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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빛나는 밤 (The Starry Night) - 빈센트 반 고흐
1889년 /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73.7x92.1cm / 뉴욕 현대미술관 소장
빈센트 반 고흐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별이 빛나는 밤>은 그가 고갱과 다툰 뒤 자신의 귀를 자른 사건 이후 생레미의 요양원에 있을 때 그린 것이다. 반 고흐에게 밤하늘은 무한함을 표현하는 대상이었고, 이보다 먼저 제작된 아를의 <밤의 카페 테라스>나 <론 강 위로 별이 빛나는 밤>에서도 별이 반짝이는 밤의 정경을 다루었다. 반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오늘 아침 나는 해가 뜨기 한참 전에 창문을 통해 아무것도 없고 아주 커 보이는 샛별밖에 없는 시골을 보았다.”고 했다. 이 샛별은 그림 가운데 왼쪽에 있는 커다란 흰 별일 것이다. 그가 그린 밤하늘에서는 구름과 대기, 별빛과 달빛이 폭발하고 있다. 황량하고 짙은 파란색 하늘은 세상의 종말을 연상케 하고, 그 위로는 구름이 소용돌이치며 떠있다. 달과 별의 둘레에는 부옇게 무리가 져있다. 비연속적이고 동적인 터치로 그려진 하늘은 굽이치는 두꺼운 붓놀림으로 불꽃같은 사이프러스와 연결되고, 그 아래의 마을은 대조적으로 평온하고 고요하다. 마을은 있는 그대로 그린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고안되었는데, 교회 첨탑은 반 고흐의 고향 네덜란드를 연상시킨다. 그는 병실 밖으로 내다보이는 밤 풍경을 기억과 상상을 결합시켜 그렸는데, 이는 자연에 대한 반 고흐의 내적이고 주관적인 표현을 구현하고 있다. 수직으로 높이 뻗어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사이프러스는 전통적으로 무덤이나 애도와 연관된 나무이지만, 반 고흐는 죽음을 불길하게 보지 않았다. 그는 “별을 보는 것은 언제나 나를 꿈꾸게 한다.”면서 “왜 하늘의 빛나는 점들에는 프랑스 지도의 검은 점처럼 닿을 수 없을까? 타라스콩이나 루앙에 가려면 기차를 타듯이, 우리는 별에 다다르기 위해 죽는다.”고 했다. 이 시기에 그의 필치는 더욱 두꺼워지고 더욱 열정적으로 변했으며, 꿈틀거리는 듯한 선은 별의 광채를 한층 두드러지게 한다. 이 시기의 특징인 회오리치는 듯 꿈틀거리는 필치는 강렬한 색과 결합되어 감정을 더욱 격렬하게 표현한다. 이 곡선의 화필은 굽이치는 운동감을 표현하면서, 그림 전체를 율동적인 흐름으로 통합한다.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 (La nuit toil e, Arles) - 빈센트 반 고흐
19세기경 /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92x72.5cm / 오르세 미술관 소장
화가는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는 이 그림에 강렬하고 어두운 색과 넓고 불안정한 터치로 스스로를 표현한다. 별들은 어두운 하늘에 흩어져 있고 빛이 물 속에 반사되어 화면을 구성하는 수직선을 형성한다. 희귀한 그림의 하나인 이 야경에서는 야릇하고 매혹적인 아름다움이 나타나 있다. 쇠라와 시냐크 같은 점묘법 화가들의 기법에 매혹당한 고흐는 색상들을 구성하기 위해 다양한 색조의 터치들을 병렬했다. 고흐는 이 장소의 야릇한 분위기를 캔버스 위에 옮겨 놓기 위해 두 가지 주요 색상인 노란색과 푸른색을 사용했다. 화가는 "내 눈앞에 있는 대상을 정확하게 그리기보다는 나를 강하게 표현하기 위해 임의대로 색상을 이용한다."라고 말했다. 고흐는 1889년 생레미에서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이라고 명명된 또 하나의 다른 작품을 완성했다. 현재 뉴욕 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 그림에서는 특히 물결치고 굴곡이 심한 선들 덕분에 고흐의 번민과 절망스러운 감정이 훨씬 더 강조되어 있다.
