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여행을 다녀와서
□ 여 행 지
혁명광장, 독수리전망대, 키릴과 메소디우스 동상, 러시아 정교회, 신한촌기념비, 레닌 공원,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 시베리아횡단열차 기념비, 시베리아횡단레일 전차체험, 해안공원, 지상요새 ► 우스리스크 : 고려인문화센터⋅역사박물관, 최재형 거주가옥, 이상설 유허비, 옛 발해성터
□ 참 여 자 : 총 34명 ► 포시 탑 16명, 노랑풍선·미스터투어 18명 □ 이용 선편 ► 동해항 ⇌ 블라디보스토크항 : DBS 크루즈 훼리(편도 704km, 22시간 소요)
∙ 선 박 명 : M.V. Eastem Dream ∙ 총 톤 수 : 13,000 톤급 □ 숙 소 ► 아무르스키잘립 호텔 2박(05.30 / 05.31) : 429호
□ 여행 일정(시간은 현지시간) ► 제1일차 (05. 29. 일요일. 맑음) 서산출발(05:00) ⇒ 대산(05:20) ⇒ 화성휴게소 조찬(06:20∼06:45) ⇒ 서서울톨게이트(06:59) ⇒ 금천구청(07:16) ⇒ 서서울톨게이트(07:34) ⇒ 영동고속도로 진입(07:35) ⇒ 여주휴게소(08:13∼08:18) ⇒ 평창휴게소(09:14) ⇒ 대관령휴게소(09:40∼10:00) ⇒ 동해요금소(10:27) ⇒ 대게해장국 집 오찬(10:50∼11:27) ⇒ 동해국제여객터미널 도착(11:45) ⇒ 크루즈 훼리호 탑승(12:27) ⇒ 동해항 출발(14:00) ⇒ 석식(18:30∼19:00) ⇒ 일몰 조망(19:00∼19:30) ⇒ 바에서 일행들과 미팅(19:40∼20:00) ⇒ 취침 ► 제2일차 (05. 30. 월요일. 맑음) 배 요동(07:00∼10:00) ⇒ 조찬(07:00∼07:30) ⇒ 오찬(12:00∼12:20) ⇒ 블라디보스토크 항 도착(13:20) ⇒ 배에서 내림(14:30) ⇒ 가이드 미팅(14:55) ⇒ 버스 탑승(15:20) ⇒ 영원의 불(15:30∼15:50) ⇒ C-56잠수함박물관 관람(15:42∼15:50) ⇒ 참전희생자 명단(15:52) ⇒ 개선문(16:00∼16:10) ⇒ 쿠즈네초프 동상(16:11∼16:15) ⇒ 혁명광장(17:28∼17:35) ⇒ 독수리전망대(17:45∼18:25) ⇒ 우세미다로그 식당 석식(17:32∼18:40) ⇒ 호텔 도착(18:45) ► 제3일차 (05. 31. 화요일. 수시로 비) 모닝 콜(06:30) ⇒ 조식(07:00∼07:30) ⇒ 호텔 출발(09:10) ⇒ 러시아 정교회(09:20∼09:40) ⇒ 신한촌 기념비(09:45∼10:10) ⇒ 레닌공원(10:20∼10:25) ⇒ 블라디보스토크 횡단열차 기념비(10:35∼10:50) ⇒ 블라디보스토크 – 우골나야 구간 횡단레일 기차체험(11:00∼12:00) ⇒ 버스탑승(12:25) ⇒ 우스리스크 빠뜨리오트 식당 오찬(13:40∼14:28) ⇒ 고려인역사관⋅문화센터(14:30∼15:03) ⇒ 최재형 선생 거주가옥(15:10∼15:16) ⇒ 이상설 유허비(15:26∼15:36) ⇒ 옛 발해성터(15:43∼16:03) ⇒ 백화점 쇼핑(17:51∼18:37) ⇒ 카페 리 식당 석식(18:57∼19:27) ⇒ 호텔 도착(19:45) ► 제4일차 (06. 