 갔다가 오는 길에 어머니께서 고향으로 내려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형수에게 전화를 하고 찾아갔다. 축복을 받기 위해서 준비해 놓은 예복이랑 그 외 물건들을 찾아서 집으로 왔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뜻밖의 희소식이 왔다. “독신축복가정 희망자는 사진을 들고서 축복식에 참여해도 된다.”는 연락이 왔다. 거기에 참석하는 사람은 예복을 입고 사진을 들고 참석해야 하며 가정국장이 축복을 해 준 사람에게 성주식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독신축복가정이 인정된다는 것이다.
나는 부랴부랴 형제 3가정을 모아서 상의를 하였다. 누가 사진을 들고 들어가며, 누가 가정국장을 모시고 갈 것인지 등이 주요한 일이었다. 모든 일을 6500가정인 동생한테 맡겼다. 토요일 고향 집에 가니 가정국장께서 오전에 다녀가셨다. 정신이 없이 누워계시던 어머님께서 아무런 일없이 조용히 성주를 드시고 다시 누우시더라고 동생이 당시 상황을 전해주었다.
알고 보니까 축복식장에 들어간 동생이 가정국장을 서울에서 광주까지 비행기로 모시고, 비행장에서 고향인 석곡까지 택시로 모시고 와서 성주식을 행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역순으로 택시로 해서 비행기로 모시고 갔다고 했다.
우리는 독신축복을 받으실 분이 많이 나올 줄 알았는데, 딱 한 명 우리뿐이었다. 그래서 가정국장이 우리 집까지 방문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방문이 있기 전에도 치열한 노력을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처럼, 우리들의 노력에 감동된 가정국장이 친히 내려오셔서 독신축복식을 거행하였던 것이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형수께서 그 이전에 가정국장 댁으로 찾아가서 “제발 사진축복으로 받게 해주세요.”라고 간청을 드렸다. 그리고 일본에서 목회를 하는 동생도 가정국장을 만나서 부탁을 했다고 나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그런 염원의 결실로서 어머니의 독신축복식이 있게 되었다.
참아버님께서 어떻게 이번에 사진으로 독신축복을 허락하셨는지 궁금했다. 가정국장은 “오늘 참아버님께서 미국으로 출국을 하시는데, 곽정환 회장께서 독신축복을 주관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진을 들고서도 가능한지를 출국하시기 전에 보고를 드려보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마침내 허락이 되었다. 사진을 들고서 독신축복식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 허락이 승인된 것은 원인(遠因)으로서는 어머니께서 초창기 개척 전도를 나오신 대원들에게 방을 빌려주어서 잠을 자게 했고, 밥도 제공해 주신 공적(功績)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또 근인(近因)으로는 형수께서 가정국장 댁을 방문하여 부탁을 드렸고, 일본에서 목회자로 일하는 동생도 일부러 한국으로 와서 가정국장을 만나서 청원을 하였다.
축복가정이 되는 것은 천지개벽할 일이다. 그렇게 가치가 큰 만큼 정성을 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의 인심도 공짜가 없는 법인데, 우주보다 큰 축복가정이 되는 것이 어찌 노력없이 되겠는가? “천국은 침노한 자가 뺏는다.”는 성경 말씀처럼, 간절히 바라면서 노력하는 자가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형수와 동생에게 무한히 감사한다. 그리고 참부모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린다.
7. 천보가정
777가정인 형님의 성화에 이어서 장모님의 성화가 있었다. 이후에 형수로부터 연락이 왔다. “우리도 천보가정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냐?”고 제안하였다. 형님 살아 계실 때에는 아무 말씀도 없더니 형님이 성화하신 지 1년 뒤에 온 연락이다. 그때 나는 “얼마나 천보에 들고 싶었으면 준비를 하고 연락을 하실까? 아내 생각도 이처럼 간절할까?”라고 생각했다.
아내에게 물어보았다. “형수께서 천보에 들자고 하는데 당신 생각은 어떤가요?” 아내는 “왜 나라고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없겠어요. 당신이 못하게 해서 안 한 것이지요”라고 했다. “그럼 우리 준비해 봅시다.”라고 하니 아내는 좋아했다. 교회에 가서 천보에 들어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교회 업무를 보는 권사가 “정회순 장로님이 천보에 들어간다고 하니 어찌된 일이에요?”라고 놀랐다.
천보에 들어가려면 제일 문제가 돈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큰 걱정이었다. 큰 처남이 장모님 성화식 때 들어온 부조금을 다 가져가라고 하였다. 장례식 비용과 요양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의 비용들을 제하고 남는 돈을 다 가지고 왔다. 그래도 돈이 상당히 부족하였다.
그 때 회사에서 갑자기 불렀다. 정년이 지난 3명이 같이 갔더니, 직원이 퇴직금 정산을 해준다고 하였다. 이전에 돈이 급히 필요하여서 “퇴직금 중간 정산을 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해 본 적이 있는데 “안 됩니다.”는 답을 들었다. 그런데 3명에게 퇴직금 정산을 해준다고 하였다. 나는 그 순간 “아하, 이 돈으로 천보에 들어가라는 것이구나.”고 생각했다.