아를의 반 고흐의 방 (Van Gogh's Bedroom at Arles) - 빈센트 반 고흐
1889년 /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73x91cm /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소장
‘반 고흐의 방’이라는 이름으로 세 작품을 그렸다. 가장 오래된 버전은 1888년 10월 중순에 아를에서 그려진 것으로, 반 고흐가‘남프랑스 아틀리에’라는 예술가 공동체 구성을 위한 프로젝트를 준비하면서 고갱이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던 시기이다. 반 고흐는 10월 17일 고갱에게 보낸 편지에서 본인의 전반적인 회화 구성에 대해 묘사하며 자신은 공간을 기묘하게 변형시켜 모티프에 적용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고갱과 반 고흐의 만남은 비극적으로 끝나고 말았으며, 그로부터 얼마 후 반 고흐는 요양원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후 일어난 홍수로 인해 작업실에 방치해 두었던 최초의 «반 고흐의 방» 일부가 손상되었다. 이 최초의 작품은 현재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후 1889년에 생레미 요양원에서 나온 그는 같은 주제로 두 점의 작품을 더 그렸다. 이중 하나는 원본과 동일한 크기로 현재 시카고 미술관에 보존되어 있으며, 어머니와 여동생 윌을 위해 그린 나머지 하나는 현재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작품의 세 가지 버전에서는 문, 창문, 의자, 침대 같은 주요요소가 모두 동일한 위치에 그려졌지만,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가장 쉽게 차이점을 알아볼 수 있는 부분은 오른쪽 벽에 걸린 그림들로서, 특히 캔버스 프레임 바로 아래에 있는 초상화 두 개와 침대 머리맡 위에 걸린 풍경화에 변화를 주었다. 여인의 초상화에 대해서는 뭐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 힘들지만, 그 옆에 있는 초상화의 경우 인물의 특징으로 보아 자신의 초상을 그려 넣은 것처럼 보인다. 시카고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의 경우, 인물의 수염과 붉은색 머리카락, V자 네크라인의 옷으로 미루어 보아 1889년 9월에 생레미에서 그린 자화상인 것으로 짐작된다. 반면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에서는 머리의 위치, 깨끗하게 면도된 얼굴, 차이나 칼라의 상의로 보아 동일 시기에 그려진 또 다른 자화상과 유사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두 개의 자화상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완성했으면서, 작품 속에는 왜 다른 모습으로 그렸는지, 그리고 거의 유사한 두 점의 작품에 왜 이 자화상들을 그려 넣었는지 그 이유는 불가사의다. 또한 1889년 9월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주제로 그린 «피에타»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 반 고흐의 자화상과 비슷하다는 사실도 앞선 의문과 일맥상통하며,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이 수수께끼를 푸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해바라기 (Sunflowers) - 빈센트 반 고흐
1888년 /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91x72cm / 뮌헨 노이에 피나코텍 소장