01. 수요일. 맑음) 모닝 콜(06:30) ⇒ 조식(07:00∼07:30) ⇒ 호텔 출발(09:35) ⇒ 해안공원(09:55∼10:30) ⇒ 지상요새(10:33∼11:00) ⇒ 여객선터미널 도착(11:15) ⇒ 크루즈 훼리 탑승(12:00) ⇒ 선내식당 오찬(12:30∼13:00) ⇒ 블라디보스토크 출항(14:00) ⇒ 석식(18:40∼19:00) ⇒ 낙조 관망 ⇒ 취침(21:00) ► 제5일차 (06. 02. 목요일. 맑음) 일출 조망(05:00∼06:30) ⇒조식(07:00∼07:30) ⇒ 동해항 도착(11:30) ⇒ 하선(11:45) ⇒ 터미널주차장 출발(11:55) ⇒ 동해 곰칼국수 집 오찬(12:19∼13:35) ⇒ 망상IC(13:42) ⇒ 평창휴게소(14:26∼14:38) ⇒ 여주휴게소(15:45∼16:00) ⇒ 서서울톨게이트(16:48) ⇒ 광명일행 하차(17:10) ⇒ 송악요금소(17:55) ⇒ 삼길포 경유 ⇒ 대산(18:40) ⇒ 서산 도착(19:00) 블라디보스토크란 ‘동방을 지배하라’라는 뜻이다. 동해 연안의 최대 항구도시 겸 군항이다. 극동함대의 사령부가 있는 해군기지이며, 북극해와 태평양을 잇는 북빙양 항로의 종점이며, 모스크바에서 출발하는 시베리아횡단철도 9,288㎞의 종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세계 5대양을 연결하는 해양노선과 인천, 부산, 니가타(新潟), 오사카(大阪), 하얼빈(哈爾濱), 다롄(大連), 방콕 등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도시를 연결하는 직항로가 개설되어 있다. 주도이다. 몬순기후이며 평균온도가 1월에는 -14℃, 8월에는 +24℃로 연평균온도가 +5℃이다. 1860년 7월 2일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 해군 항으로 지정되면서 도시 건설이 시작됐다. 블라디보스토크는 1870년에 시로 승격되었으며, 1890년대∼1900년대에는 러시아 극동 지구의 대외교역, 외교 및 상업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그리고 1904년에는 러시아 극동 지구의 자유무역 항구로 지정되었다.
1913년 이곳에 시내 전차가 운행되었고, 연안 해운선 운항이 개시되었다. 1917년 시인구가 13만 명을 돌파하면서 ‘극동의 세인트 피터즈버그(St. Petersburg)’라는 별칭을 얻었다. 급격히 부상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개설된 총영사관은 인도(1992)를 비롯하여 미국(1992), 한국(1992), 일본(1993), 베트남(1995), 우크라이나 등이다.