그 돈으로 우선 조상들의 해원식과 축복식을 완료하였다. 그리고 360가정 전도를 위한 문제를 하나씩 하나씩 해결하였다. 돈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 이후의 모든 일들이 일사천리로 착착 진행되었다. 모든 서류를 완결해놓고서 마침내 믿음의 부모인 형님 가정, 777가정 누님 가정, 일본에서 목회하고 있는 6500가정 동생 가정, 우리 가정, 전체 4가정이 함께 천보가정에 들게 되었다. 나는 하늘 앞에 무한한 찬양과 감사를 드리면서 더욱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기로 결심하고 노력하고 있다.
8. 다툼이 없는 행복한 부부로 사는 비법
부부가 되어 살다 보면, 그 동안 자라왔던 문화적 배경이 다르고, 습관이나 가풍(家風)이 다르기에 충돌을 할 경우가 생긴다. “가정출발 후 3년 안에 다툼이 자주 일어날 것이다. 그 위기를 잘 극복해야 한다.”는 말씀도 있다. 어떤 가정이든지 날마다 좋을 수만은 없다. 크고 작은 갈등이나 다툼이 있게 마련이다. 그럴 때에 지혜롭게 잘 이기고 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귀한 축복가정에 흠이 생길 수도 있다. 부부 다툼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노하우를 가정마다 개발해야 한다.
후배 가정들이 나에게 제일 많이 하는 질문이 “권사님이 좋으셔서 부부 싸움을 안 하시죠?”이다. 그러면 나는 가정 출발할 무렵에 내가 어디에서 <부부 싸움할 때 지켜야 할 것>에 대해서 기억하고 있는 내용을 알려준다. 대강 아래와 같은 내용이었다.
1) 자녀들 앞에서 싸우지 말 것
2) 큰소리를 내지 말 것
3)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 것
4) 싸움을 확대하지 말 것. 부부 싸움이 집안싸움이 되지 않게 할 것
5) 장기전을 갖지 말 것
6) 지난 일을 들춰내지 말 것
7) 싸운 날은 그날로 풀 것
이런 내용을 갖고 살다보니, 40여 년을 살면서 부부 싸움을 안 하고 살아온 것 같다. 집안 일로 바쁜 중에도 160가정 완료, 천일국 주인상 수료, 자서전 430권 완료, 독신축복, 천보입적 등의 일에 최선을 다하여 승리하게 이끈 아내에게 감사를 드린다. 앞으로 즐겁고 행복하게 살 일만 남은 것 같다.
9. 앞으로의 계획
앞으로도 건강하게 살면서 천일국 안착에 기여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하여 긍정, 감사, 웃는 모습으로 살 것이다. 일신석재 은퇴 이후에도 코웨이 물류 근무를 하고 있으니 얼마나 복을 받은 것이 아닌가! 참아버님께서는 특별한 건강비법을 창안하셨다는데, 나는 나에게 맞는 건강유지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고 하니, 건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고 한다. 부부 함께 건강하도록 가일층 노력할 것이다.
참부모님이 바라신 대로 3대가 같이 사는 행복한 축복가정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교회 장로로서, 나아가서 천보가정(2021년 10월 3일)으로서 천보가정 실세화에 주력할 것이다. 참부모님께서 하늘부모님의 소원을 풀어드리기 위하여 일생을 전력투구하신 것처럼, 우리 축복가정들은 참부모님의 소망을 풀어드려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 축복가정의 존재 이유이며, 최고의 가치를 발휘하는 조건이다. 틈나는대로 무지에 빠져 있는 이웃들에게 참부모님의 사상과 생애를 전파할 것이다.
첫댓글 조유자님 댓글
정임언니
존경합니다
각자의삶과 신앙으로나아가는모습들을
듯게되는자서전 감동받습니다
정혁순님 댓글
정회순, 김정임가정의 자서전 잘 읽었습니다. 부인에 대한 사랑과 자녀교육에 대하여 감명받고... 천보가정까지 이루신 업적에 존경을 표합니다.
손기문님 댓글
오늘은 사랑하는 동생 정회순장로님의 자서전을 읽고 옛날 임지에 동원되어 좁은방에 칼잠을 자며 함께 생활했던 추억들이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오내요. 6000가정 형제들이 참아버지 말씀에 순종하여 모든직장과 사업을 정리하고 3년임지 동원을 했던 사연들은 훗날 천상에 가더라도 업적으로 기록 될것입니다. 특히나 정회순동생과 표시판을 심는 사업을 할때 그때 나는 팀장으로 앞자리에 앉아 편안하게 갔었는데 정회순 동생은 먼지을 뒤집어쓰고 트럭 뒷칸에 앉아 갔다는 이야기에 미안한 맘 금할길 없내요. 황인태 회장님이 늘 이야기했던 곡성 석곡리 그집이 정회순 동생네 집이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리고 휼융하신 부모님을 두셨네요.
정회순동생! 자서전 잘 읽었습니다. 건강하시고 행복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