반 고흐는 선보다는 색채를 중시한 몽티셀리(Adolphe Joseph Thomas Monticelli, 1824-1886)를 들라크루아(Ferdinand Victor Eugène Delacroix, 1798-1863)의 정신을 계승한 색채의 대가로 생각했다. 반 고흐는 특히 몽티셀리의 정물화에 영향을 받았다. 그의 정물화는 강렬한 색채와 두꺼운 붓 터치로 인한 질감표현이 특징이다. 반 고흐는 몽티셀리의 화풍을 수용해 화병에 꽂힌 꽃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그림에서 우리는 화병에 꽂혀있는 12송이의 해바라기를 볼 수 있다. 반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해바라기는 빨리 시들어버리기 때문에 나는 매일 아침 일찍부터 황혼이 올 무렵까지 해바라기를 그린다’라 적고 있다. 그래서일까? 그림 속 해바라기는 제각각 다른 모습이다. 어떤 해바라기는 활짝 피어있으나 또 다른 해바라기는 바닥을 향한 채 시들어가고 있다. 상상의 세계가 아닌 실제 보이는 것을 재빠르게 그려낼 때 포착 가능한 시간의 흐름을 이 작품에서 느낄 수 있다. 반 고흐는 고갱과 함께 머물 집을 “파란색과 노란색의 심포니” 구도를 가진 장식적인 해바라기들로 꾸미고 싶었다. 반 고흐는 평소 색채 효과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작품에 적용하고자 했다. 보색대비에 의한 색채효과를 선호한 반 고흐는 희미한 말라카이트 그린부터 로열 블루까지 다양한 푸른색을 배경으로 따뜻한 노란색의 해바라기를 그리고자 했다.해바라기의 노란색은 반 고흐가 개인적으로 좋아한 색이기도 하다. 베르나르(Émile Bernard, 1868 -1941)는 태양의 색깔을 닮은 해바라기의 노란 빛을 “반 고흐가 회화에서뿐만 아니라 마음 속에서도 꿈꿔왔던 빛”이라 말했다. <해바라기>란 작품을 살펴보면, 한 화면에 노란색의 해바라기와 대비를 이루는 옅은 녹색을 배경을 배치함으로써 그가 원했던 장식적인 효과를 얻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반 고흐 특유의 임파스토(impasto: 유화물감을 두껍게 칠하여 그림을 그리는 것을 이르는 말)기법은 화병의 꽃들을 실제 꽃들처럼 생생한 질감을 부여하고 있다.
낮잠 (밀레 작품 모사) (La méridienne ou la sieste (d'après Millet))
- 빈센트 반 고흐
1889년~1890년 /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91x73cm / 오르세 미술관 소장
<낮잠>은 반 고흐가 프랑스 프로방스(Provence) 지방 생 레미(Saint-Rémy)의 정신병원에 기거할 무렵에 그려졌다. 이 작품은 동일한 주제를 다룬 장 프랑수아 밀레(Jean François Millet, 1814-1875)의 작품을 모사한 것이다. 밀레는 1858년부터 1867년 사이에 <하루 중 네 순간(Four Moments in the Day)> 연작을 제작했는데, 반 고흐는 그 중 1866년 작인 <한낮(La Méridienne)>에서 이 작품의 모티브를 가져왔다. 반 고흐는 밀레의 작품을 다시 그리는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 그의 동생 테오도르 반 고흐(Theodor van Gogh, 1857-1890)에게 “나는 빛과 어둠이 주는 인상을 검은색과 흰색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밀레와는) 다른 색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반 고흐는 이 작품을 그리며 밀레의 원작에 충실 하려고 노력했다. 반 고흐의 <낮잠>은 밀레의 작품에서 기본적인 구도만 좌우로 바뀌어있을 뿐이며, 누워있는 인물의 자세나 배경의 모습, 전면에 놓여진 기물들의 모습은 모두 동일하게 표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 고흐는 1860년대 프랑스 농촌의 평화로움을 표현한 밀레의 장면에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덧입혔다. 반 고흐는 푸른색과 보라색, 노란색과 주황색 등을 대조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밀레의 파스텔 그림과는 다른 매우 독창적인 느낌을 만들어냈다. 배경을 표현하는데 사용된 퍼져나가는 듯한 붓질은 반 고흐의 특징적인 표현방식이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그와 같은 붓질은 격정적인 인상을 주지만, 이 작품에서만은 고된 삶으로부터 휴식을 취하는 부부의 모습과 함께 어울려서 자유로운 느낌을 강조한다. 밀레의 작품에서와 같이 여전히 평화로운 자연을 그 주제로 삼고 있지만, 동시에 이 작품은 반 고흐의 강렬한 예술성을 드러낸다.