또한 주 하바롭스크(Khabarovsk) 중국 총영사관 분관이 있고 오스트레일리아, 필리핀, 태국, 캐나다, 독일, 영국, 방글라데시, 아르메니아, 뉴질랜드 등의 명예영사관이 개설되어 있다. 극동 시베리아에 대한 한인들의 이주사가 시작되었는데, 1863년 인접한 함경북도의 13호 농가가 노브고로드(Novgorod)만으로 이주한 것이 그 효시다. 반세기가 좀 지나서는 그 수가 20만 명을 넘어섰으며, 연해주 지역에 한인사회가 형성되어갔다. 이주 한인들은 남다른 근면성과 강인성으로 온갖 환난을 이겨내면서 불모의 땅을 개척해나갔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블라디보스토크를중심으로 한 극동 시베리아는 한때 한(韓)민족의 정통국가인 해동성국(海東盛國) 발해가 지배하는 영역이었다. 주변의 니콜라예프카(Nikolaevka)나 고르바트카(Gorbatka) 등 발해 성터에서 출토된 8~10세기의 숱한 유물들이 이것을 실증하고 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280km 떨어진 노보고르데예프카 성터에서는 온돌을 비롯한 여러 가지 발해 유물과 더불어 8세기경에 주조한 중앙아시아 소그디아나의 은화가 발견되었다. 이 은화의 보관자인 러시아의 샤프쿠노프(E. V. Shavkunov) 박사의 증언에 의하면,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트(소그디아나)에서 8세기경에 주조한 이 은화는 교역수단으로 쓰인 것이 분명하다고 하면서, 당시 발해의 특산물이었던 초피(貂皮, 담비 가죽)를 중앙아시아 상인들이 은화를 주고 구입해갔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추단과 더불어 중간지점 격인 치타(Chita)에서 등자(鐙子) 같은 고구려 유물과 동∙서문물이 동시에 발견된 점 등을 감안해, 샤프쿠노프 박사는 사마르칸트-치타-발해 상경(上京)-연해주로 이어지는 이른바 ‘제2 동아시아 교역로’, 즉 ‘초피로(담비로)’의 가설을 제시하였다. 이 길은 발해 국제 5도의 하나인 거란도(契丹道)와 일치하고 있다. □ 여행 후기 서산에서 ㈜포시탑여행사를 운영하고 있는 병도씨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여행을 추진하고 있다며 가자고 하여 여행을 즐기는 심리가 작동해 함께 하기로 하였다. 인터넷에서 여행지에 대한 정보들을 열람해 여행 시에 참고할 수 있도록 유인물을 만들었다. 이번 여행은 배를 타고 다녀오는 지라 캐리어 가방은 배 계단을 오르내리는데 불편할 것 같아 등산배낭에 짐을 꾸렸다.
화성휴게소에서 두부찌개백반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화성휴게소에 도착하여
서울 금천구청 앞에서 여자 일행 두 명을 태워야 한다고 해 서서울톨게이트를 지나 약속장소로 향하였다. 순조롭게 약속장소에 도착, 2명을 태우고 되돌아 나와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동해로 향하였다.
오래전에 큰 수해를 당하여 많은 피해가 발생했을 때 갔었는데 그 때와는 환경이 많이 개선되어 있음을 실감하였다. 주택도 많이 개량되고, 농경지와 하천도 잘 정리되어 있었다. 대관령휴게소에 들러 차 한 잔을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시 달렸다. 휴게소에서 잠시휴식을 --- 강릉대관령휴게소를 배경으로 동해시청 앞쪽 대게해장국집에서 3만원짜리 가자미무침과 7천원하는 대게해장국으로 점심을 했다. 해장국이 나왔는데 대게는 없고, 사스랭이가 들어 있었는데 맛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관광지에서 음식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느낌을 받아 여주인 보고 이래도 되는 것인지 따지고 왔다. 동해 대게해장국 집에서 오찬을 식당에서 나와 동해국제여객터미널로 이동하여 이곳 주차장에 주차를 했다. 내부로 들어가니 일부 여행객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터미널의 규모가 작아 내부 대기시설이 협소하였다.