싸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길 (Road with Cypresses) - 빈센트 반 고흐
1890년 /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92x73cm / 크뢸러뮐러 미술관 소장
빈센트 반 고흐에게 싸이프러스(측백나무과)와 올리브 나무는 남프랑스를 상징하는 모티프였으며, 이를 소재로 작품을 그리는 것이 생 레미에 머무는 동안 그의 염원이었다. 그는 1889년 6월부터 병원 밖에서의 작품 제작을 허락받자, 올리브 정원의 풍경과 함께 싸이프러스가 있는 풍경에 도전했다. 당시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싸이프러스의 매력과 함께 표현의 어려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싸이프러스가 머리에서 떠나질 않아. 해바라기 그림같이 싸이프러스를 그려보고 싶어. 이건 그 동안 누구도 이런 방식으로 싸이프러스를 그리지 않았다는 것이 놀랍기 때문이야. 선도 비례도 이집트의 오벨리스크 같이 아름다워. 더구나 녹음이 예상외로 너무 멋져. 그건 태양이 내리쬐는 풍경 가운데 생기는 검은 물보라로 흥미로운 검은 장단이야.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대로 그것을 포착하는 것이 너무 어려워.”고흐는 ‘올리브 정원’이라는 주제로 1889년 6월부터 12월까지 여러 점의 유화를 그렸으나, 다음 해 1월 이후부터는 1점도 그리지 않았다. 이는 고흐가 올리브 나무의 모티프를 자신의 것으로 충분히 소화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편 싸이프러스가 있는 풍경은 1889년 6월에 여러 점의 유화와 데생으로 집중적으로 그렸으나, 이후로는 눈에 띄는 전개가 없다.1890년 5월의 <싸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길>은 생 레미에서의 마지막 작품이다. 반 고흐는 매력적이면서도 어려운 싸이프러스 모티프에 새롭게 도전하여 프로방스에서의 경험을 여기에 모두 쏟아붓고자 했다. 반 고흐는 싸이프러스에 대한 마지막 도전으로 자연 그대로가 아닌, 싸이프러스를 둘러싼 다양한 상상을 하나의 풍경 이미지로 구성하고자 했다. 그것은 고갱이 ‘추상’이라고 부른 아를의 <노란 집>을 통해 반 고흐가 전수받은 방법이었다. 반 고흐에게 그것은 2년 남짓한 남프랑스의 생활에서 얻은 가장 귀중한 재산이었다. 이 조용한 야경에는 고갱과 작품제작을 함께 한 날들에 대한 감회가 이입되어 있는 듯 하다. 남자 두 사람이 서로 기대듯이 밤길을 가고, 그 뒤로 두 사람을 태운 마차가 온다. 재미있는 것은 싸이프러스에도 2개의 줄기가 묘사되어 있다는 것이다.
생트-마리의 바다 경치 (Seascape at Saintes-Maries) - 빈센트 반 고흐
1888년 /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44x53cm / 푸슈킨 미술관 소장
반 고흐는 아를(Arles)에 머물던 1888년 6월에 해변 도시인 생트-마리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5일간 머물며, 이 작품을 비롯해 바다를 소재로 한 그림들을 여러 장 남긴다. 그가 파리를 떠나 남프랑스로 거처를 옮긴 것은 자신에게 영감을 줄 새로운 장소를 찾기 위해서였다. 파리에 머물던 시절 반 고흐는 당시 파리에선 그 유행의 막바지에 달해있던 자포니즘(Japonisme: 1972년에 비평가 필립 뷔르티(Philippe Burty)가 만든 용어로, 19세기 중•후반에 걸쳐 유럽에서 유행하던 일본의 예술과 문화에 대한 관심을 총칭하는 말)을 접하고 큰 자극을 받는다. 그는 일본을 매우 동경했지만 실제로 그가 가지고 있던 일본에 대한 생각은 전해들은 일화, 부분적으로 접한 우키요에(浮世繪: 일본 에도 시대 유행한 풍속화), 그리고 스스로의 상상에 불과했다. 그 무렵에 반 고흐는 일본을 여행한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화가 러셀(John Peter Russel, 1858-1931), 툴루즈 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 1864-1901) 등과 함께 어울리며 일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반 고흐는 1888년 2월 20일에 파리를 떠나 남프랑스의 아를(Arles)로 거처를 옮겼다. 남프랑스는 몽티셀리(Adolphe-Joseph-Thomas Monticelli, 1824-1886)와 세잔(Paul Cézanne, 1839-1906)이 태어나고 그들의 화풍을 발전시킨 지역이다. 반 고흐는 이곳이 자신에게도 특별한 영향을 줄 것이라 믿었다. 반 고흐가 생각하는 남프랑스는 일본과 유사한 이국적인 곳이었다. 그는 그곳에서라면 “더 맑은 하늘 아래에서 자연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반 고흐는 아를에 머물던 무렵 “이곳에서는 일본 그림이 필요하지 않다. 난 언제나 이곳이 일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편지에 적은 바 있는데, 이는 그가 남프랑스에서 추구하던 것이 무엇인지 간접적으로 알 수 있게 해준다.
파이프를 물고 귀에 붕대를 한 자화상 - 빈센트 반 고흐
1889년 /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51x45cm / 개인 소장
“눈 앞에 펼쳐지는 것을 그대로 묘사하기보다는 자유롭게 색채를 사용하여 내 자신의 개성을 보다 강하게 표현하고 싶다.” 빈센트 반 고흐는 인상주의 이후에 등장한 포스트 인상주의의 대표주자로서 자신의 심상을 붓을 통해 자유로이 표현했다. 그의 생애는 불행했지만, 작가로서의 능력은 천부적이었다. 이는 그의 타계 후 얻게 된 명성과 세계 미술 작품 중 최고가를 형성하고 있는 작품가격으로도 증명이 된다. 반 고흐는 1888년 아를의 카렐 호텔에서 라마르틴 2번지로 집을 옮겼다. 일명 ‘노란집’이라고 불린 그 집에서 반 고흐는 혼자 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당시 ‘화가들과의 관계’를 열망했다. 그래서 이 집을 동료화가들과 함께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반 고흐는 당시 퐁타뱅에 살고 있던 고갱에게 편지를 보내 이곳으로 초청했다. 고갱과 함께 작업을 한다면 자신의 작업이 한걸음 더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고갱은 몸도 아프고 빚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때마침 반 고흐의 동생 테오가 아를에서 그린 그림을 후한 값에 사겠다는 제안을 했다. 이 제안을 받아들인 고갱은 1888년 10월 28일 아를로 왔다. 고갱은 반 고흐와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쥐고 생활하기 시작했다. 캔버스 준비와 요리, 가구 구입도 고갱의 몫이었다. 고흐와 고갱은 끊임없이 작업했고, 그 작업에 대해 토론했다. 고갱이 아를에 온지 한 달이 지난 무렵, 사건이 일어났다. 성격이 강한 두 사람이 작품에 대한 토론 과정에서 마찰이 생기는 등 불화가 불거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갱은 아를에서 작업한 몇 작품을 팔았기 때문에 아를을 떠나려고 했다. 그러나 반 고흐는 이를 참을 수 없었다. 12월 23일 기어이 반 고흐는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자른 후 자살을 시도했다. 그날 반 고흐의 광기를 접한 고갱은 밤을 호텔에서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반 고흐의 자살 미수 사건을 알았다. 그리고 의사와 테오에게 이 사실을 알린 후 그는 곧바로 파리로 떠났다. 이 작품은 1889년 1월에 그린 것으로 귀를 자른 지 한 달 사이에 완성된 것이다. 반 고흐는 귀에 붕대를 한 자화상을 두 점 그렸는데, 한 점은 영국의 코톨드 인스티튜트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으며, 지금 이 작품은 개인 소장가가 소장한 것.