였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 포시탑여행사 16명하고, 노랑풍선과 미스터투어의 18명을 포 함하여 모두 34명이 함께하게 되었다. 우리 팀 16명은 남자가 5명, 여자가 11명인데 우리 4명을 제외한 12명은 서울지역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출국심사가 개시되어 짐을 x-ray 검색대에 집어넣은 후 옆으로 이동, 소지품을 꺼내 바구니에 넣고 검색대를 통과해 나온 짐을 챙겨 가지고 나왔다. x-ray 검색대를 통과 해 나온 짐을 검정개가 마약이 있는지 냄새를 맡고 있었다. 부두에 정박해 있는 13,000톤급 DBS 크루즈 훼리호에 오르기 위해 경사진 긴 난간을 오를 때 출렁거려 조심하였다. 탑승자 대부분은 한국인 관광객들이고 다음으로 러시아 젊은이들이 많았다. 배에 올라 티켓에 배정된 3208호 침실을 찾아 갔다. 3층의 선두에 위치한 4인실 2층 침대 방이었는데 통로가 작고, 침대도 협소한 것 같아 다른 곳으로 옮기자고 해 2층으로 내려가 비어 있는 다인실 방인 2301호에 4명이 자리 를 잡았다. 2층 침대 방인데 옆에는 러시아 젊은이들이 많이 자리하고 있었다. 2층 갑판으로 나가보니 여자 일행들이 음식을 가져와 먹고 있어 함께 어울렸는데 여자들이 술을 잘 마셨다. 선내 방송으로 식사시간을 알렸는데 식권 색깔별로 시간 차이를 두고 식사하도록 안내하고 있었다. 선미 2층에 있는 식당은 1층 옆 통로를 통해 계단으로 올라가도록 되어있었다. 뷔페식으로 배식이 되었으며 종사자는 한국인이 많았다. DBS 크루즈 훼리호 훼리호 갑판에서 --- 식사를 끝내고 갑판으로 나가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다 선상에서 일몰을 맞이하였다. 아무 것도 없는 수평선 가까이로 해가 낮아지면서 붉게 노을이 물들어 아름다운 경관을 자아내자 많은 사람들이 촬영을 하느라 야단을 피웠다. 손바닥에 붉게 물든 둥근 해를 올려놓고 일행들을 촬영해 주었다. 일몰의 황홀한 장관이 사그러 들면서 바람도 세졌다.
병도씨가 여행일정과 유의사항에 대해 설명을 하고, 차를 한 잔씩 나누며 개별적으로 일어나 자기소개를 하였다. 서로 얼굴을 익히면서 친근감을 가지고 즐거운 여행이 되도록 다짐하는 자리가 되었다. 침실로 이동하여 29번 2층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였는데 복도의 후황소리가 세게 나고 러시아 젊은이들이 떠들고 들락거리는 바람에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선상에서 일몰을 배경으로 망망대해의 황홀한 일몰 2301호 다인실 침대칸 뒤척이다 잠이 들었는데 배가 심하게 요동을 치는 바람에 깨어보니 속이 미식 거렸다. 시계를 보니 러시아 시간으로 07시였다. 아침식사를 하러 가자고 해 2층 홀로 가니 배가 너무 심하게 요동쳐 다시 침대로 돌아와 눕고 말았다. 일행 중 한 명은 아침식사를 한 후 멀미를 해 모두 토하고 갑판에서 의자에 누워 있다고 하였다. 일행이 멀미약을 사다주어 한 병을 마셨다. 얼마 후 안정이 되었는데 10시경이 돼서야 배가 평온을 되찾았다. 3시간여 동안 요동 칠 때가 북쪽에서 내려오는 거센 해류가 통과하는 심해지역을 지날 때인 듯싶었다. 이 지역을 벗어나 블라디보스토크 근해로 접어들면서 요동이 잠잠해진 것 같았다.
주변의 섬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얼마 후 블라디보스토크 항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아무르만의 튀어나온 작은 반도에 자리한 이 항구는 생각했던 것 보다 규모가 큰 것 같았다. 현대식 고층건물들과 웅장한 모습의 사장교가 항만에 정박해 있는 큰 배들과 어우러져 항구도시의 정겨운 풍경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선하도록 했다. 입국심사를 끝내고 나오니 가이드가 명단을 체크해 가며 인원을 점검하였다. 확인이 끝난 후 여자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주차장으로 이동하여 버스에 올랐는데 45인승 현대차였다. 블라디보스토크항에 근접하니 섬이 --- 사장교(금각교)가 있는 항구전경 부라디보스토크여객선 부두 한국산 현대 관광버스 이동하면서 가이드가 자기소개를 하였는데 이름이 고은희라고 하였다. 대학 때 일본어를 전공하여 한국에서 일본인 관광객 가이드를 했었는데 한⋅일 관계가 악화되는 바람에 관광객이 줄어 가이드 생활을 그만 두었다고 하였다. 이후 러시아 지역을 여행하면서 블라디보스토크를 찾게 되었는데 이 지역에서 우리 선조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독립운동을 한 역사적인 활동에 감탄해 이곳에 대한 애착심이 생겼다고 했다.