생-레미-드-프로방스의 생-폴 병원 - 빈센트 반 고흐
1889년 /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48x63cm / 오르세 미술관 소장
남프랑스 아를르에 도착한 반 고흐는 호텔 겸 식당인 카렐 호텔에 머물며 견디기 힘든 겨울을 넘기고, 꽃피는 봄이 되자 곧 아를르의 전원으로 나가 과수원 등의 봄 풍경을 일본풍의 테크닉과 구도를 이용해 그렸다. 5월, 그는 유명한 '노란집' 이층으로 세를 얻어 들어가 화가들과의 공동체를 꿈꾸게 되었고, 동생 테오Théo의 도움을 받아 고갱을 아를르로 부른다. 1889년 12월 23일 밤 고갱과의 논쟁이 끝난 직후 그를 살해하려 했다가 실패한 작가는 대신 자신의 귀를 잘랐고, 그 귀를 신문지에 싸서 창녀 라셀에게 주었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 실제 사건으로 '붉은 머리의 광인'으로 불리게 된 반 고흐는 아를르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끝에 마침내 마을에서 쫓겨나 아를르에서 수 십 킬로 떨어진 생-레미의 병원에 수용된다. 『생-레미-드-프로방스의 생-폴 병원』역시 당시의 비극을 증언하는 그림들 중 하나다. 반 고흐는 다음 해 봄 파리로 올라와 인근의 오베르-쉬르-우아즈에 사는 가셰Gacher박사를 찾아간다. 그리고 두 달여 만에 목숨을 끊고 만다. 착란 상태에서 몇 번씩 독성이 강한 물감을 마시는 바람에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된 반 고흐였지만 1888년 가을과 겨울에 반 고흐는 생-폴 병원의 실내와 정원을 그릴 수 있었다. 그림 왼쪽에 길게 가지를 늘어뜨린 소나무는 이미 단순한 나무가 아니고, 뒤편의 건물들과 그 위 하늘도 눈에 보이는 대로의 사물이 아니다. 모든 사물은 두터운 외관을 벗어버리고 생명의 가장 원초적인 힘으로 충만해 있다. 나무와 집과 하늘 그리고 땅과 인간마저 하나의 움직임 속으로 끌어드리는 역동성이야말로 작가의 이성이 마비되었음을 보여준다.
장미와 아네모네 (Roses et anémones) - 빈센트 반 고흐
1890년 /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52x51.7cm / 오르세 미술관 소장
반 고흐는 풍경화나 인물화 외에도 다양한 색채의 꽃들을 화면에 담은 정물화 또한 다수 제작했다. 반 고흐는 꽃이란 소재를 다양한 방식으로 작품 속에 사용했다. <해바라기>와 같이 정물화의 주제로서 화병에 꽂힌 꽃들을 그리기도 했고, 때로는 인물화의 장식요소로 꽃을 화폭에 담았다. 반 고흐는 1886년 파리에 정착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정물화인 꽃병 연작을 그리기 시작했다. 파리에 있었을 당시 그의 꽃병 연작에 영향을 준 사람은 19세기의 화가 몽티셀리(Adolphe Joseph Thomas Monticelli, 1824-1886)였다. 몽티셀리는 선보다는 색채를 중시했던 화가였다. 반 고흐는 그를 들라크루아(Ferdinand Victor Eugène Delacroix, 1798-1863)의 정신을 계승한 색채의 대가로 생각했으며 특히 그의 강렬한 색채와 두꺼운 붓 터치로 인한 질감표현에 크게 감명받고 이를 따르고자 했다. 화병에 꽂힌 꽃들을 그리는 것에 대한 반 고흐의 흥미는 파리시절 이후에도 아를(Arles)에서 그린 <해바라기>, 1890년에 오베르 쉬르 우아즈 (Auvers -sur -Oise)에서 그린 <장미와 아네모네>에 이르기까지 계속된다. 파리에 머물던 시절 반 고흐는 자포니즘(Japonisme: 1972년에 비평가 필리프 뷔르티(Philippe Burty)가 만든 용어로, 19세기 중 ․ 후반에 걸쳐 유럽에서 유행하던 일본의 예술과 문화에 대한 관심을 총칭하는 말)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반 고흐가 파리에 도착했을 무렵인 1886년 즈음엔 이미 자포니즘의 유행은 예전 같지 않았다. 당시 인상주의 화가들은 자포니즘을 식상하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처음 이를 접한 반 고흐에게 있어 일본 판화는 신선했고 새로운 작품에 대한 영감을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반 고흐는 일본 판화의 과감한 색채로 뒤 덮인 평면적인 화면, 대상의 윤곽선을 그리는 방식, 독특한 시점 등을 자신의 작품에 적용했다. 반 고흐의 작품 속 자포니즘의 영향은 그가 파리를 떠난 후 그린 작품들에서도 여전히 찾아볼 수 있다.