이러한 것이 신의 게시가 아닌가 싶어 아주 이곳에 주저앉아 이곳을 찾는 관광객에게 애국지사들의 숨은 발자취를 알리기 위해 러시아어를 공부해 가이드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유학을 권유할 생각이라고 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한국보다 한 시간 빠르다며 시계를 맞추라고 하였다. 하절기엔 1시간, 동절기에는 2시간의 시차가 난다고 했다. 그리고 여권과 출국카드가 없으면 집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 잘 간수하라고 당부하였다.
이곳은 영어도 통하지 않고, 러시아어도 생소해 길을 잃으면 어려우니 다닐 때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며, 지정된 시간 안에 집합장소로 모일 수 있도록 시간을 잘 지켜달라고 하였다. 이곳은 화장실 시설이 열악한 가운데 유럽처럼 이용하는데 유료이기 때문에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곳에서 이용토록 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우리가 첫 번째로 찾은 곳은 블라디보스토크 항 해군기지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한 영원의 불이었다. 큰 글씨로 노랑풍선, 포시탑 여행, 미스터 투어라고 쓴 표식을 든 가이드가 해설을 해주었다. 먼저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도록 안내해 주었다. 영원의 불 앞에서 영원의 불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싸우다 전사하여 돌아오지 못한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제작되었다고 하였다. 영원의 불 앞에는 세 개의 화환이 놓여 있었고, 작은 구멍에서 가스불이 타오르고 있었는데 1년 365일 꺼지지 않아 영원의 불꽃이라고도 하며, 결혼한 신혼부부들이 이곳을 찾아와 헌화하고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다고 하였다. 이 영원의 불 위쪽엔 러시아 정교회 기도원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외관만 보았다. 바로 옆에는 웅장한 모습의 C-56잠수함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 잠수함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1941∼1945) 잠수함으로 독일 군함 10여척을 침몰시킨 구소련 태평양함대의 유명한 잠수함이라 하였다. 내부를 박물관으로 개조하여 전쟁 때 활동상황과 함장의 흉상, 잠수함 모형, 포탄 등을 전시해 놓았는데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다. 흉상의 코를 만지면 좋다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이 만졌는지 노랗게 윤이 나고 있었다. 구간 구간을 통과할 때 작은 문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어 몸을 낮춰야 했다. 이 박물관은 태평양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1982년에 설립했다고 하는데, 조각가 네나지빈과 건축가 산도크가 디자인 했다고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C-56잠수함 잠수함박물관 관람 중에 ---
사망한 많은 희생자 명단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가이드가 한국사람 김씨들도 있다하여 K줄을 확인해 보니 5명이나 되었다. 우리나라 사람이 소련에 귀화하여 참전하지 않았나 싶었다. 해방을 위해 활동한 곳으로 안중근 의사도 이곳에서 사격연습을 실시하면서 암살 거사계획을 수립했다고 한다. 이곳을 뒤로하고 정교회 기도원을 지나 조금 오르니 모양이 아름다운 개선문이 나왔다. 개선문을 배경으로 우리 일행 16명이 기념촬영을 하였다. 건립되었으며,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표 유적이라고 한다. 