랑글루아 다리 (The Langlois Bridge) - 빈센트 반 고흐
1888년 /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60x65cm / 반 고흐 미술관 소장
빈센트 반 고흐는 1887년부터 1888년 아를(Arles)에서 지낸 15개월 동안 자신을 집을 본거지로 예술가 공동체의 아틀리에를 만들고자 했다. 그만큼 화가로서의 본업에 열중했던 이 시기에 그는 200여 점에 이르는 작품을 제작했는데, 현대에 이르러 이 작품들이 대중으로부터 특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음을 볼 때, 화가의 열정과 작품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음을 보여준다. 반 고흐는는 1888년 자신의 조국 네덜란드의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도개교(跳開橋)를 주제로 여러 점의 그림을 그렸는데, 이 작품은 그 중 하나이다. 마을 입구에 있는 운하를 가로지르는 랑글루아(Langlois) 다리를 그려 넣고, 그림 왼쪽 끝에는 운하와 론(Rhône) 강의 경계가 되는 수문을 그렸다. 강둑의 풀은 봄날의 부드러운 초록빛을 띠고 있고, 강 위에는 우윳빛 하늘이 비치고 있다. 그는 이 작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투명한 공기와 찬란한 색채의 효과를 볼 수 있는 이곳은 마치 일본처럼 아름다워 보인다. 흐르는 강물은 풍경 속에서 아름다운 에메랄드빛과 선명한 파랑색의 얼룩을 만든다.” 이 작품에는 다양한 소재들이 조밀하게 배열되어 있는데, 이는 반 고흐가 일본 미술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실제로 <랑글루아 다리> 연작들은 일본 판화 방식으로 그려졌다. 아를 시기의 작품은 기법에서도 대체로 일본 판화에 의지하고 있으며, 인상주의와 분할주의의 원칙에서 탈피한 것이 특징이다. 이 시기에 그는 동양화가들의 작품 속에서 나타나는 명상이나 평면적 색채에 대하여 고찰했는데, 1888년 9월 동생 테오(Theo)에게 “나는 일본 화가들이 모든 것을 극도로 단순하게 표현한다는 점이 부럽다. 그것은 너무 지루하게도 조급하게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작업은 숨 쉬는 것처럼 간결하며, 그들은 마치 옷의 단추를 푸는 것처럼 손쉽게 몇 가지 특징만으로 인물을 표현한다.”라고 언급할 정도로 동양미술, 특히 일본 미술에 심취했었다. 하지만 이 작품 속에서 사용된 밝은 색조, 그리고 작품을 야외 작업으로 완성했다는 점 등을 볼 때, 인상주의의 영향이 완전히 배제되었던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빈센트의 의자 (Vincent's Chair) - 빈센트 반 고흐
1888년 /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93x73.5cm /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1888년 아를(Arles)을 본거지로 예술가 공동체를 만들고자 했던 빈센트 반 고흐의 꿈은 고갱과의 불화로 파국에 이르게 되었다. 반 고흐는 극도로 흥분한 상태에서 고갱을 향해 면도칼을 휘둘렀고, 이를 계기로 고갱은 아를을 도망치듯 떠나게 된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며칠 전 두 사람의 공동 생활의 파국이 가까웠음을 예감한 듯, 반 고흐는 <고갱의 의자>(1888)>와 함께 이 작품을 그렸다. 예전에는 둘이 앉아 함께 이야기하던 의자였는데, 이제는 모두 비어 있다. 비어 있는 의자는 부재(不在)를 의미하는 은유의 상징물로서 당시 반 고흐의 고독감이 잘 드러나 있다. 