니콜라이 황제는 오랜 전통에 따라 왕위계승 전 러시아 여러 도시들과 세계를 여행 하였고, 그가 방문했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이르는 러시아의 모든 도시에 동일한 개선문을 건축하였다고 했다. 구소련 정부에 의해 1927∼1930년 사이 차르(czar) 통치기간 동안의 많은 유적들과 더불어 파괴되었다가, 2003년 니콜라이 2세의 135주년을 기념하면서 복원되었다고 했다. 개선문에서 위쪽으로 조금 오르니 길옆에 혁명가 쿠즈네초프 장군의 동상이 있었다. 사진을 찍느라 가이드의 설명을 못 들었다. 개선문 앞에서 --- 쿠즈네초프 동상 앞에서 이곳에서 위로 이동하니 큰 도로가 나왔는데 스베틀란스카야 대로라고 하였다. 도로에는 차들로 넘쳐 났는데 일제차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곳은 겨울이 7개월간이라 영하 40도 정도 떨어지는 혹한의 환경에서 일제차들이잘 적응하기 때문에 승용차는 99%가 일제차라고 한다. 버스는 한국에서 중고차를 많아 들여오는데 현대와 대우차가 많이 눈에 띠었다. 긴 겨울 동안 노면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면서 많이 파손되는데 울퉁불퉁한 길을 달리는데 한국산 버스가 제격이라고 했다. 그리고 추운날씨에 바람이 강해서 건물에 창문을 많이 내지 않았다고 하였다. 군사도시에서 관광도시로 환경이 바뀌어 가면서 창문을 개조하게 되었는데 창문 모양이 각양각색이라고 하였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스베틀란스카야 대로의 번화가 중심에 위치한 혁명전사광장 (혁명광장)이었다. 노변에 차량들이 많이 있어 버스를 대기가 어려웠다. 병사의 동상이 있었다. 왼쪽으로는 벨르이 돔이라 불리는 흰색건물의 연해지방 주정부 종합청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신년축하 축제를 비롯하여 전승기념일인 5월 9일에는 각종 퍼레이드와 불꽃놀이가 펼쳐지며, 그 밖의 각종 행사가 열리는 이곳 중앙광장은 시민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대형 야외공연장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하였다. 혁명전사광장 전경
러시아인들은 꽃을 좋아해 24시간 꽃을 파는 가게가 많다고 하였다. 매년 3월 8일은 세계여성의 날인데 3월 7일에는 남자들이 부인과 여자들에게 줄 장미꽃을 사기위해 꽃가게 앞에 길게 줄을 서야하는 일이 벌어진다고 하였다. 러시아 여인이 좋아하는 선물 1위는 꽃이고, 다음으로 초코렛, 향수 순이라고 했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버스는 좀 경사진 도로를 올라 로타리 도로변에 정차하여 내리니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언덕의 계단을 올라 찾아간 곳은 독수리 둥지라 불리는 오를리노예 그네즈도 산에 자리한 독수리 전망대였다. 이 산은 이곳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높이가 214m라고 하였다. 2012년 에이팩 정상회담 개최에 대비해 건설된 사장교인 금각교가 눈앞에 웅장한 모습으로 들어왔다.
날씨가 흐리고 바람이 불어 추위가 느껴지는 가운데 아무르만에 자리한 도시의 모습을 조망할 수 있었는데 야경도 아름다울 것 같았다. 전망대 철책에는 청춘 남녀가 사랑을 언약하고 채워놓은 자물통이 매달려 있었다. 뒤편 위쪽에는 러시아어를 만들었다는 키릴⋅메소디우스 형제의 동상이 항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전망대 아래에 한글로도 안내를 해 주는 기념품 판매점이 있었다. 아마 한국 사람들이 많이 오는지 물건을 파는 아저씨가 나름 한국말을 하였다. 색색이 칠해진 러시아 전통인형 마트로시카, 털모자들, 지갑과 장식품까지 다양한 물건들이 많이 진열되어 있었다.
무료라고 해 용변을 보았다. 환율은 1루블에 20원으로 통용되고 있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금각교 전망대에 자리한 키릴⋅메소디우스 형제 동상 전망대에서 바라 본 항구 모습 독수리전망대를 뒤로하고 시내로 내려와 우세미다로그 식당에서 현지식으로 저녁을 하였다.실내조명이 발그레하게 비치는 가운데 음료와 샐러드, 빵, 스프 (보르시)가 나왔다. 보루시 국물에 빵을 찍어 먹으라고 하였는데 빵 맛은 별로였다. 와인 잔에 빨간 쥬스 음료가 나왔는데 빛깔이 아름다웠다. 음료 잔을 들고 알찬 여행을 위해 건배를 하였다. 이어서 보드카가 한 잔씩 나와 또 건배를 했다.