의자는 반 고흐가 꾸준히 관심을 가졌던 소재로 특히 이 작품은 영국 《더 그래픽(The graphic)》이라는 잡지에서 영국의 한 화가가 찰스 디킨슨(Charles Dickinson)의 빈 의자를 드로잉한 작품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림 속 의자는 투박한 직선으로 그려졌으며, 그림의 배경 또한 멋을 부리지 않은 소박함을 보여주고 있는데, 반 고흐의 파이프가 놓여 있어 '파이프가 놓인 의자'라는 제목으로 불리기도 한다. 자신의 의자를 그리기 위해 반 고흐는 밝고 섬세한 색을 선택했다. 바닥 타일의 오렌지색, 의자의 노란색과 벽의 청록색의 세 가지 색이 주조를 이룬다. 이러한 여러 색의 조화는 이 그림을 그리기 전에 그렸던 <반 고흐의 방>(1888)과 유사하다. 대각선으로 놓여 있는 의자는 관찰자의 시선에 바짝 다가와 있다. 그림 속 공간은 삭막하지만 부재 중인 화가를 대신하는 파이프와 담배가 확실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화면 뒤쪽에는 해바라기 몇 송이가 담긴 바구니가 보인다. 반 고흐 작품의 서명이 늘 그러듯이, 바구니에는 반 고흐라는 성이 아닌 빈센트(Vincent)라고 이름만 적혀 있다. 반 고흐는 이러한 일상의 의자를 통해 고갱과 자신의 부재를 드러내고자 했지만, 작품 속에서 반 고흐의 존재는 여전히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렇듯 서로 다른 반 고흐 자신과 고갱의 성격 및 취향을 너무나도 잘 나타낸 작품의 날카로운 감수성과 존재 의식 등은 반 고흐 예술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포룸 광장의 카페테라스 - 빈센트 반 고흐
1888년 /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81x65.5cm / 크뢸러뮐러 미술관 소장
이 작품은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주제로 한 빈센트 반 고흐의 최초의 작품으로 보인다. 고흐는 별이 빛나는 밤하늘에 대한 관심을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아를에 와서 맞은 첫 봄, 고흐는 베르나르에게 소묘에 대한 사례를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집안에서 공상으로 그림을 그릴 기분이 아닐 때가 때때로 있어 유감스럽다네. 단순히 힐끗 쳐다 본 것에 지나지 않는 내 눈에 비친 실제의 것보다도 마음을 고양시키고 마음의 위로가 되는 자연을 우리들은 상상력으로 창조할 수 있지. 예를 들면, 그래, 별밤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 그려보고 싶은 것이네.”하지만, 이 작품에서 고흐의 관심은 ‘별이 빛나는 밤’이 아니다. 고흐는 밤의 광경이나 효과를 즉석에서 그리는 것, 밤 그 자체를 그리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이 작품은 그의 편지를 통해 야외에서 그려졌음이 밝혀졌다. 또한, 이 작품에는 상상력도 동원되었다. 예를 들면 화면 오른쪽에 있는 나무는 원래 스케치에는 없었다. 노란색과 청색의 보색이 지배하는 화면전체에 나무의 녹색은 온화함을 부여하고 있으며, 수평과 수직이 지배적인 구도에 카페의 차양과 함께 대각선 구도를 이루고 있다. 우키요에나 프랑스의 근대소설은 유토피아를 꿈꾼 아를 시대의 고흐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들의 영향 아래 고흐는 빛이 바래고 창백하며 어둡고 볼품없는 인습적인 밤에서 탈출하여 다양한 빛이 교차하는 밤의 카페테라스를 그릴 수 있었다. 이는 새로운 회화의 등장을 예고하였다. 이 그림은 반 고흐에 대한 최초의 종합 비평문인 《반 고흐-고독의 화가》(1890)를 쓴 알베르 오리에가 소유하고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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