러시아에서 접하는 보드카라 조금 맛을 보니 혀끝이 짜릿하였다. 계란과 밀가루를 반죽하여 만들었다는 블린이란 호떡 같은 것이 나왔는데 마요네즈와 꿀에 찍어 먹었다. 이 지역 음식점에서는 서비스가 없다고 하였다. 음식을 더 찾으면 무게를 달아서 별도로 계산을 해야 되며, 손님을 대하는 매너도 소 닭 보듯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 식당은 음식을 더 찾으면 친절히 갖다 주었다.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서비스의 질이 향상되어 간다고 했다. 보드카로 건배 식당의 은은한 조명 색채가 아름다운 음료 러시아에서는 한국음식을 알아주는데 특히 팔도라면이 유명세를 타 시장점유율 60%를 차지한다고 하였다. 러시아에 귀화한 빙상선수 안현수가 홍보하고 있는 도시락라면도 인기가 높다고 했다. 그리고 한식당의 메뉴가 고급음식으로 정평이 나 있어 돈 있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하였다. 이 호텔은 특이하게 건물 꼭대기에 작은 출입문이 나 있어 밑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었다. 7층에 카운트 로비가 있었는데 호텔구조가 반 지하 형태인 듯싶었다. 가이드가 여권과 입국카드를 걷어 제출하고 방 열쇠와 식권 한 장씩을 인수하여 나누어 주었다.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4층의 429호실에 숙박하게 되었다. 우리 일행 모두가 4층에 배정되었다. 중국인 관광객들도 많이 있어 시끄러웠다. 가이드가 호텔에서 주의해야 될 사항들을 이야기 해 주었다. 아무르스키잘립 호텔 아무르스키잘립 호텔 숙소에서 바라본 식전풍경 아무르스키잘립 호텔 429호실 모습 식사는 호텔 4층 식당에서 07시부터 하고, 08시 50분까지 7층 로비로 집결하는 것으로 하였다. 저녁에 호텔을 나갈 때 호텔 명함을 가지고 나가 길을 잃으면 이를 보여 주고 택시를 타든지 물어서 오라했다. 샤워 시 커튼을 치고 물이 방으로 넘치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넘치면 20만원의 벌금을 내야 한다고 했다. 방에 들어가는데 전자키가 아닌 열쇠라 꽂고 돌려도 잘 열리지 않아 짜증스러웠다. 방에는 작은 싱글 스프링침대 두 개가 있었는데 움직일 때 마다 소리가 나고 빈약했다. TV는 한국산 골드스타 아주 구형 브라운관이었다. 우리나라 모텔 보다 나은 것이 없었다. 호텔은 바다를 바라보고 해변에 자리해 있어 테라스에서 바다를 조망 할 수 있었다. 여행 3일째를 맞아 가벼운 마음으로 버스에 올랐다. 가이드가 두 명이 빈다며 찾느라 호텔을 두 번이나 오가드니 60대 부부를 데려 왔는데 잠간 잠이 들었다고 하였다. 늦게 오는 바람에 32명이 귀중한 시간을 차에서 소비하고 말았다. 출발할 때부터 비가 내려 우산을 준비하였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러시아정교회를 찾았는데 공동묘지 자리에 지어졌다고 하였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니 실내에 의자가 없었다. 교회 내에서는 탈모를 해야 되고, 사진 촬영도 금지되어 있었다. 설교가 없으며 찬송가도 아카펠라로 연주한다고 했다. 교회와 가정에서 기도할 때에 눈을 감지 않으며 이콘이라는 성화 그림을 보면서 기도를 하며, 이콘에 입을 맞춘다고 하였다. 러시아정교회 전경 정교회 내부 모습 이어서 한인촌 기념비를 찾아 갔다. 아무 글씨도 새겨지지 않은 큰 돌기둥 3개가 우뚝 서 있고, 우측에 화강석 받침석 위에 오석의 안내표석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철책을 설치해 보호하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니 남자 한 분이 나와 철책 문을 열어주어 들어갔다. 일행들이 기념비 앞에 늘어서서 선조들의 희생적인 독립운동으로 오늘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깊은 추모의 묵념을 올렸다. 그리고 작은 사무실로 들어가 방명록에 서명을 하였다. 한국의 정치 불안과 빈곤으로 인한 한인들의 연해주 이주가 시작되었는데 신한촌은 1863년 이후 연해 지방에 들어온 한인들이 라게르 산 비탈지 부근에 모여 살면서 조성되었다고 한다. 디나모 스타디움 부근의 구 한촌과 함께, 1937년까지 블라디보스토크 일대 한인들의 양대 거주 지역이었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국내외 애국지사들이 이곳에 결집하여 독립운동단체를 결성하였으며, 1919년에는 망명정부(대한국민의회)를 수립했다고 하였다.
12,000여명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소련혁명 직후,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토크 일대를 점령하고 있을 당시, 신한촌에는 비밀아지트와 빨치산 부대의 무기창고들이 있었다고 했다. 소비에트 시절에는 현대식 건물과 문화회관이 세워졌으며, 1932년에 한국극장이 개관되는 등 한인 거주 지역으로서 체계를 갖추어 갔다고 한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에 의해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면서 신한촌은 해체되었다. 1999년 8월 15일 3·1 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한민족연구소가 ‘신한촌 기념비’를 건립했다 한다.
위로하기 위한 것이다. 3개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한 개는 조국인 대한민국, 다른 한 개는 새로운 고향인 연해주, 다른 한 개는 항일운동이 가장 많이 이루어진 중국을 나타낸 것이라고 하였다.
민족의 최고 가치는 자주와 독립이다. 이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은 민족적 성전이며, 청사에 빛난다. 신한촌은 그 성전의 요람으로 선열들의 얼과 넋이 깃들고, 한민족의 피와 땀이 어려 있는 곳이다. 1910년 일본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당하자 국내외 지사들은 신한촌에 결집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필사의 결의를 다졌다. 성명회와 권업회 결성, 한민학교 설립, 신문 발간, 13도의군 창설, 등으로 민족역량을 배양하고 1919년에는 망명정부(대한국민회의)를 수립하여 대일항쟁의 의지를 불태웠다. 그러나 한민족은 1937년 불행하게도 중앙아시아에 흩어지게 되고, 신한촌은 폐허가 되었다. 이에 해외한민족연구소는 3⋅1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선열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고, 재러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마음의 상처를 위로하며, 후손들에게 역사인식을 일깨워 주기 위하여 이 기념탑을 세운다. 1999년 8월 15일 한국사단법인 해외한민족연구회
이곳 신한촌은 독립운동의 요람일 뿐만 아니라 교육, 언론, 문화의 중심지로서 지금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50만 한민족의 근원지이며 마음의 고향이다. 그러나 신한촌이 형성된지 100여 년, 그리고 중앙아시아로 흩어진지 60여 년이 지나도록 기념물 하나 없이 역사의 뒤편으로 잊혀져가고 있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안탑갑게 하였다. 이에 해외한민족연구소에서 적극적으로 주선하여 정유리 러시아고려인연방회장, 이 훼체스라브 블라디보스토크회장의 노력과 중앙아시아 전 고려인의 정성이 모아지고 러시아 당국의 협조에 힘입어 한국의 경제인연합회에서 협찬하고 ㈜백미산업 이인기 사장이 건립비를 부담하여 이 탑을 세우게 되었다. 1999년 8월 15일 한국사단법인 해외한민족연구소 이사장 손세일. 소장 이윤기. 임원 김낙준 김도현 김성국 신한촌 기념비 기념비 앞에서 묵념 신한촌 기념비 앞에서 |